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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體性」 確保로 利涉大川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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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今까지 許皇后의 正體性과 關聯한 韓半島 渡來說은 印度·泰國·中國 等 三個國이다. 이를 考證하기 爲해 兒童文學家 故 李鐘琦先生(1929~2003)은 印度의 古代王國인 阿踰陀를 踏驗(1976年), 阿踰陀國 公主가 liman海流를 利用한 渡來說을 考證하였고, 그곳에서 印度의 作家이자 古代史家인 Amrit Lal Nagar 博士로부터 「1世紀 以後, Ayodha 王族이 泰國에 植民地을 세운 後, 또 다른 곳으로 移住했을 可能性이 韓半島」라며 泰國의 「Ayutia」說을 提起하였다. 또 古考學者 金秉模博士는 中國 四川省 安岳縣(普州)를 踏査하여 「許皇后가 阿踰陀國의 亡國流民으로 西南絲路를 通해 普州로 移住한 後, 다시 長江을 타고 韓半島南端으로 渡來한 것」 이라고 擧論하였다. 또한 中國四川省文物管理所는 四川省社會科學院 段劉先生의 論據를 中心으로 「許皇后는 東漢叛亂民의 身分으로 韓半島로 건너간 中國의 普州사람」이라고 主張하고 있다.
첫째, 一然스님이 撰述한 「三國遺事」의 <駕洛國記>를 記錄한, 當時 金官知州事 文人의 글(古記引用)을 史實대로 認定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中國四川省文物管理所가 主張하는 雙魚文樣은 安岳縣과 金海의 首露王陵(銀河寺의 神魚)에서만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라 印度를 비롯한 東亞細亞 여러곳에서도 傳해진 것이며, 時間的으로도 紀元前7世紀부터 20世紀까지 걸쳐 있다는 것이다. <曺元榮·陜川博物館學藝士, 本誌 2006年11月號發表> 셋째, 許皇后의 號稱인 「普州太后」의 「普州」가 中國의 安岳縣을 가르키는 固有名詞가 아니라 普通名詞로도 使用할 수 있다는 點이다. 卽 [普]字의 字義가 ① 넓을 普(博也) ② 클 普(大也) ③ 두루 普(변也)로써 「넓은 고을」「큰 나라」等으로 解釋하여 「駕洛國」이라는 部族國家보다는 더 큰 나라에서 왔음을 뜻하는 「宅號晋州」로 使用했다는 것이다. 넷째, 現在 우리나라에서 일컫고 있는 地名가운데 中國地名과 幷用하거나 類似名稱은 「安岳」外도 한 두 곳이 아니란 點이다. 例컨대, 京畿道의 利川과 廣州는 中國湖北省의 「利川」과 廣東省의 「廣州」와 같고, 慶南의 河東과 崑陽, 그리고 金海의 大同은 山東省의 「河東」과도 같다. 이러한 幷用名稱은 中國에서 由來한 곳도 없진 않겠지만, 漢字文化圈에서는 普遍的現狀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平北 熙川郡에 있는 峨眉山과 釜山 峨眉洞의 「峨眉山」을 四川省 「峨眉山」에서 由來한 것이라고 主張한다면 이에 몇 사람이나 首肯하겠는가, 이다. 다섯째, 우리나라(韓半島) 南部地方에 남아있는 生活風習과 現在 印度人의 生活習俗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共通性과 類似點을 들 수 있다. (1) 韓國과 印度의 洗濯風習이다. 現在 우리나라에서는 都·農間에도 사라지고 있는 風習이지만 印度에서는 至今까지도 洗濯物을 빨 때는 냇가의 징금다리(돌)나 바위틈에서 돌을 利用해서 땟국을 치대거나 문지른 다음, 쥐어 비틀어서 바위나 풀섶에 말리는 一名「돌빨레이다. (2) 지게(褓負)벌이 이다. 首都 Newdeli를 비롯한 Bombay와 Moombey 等 大都市에는 시골(村落)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사람들로 城市를 이룬다. 그러나 人力車를 除外한 大多數의 사람들은 모두 「지게벌이」로써 하나의 職業群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게」가 우리와 恰似한 點인 것이다. (3) 소(牛)몰이 耕作法이다. 印度의 農村에서도 우리와 같이 소(牛)를 利用한 耕作法인데, 소 머리에 둘러 씌운 멍에가 우리의 소 멍에와 같다는 點이다. 特히 두 마리의 소를 利用한 「雙頭멍예와 「쟁기」는 其 規格이나 材質에 있어도 똑같아 驚歎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連하여 「駕洛國」의 「駕」字가 멍에 駕(馬在中), 멍에 맬 駕(馭也), 임금이 탄 수레 駕(御車駕)로써 許皇后의 韓半島渡來와 「駕洛國」國號와도 聯關性이 있다는 點이다. (4) 龍王信仰이다. Gangis 江의 回敎徒나 佛敎徒의 巡禮儀式中, 江街에서나 或은 半身入浴한체 「촛불祈禱」하는것과, 우리나라 島嶼地方(中部以北엔 祭天·山岳信仰)의 「龍王祈禱」및 佛敎徒의 「流燈行事」가 樣式의 差異는 있을 뿐 國泰民安과 安心立命을 念願하는 其 意義는 같다는 點이다. (5) 거릇배의 模型이다. 韓·中·日의 「거릇배」는 其 模型에 있어 조금씩 差異가 있다. 이를테면 한국의 거릇배는 앞이 뽀족하고 뒤가 方型(前尖後方)인 反面, 中國은 前後가 圓型에 가깝고, 日本은 前後가 方型에 가깝다. 그런데 印度의 海岸街나 江街의 배들은 우리와 같은 前尖後方이다. 各國의 生活風習을 批交할 때, 바닷가의 거릇배가 類似하다는 좀체 드문 現狀이라 할 것이다. (6) 蛇佛像이다. 뱀(蛇)이 佛身을 감고 있는 이같은 石彫像은 金海의 明月寺址와 全南 昇州 仙岩寺(一柱門入口) 等 南道地方의 古代寺刹에서만 볼 수 있는 特徵이다. 이런 「蛇佛像」은 印度 및 南方佛敎圈以外에서는 볼수 없는 特異한 現狀인 것이다. (7) 「家族中心的인 삶」과 「進步的인 世界觀」이다. 現在 印度人들을 「世界化」의 물결속에서도 新·舊가 幷存하는 삶을 살고 있다. 따라서 이들도 宗敎指向的인 삶과 同時에 家族中心的 世界觀을 固守하는 側과, 個人主義的이면서도 社會進步的인 世界觀으로 社會葛藤을 보이는 것도 우리와 같은 現狀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自身의 運命으로 받아들이는 善한 삶의 態度이다. 그래서 人力車나 지게벌이로 生計를 延命하더라도 언제나 맑고 구김살 없는 堂堂한 모습이다. (8) 中國渡來說은 보다 더 檢定이 必要하다. 왜냐하면 金秉模博士가 提示한 「西南絲路를 通한 阿踰陀國 流民說」과, 四川省文物管理所가 主張하는 「東漢叛亂民의 普州說」에 따른「Ganper 王朝의 滅亡(世紀前 30年)과 許皇后가 韓半島에 渡來한 西紀48年間의 78年空白說」은 論理的이고 構體的인 論據提示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實際與否에 있어서는 많은 學者들의 考證과 檢定이 要求되는 것이다. 特히 中國官學의 老獪한 論據提示는 今世紀初부터 始作된 「東北工程」과 같은 「東南工程」의 色彩가 農厚하여 論據의 斬新性에 있어서나 意圖에 疑心되는바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故 李丙燾博士는 1974年 「歷史學報 第17~18號 <首露王考>」에서 다음과 같은 見解를 披瀝한 바 있다. 首露王의 諱[首露]는 여섯알(六卵化爲童子)에서 먼저 태어났다(始現故諱首露)고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 아니고, 上神聖을 뜻하는 [수리], [솔]의 寫音으로 高句麗의 大解朱留王의 [朱留]와 같은 말일것이다. 그리고 注意할 것은 [首露]는 本伽倻의 임금이 되고, 나머지 다섯명은 五伽倻의 임금이 되었다는 句節이다. 이것은 무엇을 意味하느냐, 하면 首露王이 六伽倻의 聯盟을 結成할 때 最初의 盟主로 君臨하였던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하며, 또한 그는 本伽倻 部族國家의 始祖라기보다 中始祖格으로 보는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의 出生도 記錄한 것 보다는 좀더 後歲로 보아야 할것이다. 卽, 駕洛國의 마지막 王인 仇亥王이 首露王의 九代孫이고, 新羅의 金庾信(590~673)이 首露의 12代孫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면 首露王은 仇亥王으로부터 約3百餘年前이고, 金庾信으로부터는 約360餘年前의 人物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首露王의 時代는 大略3世紀에 該當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首露王의 崩御年度는 正確할런지 몰라도 出生年度는 너무나 加工的이었기 때문에 그의 歲壽를 158歲로 만들게 된것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三國遺事·駕洛國記 譯註(8)(38)·大洋書籍1975> 이러한 李丙燾博士의 見解에 따른다면 首露王은 紀元2世紀의 人物로 看做할수 있다. 그렇다면 許皇后의 渡來時期도 西紀48年이 아니라, 中國渡來說의 「Ganper王調」滅亡에 關한 約78年間의 空白期를 勘案한다면 西紀136年이 된다. 따라서 首露王과 許皇后의 實際歲壽도 約80餘歲로 整理할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古代國家의 建國과 人物의 加工的 潤色(embellishment)은 駕洛國外 新羅·高句麗·百濟의 建國에서도 나타나 있으므로 史論으로 克復할수 있다는 것이 筆者의 見解이다.
以에 따라 金明坤 文光部長官에게 다음과 같이 建議하는 바다. 金長官은 지난해 7月 5日, 就任100日을 맞은 記者懇談會에서 이같이 밝혔다. 「民族文化는 우리 文化의 始原임에도 그동안 其 重要性만큼 注目받지 못했다. 따라서 神話와 傳說, 宗敎와 哲學, 그리고 歷史속에 숨겨진 우리 文化의 뿌리를 찾아 現代的으로 活用하기 爲한 事業을 重點的으로 推進할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올해(2006年) 約2百餘件의 文化部 懸案事業中 約30餘件을 力點事業으로 選定하여 推進할것」이라면서 文化의 힘이 未來의 韓國을 바꾼다는 信念으로 일할 것이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民族文化의 再創造를 爲해 ① 民族文化의 原型을 探究해서 文化·藝術의 創作要素를 活用할 것이며, ② 이를 爲해서 口傳 또는 生活習俗形態로 傳해지는 資料뿐 아니라, 個人·個別機關에서 이뤄진 學術的 硏究成果들을 蒐集·整理하여 活用方案을 定할 것이다. ③ 이같은 硏究成果를 土臺로 來年(2007年)에 基本計劃을 樹立하여 誠實히 遂行할 것 이라며, 其 事業의 項目과 方法까지 具體的으로 提示하였다. 이러한 懇談會를 지켜 본 筆者로서는 金長官의 事業構想이 꼭 「歷史속에 묻힌 伽倻王國」의 復元을 念頭에 두고 말한 것과 같이 받아들였다. 이같은 義氣는 筆者뿐 아니라 伽倻史 復元에 獻身해온 諸方逸士들의 한결같은 所懷였었다. 따라서 筆者가 建議코자 하는것은 國務會議를 거쳐야 할 事案도 아니다. 長官裁量으로 可能한 「伽倻史論叢」發刊이다. 다시말해서 「論叢發刊」으로 伽倻史에 對한 各界各層의 論據들을 公募하여 妥當性있는 論考로 「國史編纂委員會」에 넘기자는 것이다. 이같은 「論叢發刊」은 莫大한 豫算이 드는 일도 아니다. 내친김에 말하자면 「釜山市」「慶尙南·北道」 「全羅南道」等의 地自體나 各 大學 및 言論社 等 「個別機關」에서도 할 수 있으며, 莫企業과 日本內 親韓媒體인 「朝日新聞」에서도 關心가질 만큼 손쉬운 일이다. 그러나 事案이 事案인 만큼 「伽倻史論叢」은 名實相符하게 政府部處인 「文光部」가 發刊해야 圓滿히 遂行될 수 있기 때문이다. 周知하듯, 1950年代 李承晩政府에서는 政府樹立後, 「禮樂刑政」의 國政均衡을 爲해 「國立國樂院」을 設立, 6.25戰亂渦中에서도 國樂院을 釜山 龍頭山公園 入口(舊 釜山技術工高)로 移住시켰으며, 戰亂後 貧困한 國庫에서도 「朝鮮王朝實錄52券」과 「高麗大藏經23券」을 縮刷·韋裝으로 펴내 文化治積을 이뤄냈다. 또 第5共和國의 經濟政策中에서도 「東國輿地勝覽」과 「東文選」等의 國譯事業으로 治積을 남겼다. 하지만 이보다 더 崇尙할 일은 金富軾先生이 우리의 先住者들이 남긴, 「古記」를 「史記」로 撰述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一然스님이 「史記」에 빠뜨렸던 逸事遺聞들을 「遺事」로써 撰述치 않았더라면 昨今의 「東北工程」과 「東南工程」, 그리고 日本의 「任那日本府說」의 三角派高를 어떻게 對應할 수 있었을 것인가,에 戰慄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史料」의 限界에서 벗어날 수 없는 「古記」를 客觀的 「史書」로 評價될 수 있게 한 雷川 金富軾先生과 普覺國尊 一然禪師의 歷史意識에 敬意를 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遺史」의 落張과 毁損에 對備하여 重刊, 우리 正體性의 原型과 思想史를 保全시킨 全平君 李繼福先生 또한 追念하지 않을 수 없다. 李繼福先生은 朝鮮中宗7年(1612), 慶州鎭의 兵馬節制使로 赴任한 後, 「遺事의 重刊」을 爲해 完本求入을 搜所聞하였으나 求하지 못했다. 그러던 次에 星州牧使 權 輳가 完本을 求하여 주자 定難功臣 安과 慶尙道都事 朴 佺, 慶州鎭兵馬節制都尉 李 瑠, 生員 崔起潼, 李山甫等 諸位들의 協贊으로 重刊하여 其中 唯一本이 高麗大學校에 所藏(晩松 全完燮文庫)되어 今日까지 서울大 奎章閣本과 함께 傳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筆者가 알고 있는 金明坤 長官의 삶의 座標는 立身·官僚指向과는 拒里 가 먼 脫世間的 삶(liberlist)으로 一貫해온 것으로 안다. 그래서 지난해 記者懇談會에서 밝힌 「民族文化의 原型」과 이것의 「再創造政策」을 所信대로 推進할 것으로 믿어 疑心치 않는다. 以에 따라 此際의 「伽倻史論叢」發刊에도 各別한 洞察이 있기를 促求하는 바이다.
「企業은 時速 100mile의 速度로 變化하는데 比해 勞組는 30mile, 政府는 25mile, 學校는 10mile, 政治는 3mile의 走行速度로 變化를 沮害(interference)한다」「100萬名의 勞動者들이 失職했을 때 100萬個의 일자리를 創出해야한다는 假定은 知識集約型 經濟에서는 錯誤이다. 失業者들이 새로운 技術을 習得할때면, 經濟가 要求하는 새로운 知識이 또 다른 變化를 要求하기 때문이다」「第1물결(農耕社會)은 耕作하는것(growing), 第2물결(産業社會)은 增産하는것(making)에 依存했다면, 第3물결(情報社會)은 奉仕하는것(servicing)과 思惟하는것(thinking), 그리고 知識(knowing)과 經驗(experiencing) 等을 基盤으로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情報의 洪水속에서 無用知識(obsoledge;obsolete와 knowledge의 合成語)을 濾過하는 能力이야 말로 「未來의 富」를 決定짓는 核心要素가 될것』이라고 分析·指摘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第3물결은 「世界化」의 動因이 되어 昨今 世界各國은 富國强兵과 國粹主義로 變質되면서 東北亞는 새로운 緊張局面과 同時에 退行的 歷史戰爭으로 展開되고 있는 것이다.
元胎肇啓하니 利眼初明하고 → 太初에 하늘이 열리니, 비로소 온누리 밝았고 / 사람은 태어 났으나, 君王의 자리는 이루지 못했도다 / 中原은 累世를 거듭하고, 東國은 三國으로 나눠 섰으니 / 新羅가 먼저 자리잡고, 駕洛은 뒤에 이뤄졌도다 / 스스로 다스릴 이 없으니, 뉘라서 百姓을 보살피랴 / 마침내 玄妙한 造化로, 創生을 보살핌인저 / 여기 符命을 點指하여, 精靈을 나투었나니 / 山中에 알을 내릴땐, 안개속에 그 形容을 감추었도다 / 안은 漠漠키 짝이없고, 밖 또한 어둡고 어두웠도다 / 바라보면 形象이 없는 듯 하나, 귀 기울이면 소리 들리나니 / 무리들 노래지어 아뢰고, 여럿사람 춤으로 드러냈도다 / 한 이레가 지난 後, 暫時 고요하게 되었으니 / 바람불어 구름걷히고, 하늘 더욱 푸르렀으라 / 여섯의 둥근 알이, 자주빛 끈에 드리워 졌으니 / 낯선땅 四方에서 모인 사람들, 지붕위 기와를 잇댄것 같았으니 / 구경 나온 사람들 담벼락과 같았고, 치어다 보는 사람 국 끓듯 하였도다 / 다섯은 各己 제 고을로 가고, 한 사람은 이 城에 머무렀으니 / 같은 때 같은 자취로, 형 같고 아우와 같았도다 / 참으로 하늘이 德을 낳으사, 世上을 爲해 規範을 이뤘음이라 / 王位에 처음오르사, 온 세상 맑아오고 / 宮闕은 옛을 따랐고, 흙계단은 외려 平坦했도다 / 萬事를 처음부터 힘써, 뭇 政事를 폈으니 / 기울지도 얽매임도 없이, 오로지 한 마음으로 精誠을 다 했도다 / 길을 가는 者는 길을 讓步했고, 農夫는 밭 이랑을 讓步했도다 / 온 나라가 서로 믿고 依支하니, 萬百姓은 泰平盛歲를 맞아거늘 / 풀잎에 맺힌 이슬 忽然이 사라지듯, 大椿을 이루지 못하매 / 王과 王后 命을 바꾸니, 나라와 百姓이 모두 슬퍼했도다 / 金은 脈으로 서로 잇고, 玉은 그 소리로 떨치나니 / 子孫이 끊어지지 않고, 祠堂의 향내는 멀리 퍼졌도다 / 비록 歲月은 흘러간다 하여도, 規範은 決코 기울지 아니함이로다 끝으로 中國의 「東北工程」에 따른 斯界의 對應論據로써 「東夷列傳」을 添附코자 한다. 이 文獻은 지난해 7月 16日, 亞山學會 第18回 學術發表會에서 朴銀鎬 先生(龜尾中正會)이 發表한 論文가운데 一文項을 拔萃한 것이다. 原出處는 BC268年 戰國時代(魏·安釐王10年) 孔府家(曲阜)의 7代孫인 孔斌이 쓴 것으로 檀奇古史의 附錄이다.
→ 옛적 東方에 오래된 나라가 있어 其 이름을 東夷라 일렀도다. 其 나라의 方位는 箕의 그트머리이오, 땅은 朝鮮의 白頭山에 接해 있도다. 처음 「檀君」이라는 神人이 있어 그를 따르는 아홉 部族이 推戴하여 임금이 되었도다. 이때가 堯임금과 같은 時代인지라, 舜임금이 東夷에서 出生하여 中國으로 들어와 天子가 되었거늘, 其 다스림이 特出하여 歷代 임금 가운데 으뜸이었도다. ※ 孔斌(字는 子順)은 孔子의 7代孫으로 只今으로부터 約2300餘年前의 人物이다.<筆者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