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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성을 극복하려는 그리스도인들
기독교 신앙은 배타적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 평가를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과제’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이 비로소 진실되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과제로 여기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신앙이라는 평가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왜 배타적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일까? 하나님은 사랑하시며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으시고 공평하게 햇빛과 비를 내려 주신다. 예수님은 사랑의 팔을 넓게 펼치시고 죄인을 용납하시며 찾아오신다. 가장 포용적이며 따뜻할 것 같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이 가장 배타적인 특징을 띤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오해한 결과일 것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오해하여 기독교 신앙이 지닌 고유의 보편성과 관용을 상실하는 까닭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이해는 신자의 선입견과 기본지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에 오해하였다’(마 12:29, 막 12:24)고 평가하셨다. 빌립 집사가 만나서 복음을 전해준 이디오피아의 재무장관도 성경을 읽는 열심은 있었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능력은 부족했다(행 8:31).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우리가 아직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부분적으로 알고 있다’(고전 13:9)고 말했다. 신앙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도자(truth seeker)다. 즉, 진리를 배우고 알아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신앙인이 배우려는 마음을 저버리고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양 생각할 때 그는 이미 그릇된 길로 접어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말은 신앙인이 자신이 배운 것을 전부 의심하고 부정하여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고 여기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agnostic)’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신앙인은 배우고 굳게 믿는 바 진리를 지켜야 한다(딤후 3:14).
그러면 기독교인이 스스로 배타적인 생각을 하고 그런 태도를 취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 가장 첫번째 이유는 구원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즉, 구원론이 기독교인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구원이 무엇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받는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원을 정의할 때 죄와 사망, 지옥과 천국으로 설명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사망에서 벗어나 지옥을 면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 뿐이다. 다른 이름(행 4:12)이나 다른 길(요 14:6)은 없다. 그리고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선물이다(엡 2:8). 그리고 구원의 완성은 죽어서 들어가는 천당이다.
그런데 구원을 정의할 때, 창조의 목적과 대리인(청지기)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돌보고 생명으로 충만하게 가꾸는 성실한 농부에 비유될 수 있다. 이때 구원은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그 은혜의 보좌 앞에 서서 예배하는 왕 같은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은 주님이 이 세상을 새롭게 재창조하실 때 그 세상에 동참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하는 구원이 이 세상으로부터(from this world) 건짐을 받는 것이라면 뒤에서 말하는 구원은 이 세상을 위하여(for this world) 부름 받는 것이다. 전자의 구원관에 의하면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머물다 갈 여관과 같은 곳이며 진짜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다. 그러나 후자의 구원관에 의하면 여기 이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세상이며, 마침내 새롭게 되고 회복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다. 전자의 구원을 믿으면 이 세상에는 구원을 받을 사람과 멸망받을 사람으로 나뉘어지지만, 후자의 구원을 믿으면 이 세상은 먼저 부름 받아 제사장적 소임을 받은 사람들과 그들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될 사람들로 나뉜다.
신약학자요 성공회 사제인 톰 라이트(Tom Wright)는 ‘혁명이 시작된 날’(The Day the Revolution Began, 2016)이라는 책에서 십자가가 왜 승리인지를 설명하고자 했다. 또한 그는 십자가를 통한 대속교리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제시했다. 특히 그는 로마서와 복음서를 강해하면서 대속교리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그가 특히 우려하는 대목은, 하나님에 대하여 신자들이 생각할 때, 한편으로는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이런 형벌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체벌하는 부모와 같은 분이라고 여길 수 있다는 점이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구약의 제사는 이교도의 제사와 다르다. 이교도의 제사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위해 무고한 피를 흘릴 제물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제물을 제단에서 죽여 심장을 꺼내거나 목을 베거나 하여 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반면에, 구약의 제사는 제물을 제단 밖에서 미리 잡아 그 피를 가져와서 제단을 깨끗하게 한다. 그것은 백성의 죄로 인하여 더러워진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없으므로 제사를 통해 그 백성과 화목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도 이런 의미에서 그 백성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제사라고 할 수 있다. 제사를 통해서 깨끗하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서 교제할 수 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설명하는 칭의(justification)도 사실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의 은혜의 보좌 앞에 제사장으로 설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1~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설 수 있게 한다. 그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과 같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8:1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이 에덴동산으로 아담과 하와를 들이신 이유이기도 하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창 2:15).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관리하고 다스려 충만하게 하는 특권과 임무를 받았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피조세계를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 특권과 임무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때 스스로 어둡게 되며 어리석게 되어 죄에 빠지고 만다(롬 1:18~32).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죄는 과녁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며, 그 때의 과녁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임무를 말한다. 그것은 예배(worship)와 돌봄(care-giving)이다. 여기서 돌봄은 피조세계를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이며 이를 달리 말하여 선교(mission)라고 할 수 있다. 죄란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그것에 마음을 빼앗길 때 나타나는 부산물이다.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성령을 좇아 순종할 때는 선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성패와 축복과 저주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의 목적은 우리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누가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누가복음 24:46~48
복음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전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본문 47절은 다른 번역본으로 보면 ‘회개와 죄 사함’(repentance and forgiveness of sins, NIV, 헬라어 원문도 명사로 되어 있음)이 전파될 것이라고 되어 있다. 회개는 우상숭배의 삶에서 돌이키는 것이며, 죄 사함은 포로생활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포로생활은 죄의 종노릇을 하는 삶을 말하며, 그렇게 된 까닭은 사람이 우상(탐심)에게 마음을 주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죄를 담당한 것이라면, 그 백성을 종살이시키던 세상 임금(또는 파라오)이 심판을 받았음을 의미하며, 이는 그 백성이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직을 회복함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듣고 새롭게 된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성도들을 칭찬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데살로니가전서 1:9
위에서 소개한 톰 라이트의 책(The Day the Revolution Began)을 읽으면서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새롭게 이해했다. 그것은 인간을 묶고 있던 죄의 권세를 끊어버리고 우리가 본래 지음 받은 그 목적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피조세계를 풍성하게 하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 동안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 대신에 허탄(虛誕, 거짓이 많아서 미덥지 않음)한 우상을 섬기고 그것에게 마음을 빼앗겨 살아왔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유를 주시려고 죄 사함을 주셨음을 깨달을 때 그들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며 그 결과로 구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구원이란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그 은총을 세상과 나누는 삶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 책에서 톰 라이트는 기독교회가 지난 2천년을 지나오면서 초대교회 신자들이 믿고 감격하며 위대한 확신 가운데 전했던 복음을 왜곡시켰다고 우려한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을 플라톤주의로 바꾸어버렸고(Platonize our eschatology), 인간론을 도덕주의로(Moralize our anthropology), 그리고 구원론을 이교주의로(Paganize our soteriology) 바꾸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491
톰 라이트는 기독교인들이 구원을 이해할 때, 죄인이 예수 믿고 회개하여 장차 천당에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우려하며 그것이야말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플라톤의 이원론에 물든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그 생각으로부터 성경해석과 그리스도인의 삶 모든 영역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그의 책,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Surprised by Hope: Rethinking Heaven, the Resurrection, and the Mission of the Church, 2008)를 읽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놀라는 이유가 그 책에서 바로 이런 생각을 만나기 때문이다.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도 오래 전부터 기독교의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하여 고민해 왔다. 나는 2016년 7월에 그레그 알브레히트(Greg Albrecht)의 글,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켰는가?’를 번역했다. 그 글에서 그레그는 십자가와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은혜의 복음으로 풀어보려고 노력했다. 그의 글은 아래에서 읽을 수 있다:
https://cafe.daum.net/Wellspring/UnEe/23
그레그 알브레히트는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글과 방송으로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홈페이지는 다음과 같다:
Christianity without Religion: Plain Truth Ministries
위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자료들도 있다:
은혜의 복음에 대한 짧은 글 모음:
https://www.ptm.org/resources/free-resources
추천 도서 목록(여기서 은혜의 복음 설교자들을 볼 수 있다!):
https://www.ptm.org/resources/recommended-reading
오늘의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기독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박해 가운데 있다가 300년경에 밀라노 칙령 이후 로마 주류 사회에서 공인되었을 때 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그렇게 중세 천년을 보낸 후에 1517년 독일인 사제 루터가 용감하게 일어나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어올렸을 때 교회는 새 시대를 맞이했다. 그리고 20세기 초 성령운동이 일었을 때 다시 한번 교회는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그리고 오늘 교회는 다시금 새롭게 변화된 국제정세와 선교지형의 변화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우리 앞에 있는 열린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나는 위에서 톰 라이트의 책과 그레그 알브레히트의 글을 소개했다. 이들은 지금 배타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