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2023 늦가을
세브란스 의전 설립자, 올리버 에비슨 선교사 가족 묘원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가족 묘원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가족 묘원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어니스트 베델의 묘와 훼손된 장지연의 비문
언론인협회에서 다시 세운 장지연의 묘비문과 어니스트 베델의 묘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楊花津 外國人 宣敎師 墓園
Yanghwajin Foreign Missionary Cemetery 이신웅
늦가을에 은퇴 장로님들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를 순례했다. 아침 8시 군산에서 출발, 11시 30분에 하늘주차장에 도착했다. 고 최이남 장로님 자제이시고 우리교회 학생 창립교인 최수철 선생님을 만나서 안내를 받았다. 성수대교를 지나서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갔다.
구한말 고종의 시의이자 광혜원 2대 원장이었던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였던 헤론(J.W.Heron)이 이질로 사망하자(1890) 조정에 외국인 묘지 터를 요구했다. 대원군 때 천주교도들을 절두처형 했던(1866) 양화진에 묘지 터를 허락했다. 알렌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정과 협상했다. 선교사와 가족 145분의 묘가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버려진 곳이었고 군정 때는 군정이 관리하다가 한국전쟁 때는 격전지가 되기도 했다. 그 후 한경직 목사님이 관리권을 얻었고 현재는 구역 안에 설립된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교회’가 소유권을 갖고 자원봉사자들이 안내하고 있다.
100주년기념교회 봉사관에서 영상을 보며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나와서 안내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오늘 오후 2시에 순례를 신청한 팀이 17팀이라고 한다. 각 지역에서 온 고등부 청년부 학생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20명씩 조를 만들어서 안내자가 가이드를 했다. 우리 은퇴 장로들은 마지막 기타 조에 끼어서 답사를 했다.
묘역은 잘 정리되어 있고 아름답고 고즈넉해서 산책만으로도 힐링이 될 것 같았다. 묘지 주변의 키 큰 나무들은 노랗게 잎이 물들고 낙엽은 떨어져서 묘지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묘지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서 우리는 걸었다.
더글라스 B. 에비슨(Douglas Bray Avison)의 묘역을 먼저 만났다. 그는 세브란스 의전의 소아과 교수도 하고 병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세브란스의 설립자 올리버 R.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의 아들이다. 올리버 에비슨 (어비신 魚丕信) 선교사는 제중원 제4대 원장이었고 1895년 콜레라 퇴치에 공헌했으며 고종의 시의였고 1899년 제중원에서 의학교육을 시작했다.
안식년에 미국에 가서 석유회사 중역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의 후원금으로 제중원을 남대문 밖으로 옮기고 세브란스로 개칭하여 병원을 설립했다. 세브란스 의전과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으며 ‘연세’ 통합에도 기여했다. 그들은 미개한 나라에 현대의학을 심고 발전시킨 위인들이다.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선교사의 묘역 앞에 섰다. 4대 자손을 포함하여 7분이 매장되어 있다. 검정 오석으로 만든 묘비가 화려하다. 그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항에 상륙했다. 그들의 상륙일을 우리나라 개신교의 전래일로 생각한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연세전문학교를 설립했다.
봉사자가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역을 설명했다. 아펜젤러 (Appenzeller H. Gerhard)선교사는 감리교의 선교사로 언더우드와 함께 최초의 선교사였고 배제학당을 설립했다. 이곳에 부인 아들 딸의 묘가 있고 자신의 묘는 가묘이다. 바다에서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목포에서 성경출판에 대한 회의가 있어서 배를 타고 내려가다가 서천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사고로 사망했다. 자신은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허우적거리는 두 여학생을 구하려다가 실종되고 말았다. 검정 오석비가 서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상륙하신 첫 기도” 언더우드의 기도문을 이곳에 세워놓았다.
어니스트 베델 (Ernest T. Bethell 1872-1909 裵說)의 묘 앞에 섰다. 그는 대한매일신보 발행인이었고 일제에 의해 옥고도 치렀다. 곁에 계몽 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장지연이 쓴 비문이 있고 일제가 일부 훼손한 채로 서있다. 그 곁에는 언론인협회에서 새로 세운 장지연의 ‘배설 묘비문’과 묘비가 서있다. ‘대한매일신보 사장 대영국인 배설지묘’
그 외에도 이곳에는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 (Mary F. Scranton), 감리교선교사이자 독립운동과 한글 발전에 큰 역할을 한 민족의 은인, 호머 헐버트 박사(Homer B. Hulbert), 대한제국의 애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 등 많은 분들이 이곳에서 쉬고 있다. 헐버트 박사의 비문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는 글이 있다.
간호사로 황해도 개성 여학교 교사로 봉사하다가 조선에 온지 8개월 만에 맹장염으로 25세에 사망한 루비 켄드릭 (Ruby R. Kendrick)의 묘비에는 “나에게 1000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는 글이 있다는데 묘를 찾지는 못했다. 그들은 미개하고 주권까지 뺐긴 이 나라에 와서 교육시키고 계몽시키고 질병을 퇴치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했다. 자유와 독립, 인간의 가치와 권리를 깨닫게 했다. 결국 이 나라를 되찾게 하고 세계만방에 우뚝 서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선교사들의 묘가 잘 관리되고 존경받고 있다는 사실이 감동을 주었다. 교회 앞 벤치에 앉아서 노 장로들이 최 선생님이 준비해 온 차와 다과를 나누며 우리는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202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