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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글 스크랩 요나이야기 네번째(요나서 3장) 니느웨가 구원받았습니다.
우슬초 추천 0 조회 132 12.07.02 21: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니느웨가 구원받았습니다

요나서 3장 1~10절


전체 요나의 주제를 다 설교하고 나서 다시 각 장을 설교하다보니 매 장을 준비할 때마다 우려되는 것이 하나있었습니다. 이미 다 언급했는데 뭐 특별한 것이 있을까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을 읽고 깊이 들여다 볼 때마다 이전에 가볍게 지나갔던 부분들이 다시 크게 다가오며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오늘 3장도 그렇습니다. 이미 전체 줄거리 가운데 3장의 내용은 다 전모가 드러난 상황입니다. 요나가 물고기의 배속에서 살아나와 니느웨로 가서 심판을 선언하니까 그 성읍 백성들이 다 회개했더라하는 이야기가 그 줄거리입니다. 더욱이 요나가 삼일길의 니느웨 성읍을 겨우 하루만 불성실하게 다녔다는 것도 이미 다룬바 있습니다. 

그런 본문 속에서 우리는 오늘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다시 얻은 기회

1절을 같이 한번 보지요.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여러 번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의 이 두 번째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2절에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를 수행하지 못했는데, 아니 안했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똑같은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3장 2절은 1장 2절과 그대로 평행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 2절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신지라” 

3장 2절 “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로서는 다시 받은 기회입니다. 죽음의 고통을 통해서 살아난 자가 받은 귀한 사명입니다. 그 내용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그에게 주어졌던 그것을 다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같은 명령을 또 주셨을까요? 그리고 왜 꼭 심판의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려고 하실까요?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그들에게 전하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실마리는 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절 전반부에 보면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며 성경을 다시 차분히 읽는데 바로 이 단어가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저의 가슴이 마구 뛰었습니다.

요나서에서 니느웨를 언급할 때마다 “큰 성읍 니느웨”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대의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 강대국이었지요. 그만큼 양적으로 큰 나라이긴 하지요. 힘으로도 강한 나라 그래서 큰 나라라고 볼 수 있지요. 3절에서 ‘니느웨는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고 기록한 부분에서는 그런 외적인 규모를 언급하는 듯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의 크고 작음은 전혀 관심 밖의 일입니다. 높은 곳에서 보면 오십보 백보이지요. 사람의 능력도 사람의 재력도 사람의 외모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100미터 미인 아시지요? 아무리 이뻐봐야 100미터 밖에서는 그게 그거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관심하는 부분은 무엇입니끼? 우리의 영적 가치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악한 자들은 무가치한 존재들이지만 하나님께는 똑같이 가치를 지닌 자들임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니느웨를 수도로 하는 앗수르인들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입니다. 그들도 국력이 쇠퇴해 가는 처지라 곧 바벨론에게 멸망하기는 했지만 북이스라엘에겐 철천지 원수의 나라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성정이 매우 악독하고 잔학했다고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신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사람의 눈에 보기엔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자들입니다.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큰 성읍이라고 보셨습니다. 무가치한 존재들이 아니라 가치있는 존재들입니다. 세상에서 힘이 있어서 큰 성읍이 아니라 그대로 두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그들이지만, 오히려 그러기에 하나님의 눈엔 크게 들어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니느웨를 사랑하신 이유는?

그러면 니느웨를 사랑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을 그렇게 크게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냥입니다! 그냥 사랑하셨습니다. 왜 너무 허무한 답입니까? 다만 그들도 하나님인 창조한 당신의 자녀들이라고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사랑하십니까? 그냥입니다.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가 아니라 존재로서 사랑하시는 것뿐입니다. 사람이 보기엔 작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다 큰 성읍입니다. 안타까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8~41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그 표적은 마12:40절의 표현처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냈던 것처럼, 예수님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는 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의 예표로 그렇게 생각해왔지요. 하지만 우리가 그 본문에서 간과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다음절에 심판날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자들입니다. 

즉 예수님의 표적은 단지 사흘 동안 땅속에 머물렀다 일어난 사건 하나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계획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기적 같은 일로서 감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니느웨 같은 이들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는 그 길로서의 부활 사건이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발표되었다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 받았다는 것이 기적같은 일이요, 또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보여주시고자 하는 표적-싸인이라는 것입니다. 

니느웨 같은 자들에 대한 구원은 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요나 이야기 전체가 보여주는 통전적인 그림이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즉 그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큰 성읍이었다는 것입니다. 멸망시키기엔 너무나 마음 아픈 당신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나서를 통해 보여주는 역사적 유비이며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요나는 다양한 각도에서 우리의 마음을 반영해 줍니다. 요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를 보여주며 또한 니느웨를 통해 우리를 향한 구원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개촉구인가? 심판의 선언인가?

다시 요나가 받았던 메시지를 살펴봅니다. 2절의 내가 네게 명한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1:2절에서 보았지요.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들을 쳐서 외치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의 죄를 명확하게 지적하여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왜 처벌받는지 죄목을 말해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회개의 촉구는 없습니다. 요나가 후에 선포하고 다닌 것도 40일이 지나면 멸망할 것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럼에도 왜 요나는 가기를 꺼려했습니까? 그 메시지를 전하는 데 왜 이리 소극적입니까?

단 한가지 이유이지요. 그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볼 기회조차 주기 싫다는 것이지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그것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망과 미움은 받은 배신감과 서운함 등의 감정입니다. 사랑의 진정한 반대는 무관심입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죄를 짓든지 말든지 나는 거기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그래도 싸울 때가 소망이 있습니다. 싸움도 없고 사랑도 없으면 그야말로 무덤일 뿐입니다. 거기엔 소망이 없습니다. 

바로 요나의 심정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잘못을 깨닫게 할 만한 힌트조차 주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부추겨서 아무 말이라도 하라고 등 떠밀어 보내신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밀려서 니느웨에게 소망이 되거나 기대를 할 만한 것을 일체 언급하지 않고 나뿐 것만 억지로 꺼내놓았는데 그들에게 일어난 결과는 어떻습니까? 니느웨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회개의 돌풍이 불었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니느웨가 용서 받은 이유?

그러면 니느웨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셔도 그냥 구원하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니느웨가 무너짐을 면할 수 있었던 것도 어떤 이유일까요? 5절부터 9절까지의 내용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회개가 하나님의 돌이키심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먼저 다신 사회에서 살고 있던 백성들이 요나의 소식을 접해듣고는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베옷을 입습니다. 이것은 회개를 드러내는 당시의 강력한 표현이었습니다. 그 소문이 왕에게 전해지자 왕까지도 자신의 화려한 조복을 벗고 베옷으로 갈아입고 재에 앉아 회개를 합니다. 나아가 조서를 내려 전 국민이 아니 짐승까지도 금식하며 회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혹시(!)라도 구원을 받을까하여 이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9절). 아직 이렇게 하면 구원해 줄 것이라는 메시지를 들은 바도 없습니다. 요나가 그렇게 외치지를 않았으니까요. 단지 망할 것이라고만 전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그것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혹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실까 기대하며 이런 회개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보장된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는 이런 온전한 회개가 먼저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개는 구원을 위한 딜이 아닙니다. 거두절미하고 그냥 인정하고 무릎꿇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용서해준 다고 약속하면 내가 회개할께요.’ 이런 조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떠나는 것이 회개다!

나아가 그들의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0절에 보면 그들이 행한 것 곧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입술로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것은 자기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한 돌이키는 행동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마음과 중심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입술의 고백만으로도 구원받는 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입술로 고백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심중에 있는 그것을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롬 10: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입술의 고백의 출발점은 마음속에 있습니다. 내면의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사랑하심을 믿으며, 그것을 입술로 시인함으로써 외적으로 선포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다는 것은 단지 혀의 밀이 아니라 마음 속의 것을 드러내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그런 돌이킴을 하나님 앞에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돌이킴을 보시고 당시의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냥 사랑하시고 또한 돌이켜 회개하면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3장은 구원론이었다.

요나서 3장을 강해하면서 느낀 것은 3장은 구원론에 관한 기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조건없이 그냥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온전한 뉘우침을 통해 삶을 돌이키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며 그런 회개를 하나님 앞에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시킬 계획을 취소하시고 마음을 돌이켜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이 요나서 3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왜요? 그냥이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용서합니다. 어떻게요? 삶을 돌이켜 회개하면 말이지요.

오늘도 우리는 그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리고 그 품 안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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