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적인 사망원인은 방광과 자궁파열로 인한 과다출혈.
하도 걷어차이고 하루도 거르지않고
성적인 학대에 고문에..
이화학당의 장 윌터가 어렵게 돈을주고 면회를 갔더니
맞잡은 손은 이미 시커멓게 썩어서 핏물이 줄줄 흐를정도였고
출옥을 이틀앞둔 9월 28일 오전 7시경에 1평짜리
쪼그린 독방에서 사망.
당시 기온이 30도를 넘어서는 무더위에
열흘이 넘도록 쓰레기더미속 시신으로 가매장 해두었다가
이화학당 측에서 국제사회에 고발하겠다는 소장을 접수하자마자
대충 수의를 입혀서 내보냄.
시신에서 핏물인지 다른물인지 알수없을 정도로
붉은 물이 흘러나와서 하얀수의가 붉게 물들어서...
.............
3.1만세의거 전문가인 그는 기존의 자료와 현장답사를 통해 열사의 생애를 복원해냈습니다.
그가 쓴 책을 통해 열사의 시신 인도와 장례식 부분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수감 당시 간수들 얼마나 발길로 걷어찼던지 열사의 방광이 파열됐습니다.
당시 이화학당의 월터 학당장 서리가 서대문형무소 병사(病舍)로 면회를 가서 보니 열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고, 병색이 완연했다고 합니다.
특히 맞잡은 손의 자국이 그대로 눌린 채로 있어 제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손가락으로 눌러 만져보니 살이 썩어서 손에 피가 묻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월터 학당장 서리가 치료를 요청했으나 감옥측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10월 12일, 이화학당의 문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몇몇 학생들이 나가보니 사람들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들것을 하나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 들것에는 열사가 붉은 수의를 입은 채 시신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얼마 안있으면 곧 출옥할 줄 알고 열사을 위해 옷과 머리핀을 준비했던 친구들은
그 참혹한 광경을 보고 기겁을 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유관순 오빠 유우석 선생
열사가 숨을 거둔 9월 28일은 여름 끝자락이어서 아직은 더운 날씨입니다.
게다가 열사는 당시 방광 파열 등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감옥측은 열사의 시신을 근 보름간이나 가매장했다가 인계한 것입니다.
그러니 시신 인계 당시 그 상태가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다만, 시신이 여섯 토막으로 훼손됐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시신을 인수받은 당일 이화학당측은 열사의 교우들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였습니다.
이틀 뒤인 10월 14일, 오빠 유우석 등 몇 사람만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열사의 시신은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곳이 군용기지가 되면서 파헤쳐져 열사의 시신은 사라졌습니다.
당시 일본군측이 이장(移葬) 공고를 냈을 테니지만 제대로 챙기지 못한 탓입니다.
끝으로 시신 훼손설과 관련해 이정은 연구원이 쓴 책의 내용을 아래 소개합니다.
“서대문 감옥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받았을 때 유관순의 시신이 여섯 토막으로 절단되어 있었다는 말들이 많이 있었다. 해방 후 제작된 영화에서 그렇게 그렸고 많은 유관순 이야기 책에서 그렇게 그렸다. 장례식을 직접 주관하고 참여했던 이화학당의 월터 학당장이나 오빠 유우석은 시신 절단설을 부정하였다.”
다시 3.1절을 맞으며 92년 전 그날의 함성을 떠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