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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 길이 막혔을 때
성경 제목 : 이사야 38장1절-8절
설교 자 : 박 한서 목사 <2019년 2월10일 주일오전>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세계적인 명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원래 <바이올린> 연주자였습니다.
그는 시력이 나빠서 연주 때마다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악보를 외워버렸습니다.
그 이후 이것이 습관화되어졌고
<오케스트라> 특성상 조화를 이뤄야겠기에
다른 파트 악보까지 모조리 외워버렸습니다.
한번은 연주를 막 앞두고 지휘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부득이 대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연주를 지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논 끝에 '악보를 모조리 외우고 있는 <토스카니니>에게
지휘를 맡기는 것이 좋겠다.'해서 그에게 지휘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지휘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곡울 다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모든 곡을 잘 소화하여 연주를 마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토스카니니>가 세계적인 명지휘자로
발 돋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훗날 그는
"나의 나쁜 시력이 나를 명지휘자로 만들어 주었다고."말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문을 닫으실 때에
다른 문을 열고 계십니다.
길이 막힐 때에 다른 길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그리로 초청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기독교 심리학자인 <푸랑크 미너스>는
성도들이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7가지 원칙을 소개했습니다.
1. <예수>안에서 반드시 뚫고 갈 수 있다고 믿으라.
2. 능력의 삼각형 곧 성경말씀과 기도와 교회 안에서 문제를 살펴보라.
3. 막다른 골목에서도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라.
4. 문제를 피하지 말고 직면하라
5.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6. 패배했을 때 그때를 성숙해지는 기회로 삼으라
7.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 인생과 문제를 보라.
이상 7가지 원칙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은 <이사야> 38장1절 말씀은
1절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주인공 <히스기야>가 병이 들어 죽어야 할
상황이라고 하는 데에 못내 아쉬움이 있습니다.
<유대>나라는 <다윗>과 <솔로몬> 왕국이래로
어두운 세월로 먹칠되어 왔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들은 하나같이 사악했고 백성들은 어리석었습니다.
<여로보암>과, <나답>이 그랬고 <시므리>와 <오모리>,와 <여호람>과,
<예후>가 그랬습니다.
이런 와중에 <히스기야>라는 한 선한 왕이 나타나서 조상들이 세운
우상을 파괴하고 성전을 수축하고 <하나님>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특별히 <히스기아> 왕은 <앗수르> 군대 <산헤립> 장군의
선전 포고문을 들고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더니 18만 5천명 적군을
격퇴시키고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대승하는 공적을 세웠습니다.
이제는 좀 안심하고 편안히 살 수 있으려니 생각하는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그 왕에게 갑자기 질병이 찾아왔는데
주치의도 희망이 없다고 죽음을 선고할 만큼 왕의 병세는 절망적이었습니다.
급기야 <이사야> 선지자마저 <히스기야> 왕을 찾아와서
"왕은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가정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최후 통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히스기야> 왕의 나이 39살 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시점을 두고 "그 때에"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혼란했던 나라가 평정을 되찾고 외세도 물러가고 이제는 편안히
쉴 수 있으려니 할 그 때에 죽음이 찾아 왔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신만고 끝에 태산을 넘는 순간
화려한 꽃밭이 전개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꽃밭대신 물결치는 바다가 앞을 가로막는 것,
이것이 세상사 입니다.
물결치는 바다를 건너자 옥야천리
과수원길이 열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과수원 대신 가시가 우거진 황무지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이런 것이 인생사더란 말입니다.
이런 인생의 아픔을 오늘 본문은
"그 때에" 라는 단 한마디 말로 설명합니다.
“왜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가?
아니 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 고난을 당하는가?
왜 <히스기야>처럼 선한 사람에게
이토록 안 좋은 일이 생기는가?“
이런 문제 속에 휘말린 <히스기야> 왕의 모습이
오늘 상처투성이 속에 살아가야 하는 우리 현대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구원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상처투성이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믿기 때문에 도와주었던 친구에게 배신과 기만을 당하고
빈손으로 일어서야 하는 그 울분은 어찌 보상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살아 보아야지 결심한 바로 그 다음날
곧 바로 실패했을 때에 그 좌절감을
어찌 고침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인생의 살벌한 경쟁대열에서 낙오자가 되어
지금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내가 밀리고 있다고 느껴질 때
겪어야 하는 수치감과 패배감은 또 어떻게 치유될 수 있겠습니까?
이번만 성공하면 주님 앞에
충성하고 살아야지 하고 바르게 살아보려고 했는데
갈 길이 그만 곽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에 당혹감은 어찌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한 결 같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고
한 가지 길이 열려지면 또 다른 길이 막힐 때가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헤롤드 쿠시너>(H.S. Kushner)목사님이
"왜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헤롤드 쿠시너> 목사님은
천성적으로 착한 사람이었고 큰 교회의 훌륭한
목사로서 모든 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기쁘고 보람된 나날을 보내는 데 3개월 된 어린 아들이
중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되어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조로증>"이란 것이었습니다.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이 아이가
벌써 늙어가기 시작하는 것 이었습니다..
10살이 되기 전에 팔순노인처럼 늙어버리기 때문에
그 아들은 그 이상 이 세상을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살아야 되는 어버이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
나는 바르게 살아보려고 노력했는데,
나는 착하고 선하게 살려고 했는데,
믿음으로 살려고 그렇게 노력하는 나인데 이런 고난이
왜 찾아오는가? 나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이 고통을 왜 내가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Why me? 이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오랜 시간을 씨름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다음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① 인생의 모든 고난은 나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니다
② 이 땅에 우연한 일은 없다.
나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는 용납이 안 되지만 나는 이해가
안 되지만 여기에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다.
③ <하나님>은 슬픔과 기쁨을 병행해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
④ <하나님>은 땅의 문을 닫으실 때에 하늘 문을 여신다.
길을 막으신 <하나님>은 틀림없이 다른 길을 주신다.
한 가지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고 우리를 초청해
주시는 분이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곤고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사람마다 형통한 삶, 기쁜 날을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소개한 어리석은 부자를 보십시오.
<누가복음>12장19절 말씀에 보면
19절 "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사람이 형통하기만 하면
나나 너나 할 것 없이 다 그렇게 됩니다.
큰소리치고 자만하는 버릇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 버릇이 생기면 인간은 결국 육신만 생각하는
짐승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것은 불행이고
신앙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불행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녀들이
이런 불행을 당하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곤고한 날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일과 나쁜 것을 함께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놀라운 조화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 아름다운 인격을 얻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전에 나와서 말씀을 들을 때면 '저건 내게 하시는 말씀이야.'
<하나님> 말씀, 그 복된 말씀을 가슴속에 움켜쥐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누구나 문제는 있게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푸는 유형을 보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긁어 부스럼 형이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더 문제를
키우는 사람, 더 문제를 흩으러버리는 사람 말입니다.
둘째, 절망 형이 있습니다.
속으로 고민하고 절망합니다. 자기 자신을 학대합니다.
이웃을 향하여 불평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합니다.
셋째, 백치 형이 있습니다.
문제가 있으나 없으나 밥 잘 먹고 잠을 잘 자고
아무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 미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넷째, 문제가 있을 때마다 아주 쉽게
문제를 푸는 지혜 형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어느 날 군사들의 막사를 방문했습니다.
군사들이 노끈을 요상하게 묶어놓고 노끈 풀기 내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힘센 자도 풀지 못했습니다. 꾀 많은 병사도 노끈을 풀지 못했습니다.
대왕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부관 내 칼을 가져오너라." 시퍼런 칼을 높이 치켜들더니
노끈을 싹뚝싹뚝 잘라 버리고는 "나는 문제를 이렇게 푼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사실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력이 없는 것이 문제더란 말입니다.
물이 깊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수영을 할 수 없음이 문제입니다
길이 막히면 그 막힌 길 때문에 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넓은 길을 찾아 발견하고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햇빛이지만
진흙은 딱딱하게 굳어지는데 <쵸콜렛>은 녹아버립니다.
똑같은 햇빛을 받고도 살아있는 나무는 더욱 싱싱하게 자라가고
죽은 나무는 바싹 말라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 모두에게
문제를 푸는 언약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인생의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지혜와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죤 번연>의 "<천로역정>"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크리스챤>"이란 사람이 "<소망>"이라는
친구와 함께 천성을 향하여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이 너무 힘들고 고달프기만 합니다.
마침 널찍한 샛길을 만나게 됩니다. '이리가면 되겠구나.'
그곳으로 가는데 점점 길이 좁아들더니
무서운 골짜기로 빠져들고 맙니다.
골짜기에 다다르자마자 무서운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홍수를 만난 것입니다.
사면초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날은 어둑어둑 저물어 가고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웅크리고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피곤을 이기지 못해
자신도 모르게 잠에 골아 떨어지고. 맙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무서운 거인이
<크리스챤>과 <소망>이 옆에 서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절망>"이라고 하는 무서운 거인이었습니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 영토로 무단 침입한 녀석들이야.
오늘 내가 너희들을 가둘 수밖에 없다." 지하 감옥에 쳐 넣고는
일주일 동안을 무섭게 매질을 하여 그 <크리스챤>과 <소망>은
초주검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절망>은 독약을 내밀며
"두 사람이 마시고 죽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버텨냈습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뒷마당에 끌어내서 찢어 죽이겠다."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그 말을 듣고 <크리스챤>과 <소망>은
이 밤이 그들의 마지막 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에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벽녘에 <크리스챤>이 무릎을 치고 소리를 지릅니다.
"지금쯤 자유로이 걸어 다닐 수 도 있었을 내가
이런 악취가 풍기는 지하실에 갇혀 있다니 이게 무슨 꼴인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이 성안에 있는 자물쇠는 어느 것이나 열 수 있다는
보장을 받은 언약의 열쇠가 내 품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내가 아파서, 고난이 너무 낙심시켜서 언약의 열쇠를 망각하고 살았구나."
외치면서 <크리스챤>은 급히 <소망>이를 깨웁니다.
그리고 자기의 품속을 더듬어 언약의 열쇠를 끄집어냅니다.
이 열쇠로 감옥 문 자물쇠통에 넣어 돌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슬그머니 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곳을 빠져나간 그들은 대문도 쉽게 열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날이 새기 전에 <크리스챤>과 <소망>이는
절망의 성으로부터 도망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약의 열쇠! God is the Key!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Bible is the Key!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언약의 열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 이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을 때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난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믿음을 얻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새 힘을 얻습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놀라운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에 '저 말씀은 내게 주시는 말씀이야.
저 말씀으로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어. "아멘"하고
받아들일 때에 그 언약의 키 그 말씀이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재미있는 분이 천국에 들어가는 자물통을 여는 번호가 있는데
66에 3927이라고 했습니다. 신구약 66권. 구약 39권 신약 27권.
3×9= 27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에 부딪혔을 때 <히스기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단순히 아픔만 보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나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나기가 쏟아지면 처마 밑으로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곤고한 날 기도의 그늘에 피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기도는 곤고한 날 우리가 잃어버리기 쉬운 것들을 지켜줍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도가 없는 형통보다는 차라리 기도하는 곤고함이
우리를 더 유익된 길로 인도해 주다는 사실을 기억 하십시요
여기 <히스기야>를 보십시요.
첫째, <히스기야>는 낯을 성전을 향한 벽으로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성전으로 달려가 울부짖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병이 악화되어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의 중심은 성전입니다.
팽이를 돌리다 보면 중심이 흔들리는 팽이는 오래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 인생이 흔들렸는가? 믿음의 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왜 그토록 인생이 불만스러웠는가?
내 생애 축인 <예수>가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니었는가?
말씀의 축을 잃어버려서 성전의 축을 잃어버려서
우리는 때로 비틀거리고 흔들거리는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능력의 삼각형이란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교회 중심, 말씀 중심, <예수> 중심의 사람은
비바람에 흔들리는 법이 없습니다.
벽은 문이 없습니다.
벽은 밖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곳입니다.
그래서 벽은 절망과 좌절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내겐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내게는 전혀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절망 앞에 섰을 때,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을 때, 모든 문이 닫혀있을 때
<히스기야>는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알고 보니 길이 막히는 이유는
<하나님>을 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땅의 문이 닫혀졌을 때에 하늘 문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앞도 막혀있고 뒤도 막혀있고 좌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땅으로 꺼질 수도 없어도 하늘을 향한 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내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가 가는 곳곳마다 내 앞에 느려져 있는가?
슬픔이 있고 문제가 있고 언제나 벽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가?
우리가 태양을 등지고 살아가면 언제나 그림자가 내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서 태양을 바라보는 순간 그림자는 순식간에
내 등 뒤로 물러가게 되는 것이다.
내 인생 앞에 그림자가 늘어져 있으면
의의 태양이신 주님을 바라보시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시라.
전능한 <하나님>을 바라보시라. 인생의 푯대를 바라보시라.
여러분의 어두운 그림자는 뒤로 물러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히스기야>는 심히 통곡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히스기야>의 눈물은 그 영혼에 쌓였던
오물을 씻어내어 그 영혼을 순수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더운 공기가 빠질 때에 찬 공기가 들어와 그 자리를
채워주듯이 그 눈물은 세상의 욕심을 비우고 주님으로 채워주었습니다.
잘 못 살아온 인생을 눈물로 쏟아놓을 때
인생의 상담자 되시는 우리 주님의 지혜로 채워주시고
세상만 사랑하던 죄 된 생활을 눈물로 쏟아 놓을 때
삶의 궤도를 수정할 수 있는 Quality Life 를 향한 결단으로
내 속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눈물이 그랬고 <에스라>의 눈물이 그랬고
<예레미야>의 눈물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스펄젼>은
성도의 눈물은 천국 가는 고속도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성도의 눈물은 막힌 길을 뚫는 폭탄과도 같은 것입니다.
셋째, <히스기야>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놓고 기도했습니다.
마음을 쪼개 놓고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내가 얼마나 주님 앞에 충성을 다했는지,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내 허물과 부족함이 무엇인지
샅샅이 낱낱이 주님 앞에 고백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감출 수가 없습니다.
덮을 수가 없습니다. 숨길 수가 없습니다.
나의 가장 작은 충성마저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모하는지 은혜를 그리워하는지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신실한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고 기도할 때에 문제가 녹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곤충들 가운데 보호색을 가진 것들이 있습니다.
나무의 색깔 따라 옷을 갈아입고 계절 따라 색을 바꾸어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벌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게 1년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눈이오나 비가 오나 더울 때나 추울 때나
당당하게 자기 색을 가지고 있는 <거북이>, <학>, <두루미>,
<사자> 등은 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오래 오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나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아니 인생이 순탄하게 잘 풀려나갈 때나 역경의 가시밭길을 걸어갈 때나
얄팍한 보호색을 걸치고 다니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오직 한 가지 색깔
우리 <행복한 교인>의 한 가지 색깔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신뢰하고 살아간다." 고 믿는가?
이 신앙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히스기야>의 기도의 자세였고 인생관이었습니다.
이런 삶의 자세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눈물의 기도를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보십시요.
오늘 본문 <이사야> 38장5절-6절 말씀에
5절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15년을 더하고
6절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성을 보호하리라."
우리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태양을 멈추게 하신 분이십니다.
말하자면 이 지구의 자전을 멈추게 하신 분이십니다.
이 분이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해 그림자를
10도나 뒤로 돌리셨습니다.
길이 무엇입니까?
주님 자신이 해결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불가능은 가능해 집니다.
고난도 변해 기쁨이 됩니다. 죽음도 부활로 바꾸어집니다.
우리 인생들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고 달려만 갔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은 그 결과를 축복의
기회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내가 곧 길이니라.
이 길은 절대로 막히는 길이 없습니다.
<히스기야>의 병이 낫고 생명이 연장되었을 때에
<이사야> 38장17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그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17절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울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20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 하리이다..
19세기 <러시아> 최고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28살에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영하 50도의 추운 날씨에 사형장으로 끌려갑니다.
이 땅에서 숨을 붙이고 살수 잇는 날이 5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5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처음 2분 동안에 나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찾아온 친구 친지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나누리라.
그리고 2분 동안에 살아왔던 지난세월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를 하리라. 마지막 1분 동안은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던 이 땅의 아름다움을 둘러보고
그 다음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 앞에 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2분 동안
친지 친구들을 향하여 따뜻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지나온 생애를 돌이켜 보는데
갑자기 마음속에 무서운 공포가 엄습해 옵니다.
“내게 한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렇게 후회스럽게 살지는 않을 것을.
인생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음을
내가 왜 모르고 살았더란 말인가?
한번 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번 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서운 공포와 함께 절박함과
간절함이 더 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때 밖이 왁자지껄 시끄러워졌습니다.
한 병사가 흰 손수건을 흔들며 요란하게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제의 특사 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연장된 시간 남은 생애 동안
자기의 피를 찍어서 하고 싶은 얘기,
사람의 생명에 대한 간절한 절규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 수 없는 한번 뿐인 인생의
간절함을 글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죄와 벌」「까라마 조프의 형제들」등
불우의 명작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히스기야> 뿐만 아니라
여러분! 우리 모두도 <하나님>께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셔서 지금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저도 여러분도 언젠가는 죽어야할 존재들입니다.
다만 그 시간이 연장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시간이란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전세 기한일 뿐입니다.
재산도, 자녀도, 직장도, 사업도 내 것이 아니요.
남편도 아내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일 뿐입니다.
주인의 심판에 따라 언젠가는 막이 내려질 것입니다.
언젠가는 내 놓아야 할 날이 있고 끝이 있고 움켜쥐었던
손을 힘없이 펼쳐놓게 될 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 밤이라도 <하나님>이 오라 하시는데
못가겠다 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욥>처럼 고백합니다.
<욥기서>1장21절 말씀에 보면
21절 "주신 이도 <여호와>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 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연장된 시간! 막혔던 길이 열려진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려고 하시는지요?
참으로 소중한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답이 있고 길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에 길이 열려졌을 때 어떻게 살겠느냐는 말입니다.
이제 내 인생이 한 패배자의 상처뿐인 경기로 끝날 뻔했는데
한 전능자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연장된 시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연장된 시간 어떻게 치룰 것인가요?
덤으로 얻은 내 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살 것인가요?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내 남은 생애에 뚜렷하고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그를 일컬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 주의 제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막혔던 길이 열려지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절망의 자리에 있을 때에 여러분의 손을 붙잡아주시는
따뜻한 손길을 체험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제 그분의 손을 붙들고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겠습니까?
막다른 곳에 부딪혔을 때에, 절망의 벽이 여러분의 앞길을
가로막았을 때에 시원하게 길을 열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 길을 어떤 자세로 살아가겠습니까?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거운 인생의 짐에 눌려 죽지 못해 살았을 때
주님께서 그 문제를 대신 맡아주셔서
새로운 은혜로 사는 것 같은 인생을 살아가시는 분이 계십니까?
인생의 종착점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고 신음하고 있을 때
한번 뿐인 이 인생 내 영혼의 참된 가치를 알고
살아가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
주께서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
지금 길이 막혔습니끼?
길이 막혔을 때 낙심하지 말고
나의 등 뒤에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그분의 손을 붙들기를 바랍니다.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밀어 주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 걸어 가시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새 힘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길이 막혔을 때, 그 때는 기도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교회로 돌아올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올 때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직접 개입해주실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붙잡히시는
<행복한 교회>의 식구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