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토막 - 요즈음 쓰는 글 중에서

[나도 백사]

앓아오던 통풍이 날로 심해져 거동도 힘들어지자 황제는 아우 오스트리아 왕 페르디난트 1세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 물려주고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조용하게 마무리 지을 마음을 먹었다. 남다른 의상 감각도 아내와 같이 사라졌는지 흰 셔츠만 빼고는 구두와 양말까지 모두 검은색만 고집한 지 십수 년, 여행 떠날 때마다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더러 그리게 한 여러 아내 모습 중 하나는 꼭 챙겨 넣었다. 이사벨라 초상화,  이사벨라와 카를···. 재혼도 마다하고.

황제는 세르비아의 알카자르 궁에서 두 번째 대면하던 아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혼담은 그가 스페인 왕위에 오른 직후 어느 카스티야 귀족이 제안했었다.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 딸 이사벨라가 소생의 사촌누이이온데 비로 맞으셔서 포르투갈과 동맹을 굳히시면 어떠실지. 내 나이 18세, 결혼은 급할 것 없네, 마침 마누엘이 홀아비라니 동맹이 필요하다면 내 동생을 비로 보내면 되겠구먼.

4년 후. 포르투갈보다는 잉글랜드가 유리하지 않을까? 그는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6살 난 메리 공주와 약혼해두고 신붓감이 자라기를 천천히 기다리던 8년 동안 마음이 변했다. 나이 더 들기 전에 후사를 걱정해야 합니다, 재촉하는 신하들도 있었다.

일진일퇴 4달을 끌던 이탈리아 파비아 전투에서 마지막 4시간 동안 9천 명으로 3만여 명의 프랑스군을 대파한 직후였다. 이제 잉글랜드와 동맹은 필요 없겠어. 지난 2년여 이탈리아에서 치른 몇 차례 전쟁 때문에 스페인 재정은 말이 아니었다. 카를은 8년 전의 혼담을 떠올렸다. 이사벨라 공주는 아직도 미혼. 신부의 지참금은 거금 금화 90만 레알. 그 돈이면 해결된다.

약 30년 전 조부는 카스티야 왕에게 겹사돈 요청을 했었다.

‘둘째 따님을 우리 아들 미남공에게 주시고 그 대신 미거한 우리 딸을 며느리로 거두어주시면 어떠실지…?’

이번에 카를은 포르투갈 왕에게 친서를 보내어 자기 머리를 자기가 깎았다.

‘소중한 여동생을 내게 보내 주시고 사랑하는 내 여동생을 왕께서 비로 삼으면 어떠실지···?’

그쪽도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지체하지 않고 쾌히 승낙한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우선 카를은 헨리 8세에게 일이 여의치 않게 풀려 약혼을 취소할 수밖에 없는 사정에 놓였다는 정중한 편지를 썼다. 일사천리로 막내 여동생이 포르투갈 왕의 왕비가 되는 동안 파비아전투를 진두지휘하다가 생포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스페인 왕국의 궁이 있는 마드리드까지 끌려와 감금되어 있었다.

딱 1년을 감금당한 끝에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부르고뉴를 넘기고 플랑드르, 이탈리아 그리고 부르고뉴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뿐 아니라 황제의 여동생을 왕비로 삼아 카를을 매형으로 섬기겠다는 서약을 하고 이를 보증하기 위해 동생 2명을 인질로 보내겠다는 조약문서에 서명했다. 지난 몇 년 교황과 손을 잡고 이탈리아에 쳐들어가 합스부르크 왕령을 찝쩍거리던 왕 프랑수아가 두 인질을 잡혀 놓고 코가 석 자나 빠진 채로 마드리드를 떠난 지 나흘째, 참 날씨도 화창하고 상쾌하던 그날이 아마 3월 10일이었지···. 카를은 이사벨라를 만나기로 한 세비야의 알카자르 궁을 찾았다. 1년쯤 전 여동생 결혼식에서 본 후로 두 번째. 이사벨라를 보자마자 카를은 아름다운 모습에 넋이 나갔다. 저번에는 왜 몰랐지. 그때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던 탓이었나. 그녀는 23살. 딱 3살 아래. 스페인어에도 능숙한 그녀는 카를의 관심사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애교 넘치는 눈웃음으로 깊은 관심을 표시했다. 몇 년을 끌던 문제를 홀가분하게 벗어던진 사내의 유쾌한 모습은 그녀 눈에도 참 보기 좋았을 것이다. 얘기를 나눌수록 둘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어 한나절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카를은 안다. 저 아름다운 검은 눈은 나를 속일 수 없다. 지참금 한 푼 없대도 그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단 하루도 미룰 것 없다. 만찬 시작 전에 세비야 대성당의 대주교가 달려왔다. 그날 자정 직후, 궁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교사절 홀 금 모래 은하수 같은 돔아래에 부랴부랴 준비한 결혼식장에서 둘은 친인척이나 축하사절 하나 없이 조용하고도 엄숙한 결혼식을 치렀다. 올 때는 따로따로 수행해 온 마차 행렬은 식이 끝나자마자 하나의 신혼 행렬로 바뀌어 신랑과 신부를 태우고 밤이 새도록 달렸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궁에서 신혼부부는 일출을 바라보면서 별나고도 뜨거운 합방을 시작했다.

부왕 미남공을 처음 본 날 정신을 잃었다던 모후, 카스티야 공주. 이번에는 남녀가 바뀌었다. 겹사돈 혼인과 상속으로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을 다 차지하기에 성공한 합스부르크 왕가는 포르투갈과 겹사돈을 맺어 이베리아반도에 든든한 세력을 구축했다.

황제가 순행을 나서면 몇 달, 더러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그보다 오래 궁을 비우기 보통이었다. 황후는 그때마다 그가 비운 자리를 빈틈없이 메꾸는 훌륭한 섭정이었다. 카를이 보기에 아내의 정치적인 감각은 여느 탁월한 군주를 훨씬 뛰어넘었다. 그런 아내가 36세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으니. 7번째 임신을 3개월 만에 유산한 직후였다.

카를은 스페인에 있는 아들 펠리페 2세를 브뤼셀로 불러들였다. 상처한 지 8년이 된 22살 홀아비 황태자는 사촌 누나 내외에게 8살 된 아들과 섭정을 맡기고 브뤼셀에 가는 길에 밀라노 공국과 독일 여러 제후국부터 거쳤다. 베네치아 대사가 본국에 보낸 보고대로 의상 감각이 세련되고 예절 바르고 몸가짐이 우아하고 둥근 얼굴에 엷은 푸른색 눈 그리고 날씬한 체구를 가진 그는 연회와 무도회 자리마다 왕족들과 귀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유럽의 어느 군주보다 더 많은 나라를 물려받을 홀아비 황태자 아닌가. 왕녀들은 다투어 그와 춤을 추거나 은밀한 눈짓이나 몸짓을 나누려고 애썼다. 집안 내력이 되어버린 주걱턱이나 튀어나온 입술을 가진 부친이나 저지대 총독 여동생과 달리 멀끔한 얼굴을 지닌 미남자였다. 그렇지만 재치있는 대화는 무리였다. 카스티야에서 태어나 이번 여행으로 이베리아반도를 처음 떠났고, 라틴어와 불어를 배웠지만 써먹을 기회도 그리 없었으니 통역이 끼어야 할 지경이었다. 사람들의 생각도 그와는 같지 않았다. 부친의 루터교에 대한 정책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에게 작센 공국의 모리츠 공은 아무리 봐준다고 해도 화형이 마땅한 이교도에 불과했다.

저지대에서는 황태자의 환영식부터 저지대 순행에 이르기까지 빌럼이 수행원으로 발탁되었다. 아들에게 밀라노 공국, 시칠리아 왕국 그리고 나폴리 왕국부터 물려준 후 부르고뉴 저지대와 스페인을 하나씩 물려주고 남미와 동남아 식민지도 같이 물려주기로 마음을 정했지만, 저지대 17개 지방을 말썽 없이 다스리려면 스페인과 달리 정교한 요령이 필요하다고 황제는 생각했다. 아들을 브뤼셀에 불러들인 이유였다.

안트베르펜 부두에 나가 황태자 일행을 맞이한 빌럼은 낮 순시가 끝나면 저녁마다 연회를 벌였다. 촌스러운 스페인이나 독일과 달리 저지대에는 도시마다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풍성했다. 엄격한 가톨릭 신앙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탈리아 도시처럼 성적으로 느슨한 데가 많았다. 부유한 상인들과 은행가들이 많이 모여 사는 안트베르펜은 특히 그랬다. 갖가지 요리와 술 그리고 천을 아낄 수 있는 대로 아낀 옷을 걸친 요정 차림 아가씨들이 환대하는 연회, 이어지는 이차 그리고 아침 해장에 이르기까지 16살 빌럼은 현지 귀족이나 유지들과 함께 홀아비 황태자를 극진하게 모셨다. 며칠이 지나면서 빌럼은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왕이 되면 나사우-오라녀 공국의 자신은 당연히 그의 봉신인데 대하는 품이 왠지 마뜩잖았다.

‘내가 잘못한 게 뭘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빌럼의 개방적인 성품이 장점이었지만 왕자에게는 불편한 점이 되고 있음을 빌럼 자신은 깨닫지 못했다. 어린 빌럼이 더 당당해 보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더 쉽게 친해지는 것이 꼭 언어 탓만 같지는 않았다. 부왕이 저놈에게 홀딱 넘어간 까닭이 저것이란 말인가···? 날이 갈수록 펠리페의 심사가 꼬이기 시작했다.

플랑드르와 브라반트 순행을 끝내고 브뤼셀 황궁에 온 아들에게 황제가 당부했다.

“플랑드르 놈들은 어딜 가도 꿀릴 데가 없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이야. 눈앞에 자주 나타나서 저 인간들 호감을 얻어야 해.”

이번 부자간의 대면은 6년 만이다. 황제는 스페인을 아들에게 맡겨놓고 신성로마제국과 다른 나라들을 쉼 없이 순행하면서 주로 브뤼셀에 머물었던 것이다. 아들에게도 그러기를 요구했다.

“플랑드르 사람들은 자주 만나 너를 이해시켜야 해. 네가 그들을 편하게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어라. 신뢰부터 얻어야 해.”

그로부터 이 년이 지나 열여덟 살에 기병대 장교가 된 빌럼은 황제의 명을 받아 피레네 부근 전투에 나가 큰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고속 승진해 스물두 살에 황제의 근위부대 지휘관으로 발탁되었다. 어느 날 그는 왕족, 제후 그리고 귀족들이 두 눈을 의심하게 하는 만드는 사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펠리페가 합스부르크 스페인 왕위를 양위 받는 브뤼셀 궁 식장에서 평소 앓던 통풍 때문에 황제는 입장할 때부터 빌럼의 부축을 받았다. 황제는 식이 끝날 때까지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떼지 않았다. 황제가 통풍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 광경은 누가 보더라도 빌럼을 띄우기 위한 연출로 보였다.

‘아버지가 아들인 나보다 저 녀석을 더 신임하는 까닭이 뭘까? 저놈의 뻔뻔한 붙임성에다 탁 트인 듯 뵈는 인간성은···, 저게 정말 저놈의 타고난 본성일까 아니면 가식일까···?’

이날의 공식적인 주인공은 펠리페였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빌럼에게 다 몰렸다. 펠리페는 죽었다가 깨도 자신에게는 없는 그런 성품이 부러운 만큼이나 질시하고 의심하는 마음도 참기 어려웠다. 자기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3년 후, 황제가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왕위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위를 아우 페르디난트에게 양위하는 의식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다. 빌럼은 제후들과 선제후들 앞에서 황제의 칙령을 포고하고 오스트리아, 항가리·크로아티아, 보헤미아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을 차질없이 물려주고 물려받는 절차를 감독하는 중책까지 수행했다. 선제후들이 빌럼의 정치적인 위상을 다시 확인하게 만든 계기였다. 연이어 빌럼은 저지대의 국정자문위원으로, 그 이듬해에는 홀란드, 제일란트 그리고 위트레흐트 3개 지방의 지사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프랑슈콩테까지 맡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치까지 올랐다.

퇴위에 필요한 절차를 대부분 끝낸 황제는 화가 티치아노를 시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묘사한 ‘신의 나라’에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가족석을 예약해 두었다. 구름을 탄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을 찬양할 수 있는 앞자리에. 아들 펠리페 2세, 세 딸, 죽은 아내 그리고 자신은 초록색 의상을 걸친 성모 마리아, 복음서를 펼쳐 든 세례요한, 다윗왕, 모세 그리고 노아보다도 앞자리에. 주님의 오른쪽에.

[김웅한]

어느 백작(백사가 아니라)의 세기를 넘은 현신, 빙의? 걸 기대 !!!

[김낙호]

대단하십니다.
몇 번을 읽어도 족보파악이 잘 안되는데....
이 걸 다 꿰고 엮어나가시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나도 백사]

딸들을 동맹을 맺었다가 뒤통수도 때렸다가 땅도 따먹는 도구로 써먹었으니
중세 유럽왕가들 혼인 족보는 개 족보나 다름없고
이름도 같은 이름에 로마 숫자로 구별될 뿐인 경우가 많아
엑셀 쉬트로도 정리가 불가할 정도지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