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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학아카데미 방산사숙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문학과 레슨
고영섭
1. 시와 트레이닝
흔히 우리는 음악과 미술 분야의 레슨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음대와 미대에 입학하기 위해 초·중·고생들은 오랫동안 비싼 비용을 들이며 레슨을 받는다. 음악과 미술 분야의 레슨은 이미 필수조건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통과의례가 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거액의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일까. 이들 분야에서 양산된 작품은 독자적 네트워크 속에서 ‘자산’ 가치를 지니며 독자적인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반면 국문과나 문창과를 지망하는 고등학생이 문학 레슨을 받는 예는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아마도 글은 혼자 써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음악과 미술 분야와 달리 문학 분야가 레슨 없이 혼자 힘으로도 좋은 작품을 생산할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할 수는 있을 것이다. 글은 누구나가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쓴다고 모두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릇 작품이란 감동과 울림이 있어야 한다. 비유와 상징, 은유와 환유, 이미지와 상상력 등의 수사학뿐만 아니라 선명한 주제와 주제를 뒷받침하는 갈등구조 그리고 관찰과 묘사 및 상상력과 진정성 등이 구슬처럼 꿰어있어야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된다. 작품으로서 갖춰야 될 요소들을 갖추기 위해서는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눈 밝은 이의 트레이닝을 받아야만 오랫동안 문인으로서 ‘생존’할 수 있다. 독자 속에서 살아있다는 것, 문학사 속에서 자리매김한다는 것은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시절 인연이 맞아야’ 한다. 시절 인연은 말 그대로 직접적 원인인 ‘인’과 간접적 원인인 ‘연’이 시절의 타이밍을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시절 인연은 눈 먼 거북이가 망망대해를 자맥질하다가 통나무 하나를 만나는 것만큼 어렵다. 뿐만 아니라 그 통나무에 뚫린 구멍으로 눈먼 거북이가 머리를 내밀고 하늘을 쳐다보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문학은 국문과와 문창과 출신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 역설적이게도 국문과와 문창과에서 문학창작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겨우 다섯 손가락에도 들지 않을 만큼 극소수이다. 문학이 만인의 것이라면 문학도는 누구나가 될 수 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해도 일정한 레슨을 받으면 문학도 이상의 문학인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문학 레슨은 어디에서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처음에는 전국 일간지나 대기업 문화센터가 그 역할을 해 왔다. 적지 않은 문학도들이 이곳의 창작 지도를 받고 문인으로 등단하였다. 하지만 이들 문화센터 과정은 한 달 또는 두어 달 이내의 속성 지도로 이루어진다. 일주일에 한 번 두어 시간을 지도하지만 수강생이 수십 명에 이르러 온전한 지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 지도 문인의 안목이 천차만별이어서 ‘맨투맨’ 혹은 ‘스파르타식’ 레슨을 기대하기 힘들다. 때문에 그동안 문학도들 사이에서는 좀 더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문학 레슨 프로그램이 요청되어 왔다. 문학아카데미(1988~ )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면서 발족한 문학종합사숙이다.
전통적으로 아카데미는 ‘학사원’(學士院) 또는 ‘한림원’(翰林院)이라고도 했다. 아카데미는 그리스 아테네의 아카데미 신원(神苑)에서 플라톤과 그의 후계자들이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동시에 고대와 중세와 신세(新世)의 3기 혹은 제4, 제5기로 나뉘어 6세기 전반까지의 플라톤 학파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학문과 예술을 진흥하기 위해 설립한 공사(公私)의 지도적 단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프랑스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구소련의 아카데미아나우크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후 대학이나 연구소를 총칭하여 아카데미라고 했다. 때문에 대학의 상아탑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카데미가 아니다. 대학에 준하면서 대학이 감당하지 못하는 역할을 재야의 아카데미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각 분야에서 많은 아카데미가 탄생한 것도 아카데미의 이러한 지향 때문이다. 문학아카데미는 이러한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자 설립한 문학단체이다.
2. 문학아카데미의 정체성
문학아카데미는 창립 이후 강좌와 출판 및 문학지 창간 등으로 확대하였다. 강좌를 기반으로 한 사숙은 처음 시(강우식, 박제천, 이탄, 김여정)와 소설(윤후명, 정찬주, 이광복, 유익서, 황충상)과 동화(정채봉) 분야로 편성되어 운영하였다. 소설, 동화 분야는 발전적으로 독립했고, 시 분야 역시 박제천 시인의 방산사숙만이 남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강태 시인이 컴퓨터도사인 방산 선생에 대해 “티끌이란, 삶을 사는 동안 우리와 마주치는 제행(諸行)의 그림자이며 그 그림자의 춤추는 모습이다”라는 부제를 단 (김강태, 「도깨비시인 박제천」, 1997) 커버스토리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오늘까지 문학아카데미가 문단의 가장 정예로운 조직으로 정비될 수 있었던 것은 방산 선생의 달인적 연금술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아카데미를 뒷받침하고 있는 한국시인작가협의회(2005년 조직)는 첫 창간 문예지였던 계간 『문학아카데미』(1995, 봄)를 발전적으로 확대 개편하여 월간 『문학과창작』(1995 12)으로 새롭게 창간하였다. 『문학과창작』은 월간으로 통권 100호를 기록한 뒤 다시 계간 『문학과창작』(2004 봄)으로 변모했다. 문학아카테미는 또한 시의 대중화를 주창하며 1988년 청파소극장에서 ‘시의 축제’를 개최하다가 그 해 12월부터는 대학로 ‘샘터 파랑새극장’을 주무대로 10여 년의 월별 축제를 펼치다가 최근에는 계절별로 주관한다. 아울러 매년 여름이면 ‘숲속의 시인학교’를 개최하여 시인들의 교류의 장을 만들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시문학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숲속의 시인상> 등 여러 상을 제정하여 문인들의 창작을 격려하고 있으며,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 루마니아어, 프랑스어 등으로 한국시를 번역하여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처럼 문학아카데미는 끊임없는 아이디어로 늘 시단의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문학아카데미의 시인들은 대체적으로 많은 동인을 조직하여 친목과 선의의 경쟁을 유지해 왔다. 문학아카데미의 시우들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는 <90년대 동인>을 필두로 <시천지> <시의 나라> <시와 함께> <시랑> 등의 동인들이 활발하게 창작 활동을 한다. 이러한 가운데 문학아카데미 출신들은 명실 공히 작품으로 주요 문예지와 일간지로 등단하여 문단을 주도해 가고 있으며 문단의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문학아카테미의 정체성은 리더들의 동지적 연대감과 방산 선생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방산의 어록
문학아카데미의 실질적인 대표인 방산 선생의 대표적인 저술은 박제천시전집 전5권으로 완간된 10여 권의 신작 시집과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강우식 공저)』 『시를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 『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한국의 명시를 찾아서』 『마음의 샘』 등이다. 모두가 문학도들이 애지중지하는 스테디셀러이다.
여기에는 지난 20여 년 동안의 문학아카데미의 노하우가 숙성 발효되어 있다. 때문에 이들 저술들은 시인 지망생들의 필독서가 되고 있다. 이 속에는 문학아카데미 리더들의 시적 감성과 시인적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지도의 지침은 이곳 출신 시인들의 수업과정에서 남긴 메모와 기억들이 두루 녹아 있다.
이것을 나는 ‘방산어록’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대강을 간추려 보면 아래와 같다.
가. 시관과 시인관
방산은 시를 지도하며 시의 공식을 강조하고 있다. 그 공식에는 시의 지형도와 테크닉이 담겨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방산의 시관과 시인관이 투영되어 있다. 그렇다면 방산의 시관과 시인관을 꿰뚫고 있는 기호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공식’과 ‘진심’일 것이다. 방산은 시에도 ‘공식’이라는 세계관이 있고, 시인에게도 ‘진심’이라는 위의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공식과 진심은 분리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인 것도 아니다. 공식은 통찰의 테크닉이고 진심은 지혜의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1) 시는 누구나 쓸 수 있다. 수학에만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에도 공식이 있다.
2) 시는 신명나게 써야 한다. 억지로 쓰지 말고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써 와라.
3) 오브제를 세밀하게 묘사하면 반은 쓴 거나 다름없다.
4) 나를 도구로 써라.
5) 진짜 같은 거짓말을 하라.
6) 교육과 경험으로 잔머리를 굴리면 시가 안 된다.
7) 관문이 절대로 중요하지 않다. 시를 쓰는 일은 마라톤이다. 등단은 통과의례일 뿐이다.
8)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이미 시인이다.
9) 목표를 높은 곳에 두고 자신을 연마하라. 장거리 선수처럼 긴 안목을 가지고 시에 전념하라.
10) 작품으로 승부를 걸어야만 하는 세계, 그것은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과제이다.
11) 당선작보다 두 배, 세 배 더 잘 쓰면 아무리 학연과 지연이 따라붙어도 좋은 시를 뽑을 수밖에 없다.
이들 어록에는 오랫동안 시를 써오면서 터득하고 갈무리한 방산의 시 철학이 담겨 있다. 방산의 어록은 수업시간에 이루어진 시인들의 임상지도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위의 ‘시관’과 ‘시인관’보다 아래의 실제적인 테크닉과 마음가짐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브제라는 대상 설정과 관념과 지식을 걷어낸 세부 묘사로 압축된다.
나. 대상 설정과 세부 묘사
방산의 시관과 시인관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대상 설정과 세부 묘사이다. 문학아카테미 출신 시인들의 특장 역시 엄밀한 오브제의 선정과 그것의 세부 묘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방산은 특히 대상 설정과 세부 묘사를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시의 승패가 바로 이 부분에서 결판나기 때문이다.
1) 오브제(objet)란 물건, 물체, 객체, 대상, 목적을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다. 인간이 자신의 사고를 전개시키기 위해 대상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2) 시인은 오브제라는 대리자를 시의 무대에 배치시킴으로써 그 대리자에게 조명과 음향을 가하고 생동하는 대사를 부여함으로써 무대예술로서의 시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시는 형식적으로 20행 내외의 짧은 분량이지만 그 영향이 오케스트라나 연극예술과 맞먹는다.
3) 자신의 특성을 빨리 찾아서 그쪽으로 뚫고 나가라.
4) 잘 되었다. 모티브가 좋다. 많이 좋아졌다.
5) 시에서 무슨 짓을 못해!
6) 긴장을 풀지 마라.
7) 관념을 걷어내야 하고 지식을 벗겨내야 한다.
8)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9) 1등이 아니면 차버리라. 2등은 백 번 해도 소용없다. 당선한 사람만이 시인이다.
10) 은유의 기법은 하나의 물줄기처럼 통일되어야만 한다.
11) 한 가지 사물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방산의 어록은 많은 문학도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말이 많고 경쟁의식이 강한 시인세계에서도 문학아카데미를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은 방산의 어록에서 보는 것처럼 촌철살인과 같은 그의 시의 안목과 지도 능력 때문이다. 문학아카데미 출신 시인들의 시에서는 이 같은 방산의 가풍이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학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고 등단한 시인 수가 200여 명이 넘는단다. 물론 이 중에는 기성시인들이 트레이닝을 받고 재 등단한 경우도 있다. 이들 모두는 문학아카데미에서 공부함으로써 시인의 입지를 다졌다. 따라서 문학아카데미는 이미 대학의 국문과나 문창과 이상의 학교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구소련의 아카데미아나우크 등이 보여준 문학적, 사회적 영향력과 공헌도를 생각하게 되는 것도 이 같은 실제적 살림살이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케 했던 것은 방산의 어록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지속적인 지도력과 애정 어린 담금질 때문이다. 문학에도 레슨이 필요한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4. 시천지 동인
내가 문학아카데미를 노크한 것은 1994년이었다. 1993년 어느 여름 즈음 나는 그동안 쓴 시를 복사하여 고명수 형과 함께 문예진흥원 자료관장(덕수궁 위치)으로 근무하던 박제천 선생님을 찾아가 보여드렸다. 박 선생님의 냉정한 평가를 들으며 문학아카데미에 나와서 트레이닝을 받으라는 얘기를 듣고 왔다. 동국대 박사과정에 재학하던 나는 1994년 봄부터 이화동 2층에 있는 문학아카데미에 등록하여 수요반(저녁)과 금요반(저녁)에 합류했다. 대학원 수업과 결혼 준비 등으로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매번 시 3편을 써서 갔다. 방산 선생님은 냉정하게 머리를 자르고 팔을 자르고 꼬리를 자르고 내장을 파내며 시를 해부했다. 이리 저리 잘라내니 남는 것은 시의 모티브뿐이었다. 그때 들었던 “관념을 걷어내야 하고 지식을 벗겨내야 한다”는 발화가 내 의식 속에 지금도 남아있다. 방산 선생님은 수요반에 참여하는 몇몇 예비 시인들에게 상호 자극과 선의의 경쟁을 위해 동인 결성을 권유하셨다.
나는 윤정구 시인을 비롯하여 상희구, 최영규, 이나명, 노명순, 한이나, 김성오, 진영대, 김영교, 서주석 등의 시인들과 <시천지> 동인을 결성했다. 우리는 동인지 이름을 짓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준비했다. ‘시벌레’(노명순), ‘시천지’(고영섭) 등 여러 동인명이 제안되었지만 방산 선생님도 최종적으로 내가 제안한 ‘시천지’를 천거하셨다. 이후 우리 <시천지> 동인들은 수요반이 끝난 뒤 호프집 ‘이화동 123번지’에서 만나 동인 결성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첫 회장단은 상희구-이나명 동인이었다. 우리는 매월 세 번째 토요일에 만나 서울, 경기 일대에 세워진 시비 순례와 해당 시인의 작품세계를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순례를 기획한 내가 강의와 안내를 도맡았다. 동인들의 우애가 깊어가면서 문학아카데미 동문으로서의 공감대가 깊어졌다. 이후 <시천지> 동인은 신인 시절의 탁마와 격려에 힘입어 1990년대 우리 시단의 대표적인 문학동인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1998년 9월 나는 월간 『문학과창작』(김광림, 강우식, 박제천 심사)에 「앉은뱅이 부처꽃」 외 4편으로 1차 추천을 받았다. 이듬해 3월에는 다시 「신세한도」 외 4편을 발표하며 2회 추천 완료로 등단을 마칠 수 있었다. 월간 『문학과창작』은 종래 월간 『현대문학』이 해온 3회 추천제를 계승하여 2회 추천제를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문학지가 1회 추천제로 시인을 양산하는 것과 달리 2회 추천제를 고수함으로써 일정한 기간을 두고 해당 신인의 시적 단련과 시인적 겸허를 훈련시켜 주는 것이다. 때문에 평생 쓸 수 있는 지구력은 이때에 생겨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최근 나는 『문학과창작』 등에 발표했던 시론들을 엮어 『한 젊은 문학자의 초상』을 내었고 『바람과 달빛 아래 흘러간 시』 등의 네 권 시집도 상재했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문학아카데미와 <시천지> 동인들과 함께하며 그 거리를 좁히고 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천지> 동인은 첫 동인지로서 『상처의 곳간』을 내면서 비로소 동인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이 생겨났다. 모두 다섯 권의 동인지를 낸 우리는 여타의 동인과 달리 매달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모범적인 동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모두들 <시천지> 동인들을 부러워하였다.
이즈음 최영규 시인이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윤정구 시인이 <대산문학상> 수혜(1996)와 <수주문학상> 수상 및 문예진흥기금 지원(2000), 이나명 시인의 <대산문학상> 수혜(1998), 노명순 시인의 <바움문학상>(2009) 수상, 최영규 시인의 <한국시문학상>(2010) 수상 등을 휩쓸면서 <시천지> 동인의 존재감을 극대화시켰다. 이러한 약진은 모두 문학아카데미에서의 오랜 담금질이 꽃을 피운 것으로 보인다. 모든 단체나 조직은 수장의 인품과 품격에 의해 유지와 지속이 결정된다. 방산 선생님의 건강과 건필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