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포 전투, 부산진 전투, 동래 전투에서 연승한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북진을 시작한다. 가토 기요마사의 지휘 아래,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등 3진으로 나누어 경상도의 성을 점령해 간다.
조선군은 어떻게 대항했을까? 끝까지 저항하며 충절을 지킨 지휘관도 있었고, 용감하게 나서는 백성들도 많았다. 그러나 겁을 내어 도망간 지휘관이 더 많았다. 그 결과 경상도의 성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그것을 음력 날짜별로 정리한다.
4월 17일(5월 27일)에 양산이 함락되었다. 양산을 지키는 지휘관이 누구인지 이름도 없다. ‘겁먹은 밀양 부사 박진이 전투 한번 하지 못하고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헌납했다.’ 이런 이야기만 나온다.
4월 18일(5월 28일)에 벌어진 밀양 작원관 전투는 밀양 부사 박진이 군민 300명을 모아 벌인 전투이다. 협곡을 건너오는 일본군을 막으려다 오히려 왜군의 기습으로 괴멸되었고, 밀양성도 함락되었다. 이처럼 형편없던 박진은 영천 전투에서 맹활약하였고, 경주성을 탈환할 때는 집념을 보이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4월 19일(5월 29일)에 언양이 함락되었다.
4월 20일(5월 30일)에 벌어진 김해 전투는 김해 부사 서예원이 관군 1,000명을 이끌고 방어에 나선 전투이다. 서예원 자신은 남문을 지키고 중위장 초계 군수 이유겸을 서문에 배치했다. 초기에 열심히 싸웠으나 ‘밀양이 패했다.’라는 소문이 들리자 지휘관인 서예원과 이유겸은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그러자 군민들이 나섰다. 김득기는 동문에서, 류식은 서문에서, 송빈은 남문에서, 이대형은 북문에서 분전했으나,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용감한 김해 군민들의 충절은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4월 21일(5월 31일), 경주로 진격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경주 판관 박의장이 맞아 싸웠으나 함락되었다. 경주는 신라의 천년 고도로 역사의 고장이다. 일본군은 불국사와 분황사의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이상 4월 13일(5월 23일)부터 여드레 동안, 경도의 성이 하루에 하나씩 함락되었다. 그리고 4월 21일(5월 31일)과 22일, 이틀 동안에는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 창원과 영천 경주 등 무려 3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4월 25일(6월 3일)에 벌어진 상주 전투(尙州戰鬪)는 순변사 이일이 병사를 모집하여 훈련하던 중 패배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전투이다.
4월 26일(6월 5일)은 문경이 돌파당한 날이다.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문경 성안으로 진입했다. 그것은 문경 현감 신길원의 작전이었다. 텅 비어있는 진영으로 진입한 왜군이 관아를 지나갈 때 20명의 결사대가 화살을 쏘며 기습 공격했다. 그러나 이들은 오합지졸(烏合之卒), 곧 붙잡혔고, 투항을 거부하다 참살당했다.
4월 27일(6월 6일)에 성주성이 함락되었다.
4월 28일(6월 7일)에 벌어진 추풍령 전투는 경상우도 방어사로 임명된 조경이 왜군 구로다 나가마사를 상대한 전투이다. 조경은 거창에서 활약한 군관들을 모아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 100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에서 군관 정기룡의 투혼이 빛났다. 그는 단기로 달려들어 일본군 50명의 목을 베었고, 일본의 매복군을 격파하여 생포된 조경을 구해내기도 했다. 이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추풍령은 왜군에게 돌파당하고 말았다.
4월 28일(6월 7일)에 벌어진 충주 탄금대 전투(忠州彈琴臺戰鬪)는 도순변사 신립이 이끄는 정예부대가 전멸당한 전투이다.
개전 16일째 되는 날로 충청도까지 왜적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북진하는 일본군은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한강까지 단순에 진격해 왔다. 경상도는 물론 충청도까지 저들 앞에 우수수 떨어지는 추풍낙엽이었다.
5월 2일(6월 11일) 한강 방어선 전투는 한양으로 입성하려는 왜군의 공격을 막기 위한 전투이다. 유도대장 이양원, 도원수 김명원, 부원수 신각 등이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전투에 임하는 조선의 작전은 어설프기만 했다.
이 전투에서 세 사람이 등장한다.
첫째는 유도대장 이양원이다. 그의 벼슬 ‘유도대장’은 왕이 도성을 비웠을 때 도성에 남아 도성을 방비하던 임시 관직이다. 조선 전기에는 각 장수들 중 임명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5군영의 각 대장들 중에 임명했다. 이양원(李陽元, 1526~ 1592)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으며, 영의정에 임명되었지만, 왕이 요동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한 대신이다. 향년 66세였다.
둘째는 도원수 김명원이다. 그의 벼슬은 ‘도원수(都元帥)’인데, 이 관직도 임시로 임명된 관직으로 정2품 벼슬이다. 일반적으로 전쟁 중에 부여되며, 문관 중에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1534년생 당시 58세로 임진왜란의 군정(軍政)을 통솔하며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
부원수 신각에서 ‘부원수(副元帥)’는 전시(戰時)에 임명하던 임시 벼슬로. 도원수에 다음가는 군 통솔자이다. 신각(申恪 ? ~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팔도 부원수였다. 도원수가 문관이었기 부원수와의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각은 임진왜란의 영웅이다. 육상 전투에서 최초로 승리한 영웅이다. 그런 그가 선조의 명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비운의 영웅 신각에 대하여 따로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