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임진왜란때 충절을 지켜 순사한 충신 송상현 공을 추모하며 3일만 버텼더라면....
넷플릭스 영화로 일본 NHK 에서 방영한 연속극 ‘아떡할래 이에야스’ 를 보다가 다케다 신겐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협공으로 나라가 거덜나고 가케가와성으로 도망친...... 후계자인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이에야스의 포위 공격에 4개월째 버티는걸 보다가 문득 조선의 충신 송상현 공을 생각합니다.
송상현 공은 1551년 명종 6년 2월 전라도 정읍현에서 사헌부 감찰을 지낸 송복흥 (宋復興) 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송시열의 기록에는 어린 시절 부터 문장을 날리며 김장생 과도 친분을 쌓았다고 합니다.
송상현공은 1570년 선조 3년 20세의 나이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했고, 157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1581년에는 사헌부 지평 · 집의 등 대간의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1584년에는 종계변무사 (宗系辨誣使 ) 의 질정관 (質正官) 으로 명나라에 다녀오셨습니다.
명나를 다녀오신뒤 호조· 예조· 공조의 정랑 (正郞) 등을 거치다가 1591년 선조 24년,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동래부사 (東萊府使 오늘날 부산광역시장) 에 제수되어 다가올 전란에 대비하셨습니다.
송시열의 기록에 따르면, 왜란 직전에 송상현공의 관직은 종3품 사헌부 집의였는데 이때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동래는 일본군과 첫 교전지로 여겨져 다들 부임하기를 꺼렸다고 합니다.
이때 선조 임금께서 최전선인 동래부사의 중책을 맡을 적합한 인재를 찾자 조정에서는 송상현공
을 천거했고..... 이에 특별히 정 3품으로 품계를 올려 동래에 부임하시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1592년 선조 25년 일본군 선봉장인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18,000명에 맞서 관민
4,000명으로 대항했으나 끝내 성이 함락되려고 하자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는
부채에 “군신 관계가 더 중요하니 싸우다 죽겠다” 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씁니다.
저 부채에 부자 관계 보다 군신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궂이 쓴 이유는 조선은
효 (孝) 의 나라인데.... 가장 큰 으뜸가는 불효는 자식이 부모 보다 먼저
죽어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니 그런 큰 불효를 저지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송공은 조복을 갈아 입고 임금에게 북향사배를 올리고는 항전을 이어가다가 양력
1592년 5월 23일에 향년 41세 나이로 전사했는데.... 관기 출신의 첩인
한금섬은 담을 넘어서 까지 공에게 달려가 함께 죽임을 당해 절개를 지켰다고 합니다.
소 요시토시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가 적장이지만, 대마도주 요시토시는 그 전에 만나본 적도 있고 하니
공의 용기에 감탄하였고 전투가 끝난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공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그의 충직함을 본받으라 훈시했다고 하니 적군까지 감복시킨 훌륭한 사대부 이십니다.
다만 송상현 부사을 제외한 전사자들과 살아남은 일부 동래성 주민은 처형당해 동래성 해자에 파묻혔고,
이는 2005년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 도중에야 발견되었으니.... 지하철이 개통된 후
역사 (驛舍) 내에 작은 역사 (歷史) 관이 마련되어 있으니 처절했던 전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도중에 비변사에서 포증 (褒贈) 을 건의하는 등 꾸준히 충심과 절의를 기리려는
논의가 진행되다가 효종 때에 이르러 이조판서와 찬성에 추증되었고, '충렬 (忠烈)'
이란 시호도 하사받았으며 동래 안락서원 (安樂書院) 과 청주 충렬사에 제향되었습니다.
동래에 있던 시신은 전란후 수습해 청주로 옮겨졌는데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의
청주 충렬사 동북방 뒷산에 영장하였으며 신도비도 조성되었으니,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제목인 두전 (頭篆) 은 이정영 (李正英) 이 썼습니다.
청주 충열사는 경부고속도로 청주 IC 부근에 위치하는데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원안은 묘소 근처를 지나도록 계획되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묘소를 피하려고 손수 계획을 고쳐 현재 처럼 굽은 선형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친인 송복흥은 불효자(?) 송상현공이 전사하고 2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사헌부 감찰과 지방 수령을 지냈으며, 아들 덕에 사후에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그렇다고 한들 자식 잃은 부모의 찢어진 가슴이 나으리요 마는......
부인 성주 이씨 (이온(李熅) 의 딸) 사이에서 송인급 (宋仁及), 송효급 (宋孝及)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송인급은 1605년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감찰과 서장관을 지냈고, 차남 송효급은 1606년 진사에 올랐습니다.
동생 송상인 (宋象仁) 도 1605년 문과에 급제해 함경도 북평사, 형조 좌랑을 지내다가 1612년
김직재의 옥사로 제주도에 10년간 위리안치되었는데, 옥사 당시
국문 자리에서 자신은 송상현의 아우로 4대에 걸쳐 과거에 나가 충성을 다했다고 항변합니다.
광해군때 일이니.... 그러자 형 송상현의 친구들이 그를 구원해 목숨을 건졌고
인조반정 이후 다시 등용되어 남원부사, 전라도 관찰사 등
여러 요직을 거쳤으니, 송공도 저승에서 나마 위안을 받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송상현 부사는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고, 전쟁이 터지자마자 전사한 탓에 개인의 군사적 능력을 평가하기
에는 무리가 있는데, 다만 임진왜란 개전 초기 열세가 뻔한 상황 속에서 부산진성을 지키다 전사한
정발 다대포성을 지키다가 전사한 윤흥신과 더불어 일본군에 당당히 맞섰으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안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일본군 마저 공을 높이 평가해 시신을 온전하게 보존할 정도 였으니 '동래' 의
후신 부산광역시에서는 정발, 윤흥신과 함께 '부산을 지킨 위인' 으로 추앙하며, 부산진구 양정동
에는 송상현의 동상이 있고 주변은 '송공 삼거리' 라고 불렸다가 지금은 주변을 광장으로 조성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부산 지역 군부대인 제 53 보병사단의 별칭인 '충렬부대' 의 '충렬' 은
송상현공의 시호인 '충렬 (忠烈)' 에서 따왔으며 부산 지역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지역을 빛낸 위인' 으로 장영실과 함께 거론되는 인물입니다.
문관으로서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며 특이하게도 중국어에 능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던 인물이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허무하게 전사하고 말았으니.... 너무나도 원통한 일입니다.
이제 동래성 전투를 돌아보자면..... 동래부사 송상현은 무역을 위해 상주하던
왜관의 일본인들이 모두 떠나는등 이상 징후를 느끼고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고 또 성벽 근처에는 마름쇠를 깔아두는 등 방비를 하셨습니다.
성 주변에 나무가 많으면 공격군 기병 운용이 힘들며 성벽을 넘기 위한 사다리를 비롯한 공성 무기의 사용과
진열 정비에 방해가 되지만 일본군 병력이 너무 많았던 탓에 이런 준비들은 생각보다 효과가
적었는데 성벽 위에도 목책을 쌓았으며 일본군 역시 왜장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궁수들을 유인하기로 합니다.
왜군은 1592년 음력 4월 13일 대마도에서 700척 배를 타고 저녁에 영도에 무혈 상륙했으며
14일 새벽에 선발대가 부산진에 상륙해 성을 1차 공격하면서 성의 허실을 탐지하고
본대의 상륙을 엄호했으며.... 상륙한 본대가 진열을 갖춘후 불과 2~ 3시간만에
부산진성을 함락하니 정발 장군등 군민은 모두 전사했으며 다대포성 윤흥신 장군도 전사합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긴급히 병력을 불러모으자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이각이 제승방략에 의거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니 송부사가 동래성에서 함께 지킬것을 부탁했으나 이각은 소산역에 진을 치고 협공하겠다며
군관 20명만 남긴후 나가 울산의 본영에 조차 들르지 않고 도주했다가 훗날 도원수 김명원에 참형당합니다.
양산군수 조영규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겠다" 며 양산으로
병력을 되돌렸다가... 하직 인사 후에 동래성에 돌아와 전사했습니다.
울산군수 이언성은 성 안에 남았다가 포로가 되는데, 고니시와 사위 대마도주는 조선 무역의 이익을
잃는게 안타까워 전쟁을 막을려고 국서까지 위조했지만, 전쟁이 나니 선발로 와서 조선과
화의를 위해 이언성에게 편지를 주어 조정에 전달을 부탁했지만 이언성은 도주해
버리는데, 이는 조선의 국법에는 항복하거나 포로가 된 자는 이유 불문하고 모두 죽이기 때문입니다.
1592년 4월 15일 새벽에 부산진성을 출발한 일본군은 걸어서 오전 10시에 동래성에 도착했으니 한 부대는
동래성 동쪽 황령산 기슭에, 한 부대는 동래성 서쪽에, 한 부대는 동래성 남쪽에 3면을 포위합니다.
나무위키에는 일본군 병력을 3만으로 기록하고 조선군은 3,500명중 3천명이 죽고 500명이 투항 (종군승 덴케이
天行 의 서정일기) 했다고 적었는데... 내가 알기로는 고니시 유키나가 7천명, 소 요시토시 5천명, 마쓰라
시게노부 3천명, 아리마 하루노부 2천명, 오무라 요시아키 1천명, 고토 스미하루 7백명 합계 1만 8천7백명 입니다.
그러니까 1만 8천여명을 3만명으로 잘못 적은 연유(수군 포함?) 를 모르겠는데.... 나무 위키에서
왜군 장수 이름은 위와 그대로 똑 같지만 숫자는 다른데....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조선군은 누가 대장이라도 모두 조선 임금의 군대지만 일본은 저게 다이묘들의 사병 (私兵) 입니다?
즉 영주 (다이묘) 는 자기 영지에서는 사실상 왕과 똑 같으니 세금을 거두고 재판을 하며 군대를
육성해 이웃 영주들과 전쟁으로 날을 지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에 모여
출진했으니, 갑옷과 무기며 식량등을 모두 영주 개인 돈으로 지출하는지라 고니시 라고
하더래도 직접 지휘할수 있는 병사는 7천명에 불과하고 다른 영주들의 병사를 지휘할 수는 없습니다.
일본군은 동래성의 취약점인 동문(인생문) 을 집중 공격해서 결국 돌파하고 동래성으로 진입했는데,
당시 동래성 인생문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했으니 정찰을 통해 이를 파악한
일본군은 뒷산(망월산) 을 우회해 성곽을 넘어 동래성에 진입했고 밀양부사 박진, 경주판관
박의장이 뒤늦게 근처까지 군사를 이끌고 왔으나 동래성이 포위된지라 합류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동래성의 조선군과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동문으로 들이닥치는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를 당해내지 못했으며, 성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오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
입은 뒤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나서 고향의 부모님에게 보내는 시 한수를 씁니다.
孤成月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列鎭高枕 여러 진들은 고침하네
君臣義重 군신의 의는 무겁고
父子恩輕 부자의 은은 가볍도다
송상현은 일본군의 칼에 찔려 전사했는데 면식이 있던 일본인 '평조익 (平調益)' 이 피신 하라고
했지만 거절했으며, 송상현의 애첩과 동래성 아낙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와를 던지며 맞서다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고 양산군수 조영규도 분전하였으나 전사합니다.
송상현의 소실 금섬은 담을 넘어서까지 송부사를 따라 갔다가 일본군에게 사로잡혔고
사흘간 일본군을 꾸짖으며 욕을 하다가 살해당했으며 또
다른 소실 이씨는 일본에 끌려갔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어 끝내 절개를 지켰다고 합니다.
이때 모두가 죽지는 않았는지 (혹은 투항? 도주?) 참전한 사람들 중에는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일본군에게 항전한 경우도 있었는데, 선무 원종공신 중에 동래 출신인
인물이 66명 이었고, 이들중 뛰어난 24명을 별전 공신이라고 했으니 김정서 등 입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이 무너지자 예복으로 갈아입고 들이닥친 왜군을 걷어차며 "이웃의 법도가 이런
것이더냐? 너희는 어찌하여 이런 짓을 하느냐?" 라고 꾸짖다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공의 충절을 높이 사서 그의 시체를 온전히 보존해 고향으로 돌려
보냈지만, 동래성의 병사와 백성들은 거의 모두 학살당했으며 전투가
끝난 후에도 백성들은 성밖으로 끌려나와 일본군에게 참혹하게 살해된뒤 해자에 파묻혔습니다.
120년간 센고쿠시대에 공성전에서 일본은 몽골군 처럼 전투 개시 전에 항복하면 성주 이하
전원의 생명을 살려주고, 전투 중에 항복하면 성주 및 가신 급만 처형했으며
끝까지 저항하면... 성주와 가신에 병사들과 민간인을 포함한 성 안의 모든 사람을 죽였습니다.
민정중의 〈임진동래유사〉 에 보면 총성이 울리고 그 검광은 대낮을 무색하게 했으며,
적군이 성중에 들어와 사람으로 메우다시피 했다.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
데다가.... 적병 수만이 일시에 성으로 들어오니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일본군은 부산진성에서 오전 8시에 출발해 10km 거리를 걸어서 2시간만인 10시에 도착했고 이후
성을 3면으로 포위하고는 필담을 주고 받는동안 일부 병사들은 정찰에 나서고 나머지
병사는 휴식시간을 가진후 오후 2시경에 전투를 시작해 불과 서너시간 만에 간단히 합락된 것입니다.
대마도주의 간곡한 요청으로 일본에 사신이 다녀온후 황윤길은 전쟁이 난다고 했지만 김성일은 나지
않는다고 하니, 같은 동인인 유성룡이 그 이유를 묻자 김성일이 말하길, 황윤길의 전쟁이
난다는 말에 겁에 질린 경상도 백성들이 너도나도 짐을 싸서 피란길에 나서니 도로가 다
막히는지라, 이러다간 전쟁이 나기도 전에 나라가 무느질 지경이니 진정시키려 그랬다고 말합니다?
동인이 집권한 탓에 전쟁이 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그래도 조정은 불안한지라
경상도에 김수, 전라도에 이광 충청도에 윤선각을 감사로 내려보내 성을 수축
하도록 하니 노역이 힘든지라 백성들이 도망치고 원성이 자자하니 부득이 공사를 중지합니다.
그럼 성의 수축이나 무기 생산이 좌절되었다는 것인데....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니 백성들에게 추가 징수
하지 말고 임금과 왕족에 대신들이 재산의 일부를 내놓고 왕족과 정승 판서 자식들이 내려와 성을 쌓는
노역에 앞장서며 남들이 싫어하는 수군으로 선창에서 노꾼으로 나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발휘했더라면?
백성들에게만 세금을 과징하고 성 쌓는 노역도 백성들만 시키며 수군은 아예 조상대대로 그 자식들에게
강요하는 반면에, 양반의 자식들은 과거시험 본다고 서원에 등록만 하면 군대가 면제될
뿐만 아니라 병역 대신에 부담하는 군포 마저도 내지 않으니 백성들이 어찌 달아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당시 조선의 전쟁시 방어 체제는 제승방략 (制勝方略) 이니..... 경상도의 모든 군대 (조선
은 16세 부터 60세 까지 남자는 병역 의무) 를 대구에 모이게 했는데 5~6만
여명으로 이들을 지휘할 장수는 이일이 임명됐으나, 그는 서울에서 출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일은 300명 병사를 요청했는데 조정은 경군은 임금을 지키는 군대라 내려보낼수가 없다면서 병조에서
소집령을 내렸는데, 서을 장정들이 대부분 도주하고 소집에 응한자 도 유학 서적을 들고 갓을 쓰고
오거나 배탈이 났다며 우거지상이라..... 사흘간 300명은 커녕 서너명 모으기도 힘드니 출발을 못합니다.
나흘째 되는날 유성룡은 별장 유옥을 남겨 300명을 모으도록 하고 서너명만 데리고 내려
가도록 했는데.... 대구에 모인 5만 장정은 숙소가 없으니 들에서 자야 했고
왜군이 예상 보다 훨씬 빨리 북상한다는 소식에 비까지 내리니 그만 모두 달아나버립니다.
하양 군사들이 대구로 가던중에 용궁현감 우복룡은 말에서 내려 인사하지 않았다고 역적이라며 모두
죽이고는 상부에는 반란을 일으키려던 하양 군사들을 토벌했다고 보고 하니 경상 감사 김수가
공을 세웠다고 조정에 보고해 우복룡은 통정대부로 승진해 안동 부사가 되었지만 하양의 과부
들과 고아들이 사신이 올 때마다 원통함을 호소했으나, 들어주는 관리는 없었습니다. 아.... 조선 이여!
임진왜란에서 적을 방어할 일선 지휘관은 4명이 있었으니 바다에서는 부산 경상좌수영 박홍과
통영의 경상 우수영 원균이고, 육지에서는 울산의 경상 좌병사 이각에 창원의 경상
우병사 조대곤인데.... 네명 모두 약속이나 한 것 처럼 전투 한번 치루지 않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해전에서 죽은 수군은 3명이고 명량해전에서는 2명에 불과한데, 일본군
조총은 사거리가 100미터에 불과한데 비해 조선의 대포는 600미터에서 천미터 이니
3~400미터 거리를 두고 사격하면 아군의 피해는 없이 적선을 침몰시킬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조선의 판옥선은 크고 높으며 튼튼한데다가 대포 20문을 장착하고 160명이 타는 군함이지만
일본의 세키부네는 70여명이 타는 작고 낮으며 약한 수송선이라..... 해전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경상 좌수사 박홍은 대마도에 모인 왜군에 대한 정보 수집도 안했고 배를 모아 대포 사격을 한 적도 없으며,
13일 700척 수송선이 건너와 영도에 상륙하고 다음날 부산진성 을 공격할때도 겁에 질려 꼼짝하지
못했는데 배 10척이라도 모아 포격했으면 700척 밀집된 수송선은 부산진 상륙이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사실 조정도 불안한지라 감사 3명에 이어 수군 대장도 내려보내니 원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해 부임중에
어느 신하가 그는 백성들에게 자애롭지 못하다고 성토하자 유극량으로 바꾸어 부임중에 그
어머니 신분이 낮다는 상소에, 류성룡은 정읍현감 이순신을 천거하니 벼슬이 7계급이나 오른 것입니다.
그후 불안이 더 심해진 조정은 원균을 경상우수사에 임명하는데, 판옥선 기준으로 경상 우수영 70척,
전라우수영 35척, 경상좌수영 30척, 전라 좌수영 25척 규모라? 만약에 이순신을 부산의
경상 좌수사에 임명했으면 13개월간 전쟁 준비를 해서 왜군의 상륙을 저지할수 있었다고 봅니다?
아니면 경상 우수사에 임명했으면 제1군 고니시군의 상륙이야 당연히 놓쳤겠고 닷새 후인 2군 가토 기요마사
와 3군 구로다 나가마사의 상륙까지도 허용했겠지만.... 그후 4군부터 9군까지 부산 상륙은 저지했을
것이니 부산이 불안하면 서울로 북상하던 왜군이 계속 진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서울 함락을 면했을지도?
박홍에 이어 원균도 왜군과 싸우지도 않고 대포를 바다에 쳐넣고 배를 불사른 것은.....조선은 16세부터
60세까지 병역의무가 있지만 평소 소집되어 현역으로 근무하는 숫자는 작았으니, 1. 수군을
소집한다 2. 배와 대포등을 수리한다 3. 대포와 포탄에 화약을 배에 싣는다 3. 쌀과 부식에
기타 물품을 배에 싣는다 4. 노꾼과 선원에 전투병이 배에 올라 탄다 5. 바람이 일기를 기다려서 출진한다.
왜군이 쳐들어 오자 먼저 수군을 소집했지만 응하는 숫자가 극히 적고 배가 수리되지 못했으며
대포와 포탄에 화약이 제대로 없었고, 또 다른 비품도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배가
출항할수 없는지라..... 부산의 박홍과 거제 원균은 적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불을 지른 것입니다.
부산 경상 좌수사 박홍은 임기가 끝났는데도 재임명됐으나 수군 소집과 함대를 진열해 대포 사격등 훈련을 전혀
하지 않고 놀았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거제 경상 우수사 원균은 전쟁 3개월전 (이순신은 13개월전)
에야 부임해 본영과 예하 8관 16포등 모두 25곳을 순시하는 점검 도중에 전쟁을 맞았으니 전투가 어려웠습니다.
결론적으로 조선 수군과 왜군 간에 해전은 한산도해전 전사자 3명, 명량해전 전사자 2명에서 보듯 상대가
되지 않는데,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한 것은 2가지 이유이니 하나는 지휘관 능력의 차이로...
대포와 기관총에 신식 소총을 가진 조선군이 죽창을 가진 동학군과 싸워 3번 패해 전주성을 뺏겼지만
그후 일본군 미나미 소좌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을 전멸시켰던 것입니다?
두번째는 일본군이 전술을 바꾼 것이니,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로 진격하자 일본 수군은 해전을 피해 달아나
부산 적기에서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 언덕에서 조총 사격으로 정운 장군이 죽었으며, 그후 원균이
부산으로 진격하니 왜군은 역시 해전을 피하고 달아나다가.... 조선 수군이 멈추면 다가오고 전진하면
달아나기를 반복해 조선 노꾼이 지쳐 후퇴해 잠에 골아떨어지자 기습으로 화공을 해서 전멸시킨 것입니다?
부산의 박홍은 15일 멀리 동래성에 연기가 나자 대포를 바다에 쳐넣고 배를 불사른후 1만 수군을 해산하고
말을 타고 달아났으며, 원균도 비슷했고 경상 우병사 조대곤도 김해성을 구원하려고 나섰으나 군사들
이 도주했는지 200명 밖에 모이지 않으니 발길을 돌려 후퇴했고... 경상 좌병사 이각은 혼자 도주했습니다.
대구에 모인 5만명 경상도 병사들이 흩어진게 아까운데... 경상 좌수사 박홍이 10척 이라도 배를 출진시켰거나
이일이 서울에서 300명을 모으느라 사흘간을 지체하지 않고 출발했다면, 또 경상 좌병사 이각이 달아나지
않고 양산에서 저지했거나, 동래성이 사나흘만 버텨 주었어도 이일이 5만 군대를 인수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산진성은 2~3시간만에 동래성은 3-4시간만에 너무나도 쉽게 함락됐는데 수양제 100만 대군을 수개월간
막은 이름모를 성주가 지휘한 요동성이나 그후 당태종 30만 대군을 역시 수개월간 저지한 이름모를
성주가 지휘한 안시성에... 몽골군의 포위에도 버틴 박서와 김경손의 귀주성과 김윤후의 처인성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반년이상 1년 까지 성을 사수한 전투가 부지기수 이니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이마가와
씨는 스루가와 도토미 (현재 시즈오카현) 슈고 이마카와 요시모토가 2만 5천으로
교토로 상경하던 중에 오케하자마에서 5천 오와리(나고야)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의 기습으로 죽습니다.
그러자 인질로 와서 성장후 이마가와군 선봉으로 출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씨를 배신하고 고향
미카와(아이치현) 로 돌아가 오다씨와 동맹을 맺은후 가이국 (야마나시현) 의 다케다 신겐과 함께 양쪽
에서 침공하니 이마가와씨의 가신들도 배신해 버리고 슨푸(시즈오카) 가 점령되니, 후계자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도쿠가와군의 포위 공격에 한줌도 안되는 병력으로 희망도 없는 전쟁을 4개월간이나 버팁니다!
임진왜란의 최전선인 동래부사를 유학에 뛰어난 학식이 높은 문신이 아닌 전쟁과 수성을 할줄 아는 무장을
내려 보냈더라면.... 전쟁을 아는 무장이라면 조선의 방위 최일선인 동래성에 해자를 이중으로 파고
성벽을 돌로 쌓아 높이며 대포와 화약에 화살 그리고 바위와 목재에 그물과 철망에 기름 가마등
수성을 위해 철옹성으로 만들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면 한달은 몰라도 보름은 버텼을 것이니 아쉽습니다.
하기사 조선은 사대부 문신들이 다스리는 나라라 숙종 때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지는데, 100만도 안되는 만주족
(여진족) 이 1억이 넘는 중국을 차지했으니 저 넓은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 모두 대륙으로 들어가니 만주 땅이
비어버리자 가난한데다가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신음하던 조선인들이 하나둘 강을 건너 만주땅으로 들어갑니다.
청나라 태종은 "封禁地 (봉금지)" 로 묶은 만주 땅에 조선인들이 침범하자 1712년에 오라총관 목극등
을 보내..... 조선과 백두산 부근의 국경 지역을 조사하고 국경선을 확정해 백두산 정계비를 세웁니다.
조선은 학문이 높은 예조참판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를 파견하는데 두 사람은 문관이라 말을 탈줄 모르니
그 험한 길을 갈수 없어 수행군관을 대신 보냅니다. 대구 망우 공원에 "백두산정계비" 모조품을 세웠는데
비의 제목을 “백두산 정계비” 라고 오해하는 분도 있지만.... 첫머리에 쓰인 글자는 “大淸 (대청)” 두 글자
이며, 당시 청나라는 물론이고 조선 조정에서 실록 등에 기록한 이름은 백두산이 아니고.... "장백산" 입니다.
비문에는 청나라 총관 목극등의 이름이 새겨졌고 조선은 군관 이의복과 감사 군관 조태상이 대표
로 새겨졌습니다! 조선 대표가 일개 군관이라니 기가 막힌데.... 조정은 전쟁에 임해 동래
부사로 문신을 임명했듯, 국경을 정하는 중차대한 일이니 백두산에 올라갈수 있는 무관을
보내야 함에도..... 역시나 학문 높은 문신들이라 저들은 백두산 근처에 접근 조차 할수 없었습니다.
두명의 조선 군관과 통역관은 오라 총관 목극등과 함께 백두산에 올랐는데 조선인
으로서는 고구려가 망한지 무려 1,044년만에 처음으로 백두산에
오른 것이니 그럼 백두산은 천년 이상 우리 땅이 아니고 남의 나라 땅 이었습니다?
백두산은 첩첨 산중으로 나무가 우거져 길이 없으니 오를 때 소와 말을 열필이나 동원하고 인부들
수십명이 도끼와 톱으로 나무를 베어내고 길을 만들면서 또 도중에 며칠간
산속에서 천막을 치고 야영하면서 열흘에 걸쳐 힘겹게 올랐으니 어찌 늙은 문신이 오를수 있으리요?
백두산 정계비는 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4km 지점에 세워졌으니.... 그럼 백두산과 천지는
공식적으로 “중국령” 이 된 것인데, 보고를 받은 조정은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요즘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백두산과 천지가 중국 땅이 됐는데 저리 기뻐한 이유를 알수 없겠습니다?
통일 신라의 국경선은 황해도에서 원산만 까지 였고, 고려 태조 왕건은 고구려인들이 당나라에 잡혀간지라
사람이라고는 살지 않는 황무지인 평양으로 사람을 보내 평화롭게 목책을 쳤고 이후 평안남도에 살던
여진족을 죽이고 쫓아냈으며, 조선 건국시는 평안북도 3분지 2 와 함경남도 상당 지역을 차지한 상태였습니다.
청나라가 조선 건국 당시 국경인 평안북도 3분지 2와 함경남도 선으로 국경을 정하자고 할까 봐 잔뜩
긴장했는데,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선이 되니 여진족을 쫓아내고 빼앗은 국경선을 지킨 것이라
웃음을 멈추지 못했는데.... 벼농사를 지을수 없는 백두산과 천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