지난 꽹과리 연수 때 언뜻 왕사부님이 얘기하셨던 "필봉굿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관한 내용이 있어서 잽싸게 퍼왔습니다. 읽어 볼 만할 것 같아서 때어 왔으니 읽어들 보시길..
풍물굿 연구/ 김원호/ 학민사 / p257~276
좌도굿, 좌도굿 정신
Ⅰ
아시다시피 전라도 풍물굿은 일반적으로 좌도굿과 우도굿으로 분류된다. 우도굿 지역으로는 익산, 김제, 부안, 정읍, 고창, 영광, 장성, 함평, 나주, 광주, 장흥, 강진, 영암, 무안 등 호남의 서부평야 지역이 일컬어지고, 좌도굿 지역으로는 금산, 무주, 진안, 장수, 전주, 임실, 남원, 순창, 구례, 곡성, 승주, 화순등 주로 동부 산간지역을 이른다.(주; 우도굿적 요소가 가미된 지역을 구분하는 ‘중간농악’을 삽입한 견해도 있고(이기주,전북전통민속,하권), 좌도굿을 좌도 동북부, 좌도 남서부로 구분한 견해도 있다.(전북대학교 박물관<호남좌도 풍물굿>1994) 전자는 전주,임실,순창,남원 서부(곡성)를 중간농악이라 칭하는데, “좌우도의중간에 위치하여 좌도의 영향력이 우도보다 강하게 받는 것 같으나 어쨌든 순수한 좌도도 아니고 순수한 우도도 아니다.”라고 구분하고 있다. 후자는 임실, 순창,남원(동북부 굿에 속하는 지역 이외의 모든 지역). 곡성, 구례, 화순, 순천 등을 좌도 남서부 굿으로 칭하며, 이 지역에서는 “쇠잽이만 전립을 씨고 나머지 앞치배들은 모두 고깔을 쓴다.”고 그 특징을 얘기한다.)
그러한 분류법에 의해 좌우도의 굿적 특성을 짧게 개괄해 부면 다음과 같다. 다른 어떠한 분류도 다음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좌도굿-전원이 전립을 쓰고, 가락이 빠르고 동작도 빠르다. 단체놀이와 윗놀이에 치중한다. 다양하고 짜임새가 있으며, 조직적이다.
우도굿-주로 고깔을 쓰고, 느린 가락이 많다. 개인놀이와 아랫놀음에 치중한다. 구성부터 의상에 이르기까지 화려하다.
보다시피 가락과 차림새 정도의 특징으로 아주 간략하게 구분되고 있다. 왜 그렇게 되어왔는지도 불명확할 뿐더러 굿의 내용, 또는 형식미와 내용으로 심도 있게 비교, 분류된 것은 없다. 단지 산간지방, 평야지방이라는 지리적 구분이 기준이 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만큼의 생활 문화적 차이 때문에 특성을 달리할 것이라는 짐작 정도를 하게 해준다. 그러나 그것도 행정단위적으로 단순 구분되어 그 문화적 특성이 제대로 충분히 분류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인문 지리적 관점으로 열려있는 <산경표山經表>(주;‘백두대간’이라는 소중한 개념을 실어다 준<산경표>에 의해 우리 고유의 산줄기 개념이 최근에 새롭게 복원되었다. <산경표>는 멀리 한반도의 조종산인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곳곳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들을 1대간과 1정간, 13정맥으로 나누었다. 산과 강을 중심으로 한 생활권이 분류되기 때문에 각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구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준다. 즉 실제적 문화성을 갖는 기준이 된다. 따라서 백두대간이란, 단순 지리학적 관점을 벗어나 인문성의 계기가 되는 것이자 그것으로 한반도의 근간을 이루는 산줄기인 것이다.)에 의한 분류법이 타당성과 진정성에 있어서 더 명확하다.
윤희철에 의하면 호남의 조도, 유도는 호남정맥을 기준으로 구분되어, 호남우도는 섬진강 유역으로 산악지역이고, 좌도는 금강, 만경강, 영산강 일대의 평야지대를 일컫는다. 산과 강과 그것의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이 구분법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풍물굿에 대한 상식 몇 개를 점검하게 해준다. 예를 들어 흔히 전주는 좌도굿, 이리는 우도굿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분류법에 의해 호남정맥의 서쪽인 전주는 그 근본이 우도굿 지역임을, 이리지역은 좌도굿 지역임을 인문 지리적 문화동질성을 통해 말해준다.(주;윤희철은 ‘농악의 지역분류체계의 문제점’(<태백산맥은 없다.>,1997)에서, 홍유봉의 증언을 들어 전주가 우도굿 지역임을. 이인수의 익산 성포농악에 대한 증언을 들어 좌도굿 지역임을 말하고 있다. 게다가 “금강 하류의 논산농악과 익산 성포농악이 호남좌도 농악이라는 최근의 연구(김택규외, <한국의 농악>,수서원,1995)는 금강 유역의 마을 농악이 호남좌도농악권임을 뒷받침한다.”라는 근거까지 달아놓았다. 이외에도 화순을 좌도농악에 포함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학자들이 화순을 좌도농악으로 본 것은 화순군 동북면 한천농악을 근거로 했는데, 화순,승주는 영산강 수계고 동복은 섬진강 수계이기 때문에 동복의 한천농악으로 화순군 모두를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영산강 수계인 담양 동부지역은 낮은 고개를 통해 섬진강권인 순창과 교류하기 때문에 좌도농악의 영향권이지만 동복과 한천은 쉽게 오갈 수 없는 고개가 가로막기 때문에 마한 부족국가 이래로 생활권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경기 충청농악이라는 설정은 모호한 면이 있는데, 한남금북정맥이 있기 때문에 경기농악만을 웃다리 농악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그는, “실제적 구분선인 강 혹은 산줄기에 의한 농악권 이름을 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애매하고 혼란스러운 ‘경기 충청 북부 농악’이라는 명칭에 비해 ‘섬진강 유역 농악’이라고 하는 것이 명확하고 쉬운 분류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흔히 고깔을 쓰거나 전립을 썼다는 것이 좌, 우도굿을 가르는 중요한 단서처럼 얘기되어지는데, 왜 그런지, 그래서 그 특성은 무언지가 확실히 주장되지 않고 있다. 그건 아직도 '영향선'(주; 차림새(치복과 쓸 것 등)가 다르다는 것은 ‘영향설’과의 관계 때문이다. 3부 수록 글 “남원농악의 유래와 특성”을 보면 굿의 내용과 형식이 아직도 과도할 정도로 군악설과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치배 전원이 전립을 써야 한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게 강조된다. 그리고 고깔은 “서산대사의 ‘진법군고’ 이래로 대사의 승병의식의 소산으로, 전립 대신 화관(고깔)을 쓰는 것”이라고 불교 기원설과 부단히 연관되어져 있다.)정도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방식 때문이다. 이제는 그것들이 풍물굿적으로 특성화되고, 이미 특수한 예술적 표현의 질을 획득했으면서도, 그래서 그 발전의 길이 무궁하게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영향성 정도의 수준에 아무 생각없이 아직까지도 묻혀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깔과 전립은 즉자적 필요성에 의해 서로 섞이게 되고,(주; “전국 규모의 농악대회에서 윗놀이가 없는 세(勢)에서 몇 차례 우승을 못하게 되자 서둘러 부포상모놀이는 쇠꾼들이, 채상모는 소고꾼들이 (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이기주,앞의 책, 82쪽) “그때(1949년) 전북에는 정읍팀과 전주팀 이렇게 두 팀의 굿패가 있었다. 정읍팀은 전부 고깔을 썼다. 그런데 위쪽(서울)으로 올라가 고깔을 쓰고 굿을 하면 안 알아주었다. 그래서 고깔을 쓰고 하는 정읍팀 농악은 대회에 나가면 2등 아니면 3등이었다. ... 박정희 정부 이후에는 좌도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굿패가 부서져서 주로 정읍농악단에 속해서 다녔다. 그 때 정읍농악단의 소고잽이들은 고깔소고대신 채상소고를 채택했다. 그래서 서울 대회에서 일등을 할 수 있었다.”(홍유봉 증언, 전북대 박물관, 앞의 책, 231-32쪽)) 나아가 좌도, 우도굿도 섞이게 된다.(주; “결정적으로 좌, 우도굿이 섞이게된 이유는 60년대의 여성 농악단, 혼합 농악단의 등장에 의해서이다. ‘돈을 벌러 다니는’ 유랑 농악단이 성행했던 시기이다. ‘이 패는 서로 좋은 것만 골라서, 즉 바싹바싹 빠른 것(경쾌한 것)만 골라서 굿을 구성했다.“( 유명철 증언, 전북대 박물관, 앞의 책, 246쪽)) 그리고 그것은 아무래도 풍물굿의 내용발전을 위한 진지한 형식미 탐구, 즉 자신의 굿적 논리에 의하기보다는 대회용 볼거리, 그리고 볼거리 위주의 상업적 공연을 위한 단순 필요성에 의해 차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좌도굿, 우도굿은 서로 건널 수 없는 차이로 분류될 필요가 없고 현재는 지역적 특징 정도로 구분되어지면 족하다.(주; 남원굿 유명철 상쇠가 항상 강조하는 말에 의하면 좌도, 우도라는 말 자체가 등장한 것이 최근래의 일이다. 필봉굿의 양순용 상쇠도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한다.“우도, 좌도의 차이는 없지는 않지만, 그 차이라는 것이 비유를 하자면 말씨의 차이와 비슷한 것이지, 요새처럼 골격부터 생판 다른 것은 아닙니다.”(양진성, 오광열 외, <자료집 호남좌도 풍물굿>, 1990) 현재의 주장정도로는 옛날의 생활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특징 이상을 구분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좌,우도의 구분법은 그렇게 구분을 해야 하는 나름의 명확한 필요성에 의해 애초부터 구분, 재구분되지는 않았던 것이고, 또 그것이 각각 발전하면서 풍물굿의 미학-예술론적 패러다임을 얻어갔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런 어떤 시도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문화적 동질성을 갖는 광범한 민속조사 차원에서 한 보고서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즉자적 필요에 의해 기술-질료적 차원에서 섞이고 있다. 즉 이제는 구분의 현재성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뒤집으면 두 가지 숙제가 우리에게 남는데, 하나는 그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태생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채 서로 차별을 하지 말라는 것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관점인데, 그 차이를 각각 또는 같이 풍물굿 미학-예술론적 특수성으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영향설 절도의 차이에 대한 고집은 예술적 특성으로 발전시키려는 관점으로 바뀌어져야 하고, 점점 그 의미가 없어져가는 생활문화적 차이라는 것은 새로운 문화-예술적 장점을 갖는 지역 명문굿으로 발전을 꾀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좌,우도 구분법은 이제 무의미할 뿐더러 현실에서 생동하는 구분법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현재 우리가 알고 잇는 우도굿 개념의 출산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이는 좌도굿과 우도굿을 민속학적 태생의식이 아닌 다른 질의 문제의식으로 인식, 구분할 필요 때문에 그러하다. 필봉굿 양순용의 얘기를 들어보다.
먼저 좌도 우도 이야기 좀 해보겠습니다. 요즈음 우도굿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굿은 옛날 전주농고 농악이나 춘향농악단 등의 여성농악단이 포장걸립 다니던 사절에 그 틀이 잡힌 것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김홍집, 신기남 시대에 무속하시던 분들이 농악을 전문적 기예로 정립한 바탕 위에 포장걸립의 무대에 맞게 여러 지방 명인들의 좋은 가락을 모아서 스텝을 만들어 공연 형식으로 만든 것이지, 농촌 평민들이 치던 굿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민속학자들이 농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분들이 "당신들은 우도요 좌도요"하고 묻기 시작하자 아무래도 자기들 가락이 좌도보다는 우도지역에서 더 많이 왔다고 생각하고 우도라고 대답한 모양입니다.
학자들은 본래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지금은 학자들이 쓴 글만 보면 우도와 좌도는 천양지차로 다른 가락을 친 것처럼 알기 쉽습니다만, 실제로 우도 좌도 지방의 촌로들을 만나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도도 우리 필봉만큼 '갠지갱'가락을 많이 쳤고, 굿 시작할 때 휘모리-된삼채-휘모리로 한 바탕 친 뒤에 외마치 질굿으로 출발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오늘날 우도농악으로 불리는 굿은 그 이름이 현대 농악으로 바뀌어야만 그 분들도 원형보존이라는 압력에서 벗어날 자유롭게 뛰어 다니며 매스게임에 화려한 재주넘기의 압력에서 벗어나 옛날의 깊은 맛을 표현하는데 전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옛 명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해방공간에는 대회농악이 많았다.(주; “막 해방이 되자, 사방에서 농악 대회가 다투어 열렸는데, 그러던 중에 서울 창경원에서 ‘전국 농악 경연대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전주에서도 굿패를 꾸며 이 대회에 나가게 외었다... 그 이듬해 봄에도 농악대회가 서울 제일운동장에서 있었는데 .. 이 대회를 마치고는 바로 집으로 내려오지 않고, 바로 대구 달성공원으로 내려가 거기서 굿을 하고, 다시 대전으로 가서 한천가 공터에서 굿대회를 하고, 다시 부산으로 갔다. 부산대회를 마치고 나서야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온 것은 두달만이었다. 그 이듬해에도 다시 서울운동장 농악대회에 참가하고, 다시 대구 달성공원에 가서 하고, 마산으로 갔고, 거기 북마산 신마산하는 넓은 장소가 있는데 거기서 굿을 하고는 다시 대전으로 올라왔다.”(홍유봉 증언, 앞의 책, 230-31쪽)) 물론 마을굿도 나름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60년대에는 대회농악도 있었지만 그 시대의 명인들로 구성된 포장걸립이 벌어지고,(주; “1961년도 봄, 그러니까 5.16이후에, 서울 덕수궁에서 제 1회 전국민속경연대회가 있었다. 이 대회에 유명철이 속한 금산농악팀이 전북 대표팀으로 출전해서 1등으로 송요찬 내각 수반상을 받아와서, 거기서부터 문공부장관 허가를 얻어, 전국 일주 포장걸립을 다니게 되었다.”(홍유봉 증언, 앞의 책, 246쪽)) 나아가 여성농악단을 주축으로 명실상부한 본격적인 전문적 연예농악단까지 등장한다. 창극단의 경우처럼 아예 돈을 벌러 다니는 전문 농악단이 생겨난 것이다.
60년대 초반 전문 연예농악단 시기에 앞서 말했듯이 좌,우도굿은 섞인다. 특히 이 시기에는 좌도굿의 명인들이 타계하여 쇠잔해지고 이른바 우도굿인 정읍농악이 이름을 날릴 때였다. 이 정읍농악에도 좌도굿이 섞이게 되는데,(주; “소고잽이들이 고깔소고 대신 채상소고를 택했다. 그래서 서울 대회에서 일등을 할 수 있었다. 고깔을 채상으로 바꿔서 정오동(좌도농악 소고)이 했다. 즉 좌도농악 소고잽이들이 가서 ‘뒷굿’을 했다. ...앞굿은 정읍농악인데 뒷굿은 좌도농악이었다”(전북대 박물관, 앞의 책, 232쪽))당시 갓 탄생한 여성농악단도 이것을 기본레퍼토리 삼아 공연을 다니게 된다. 양순용의 증언대로 이시기에 변화된 우도굿이 즉 요즘 우리가 흔히 우도굿의 기본형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변화된 우도굿의 풍토에 의해 ,잘못된 풍토에 부분에 대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70년대 말에 좌도굿이라는 개념이 새로운 의미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풍물굿의 자체 분화, 발전과정들은 결정적으로 와해되고, 민속경연대회식의 대회농악 정도로 그 명맥이 남게 된다. 게다가 더욱 치명적인 것은 그대까지도 자생력을 가지고있던 마을굿까지 깨져 나가면서 대회농악도 포용해낼 수 있었던, 풍물굿의 문화적 기반이 한층 쇠락해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초부터 일기 시작한 탈춤부응운동의 여파로 풍물굿은 70년대 말부터 대학가에서 새로운 의리로 재생되기 시작한다. 이 풍물굿 재생 노력은 민중운동과 연관되고, 당시의 억압된 형태의 문화 환경과 관변적 성격의 문화를 극복하려는 저항문화의 성격을 때게 되면서 민중들의 공동체 의식에 뿌리를 내린 풍물굿과 새롭게 조우하게 된다.
그래서 당시 대동굿, 마을굿의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필봉굿이 대학가에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80년대에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해방 이후의 각종 농악대회, 그리고 60년대의 포장걸립과 전문 연희농악단이 융성하면서 연희중심 형태로 편집되어 풍물굿이 갖고 있는 민중적 의식절차성이 없어지고 기능적 표현력만 극대화되어가던 것을 역으로 마을굿을 통해 극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부터 풍물굿은 민중성과 천착하고 예술성과 문화를 진정으로 진보시키고 사회를 진보시키는 일에 적극 나서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좌도굿 정신이다. 이제 좌,우도굿은 생활문화적 구분이라는 차원에서 시대정신과 적극 만나게 되는 차원으로 전이된다. 이를 계기로 예 형태의 굿 수준이지만 여러 지역의 소중한 풍물굿 자산들이 새로이 시대의식과 만나고 기층 민중문화운동과 그 의식의 관점으로 소개되면서 대학가와 노동현장, 시민들 속에, 그리고 심지어 역으로 농민운동의 현장으로 폭발적으로 확산되게 된다.
좌도굿이 그대로 다시 재현되고 확산된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좌도굿 정신이 시대의식과 만남 사실이 유의미한 것이다. 알다시피 그 이후 풍물굿은 자체의 발전 뿐 아니라 인접예술과 문화에 영향을 미쳤고, 전통예술이 새롭게 인식되고 확산되는 데 중요한 인프라로 작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시대정신을 가지려고 하는 여러 계층의 진지한 실천들과 만나면서 사회-역사적 진정성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풍물굿은 사회의 전 부면에서 사람들의 의식을 한번 뒤바꿔 놓았던, 사람의 존재조건과 그 숭고함을 다시 일깨워주고, 그래서 사회와 역사를 진보시켜냈던 80년대라는 시간 속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90년대를 지나면서 대중문화예술의 급격한 신장, 즉 발전하는 물질운동의 수준에 조응하는 대중의 감수성, 또는 감각은 수준 높게 진화하고 있는데 풍물굿은 정체되고 있는 것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여전히 '옛것'수준의 단순재생산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당대성을 얻기 위한 노력도 마당극과의 혼동, 이벤트성과의 혼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80년대에 재생된, 즉 의미복원된 것 이상의 발전내용이 아직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물굿은, 늘 그래왔듯이, 여전히 발전과정에 있다. 사이버공동체 안에서 더욱더 신체와 정신이 박탈되어가고있는 이 지독한 문화산업 환경 속에서 풍물굿은 더욱 더 희망이다. 몸의 의식으로, 시대정신의 한가운데서 위력한 가심의 양택적 공동체성을 갖은 통과의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한의80년대라는 그 엄청난 의식과 실천, 즉, '몸과 꿈'의 시대가 축적해준, 대중적 지성의 시대에서 쌓아온 기의덩어리들이 무형으로 흐르고 있는, 새로운 세포분열을 준비하는 이 휴지기의 시대에는 더욱 더 그렇다. 좌도굿 정신은 이제 본격적으로 개화해야 하는 것이다.
좌도, 우도굿의 구분 시대는 지났다. 그리고 그것과는 이제 다른, 새로운 의미의 질을 갖는 좌도굿 정신이 새삼 소중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우도굿도 여전히 소중하다.(주; 이른바 우도굿도 60년대에 ‘변화된 우도굿’의 영향에서 벗어난 우도굿이 본디부터 갖고있는 절차의례성이 갖는 소중한 역할을 여러 각도에서 다시 조망해 보아야 한다. 관점이 없는 것이 문제이지, 그 싹들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리고, 60년대 전문 연예농악단이 비록 풍물굿적 진정성을 과도히 잃어버렸지만 나름대로 확장시킨 그 표현력의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관점으로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아니면 더욱 더 나서서 전문연예농악단의 참신한 질을 적극적으로 창출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풍물굿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능적 볼거리에 치우치는 경향에 빠지는 우를 다시 범하지 않는다면) 따라서 이제 문제는 하나 좌도굿이건 우도굿이건 간에, 풍물굿의 절차의식성과 그것의 문화예술적 진정성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명문화시킬 것인가. 그래서 지역별로 그러한 특성을 갖고 어떻게 정착, 발전될 것인가가 숙제로 남았다.
그래서 좌도, 우도의 관념적이고 쓸데없는 구분이 아니라 알토란같은 내용, 형식을 가진 튼튼한 명문굿으로서 저마다의 특성을 뽐내는일, 각각의 특수성으로 살고, 그 수준높음으로 풍물굿을 당대 삼 속으로 문화시키는 일, 그것만이 이제는 진정으로 중요하다.
Ⅱ
이러한 '정체와 가능'의 시기에 풍물굿 진영에서 작은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1997년에 누군가 pc통신에 글을 올려놓았는데, 그 글은 글쓴이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풍물굿 나아가 예술의 자기 정화력에대해 뼈아프게 점검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만한 글이다. 이 글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에 대한 비판의식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있는 것같아 그 무기력적 무관심에 더욱 가슴이 아파지는 사건이다. 그 글 <필봉굿에 대한 도발적이 문제제기>(주; 이글은 천리안 ‘사물놀이 동호회’(GO SAMUL)에서 21,토론실,강의실로 가서 6.ZSSAMUL 강의실3: 풍물굿, 사물놀이 강의실로 들어가면 찾을 수 있다. 하이텔에서는 ‘우리소리 다솜’(go sori)으로 가서 전문게시판 11.‘악기,노래,춤이 하나가 되어‘에서 찾을 수 있다.)를 발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필봉굿=유사종교?
필봉굿은, 말도 되지 않는 이론을 '양선생님이 얘기하셨기 때문에...'라는 식으로 우기곤 한다. 이러한 현상은 곧 믿음의 상태로까지 발전한다. 대부분의 필봉굿잽이들은 여타의 굿을 아예 무시한다. 이들에게는 여타의 굿은 좋지 않은 것, 틀린 것이다 전라우도는 밥이고 사물놀이는 아예 논의의 대상도 안 된다. 양선생님을 망친 것은 대학생들이다. 양선생님의 말은 말하자면 부분적인 사실일 뿐이다. 필봉굿에서 새어나오는, 도대체 사실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학설들이 정설인 듯 하는 태도가 문제이다. 내가 보기에는 필봉굿은 다른 여타의 굿을 헐뜯고 씹어댈 자격도 능력도 없는 단순한 촌극일 뿐이다.
2.필봉굿은 과연 좌도굿의 정통성을 보존하고 있는가?
필봉굿이야말로 여기저기 섞인 굿이다. 내가 만나본 많은 명인들은 필봉의 가락과 판제를 듣도 보도 못한 것인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쯤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한 번쯤은 보았을'농악'이라는 책, 혹은 기타 자료들은 하나같이 좌도가락이 굉장히 빨랐음을 증명하고 있다. 유독 필봉굿만 느린 가락을 고집한다. 혹시 필봉굿은 우도가 섞인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느 문헌을 봐도 좌도는 굿가락이 단순, 소박한데 비하여 윗놀음이 발달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필봉굿은 도대체 어디를 보아서 윗놀임이 발달했다고 할 수 있나? 냉정하게 말해 양선생님은 윗놀음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그 후계자들도 당연히 못하다. 따라서 학생들도 못한다. 그러니 필봉굿 후계자들은 이제 자시들이 모사니까 안하고 있으면서 그것으르 원래 그랬다고 왜곡시키는 못된 짓거리를 그만둬야한다. 곡성의 박대업씨나 남원의 유명철씨의 윗놀음을 보라. 그리고 나서 말을 해라. 하다못해 김봉열옹의 비디오라도 구해서 보라.
3 ‘갠지갱’은 과연 심오한 가락?
맛의 차이야 있다. 당연히 양순용 선생이 치는 갠지갱과 당신의 갠지갱은 맛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신도 한 10년 쳐봐라. 당연히 초심자들과는 다른 맛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단순한 사실을 신비화, 절대화하고 있다. 신비한 가락은 정말 새고 발렸다. 다른 가락도 쳐보고 그런 소리해라.
4. 필봉굿의 기능에 대한 입장 비판.
필봉굿은 변주를 몇몇 가락이나 아주 적은 범위 내에서만 허용하고 있다. 맛이 안난다는 거다. 필봉굿은 마치 서양음악의 악보와도 같아서 겹가락이라도 들어가는 날에는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런 아집은 심지어 다른 굿에 대한 비방으로 이어진다. 쇠를 긁어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다. 오로지 직타, 직타만을 되뇌이고 있다.
장구가락은 더욱 가관이다. 내가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장구의 궁채와 열채는 한번도 만나서는 안된며, 마치 굴러가는 듯한 소리가 나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유독 필봉굿은 장구가락의 단순함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필봉의 장구가락은 쇠가락에 맞추어서 만든 가락이라는 것이고, 즉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쇠가락에 딱 맞게 대충 얼버무린 것이라는 가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뿌리 없음에서 나오는 열등감의 한 표현이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5. 왜 필봉굿이 이렇게 되었나?
70년대 후반-80년대 초까지 마을굿, 대동굿에 대한 논의는 전성기를 이룬다. 이때만 해도 필봉굿은 지금처럼 있지도 않은 권위를 내세우거나 거드름을 피우지는 않았다. 순박한 굿이었을 따름이다. 어쨌든 그 와중에서 마을굿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그것이 풍물패의 목표가 되어가면서 마침 풍물굿이 뜬것이다. 지식인들은 특히 감동을 잘한다. 또한 머리로 사물을 보려한다. 즉 그들이 그리는 이상적이 마을굿의 상에 필봉굿을 갖다 맞춘 것이다.
이제 서서히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차분하지 못한 정열은 급기야 하나의 굿을 절대화, 신격화하기 시작한다. 오로지 필봉굿만 굿이라는 그런 아집과 허세가 자리 잡았다. 마을굿의 환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풍물을 온전히,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심지어는 왜곡시키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필봉굿이 전체 풍물의 발전을 가로막는 경로이다.
통신에 실린 14쪽 정도 되는 글을 가급적 주장의 내용 중심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위 발췌문에서는 심한 표현은 대부분 빼버렸지만 이글의 전문을 보면 알 수 있듯 글의 표현이 아주 거칠다.
이 글은 사실 필봉굿에 대한 비판의 글이 될 수 없다. 두가지 때문인데 하나는 비판의 핵심인 대안의 관점도 없을뿐더러 비판의 내용도 사실 없다. 단편적이 상식에 입각한 주관적 비난만 있을 뿐이다. 두 번째는 무엇을 비판한다는 것은 부정의 부정, 상생의 관점이 필요하다. 즉 진지한 애정의 행위이다. 그런 기본적이 자세가 없다. 그리고 비난의 초점이된 필봉굿 후계자들이 무지스럽다고까지 표현하는데, 이렇듯 인격적인 차원까지 이전투구하자는 행위여서는 곤란하다.
게다가 글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논리란 사물의 진리와 그것의 세상에 대한 진정성을 밝혀내고, 불필요한 오해나 침소봉대되는 것을 줄이기 위해서 꼭 취해야 할 방법과 태도이다. 가장 인간적인 태도이자 그 약속이 것이다. 그래서 모든 주장은 논리적이어야 하며, 그 근거가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 글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풍물굿에 대한 얘기가 없어서 논리전개의 기본 소양이 되어 있지 안다. 자신의 관점으로 쌓아온 그 소중한 성과가 없다. 당연히 자신의 얘기로 풍물굿이 주장되지 않고 일반적인 상식과 편견적 지식 몇 가지로 풍물굿을 재단하다.
예를 들어 이 글은 좌도굿의 정통으로 진안굿을 들고 있는데, 왜 그것이 좌도적으로 정통인가, 좌도적이란 것은, 그리고 정통이란 것은, 그렇기 때문에 당대의 풍물굿에 어떤 장점으로 작용하는가, 그것의 미학-예술론적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좌도 가락이 빠르다면 그것은 왜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서 얻은 풍물굿적 특성은 당대에 어떻게 살아남고 확산되어야 하는가라는 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전제되지 않는다. 관점과 출발부터 자신의 논리가 없는 것이다.
본인은 문헌, 책, 자료, 옛 명인들의 증언이 그렇다는데, 확실히 그렇다는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한 두 가지 분석을 한 것도 객관적이라고 보기에는 별로 신통치가 않다. 이 글이 논문 수준의 글이 아니고 단순한 주장의 글일지라도 확실성의 근거는 있어야한다. 그래서 이 사람의 대안은 결국, ‘가서 박대업과 유명철을 보라, 하다못해 김봉열의 비디오라도 봐라 그리고 나서 이야기하자.’라는 것으로 된다.
세상에 이런 무책임한 일이. 자신이 스스로 증명하지 못할 일을 주장하다니. 자기 주장을 객관화시킬 능력이 없으면서도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정말 모를 정도인데 ‘무언가가 있는 듯’해서 충심으로 그랬다면 차라리 그런 사실이라도 제대로 알리게 유능한 기획자가 되어 가급적 많은 사람이 그 굿을 보게 하는 게 그 주장이 그나마 솔직하게 사는 길이 될 터이다.
필자는 이 글의 내용을 문제삼고 싶지는 않다. 아니 쓸만한 내용이 없어서 사실 문제삼을 것도 없다. 단지 이 글의 태도와 자세를 문제 삼고 싶다. 이 글을 통해 우리 풍물굿 진영의 황폐한 풍토가 일견 엿보이고, 그것이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본인의 표현대로 이 글을 쓴 사람은 “87년에 이리 우도굿을 배웠고, 88년 진안 중평굿, 91년 임실 필봉굿, 92년 93년 곡성 중동굿, 93년 정읍 송산굿, 96년부터 현재까지 사물놀이를 배우고 있는 일개 굿쟁이다.” 근 10여년 동안 굿을 열심히 배우고 친, 오랫동안 굿속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굿장이가 이렇게까지 천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의 동업자 정신도 없이 상대편 타자에게 죽으라고 빈볼을 던지고 있다. 왜 이 사람은 이 지경이 되었을까?
굿을 바라보는 시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잘못된 시각 때문에 굿을 통해서 굿장이로서 자기 성숙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굿 정신에 천착하지 못하고, 그래서 풍물굿을 당대 사람들의 삶 속에 소중한 것으로 뿌리내리려는 진정성이 없이 굿의 볼거리와 그 기술에만 관심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뿐 아니라 사물놀이가 융성해지고 풍물굿의 발전이 일견 정체되어 보이는 요즈음 많은 사람이 이런 경향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풍물굿은 예나 지금이나 삶을 가심(淨化)하는 것을 소중하게 가치 지향한다. 민중들이 오랜 질곡의 삶을 부단히 승화시키고, 사람의 일과 꿈을 살찌울 수 있었던 굿의 자기 정화기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정화시키는 통과의례로 오랫동안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80년대라는 시대정신의 한복판을 지나오면서 풍물굿은 보다 삶 속으로 천착해왔고, 그 진정성의 수준을 높여왔다. 그래서 이제 풍물굿은 보다 역사-사회적으로 삶을 가심할 것을 지향한다. 풍물굿은, 그렇게 생동하고 있는, 가심의 양택적(陽宅) 축원의례이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풍물굿과 만나면서 겉보기의 놀이성에만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그 의식-무의식적 속내를 알게 모르게 유형-무형적으로 풍물굿에 접속한다. 그 속내란 두가지 차원의 존재적 발언, 즉 자기 실현 의지, 그리고 나아가 선험되고 문화된 민족적 자존의식이다. 그것을 미래 가심하고 싶은 것이다. 최소한 그만큼의 진정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풍물굿이 포착해내야 할 민중성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풍물굿과 만나려 하는가 그 속내를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하고, 삶의 모순과 질곡이 점철되는 환경 속에서도 부단히 혈로를 뚫고 나오려는 그 간절한 욕망을 들여다보는데 게을리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관점은 풍물굿이 부단히 볼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물론 볼거리야 많을수록 좋지만 그것이 구조가 되어서는 안된다. 고유의 언어가 실종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볼거리란 하고싶은 이야기가 부차화시켜내는 것일 뿐이다. 볼거리를 넘어서 서로 접속, 요구하는 본질인 삶의 내용으로, 그것의 감동기제로, 그래서 재미로 부단히 승화되어야 한다. 그러한 볼거리이어야 한다. 즉 민중적 미의식이 리얼리티를 가져내야 하고, 그래서 가장 큰 삶의 재미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위 발췌된 글이 호들갑스럽게 주장하는, 필봉굿에 우도가 섞였다는 것은 사실 아무 문제가 될 리 없다. 섞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섞였는가를 따져야 할 일이다. 그 섞임의 필연적이 질이 무엇인가를 따져야 한다. 섞인 것이 우려된다면, 그래서 꼭 섞이지 않고 보존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소중한가가 나름의 진지한 실천행위를 통해 새록새록 증거되어야 한다. 그 준거는 민중적 미의식을 발달시켰는가 아닌가가 문제가 되어서 그 섞여진 그것의 장단점을 평가해야 한다. 그것이 풍물굿이 여전히 당대성을 얻어갈 수 있는 기본자세인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따지지 못하고, 우격다짐의 몽매한 주장만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통 좌도굿이냐 아니냐라는 주장도 그 정통스러움의 민중적 미의식과 가치지향성이 증명되지 않는다면 공허할 뿐이고, 그런 식의 주장은 기실 저급한 패권의식에 사로잡힌 일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들의 영향과 누적으로 풍물굿이 볼거리 관점으로 치닫는 현상, 풍물굿 본래의 언어력과 시간성을 포기하고 이벤트-공연-무대적 시간성에.(주; 공연과 무대의 개념 자체를 주정하는 것이 아니라 풍물굿이 자신의 시간성을 포기해 왔던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한 감각의 언저리에만 놓이도록 경도되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고, 풍물굿이 당대적 민중성에 침잠하는 사고와 실천이 점차 메말라 가고 있는 것이다.
옛 풍물굿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른들의 도굿대춤-물론 잘 추는-하나에도 뚜렷한 민중적 미의식이 있다.‘절름거리는’ 시간의식이 있을뿐더러, 그 추상의 시간으로 자신의 삶을 충분히 얘기하고 있는, 나름대로 내용, 형식이 맞춤하는 빼어난 예술성이 있다. 굿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겉보기에 세련되지 못하다고 폄하하여서는 곤란하다. 아마추어들이 하는, 마을굿에서나 하는 수준이다라는 시각은 참 위험하다. 오랫동안 삶의 현장에서 풍물굿같은 삶의 진곡한 기제를 통해 사실 고도로 훈련된 몸의 언어인 것이다. 전문 예술가에게는 없는 아주 수준 높은 표현이고 춤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 다이고 결과의 끝은 아니다. 아주 중요한 놓쳐서는 안되는 계기인 것이다. 그리고 단연히 전문 예술가들에 의해 그러한 진정성은 보다 보편적인 미학 언어로 객관화되어야 한다. 인류가 꾸준히 발전시켜온 수준높은 예술적 질과 교호해야 한다. 그 공통분모 속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점차 자생적으로 발전하는 대중들의 감수성과 수준 높아지는 예술인식을 건드릴 수 있는 모든 조치들을 취하면서 승화해야 한다. 보다 당대적으로 설득력있는, 그리고 수준높은 대중성으로 발전시켜야 할 일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 관점과 태도는 분명해야 한다. 그것은 보다 민중성에 천착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민중 속에서 그들의 희로애락과 같이 부침하면서 천자락 하나도 삶․ 죽음 차원의, 길․시간의 존재의식으로 발언시키는 씻김굿의 살풀이 의식․춤이, 현실과 꿈을 같이 아우르는 춤인 살풀이 의식이 전문 무용수들에 의해 예술적으로 특화되면서 오히려 진정스러운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을 유심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잘 못추는’ 대다수의 그런 예술적 살풀이춤이 그렇듯이 겉보기에 세련되기만 한 한풀이춤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결과를 조심해야 한다. 절절함과 빼어남 예술성, 풍물굿 미학의 뿌리와 출발은 여전히 민중성에 천착하는 일이다.(주; 노파심에서 이야기하자면, 이 말은 물론 도굿대춤을 뒤늦게 추수하여 일방적으로 미화시키거나 단순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시대의식과 소재적으로 만나라는 이야기도 전혀 아니다.)
풍물굿이 볼거리로 전락되지 않고 자신의 언어와 절차기제로서 할바를 한 번 다해 보는 것, 그리고 여전히 민중성에 천착하는 것, 이 두가지가 항상 의념되지 않으면 풍물굿은 세상을 가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물론 스스로도 가심이 되지 않는다.
위 발췌된 글을 쓴 사람은 풍물굿에 대한 잘못된 시각 때문에 풍물굿에 의해 진지하게 정화되는 길에서 스스로 멀어졌다.(주; 이 사람뿐만 아니라 사실 풍물굿 진영의 자기 정화 수준은 높다고 할 수 없다. 현재의 풍물굿 수준이 사실 그렇다. 예술을 통해 사람이 정화되는 분위기가 강하게 틀 지워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사람도 풍물굿의 뭔가 ‘빛나는 것’과 만났을 것이다. 그런 감동어린 부분을 발견했을 것이다. 풍물굿이 세차게 발전할 수 있는 어떤 묘수를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안타깝도록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은 한낱 무뢰배같은 태도로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지만, 이 사람이 그저 취미 정도로 풍물굿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전문적으로 풍물굿장이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여전히 풍물굿의 미래는 민중성에 천착하는 일임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그래서 더욱 ‘자기의 풍물굿’ 관점을 가지고, 보다 현실 속에서 살면서, 즉 실천되며 쌓여지는 개념들을 확충하면서, 그러한 언어성으로 본인이 그 무언가 빛나게 보았던 것을 진지하게 드러내야 할 것이다.
굿장이들은 세상을 가심하고 스스로를 가심한다. 가심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가심하겠는가? 그 가심의식의 기저는 물론 민중성이다. 그리고 그 민중성에 천착하라는 것, 그것을 바탕삼아 당대의 삶과 그 문화를 진보시켜내라는 무형의 힘, 그것이 아직도 우리에게 살아있는 개념이자 실천인 좌도굿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