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에 속살을 숨긴 문화유적의 보고 ▶개요와 조망 높을 고(高)를 쓰는 고산은 말 그대로 고창의 들녘에 높이 솟아 주변의 조망대 역할에 충실하다는 의미다. 또 서울의 남산, 남해의 금산과 함께 산 이름이 외자다. 아직까지 고창에 꼭꼭 숨은 명산으로서 외지인들에게 속살을 내비치지 않은 숫처녀와 같이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산이다. 또 세계문화유산인 선사시대 지석묘(고인돌) 3백여 기, 후삼국시대에 축성 것으로 얼려진 고산산성(약 4.1km) 등을 간직한 문화유적의 보고다. 기암괴석과 울창한 송림이 어우러지고, 용추굴, 각시봉, 깃대봉, 매바위, 용두암, 거북바위, 촛대봉, 치마바위 등 전설이 깃든 지명과 암봉들이 산행미를 더해준다. 또 천연 복분자인 산딸기 평전과 개구리와 곤충의 낙원인 늪지대의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된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산에 축성된 산성의 총 길이가 8천1백 척, 높이 20척으로 기록돼 있다. 자연지형을 이용한 토성과 석성이 혼재되어 축성된 길이가 약 5.1km로 추정되며 동문, 서문, 남문의 흔적은 남아 있으나 북문은 찾아 볼 수가 없어 안타깝다. 전북대학교 윤덕향 교수는 축성연대를 삼국시대 후기로 추정하고 있다.
고산과 고성산 사이에 있는 가래재는 옛날 해상인 법성포와 육상의 장성역을 잇는 보부상들의 물물교환의 통로 역할을 한 중요한 고개요,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두 형제가 북쪽의 고산산성은 아우가 쌓고, 남쪽의 고성산성(古城山城)은 형이 쌓기로 약속했다. 약속한 날짜까지 성을 쌓지 못하거나 가래재에 늦게 도착한 사람이 목숨을 내 놓기로 했으나, 아우가 약속한 날짜를 어기자 형이 아우를 가래(삽)로 쳐 죽이고, 고산에 올랐다. 아우가 명천수(明天水)가 솟아나는 용추굴을 주변을 이용하여 약속보다 갑절이나 많은 산성을 쌓느라 늦은 것을 알고 후회한 나머지 가래로 자기 목을 쳐서 자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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