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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크랩 수원 화성의 가을
한국의산천 추천 0 조회 44 07.10.19 17:3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수원 화성(華城)의 가을풍경 (동북각루와 화홍문)  

답사 촬영 2007.10.19. 금요일 [ 한국의산천]

 

비온 뒤 파란하늘을 보여 주는 가을 오후, 수원에서 업무를 마치고 오는 길에 하늘이 너무 푸르러 점심조차 건너뛰며 잠시 옆길로 새서 외도를 했습니다.

모두 파란 가을 하늘 탓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하늘 푸른 수원시내 ⓒ 2007 한국의산천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인해, 폐해가 극심했던 구 정치체계의 개혁을 위해, 그리고 은퇴 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행궁을 신축했으며 화성을 쌓았다.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던 정조의 아버지,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유택(幽宅)인 영우원(永祐園)을 1789년(정조13) 풍수지리상 최길지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산(수원의 융,건릉)으로 옮기면서부터 정조대왕은 수원 백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수원의 새로운 읍치(邑治)를 팔달산 기슭 <당시 지명은 신기리(新機里)>으로 옮기면서 행정, 치안기관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 교통기관인 역참(驛站),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민생 대책을 강구했다. 또 사도세자의 묘역이 조성된 구 읍치에 살던 백성들('수원하지초록(水原下旨抄錄)'에 따르면 244호-인구 677명)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나눠주었다. 아울러 수원부에 감금된 죄수 전원과 수원부 사람으로서 유배 중에 있는 이 들도 풀어 주고 수원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주는 등 특별 조치를 베풀었다.  

 

화성은 정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던 실학의 대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 동북공심돈ⓒ 2007 한국의산천

화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 동북공심돈 앞에서 하늘거리는 억새 ⓒ 2007 한국의산천

 

 ▲ 동북공심돈 앞에서 놀이를 하는 어린이들 ⓒ 2007 한국의산천

화성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동북공심돈 ⓒ 2007 한국의산천

 

 

▲ 동북각루 ⓒ 2007 한국의산천

 

동북각루는 벽성의 서북 19보 용연(龍淵)의 위에 있다.
광교산의 한 쪽 기슭이 남으로 벋어내려 선암산이 되었고, 다시 서쪽으로 감돌아 몇리를 내려가 용두(龍頭)에서 그치고서 북쪽을 향하여 활짝 열렸다. 용두란 것은 용연의 위에 불쑥 솟은 바위이다.
성이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게 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되니, 여기야말로 실지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이다.

장안문을 잡아 당겨 화홍문과 이어지게 함으로써 앞뒤로 서로 마주 응하여 1면을 제압하고 있다. 그리고 절벽을 따라 성을 쌓고 바위에 누를 세우니 편액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하였다.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 씀]
 동서로 세 간인데 가운데는 온돌을 놓았고 북쪽으로 한 간을 붙이고 남쪽은 반 간(半間)을 물리었으며, 서쪽의 한 간은 또 길게 두 간을 늘리었다. 남쪽을 밖으로 물린 것은 마치 곡척(曲尺)처럼 생겨 있는데 평난간을 둘러쳤다. 그리고 위에 만(卍)자 쇄창(蔘)을 갖추었다. 온돌 4면에는 또 다시 만(卍)자 장자(障子)를 갖추었는데, 온돌의 면과 판자를 깐 면은 서로 판판하게 만들었다.

남쪽 동쪽 북쪽의 3모퉁이에는 5번 꺾인 팔각(八角)으로 각각 종횡의 짧은 대들보를 얹었다. 지붕 용마루의 네모진 서까래가 들쭉날쭉하여 처마를 번쩍 들고 있으며 지붕 용마루에는 망새[鷲頭]를 교착시켜 꽂았는데, 한 가운데에 3마디 절병통(節甁桶)이 까마득하게 솟아 있다. 

 


▲ 화홍문(華虹門)과 오른쪽에 보이는 동북각루 ⓒ 2007 한국의산천

 

화홍문(華虹門)

화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자는 무지개를 뜻하는 화홍문은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을 넘쳐나는 경치가 장관이라 화홍관창이라 하묘 수원 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동북쪽 평난간 밖에는 또 처마마다 판자를 깔아 성두(城頭)를 위압하고 있다. 2중으로 교란(交欄)을 설치하고 밖에는 전붕판문(戰棚板門) 16개를 설치하였는데, 만듦새는 마치 병풍을 포개어 친것 같다. 위에는 전안(箭眼) 각 1개씩을 내고, 아래에 총안 각 2개씩을 뚫었다.
단청은 5토를 사용하였으며, 대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내면에는 절지(折枝)를 그렸고, 정간(正間)의 조정(藻井)에는 연잎[荷葉]을 받쳤다.
동북 교란 아래의 성면 벽돌 높이 7척, 두께 4척 4촌, 위 아래에 총안 19개를 뚫고 널판지를 깔았다.

아래의 서남에도 벽돌을 돌려쌓아 담을 치고 담의 남쪽에 벽돌 홍예의 작은 문을 내었다.
동쪽의 물림난간 아래에도 판문을 내고 숨었던 적병의 발사에 대비하여, 포루의 제도와 같이 하였다. 정간 남쪽 처마와 층계로 누대를 만들되 돌을 깎아서 가장자리를 둘렀다. 누대의 높이 4척, 남북의 길이 13척 4촌, 동서의 너비 16척 4촌이다. 위에 방전을 깔아 우사(射)와 읍양(揖讓)의 예를 올릴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을 유지시켰다. 대 위의 서북에 각각 고란층제(高欄層梯)를 놓아 정자의 위로 통하게 하였다. 대 아래의 동남 양면에도 4층 보석(步石)을 설치하고 그 남쪽 11보의 거리에 낮은 담을 쌓고 전문(箭門)을 내었다. 용연(龍淵)은 북성 밖에 있는데, 모양이 반달 처럼 생겼다. 둘레가 210보, 깊이 6척이고, 가운 데에 작은 섬이 있다.
못위 성모퉁이에 방화수류정이 있고, 정자 아래에 있는 바위는 옛날부터 용머리라 하여 낚시터로 삼을 만하다. 못의 서쪽에 석각 이두(石刻頭)를 설치하였는데, 물이 많이 차면 이 이두로 물을 화홍문 밖으로 뿜어 내게 되어 있다.
 

 

 ▲ 동북각루 ⓒ 2007 한국의산천

 

  ▲ 동북각루 ⓒ 2007 한국의산천

 

 ▲ 동북각루에서 바라 본 각건대(동북포루)ⓒ 2007 한국의산천

 

  ▲ 동북각루에서 바라 본 각건대(동북포루)ⓒ 2007 한국의산천

 

 ▲ 화홍문(클릭하시면 파노라마로 확대됩니다) ⓒ 2007 한국의산천

 

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광교(光敎) 언덕을 대천(大川)이 가로로 자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그 동서로 3간은 아래 너비가 8척 높이가 7척 8촌, 가운데 한 칸은 너비가 9척, 높이가 8척 3촌이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홍예가 서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잠자리 무사를 붙였다. 중앙에는 장군형 무사를 덧붙였다. 거기에 다리 놓을 돌을 깔고 다리 위 바깥 쪽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설치하였다. 

 

아래의 전석에서부터 다리 밑까지 높이는 8척 7촌, 다리의 두께는 1척 9촌이다. 장대는 높이 1척이고 다리는 너비가 31척 길이 95척이다. 장대 위에는 누조(漏槽)(각각 너비 1척 깊이 5촌) 7개를 설치하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첩을 설치했으며, 타구는 설치하지 않았다. 높이는 5척 4촌 두께는 4척 8촌이고, 아래에는 방안 대포 구멍(사방 각 1척)을 뚫었다. 위에는 소포 구멍 14개(사방 각 7촌)를 뚫었다. 안쪽은 장대만을 두고 누혈(漏穴) 6개를 뚫었다. 
  

동서 양끝에는 8면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를 새겼다. 서쪽 기둥의 북쪽과 동쪽 기둥의 동쪽에는 짧은 담을 쌓고 전판문(箭板門)을 설치하여 동쪽 성의 길과 통하게 하였다. 다리 위 북쪽 편에 누각 6간을 지었는데, 동서로 가로 너비가 3간이고 남북으로 세로 길이가 2간이다. 모두 널빤지를 깔았는데 첩의 위로 높이 솟아나오게 하여 사면에 분합을 달고 동서남 삼면에는 연잎을 새긴 난간을 붙였다. 난간 아래에는 벽돌을 둘러서 담장을 만들고 남쪽 한 가운데 1간을 비워서 들고 나는데 편하게 하였다.

방사(放射)하는 제도는 포루와 같다. 다리 위에서 널판지 깐 데까지 높이가 6척 2촌이다. 북쪽 분합 밖으로 물려깐 널위에는 전붕(戰棚)을 설치하였고 판문 아래에는 벽돌로 된 첩과 이어지게 하였는데, 바깥 쪽에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총안(箭銃眼)을 뚫었다. 단확은 녹색을 바탕으로 하고 진채(眞彩)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다. 누 남쪽 다리 위의 길은 너비가 5척이고 다리 아래 7개의 홍예에는 각각 쇠로 만든 전문(箭門)을 설치하였다. 줄로 양선(兩扇)을 걸어 당겨서 교면(橋面)의 석안(石眼)까지 꿰뚫고 지나가게 하였으며, 거기에다 고리를 설치하고 자물쇠를 달았다.

문 안의 양쪽 석축은 각각 길이가 6보 높이가 4척 5촌이고, 문 밖의 석축은 각각 길이가 5보 높이가 5척 5촌인데, 위로 성의 몸체와 이어져서 전체 높이는 16척이다. 이것이 실지로 내의 동쪽과 내의 서쪽이 서로 마주 서서 휘어 꺽여 원성(元城)이 되었다.
두 끄트머리는 전붕과는 좌우로 각각 29척이 떨어져 있는데, 여기에 또 좌우의 벽돌로 된 첩 위에 타구가 셋인 여장을 설치하여 담과 이어지게 하였다. 높이는 각각 4척 4촌이고 두께는 2척 2촌이다.
 

 

 ▲ 화홍문 옆에 서있는 해태(?) ⓒ 2007 한국의산천

 ▲ 동북각루 ⓒ 2007 한국의산천

 

 ▲ 화성 순환 열차 ⓒ 2007 한국의산천

 

 ▲ 동북각루 ⓒ 2007 한국의산천

 

▲ 용연과 동북각루 ⓒ 2007 한국의산천 

정자와 버드나무 사이에 보름달이 수면위에 비추어지는 아름다운 정취를 "용지대월"이라하여  수원팔경의 하나로 꼽는다. 

 

 

▲ 점심을 걸렀기에 성앞의 슈퍼에서 우유 500mm와 땅콩샌드 빵을 사서 먹으며 무사귀환했습니다. ⓒ 2007 한국의산천

저희 4형제가 아주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퇴근 하실때에는 '크라운산도'와 하얀 크림이 가득 들어있는 동그란 '크림빵'을 자주 사오셨습니다.그래서 그런지 저도 지금 어른이 되어 ...퇴근 할때는 가끔 소주한병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자주 사가지고 들어가는 편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제 머리가 허옇게 되는 지금에야 느끼니 무슨 효도를 했겠습니까 ㅠㅠ  

 

화성의 야경 [ 촬영 2005.11.27. 일요일] [ 한국의산천]  

 

 ▲ 용연과 동북각루 ⓒ 2007 한국의산천

정자와 버드나무 사이에 보름달이 수면위에 비추어지는 아름다운 정취를 "용지대월"이라하여  수원팔경의 하나로 꼽는다. (조리개 2.8에 노출 2초. 대낮처럼 환하게 나왔습니다.) 

 

 ⓒ 2007 한국의산천

 ⓒ 2007 한국의산천

 

성의 야경 더보기 http://blog.daum.net/koreasan/5265335  

 

수원팔경
화산두견: 화산의 두견새 울음소리
소나무 꽃가루가 날리는 3월이 오면 진달래꽃이 화산(현 수원)을을 온통 물들이고 두견새가 화산을 날며 울어댄다. 화산에는 사도세자가 잠들고 그 아들이신 정조대왕 또한 유언에 따라 옆에 묻히셨으니 저승에 가서도 효성을 비치려는 뜻

화홍관창: 화홍문의 비단결 폭포수
화홍문 깊은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수원천 맑은 물은 화홍문 일곱개 수문의 폭포수가 되어 무지개 빛으로 부서져 내린다. 또한 수원천의 물줄기는 천변의 수양버들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서호낙조: 서호 노을에 드리운 산그림자
노송가지가 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경관을 따라가면 높이 2장이나 되는 폭로로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그 위에는 아담한 황이정이 있다.

광교적설:광교산에 눈쌓인 모습 
한 겨울의 백설도 장관이거니와 시루봉에 새봄이 찾아올 무렵의 춘설은 또한 비경이다.

남경장루: 긴 제방에 늘어선 버드나무
남경은 화홍문에서 화홍산앞까지 이르는 수원천의 긴제방이며 그 둑 양면에 늘어서 있는 수양버들을 일러 장류라고도 한다.

팔달정람: 안개에 감싸여 신비로운 팔달산
팔달산에 안개가 피어 오르는 정경과 팔달산 송림사이로 맑게 보이는 하늘, 산정상을 묽게 물들이는 저녁노을 또한 가경이어서 '팔달모운'이라고도 한다.

용지대월: 용지에서 월출을 기다리는 경치
용지는 방화수류정 아래 연못을 말하며 방화수류정의 그림자가 수면에 더오르면 무아경을 이루게 하는데, 수원천의 물이 용지를 거쳐 용머리를 본따서 만든 돌구멍으로 흘러 보냈기 때문에 일명 용지문이라고도 한다.

북지상면: 북쪽 연못의 흰색 붉은색 연꽃
지금의 일왕저수지인 북지의 본 이름은 연석거 또는 고구정으로서 흰색, 붉은색의 연꽃이 수면에 가득하였다. 연못이 만발하였을때 찬란한 광경을 영화정 정자에서 바라보면 저절로 취할 정도여다 한다.(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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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0.19 19:03

    첫댓글 화성의 야경이 황홀합니다 거중기란 기계로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려서 성을 쌓았던 정조 대왕, 효심으로 국론을 통일 시켜 화합을 이끌어 낸 솜씨가 대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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