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생이 색색의 크레파스로 휙휙 그린 듯한 그림들. 그러나 장난치듯 맘대로 휘갈긴 물고기, 코끼리, 기린 그림에서는 동심을 넘어선 무한자유의 천재성이 번뜩인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예술성을 다듬어지고 정제된 완벽한 대작이 아니라 작업의 맨 처음 단계랄 수 있는 드로잉으로 만난다. 그러나 대형 설치작품보다 몇 배 더 자유로움을 느끼게 하는 작업들이다. 서울 가회동에 새로 문을 연 갤러리 마노가 백남준의 드로잉 20점과 비디오 설치 작품 3점을 선보인다.
지난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백씨는 현재 뉴욕과 플로리다를 오가며 재활치료를 받는 중이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면서도 레이저 아트 등 신작을 선보이는 한편 지난 2000년에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며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부담없는 드로잉 작품에서 작가는 고향을 그리는 향수, 인생역정에 대한 회상, 또 자유롭지 못한 몸을 답답해 하는 듯한 개인적 심경을 솔직히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드로잉은 모두 2001년 최신작이다. 백남준이 ‘Liberty’(자유)란 글자를 적은 그림에는 발가벗은 남자 주위로 물고기, 새, 거북이, 게, 문어, 코끼리가 활개치고 돌아다닌다. 고층 빌딩과 송전탑, 교회의 십자가, 자동차 행렬, 남대문을 연상케 하는 전통 건물이 등장하는 그림은 작가의 기억 속 서울이 아닐까 싶다. 드로잉 ‘희로애락’에는 말 그대로 웃는 얼굴, 성난 얼굴, 슬픈 얼굴이 등장한다. 살롯 무어맨과의 그 유명한 ‘첼로 퍼포먼스’를 다시 떠올려 본 드로잉도 있다. 작가가 신문을 보다 떠오른 영감을 그대로 종이 위에 쏟아놓은 드로잉도 있다. 한국신문, 미국신문, 일본신문을 가리지 않고, 브로드웨이 공연 광고 위에다도 그리고 농구스타가 등장한 스포츠면 위에다도 그렸다. 비디오라는 대중 매체를 가지고 혁신적 작품세계를 열었던 대가의 또다른 미디어 탐구인 셈이다.
“백남준의 드로잉 속에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면서도 천진난만함과 위트를 잃지 않는 작가의 개성이 생생히 드러난다”고 갤러리 마노의 정하미 대표는 소개한다. 행위 예술, 비디오 아트, 레이저 아트 등 미술 장르를 개척한 대가가 가장 자유롭게, 최대한 맘대로 그린 드로잉을 통해 천재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볼 수 있는 전시다.
전시는 5일~내년 1월 11일까지. (02)741-6030
첫댓글 갤러리 마노 삼청동에 있습니다. 마노도 두 곳이 있는데요 감사원쪽에 있는 마노가 드로잉전하는 마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