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암동 성당>은 고려대역과 월곡역 그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다.
옛날도 옛날 나름이겠지만, 196-70년대에는 후암동과 종암동을 깃점으로
운행하는 버스 노선이 있었다.
<바위암>字가 들어있는 동네를 오가는 버스노선이 조금 특이하긴 하다.
크고 둥근 두터운 바위를 <두텁바위>라고 부른 연유에서 <후암동>이라는 동네가 되었고,
고려대 뒷산에 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鍾岩 또는 鼓岩]이라는 한자어에서
<종암동>이라는 마을이 생기게 된다.
오늘은 25도를 넘나드는 무더운 날씨이다.
장날은 원래 5일에 한번 열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가는 날이 장날일 때가 종종 있다.
오늘은 종암동 성당 야외행사가 있는 날이다.
성당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성당 초입에는 최양업 (토마스)신부의 동상이 서있다.
최양업 신부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생이다.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번째 사제가 된 분이다.
김대건 신부가 '피의 순교자'라고 한다면, 최양업 신부는 '땀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
최양업신부의 묘소는 제천의 베론 성지에 있다,
조선 후기에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숨을 곳을 찾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자연스럽게 신자촌이 형성되었고 황사영은 이곳 토굴에 숨어서 백서를
집필했던 구학산 아래 자리한 조용한 성지이다.
하나의 지역은 개개인에게는 각각 다른 기억과 추억으로 남아 있게 마련이다.
詩人<박준>에게는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장소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이기도 할 것이다.
종암동/박준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느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
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나도 아버지가 그립다. 그리움은 그렇게 냄새로도 오기도하고,
분수처럼 흩어지는 소리 속으로 다가오기도 하나보다.
종암동의 다른 옛이름인 <모랫말>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정릉천 상류에서 내려온 모래가 쌓여 소금기 없는 양질의 모래는 하수관과 전봇대를
만들었다.
그 곳 일대는 넓게 펼친 모래와 맑은 물 그리고 눈부신 햇살이 함께 어우러진 곳이었다.
중앙산업은 그런 산업으로 자라난 회사인데 그 회사가 있던 자리에는
고대 교우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1957년도에 건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수세식 아파트인 <종암아파트>가 있던 곳은
종암중학교가 있는 곳이다.
그 시절, 우아한 수세식 신식 아파트의 기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하여 축사를 하며
대견해 했다. 입주민들의 자랑스러워하는 모습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그 이웃들!
푸세식 변소의 똥을 지게로 퍼서 나르던 시절이었으니 충분히 상상해 볼만한 풍경화이다.
지게에서 흘리고 간 똥의 잔해는 연탄재로 덮어서 해결하곤 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카라바조'의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Supper at Emmaus> 는 뒤늦게 부활한 예수를 나중에야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제자들의 모습과 수염이 없는 예수의 말끔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일상에 겹겹히 쌓인 것을 흔들어서 털어내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느님, 곰곰히 생각해 보니 저의 많은 기도에는 쓸만한 내용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어렴풋이나마 그러함을 알게 되었으니 제뜻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고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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