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흥 병원에 입사한 지 올해 5년 하고 벌써 4개월이 지났다.
시골 병원에 있다가 여기 도시로 나오니 많은 것이 좋아보였다. 5년 전 처음 세흥병원에 왔을 때뿐 아니라 지금도 그렇다. 대도시라서 인구가 많으니 자연 환자군도 더 풍부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외과 의사로서 자기의 의술을 맘껏 펼칠 수 있다. 수술 외적으로도 좋아보이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맛집을 비롯해서 먹을 데가 많고, 먹을 기회도 덩달아 많다. 식탐이 많은 나는 무엇보다 그것이 마음에 든다. 일이 끝나고 퇴근할 때 쯤 되면 같이 수고한 동료들과 한 자리에 어울려 먹고 마시고 긴장을 푸는 그 분위기가 여지껏 그런 것을 모르고 지내던 내게 “아! 이런게 바로 일하는 맛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5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난 후 뒤를 돌아보니 먹고 마시고 할 때는 좋은데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생각없이 사는 만큼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 조차 파악이 잘 안된다. 밖으로 도는 동안 아이들도 훌쩍 커버렸고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이 적어서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주 옆에 없었으니 아이들도 제멋대로다. 내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산 만큼, 얻은 것이 별로 없고 그 만큼 상대적으로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이제 최근 몇 년간의 지난 족적을 살펴보아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나의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슴을 확인해야할 시간이 왔다. 뒤늦었지만 과거를 돌아보고 깨달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제 나의 목표를 점검하고 세월을 아껴서 무언가 남는 것 많은, 그래서 열매맺는 인생의 시간들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다. 남는 것이 있어야 쌓여가는 것이 있고 그래야 거기에다가 누군가 또 다른 무언가를 더 쌓아 올려 세울 수 있다.
첫째, 나는 외과 의사이므로 척추 수술과 연구를 지속해야한다. 척추 관련 저널을 읽고 내 수술의 부족한 것들을 보완하며 이론적 바탕을 갖추도록 해야겠다. 적어도 2주에 한편 정도는 논문을 읽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하겠다. 기초 한편, 그리고 임상 한편. 그런 노력이 없이는 척추 외과의사로서의 행위들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내가 몸 담고 일하는 병원과 신경외과의 발전을 위해서는 아카데믹한 기초가 있어야 한다. 척추 관련 학회 활동을 통해서 나홀로의 고립무원을 벗어나는 노력도 병행해야겠다.
둘째, 나는 직원이 100명이 넘는 병원의 책임 있는 의사다. 그 말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환자를 보며 수술을 해야 나의 봉급을 유지할 뿐 아니라 병원에 소속된 직원들의 생계와 생활이 어려움이 없다는 얘기다.
셋째, 개인적으로는 심리 철학에 관심이 있어서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올해 2권의 번역서가 나오도록 할 계획이다. 먼저 한 권은 이미 번역이 거의 끝나간다. 하루에 한 페이지만 번역해도 일년에 한권 정도는 거뜬히 가능하다. 그리해야 나 스스로도 그렇고 길을 잃고 헤메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돕기에 앞서 그렇게 나를 가다듬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도와야 한다. 다른 것 모르고 오직 척추 수술만 할 줄 알고 척추에 관한 지식만 있는 단조로운 인간이 되기는 정말 싫다,
네째, 직원들과의 유대도 너무 소홀히 하면 안되겠다. 적어도 한 달에 한번은 부하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한번은 스태프들과 식사를 하며 소통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물론 그 외에는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이어야함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아무 생각없이 분별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런 규모 있는 생활을 해야만 삶을 허비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것이다. 그렇게 해야 내가 생각하는 세상 속에서 열매맺는 생활이 가능하다.
논문 읽는 것만 빼고 나는 최근에 거의 그렇게 보내고 있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항상 신나며 의욕적이지만은 않다, 나는 나의 신념을 따라 움직이지만 타인의 눈에는 그것이 어리석게 보일 수 있다. 세상은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힘을 더 추구하고, 우직하게 땀흘려 수고하기보다 정치적 술수에 더 의존하며, 자기의 신념을 따라 살기보다 인기에 더 영합하려든다. 세상과 상반된 나의 삶의 방식은 필연코 세상과 마찰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원하고 기대했던 모든 일이 잘 돌아가란 법이 없다. 전혀 예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것은 일종의 시련이다. 오히려 세상 방식을 따라 산다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나의 신념을 버려서는 안되고 당장 눈 앞의 쉬운 길을 가고자 인간적인 술수를 통해서 혹은 힘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당장은 해결처럼 보여도 또 역시 아무 열매없는 삶의 방식을 따를 뿐이다. 예수님은 광야 시험에서 그것을 너무도 환히 꿰뚫고 계셨다. 누가복음의 옥토에 뿌린 씨앗처럼 내 신념이 옳고 내 신념대로 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지금 견디는 것이 선한 열매 맺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나와 관련하여 그 선한 열매라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지금 기대하며 추구하는 나의 미래의 열매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영향력’으로 말하고 싶다. 나는 내가 몸 담고 활동하는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은 어찌되었든 오늘날 나의 나됨의 이유와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우선 개인적으로는 심리 철학 분야에 저술과 번역으로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게 와서 조언을 구해도 아깝지 않다는 평을 받을 수 있을 정도 되어야겠다. 나의 생각과 의견을 듣고 한 사람이라도 삶의 방식을 고친다면 삼십배 육십배 백배는 아니라도 나와 그를 포함하여 두 배의 열매는 맺은 셈이고 적어도 하나의 영향력을 행사한 셈이다.
내가 몸담고 일하는 척추 분야에서도 자라나는 젊은 외과의사들이 나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할 만큼 수술 술기와 관련 지식에 타당성을 갖추고 싶다. 이는 척추 치료 분야에서의 영향력이다. 물론 고통당하는 환자에게 치료적 영향력을 주는 의사가 되어야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내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소통하는 법을 모른다면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격언을 상기하고 싶다. 나누는 법도 배워야한다. 그러려면 만나고 대화하는 시간들을 가져야 가능하다. 거기에는 자녀들을 포함하여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도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포함한다, 가족에게도 먼저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니까
세흥병원에서 일하며 보낸 지난 5년은 별 생각 없이 그냥 저냥 보낸 시간이라면, 벌써 시작된 새로운 5년은 생각있게 이제 좀 진지하게 보내야겠다. 5년이 지난 뒤에 지나온 나의 삶을 재 평가할 때에는 얻은 것이 많기에 상대적으로 잃은 것이 적은 인생이 되었다고 자평할 수 있도록.
‘청춘’이란 노래의 가사처럼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짜피 우리는 잃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젊음도 건강도 관계도 잃지만, 영향력있는 인생의 열매만큼은 잃어서는 안된다. 많이 거둘수록 좋다. 그런 인생의 열매를 얻는다면 그 대신 잃어버린 것은 조금도 아깝지 않다. 그리고 5년 뒤, 그 때에는 또 다시 새로운 인생의 목표와 계획 속에서 더 영향력 있는 더 멋진 열매 맺는 남은 날들을 꿈꾸리라.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첫댓글 참 멋집니다. 공부하는 의사, 번역까지 하신다니 도전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