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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연기설(緣起說). (3) 연기법의 12지분(支分)
연기법을 12지분(支分)으로 정리한 것이 12연기이다.
12인연이라고도 한다. 12연기는 우주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2연기는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말하는 것이다.
사성제(四聖諦) 속의 집성제(集聖諦)를 규명하는 것이다.
윤회설은 고대로부터 인도철학을 관통하는 명제이지만
12연기설은 불교만의 독창적인 해석이었다.
살아있는 자의 살아가는 괴로움을 극복하는 일이 불교의 과제이다.
과학자는 물질의 인과관계를 연구하지만,
불교는 괴로움의 인과관계를 연구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인과론은 세간에 있는 일체의 인과론이 아니고
괴로움의 인과론이다. 그것이 12인연설(因緣說)이다.
경전에서는 특별히 ‘연기의 방법은 12인연이다’라는 식으로 정해두고 있지 않다.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설명했을 뿐이다.
따라서 12를 모두 갖추고 있는 경우도 있고, 10인 경우도 있으며,
8이나 6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그때그때에 따라 항목이 증감하고 있다.
그리고 붓다께서는 12인연의 항목과 관계없이 전혀 다른 방법으로
연기를 설명하신 적도 있었다.
연기란 원인과 결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붓다께서는 상당히
자유롭게 다양한 방법으로 설법하셨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월이 흐름에 띠라 자연스럽게 12지분으로 고정됐다.
그렇다면 실제 12지분의 내용이 어떤지 살펴보자.
① 무명(無明, 산스크리트어 avidyā) - 12연기의 출발은 무명에서 시작된다.
무명은 글자 그대로 ‘명(明)’이 없다, 즉 지혜가 없다는 말이다.
변화무상한 현상 경계를 바로 보는 눈이 열리지 않고,
인과법칙(因果法則)의 도리를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어두움(昏暗)에 끌리어 진리를 진리로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
그리하여 이는 붓다의 올바른 법에 대한 무지(無知)이며,
미혹(迷惑)의 근본이 되는 무지로서 사물의 도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잘못된 일념을 가리킨다.
이 무명 일념이 일체번뇌를 낳고, 번뇌로 말미암아 악업을 짓고,
악업으로 말미암아 고(苦)의 결과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무명은 일체번뇌의 근본 원인인 동시에
악업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지를 극복해 번뇌의 때만 벗기면 바로 진여본성이 드러나서
다음 단계인 어리석은 행으로 이어지는 일이 없을 텐데,
결국 무명으로 말미암아(조건으로 해서) 업(業-行)이 형성된다.
그래서 무명에 연해 행(行)이 있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② 행(行, 산스크리트어 samskara) - 무명(無明)으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함으로써
습관, 성격, 소질 등 바르지 못한 업(業)이 지어진다.
업이 곧 행이다. 업과 행은 동의어이다.
‘행’은 행위. 동작 또는 업(業)이라는 뜻인데,
무지하고 맹목적인 생명의 원동력이다.
이것은 ‘행(行)’이 ‘결합하는sam, 작용kara’이라는
뜻을 갖고 있듯이 무명에 결합해 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무명의 끊임없는 활동상태 곧 생명의 의지가
몸[신(身)]과 입[구(口)]과 뜻[의(意)]을 통해 삼업(三業)으로 차곡차곡 쌓여서,
그 쌓이고 쌓인 경험(行)에 의해(이를 바탕으로 해서)
분별하려는 식(識)이 발생된다.
전에 보고, 먹고, 냄새 맡았던 행(行)이 아직도 잠재의식으로
쌓여 있어서(남아 있어서), 지금 음식을 보면,
전에 눈으로 봤던(眼識), 맛을 봤던(舌識), 냄새 맡았던(鼻識) 것을
떠올려 분별(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을 조건으로(연해)
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즉, 분별하려는 의식의 전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이 때까지 해온 것들(行),
즉 업에서 그것을 분별하는 식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행에 연해 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③ 식(識, 산스크리트어 vijnana) - 동양 사람의 의식구조와 서양 사람의 의식구조는 다르다.
이는 태어나면서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환경과 그 환경 속에서의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삶에 의해 업이 쌓여서 서로 다른 의식이 형성된다는 의미에서
"행을 연해 식(識)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행’은 행위. 동작 또는 업(業)이라는 뜻인데,
이러한 행이 무수히 거듭 쌓임에 따라 차차 사물을 알고 분별하는
근본의 힘이 (각자 다르게)나오게 된다. 이것을 식(識)이라고 한다.
그런데 식이 사물을 알아 분별한다고 해도
실상(實相)을 정확히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만큼 식(識)은 우리가 태어날 때에 타고난 불완전한 성질이다.
전생에서부터 마음에 미혹이 있어서 그 미혹이 행동에 나타나
불완전한 행위를 하고 있었으므로 불완전한 마음과 불완전한 상태를
그대로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이와 같이 비록 식이 분별하는 인식작용이라 하지만 불완전하다.
때문에 같은 사실을 인식해도 사람에 따라 느낌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예컨대 똑 같은 배우 A양을 어떤 사람은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싫어한다.
그 까닭은 인식 주체로서의 식이 백지와 같은 것이 아니라
무명과 행에 의해 식이 물이 들어(때가 묻어) 다른 인식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은 분별하는 불완전한 인식작용을 말한다.
이런 불완전한 식이 불완전한 분별을 해서 불완전한 명색이
현상적인 존재로 나타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식을 연해 (불완전한)명색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④ 명색(名色, 산스크리트어 nāmarūpa) - 불완전한 식(識)이 점점 발달해서
불완전한 명색(名色)을 분별하게 된다.
명(名)은 무형물인 마음이고, 색(色)은 유형물인 신체를 말한다.
오온을 색⋅수⋅상⋅행⋅식이라 한다.
색은 몸-유형무루이고, ‘수⋅상⋅행⋅식’은 마음-정신 곧 명(名)이다.
명색의 명(名)은 형체는 없고 단지 이름만 있는 것이고,
색(色)은 몸의 형체는 있으나 아직 육근이 갖추어지지 않은 불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명색(名色)은 단지 몸과 마음만 있는 불완전한 것을 말한다.
일반 사회에서 제구실을 못하는 것을 명색이라 한다.
“명색이 자동차라는 것이 경운기보다 더 잡음이 많다.”
이와 같을 때 쓰는 말이다.
그와 같이 명색(名色)이라는 것은 곧 불완전한 식(識)에 의해
현상적인 존재로 나타나서 역시 불완전한 상태에서 차차 자라면서
마음과 몸이 분별된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작용이 차차
섬세하게 세분돼 발달해 가면서 육근이 생긴다.
모든 사물에 실체성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아와 세계가
공간 속에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무명이다.
이 어리석은 생각에서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행(行)이다.
이러한 삶의 결과 형성된 욕구를 지닌 마음이 식(識)이며,
이 식이 형성됐을 때 명색(名色)이 식의 대상으로 분별된다.
그러므로 명색(名色)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그런 불완전한 명색이 차차 발달을 해서 육근이 생긴다.
즉, 명색이 불완전한 식(識)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나는데,
그 명색이 발달해 육입(六入, 六根)이 성립하게 된다.
그래서 명색에 연해 육입이 있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⑤ 육입(六入, 산스크리트어 sadayatana)-명색(名色)이
더욱 발달하면 심신(心身)의 여섯 가지 작용이 확실해진다.
즉, 눈(眼)ㆍ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ㆍ뜻(意)의
여섯 가지가 세분돼 발달한다.
이것을 육처 또는 육입(六入), 육근(六根)이라 한다.
육입(六入) 혹은 육근(六根)이란 인간 실존의 근저를 이루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지칭한다.
앞의 식(識)에는 6식이 있었고, 명색은 6경(境)을 말한다.
그리하여 여기 육입을 합쳐 18계(界)가 된다.
이 세상의 일체 구성요소인 18계는 어느 것이 먼저이고
나중이라고 할 것 없이, 인간 주관인 감관[6근=6입]과
그 감관에 대응하는 대상[6경-명색],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만날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인식작용[6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감각기관[6입]을 통해 식[6식]이 작용하게 돼 명색[6경]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대상을 마주할 때 그 대상에 대해 일단은
명칭과 형상[명색-6경]을 6입(6근)을 통해 받아들인다.
즉, 육입과 육경(명색)이 만난다. 그것을 촉이라 한다.
그리하여 육입으로 말미암아 촉(觸)이 있게 된다고 한다.
⑥ 촉(觸, 산스크리트어 sparsa) - 육근이 발달하면 개인의 경우,
이것은 꽃, 이것은 과자, 이것은 아빠, 이것은 엄마라고 식별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식별은 육입(六入)이 명색(名色-육경)과 접촉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촉(觸)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육입에 연해 촉이 있게 되는데,
촉(觸)이라고 하는 것은 심리학적 표현을 빌리면 감각이다.
촉이란 접촉을 말하며, 감각이란 접촉을 통해 일어난다.
그리고 눈으로 보는 것도 접촉이다. 촉이란 지각을 일으키는 일종의 심적인 힘이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육입)이 밖의 경계(육경)에 접촉하는 ―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촉(觸)은 마음작용들 가운데 하나로 근(根)⋅경(境)⋅식(識)이 어울려서,
즉 3사(三事)의 화합으로 이루어진다.
육근이 명색이라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라는 6경(境)을 만나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지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삼사화합이라 한다.
쉽게 말하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발생한다.
이 과정을 불교에서는 촉이라고 한다. 즉, 촉(觸)은 근ㆍ경ㆍ식이 접촉하는 것을 말하고,
수(受)는 그 근ㆍ경ㆍ식이 접촉됐을 때 일어나는 느낌을 말한다.
그래서 촉으로 말미암아 수(受-느낌)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⑦ 수(受, 산스크리트어 vedana) - 심신(心身)이 어느 정도 발달하고 사물을 식별하게 되면,
자연히 좋다든가, 싫다든가, 즐겁다든가, 슬프다든가 하는 감정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수(受)라고 한다. 즉, 수(受)라는 것은 감정이고, 감각[촉(觸)]이 일어나면
그 감각에 대해 감정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촉에 연해 일어나는 감수작용[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촉이 있으면 반드시 그 촉에 대한 느낌,
즉 감수작용(感受作用)이 수반되는데, 감수작용에는 즐거운(좋은) 것, 괴로운(싫은) 것,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 등 삼심수(三心受)가 있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해 삼심수(三心受) 중에서 한 가지 이상의 느낌이나 감정이 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접촉해서 느끼게 되는 괴로운 감정이 고수(苦受)이고,
즐거운 느낌은 낙수(樂受)이며,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또는 사수(捨受)라 한다.
감각기관[6입]과 그 대상[6경], 그리고 인식작용[6식] 등의 3요소가 만날 때
거기에서 지각을 일으키는 심적인 힘[촉(觸)]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수(受)가 발생하게 된다.
즉, 6입과 명색과 식의 접촉 위에서 생기는 고락, 불고락, 불고불락 등의 감수작용이 수(受)이다.
그러므로 수는 촉을 조건으로 해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로 말미암아 애(愛)가 생긴다.
⑧ 애(愛, 산스크리트어 trsna) - 심신(心身)이 발달해서 사물을 식별하게 되고,
자연히 좋다든가, 싫다든가 하는 감정이 생기는 가운데서 만족한 감정을 일으킬 경우,
곧 좋은 감정은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계속되기를 바란다.
반면에 싫은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싶어 한다.
즉, 애(愛)라는 것은 호오애증(好惡愛憎)의 감정이다.
이렇게 해서 수를 연해 애가 발생하게 되는데,
애(愛)란 앞서 수(受)에서 좋고 싫다는 느낌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서,
모든 중생들은 수에 의해서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세 가지 감정 중에 즐거움을 주는 그 대상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이 욕망의 만족을 바라는 열망을 갈애(渴愛)라 한다. 즉, 갈애는 맹렬한 욕망을 말한다.
이는 항상 능동적으로 만족을 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맹목적 욕망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다 무명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애는 자비와 같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으로서의 사랑, 집착의 사랑이다. 맹목적인 애념(愛念), 맹목적인 충동을 말한다.
고락 등의 감수작용이 강하면 그만큼 애증(愛憎)의 염(念)도 강해진다.
즉, 쾌락이 크면 그 쾌락을 가지려는 염이 더 강해지고,
고통이 크면 그 고통을 피하려는 염이 강해진다.
어린 승려가 고된 산사 수련을 겪다가
고향에 두고 온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참 나이의 젊은 스님에게는 이성에 대한 욕구가 치밀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런 사례들이 모두 애념이다. 더구나 수행이 안 된 무명의 애념은 말할 수 없이 강렬하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애를 번뇌 중에서 가장 심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수행에도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말한다.
촉(觸)은 근ㆍ경ㆍ식(根境識)이 접촉되는 것을 말하고,
수(受)는 그 근ㆍ경ㆍ식이 접촉됐을 때 느낌을 말한다.
그리고 애(愛)라고 하는 것은, 근ㆍ경ㆍ식이 접촉돼 느낌이 있으면
거기에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게 됨이다. 그리하여 애가 심해지면 취(取)로 발전하게 된다.
⑨ 취(取, 산스크리트어 upadana) - 인간은 ‘애(愛)’를 느낀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자꾸 추구하려는 욕망이 일어나고, 일단 얻은 것은 단단히 붙잡고,
놓아버리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을 취(取)라고 한다.
즉, 취(取)는 선택의 작용이다. 애(愛)에서 좋고 싫음이 생기기 때문에
좋은 것은 되도록 오래 두고 싶고, 가지고 싶고, 싫은 것은 그만두고 싶어서,
찰나찰나 선택작용이 생기는 것이 취(取)이다.
즉, 애(愛)를 연해 취가 일어나는데, 애에 의해 그 어떤 대상에게 사랑을 쏟아 부었을 때,
그 대상이 자신에게 즐거움(좋음)의 대상이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추구하는 즐거움의 대상을 자기가 가지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게 된다.
다른 말로 집착을 말하는 것으로서 애(愛)의 염(念)에서 일어나는
강한 취사선택(取捨選擇)의 행동으로서 취득해 가지려는 작용이 취(取)이다.
이러한 작용, 즉 집착하는 마음 - 취(取)가 강하면 강할수록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소유욕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유(有)라고 한다.
앞의 애(愛)는 마음속에 생기는 심한 애증의 생각인데 반해
취는 생각 뒤에 생기는 취사(取捨)에 대한 실제행동이다.
그리고 욕망에 의해 추구한 대상을 자기 소유화하려는 현상을 유라 한다.
따라서 취를 연해 유가 있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⑩ 유(有, 산스크리트어 bhava) - 취(取)에 의해서 즐거움의 대상을 취하려고 노력한다면,
어리석은 중생은 더 나아가서 소유하는 작업을 해서 그 대상을 기어이 자신이 가지려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유(有)라고 한다.
‘취(取)’는, 곧 선택하기 때문에 좋은 것은 소유하려고 한다.
그래서 유(有)는 차별을 뜻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가지려 하고,
싫은 것은 멀리 하려는 차별을 한다. 그리고 내 것ㆍ네 것을 구분하다가 보니,
원수다ㆍ친구다 하는 여러 가지 차별을 번거롭게 일으키며 갈등하게 되는데 이것이 유(有)이다.
유(有)는 업(業)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애(愛)와 취(取)로 인해 업(業)을 짓게 된다.
이때의 업은 행에서 지은 업보다 매우 강렬하다.
자기가 좋아 하는 것을 가지려 하다가 보니 강한 업(業)을 짓게 된다.
이와 같이 ‘취(取)’가 생겨나면
같은 사물에 대해 각기 좋은 것을 서로 가지려 하는 다툼의 감정을 가지게 되며,
따라서 다른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한 다툼의 감정, 다른 주장,
그런 차별심도 ‘유(有)’에 속한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불행과 사회의 부조화(不調和)가 마침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차별심-다른 감정, 곧 유(有)가 있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과의 대립이 생겨 다툼이 일어나서 고(苦)의 인생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의 고(苦)는 다시 다음 세상에서도 똑같이 전개된다.
즉, 근본원인인 무명(無明)을 없애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이와 같은 고(苦)의 윤회를 되풀이 할 따름이다.
무명(無明)을 없애지 않는 한, 할아버지 대(代)의 무명이 손자 대(代)로 계속 이어가게 된다.
또한 ‘유(有)’라는 글자엔 ‘있다(be), 된다(become)’의 두 가지 뜻이 포함돼 있다.
그 대상이 어떤 물질이어서 그것을 소유하게 된다면
‘있다, 없다’ 중에 "있다"가 되겠지만
그 대상이 어떤 물질이 아니고 생각이나 느낌, 사상, 이념일 때는 그것을 가지게 되면
"된다", "안 된다" 중에 "된다―이루어지다"가 되는 것이다.
취에 의해서 ― 취를 조건으로 즐거움의 대상을 취하려고 노력한다면,
모든 중생은 그 대상을 자신이 소유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완전히 자기 소유로 하는 것을 유라고 한다.
한번 취하면 그것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하려는 소유욕으로 인해서 경쟁하게 된다.
이러한 집착해서 가지려 함에 따라 업(業)이 형성된다.
그런데 업설에 의하면 업은 생(生)을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예로 들면, 사랑하고, 집착하고, 결국 결혼해서(소유해서), 아기가 태어난다.
아기를 낳는 게 바로 생이다. 그래서 유로 연해 생이 있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유(有)=업(業, karma)의 인연으로 ― 업을 조건으로 미래의 생이 있게 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12연기에서는 업이 과거에 행한 업과 지금 이 순간에 행하는 업으로 두 개의 업이 들어있다.
무명(無明) 다음에 나오는 ‘행(行)’은 지금 이전, 즉 과거에 행한 신⋅구⋅의 3업이다.
그리고 12연기에서 집착 다음에 ‘유(有)’로 표현되는 업의 생성은
지금 이 순간에 행하는 신⋅구⋅의 3업을 말한다.
즉, 과거에 행한 업을 원인으로 지금 이 순간이 있고,
지금 이 순간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새로 업을 행하는 것에 따라 미래 삶의 질이 결정된다.
⑪ 생(生, 산스크리트어 jati) - 앞서 ‘유(有)’가 있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과의 대립이 생겨 다툼이 일어나서 고(苦)의 인생이 전개된다고 했다.
‘생(生)’이란 사람이 태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이렇게 다툼이 일어나는 것,
고의 인생이 전개되는 것도 생이다.
이러한 인생의 고(苦)는 다시 다음 세상에서도 똑같이 전개된다. 그것이 생이다.
그리고 사랑을 해서 아기를 낳게 된다. 그런데 그 아기를 낳는 것 자체가 고를 생산하는 것이다.
고를 해결하지 않은 채 고(苦)를 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生)이란 고(苦)를 생산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근본 원인인 무명(無明)을 없애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이와 같은 고(苦)의 윤회를 되풀이 할 따름이다.
이와 같이 유에 연해 생이 발생하는데,
업(業)은 생을 있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업(業, karma)의 인연으로 ―
업을 조건으로 미래의 생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有)에 의해서 그것을 ‘있다, 또는 된다’가 되면,
그 다음 사물이나 생각이 생성되는데,
생(生)이란 단어는 모든 존재의 출생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감정이나 고(苦)가 생겨나는 것도 다 포함한다.
즉, 여기서 생이란, 알에서 태어나는 것,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
갑자기 태어나는 것, 형태가 있는 것, 형태가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 지각이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모두 포함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생각 자체만으로도 죽지 않겠다는 생각을 태어나게 ―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아기를 비롯한 물체의 생성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이 생기는 것도 모두 불교에서는 생(生)이라고 한다.
⑫ 노사(老死, 산스크리트어 jara-marana) - 태어남으로 머지않아 늙게 되고 드디어는 죽음이 온다.
생이 있게 되면 늙음과 죽음은 필연적이다.
이 노사(老死)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싫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죽음을 겁내고 싫어하는 것은,
육체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생명이 있는 상태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금생(今生)만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생에 의해서 태어나는 모든 것은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결국 늙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른 여러 가지 고(苦) ― 근심, 비애, 고통, 번뇌, 번민[우비고수뇌(憂悲苦愁惱)]이 발생한다.
이러한 열두 가지의 단계를 되풀이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이와 같이 무의미한 허상(虛像)이다.
인간은 다시 태어나도 역시 처음부터 불완전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
살아가면서, 좋다ㆍ싫다, 내 것이다ㆍ네 것이다, 하고
살아가는 동안에 늙어서 죽으면, 또 다시 태어나서는 역시 똑같은 삶을 되풀이 한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똑같이 되풀이 하는 것이 범부의 삶이다(윤회를 인정하는 경우를 말한다).
붓다는 늙음 ․ 죽음이라는 실존적 괴로움이 태어남[생(生)]을 조건으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방식으로 있음이라든가 집착 따위를 거슬러 올라가
결국은 무명을 조건으로 일체의 괴로움이 생겨나는 과정을 밝혀냈다.
그런데 노사는 단순하게 사람의 육체가 늙고 죽는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생각이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것
그 자체도 불교에서는 태어났다가 늙고 죽는다고 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사는 비단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정(有情) ․ 무정(無情), 삼라만상이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데, 이것 역시 노사인 것이다.
붓다의 교설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과 같은 맥락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말은 모든 것이 노사, 즉 성주괴공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무아(無我)라 하고, 공(空)이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