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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맥문학 10월호에 게재된 문학기행 "다라국(합천)의 역사와 문화" 를 廣津文協
文友들에게 보내드립니다.
굽은 소나무
다라국(陜川)의 역사와 문화
한맥문학 가족 문학기행 아마도 秋來 不似秋라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어 立秋가 지난지도 보름이 되었고 어제는 處暑인데도 炎帝는 이 땅을 전세라도 낸 듯 요지부동으로 틀어쥐고 앉아서 매일 32-3도의 더위로 갖은 심술을 다 부리고 있으니 冒頭(모두)의 말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짐스런 이 더위를 두 손으로 막아냈으면 하나 이는 螳螂拒轍(당랑거철)이요, 역부족의 현실이라 이를 한탄할 수밖에 없어 우리는 청량한 가을이라는 선물이 오기만 앉아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였다. 그런데도 이 더위에 140여명의 한맥 가족들(현지에 합류한 자 포함)은 8.24-25 양일간 세계문화유산인 8만대장경이 보존되어있는 해인사가 있고 옛 가야문화의 한축인 다라문화가 꽃을 피었으며 신라와 백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처절한 싸움을 벌였던 大倻城터가 있는 陜川지방으로 떠나는 문학기행에 나도 그 꽁무니에 끼어서 한자리 차지하는 영광을 얻었으니 고맙고도 기쁘다. 2013, 8, 24, 09;20 출발한 3번 관광버스에 나는 승차했는데 이곳에는 이름도 고은 정다운 사무국 차장이 있어 즐거운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는데 “내 본명은 정성순인데 이건선 선생이 지어준 이름이 다운이어서 여러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앞으로 편안한 여행이 되시기 바란다.” 회원들이 자기소개 겸 한 말씀하는 사이 사정없이 달리던 차가 옥산휴게소에서 잠간 피로를 푼 뒤 13;30에 다시 출발했다. 경부고속도로에서 김천출구로 나가서 직지사가 있는 대항면 방향으로 가다보니 길 양쪽에 펼쳐져있는 포도밭에는 시집갈 날만 기다리는 2.8청춘 처녀인양 익을 대로 익은 포도 알이 탐스럽게 매달려 풍요로운 가을을 알려주고 있었다. 황학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천을 따라 오르다가 寺下村에 있는 식당 경복궁에서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들었다. 직지사 일주문에 이르니 안내원이 나와 우리를 맞이한다. 해동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의 동국제일가람인 直指寺는 절 입구 오른쪽에 있는 산 중턱에 있던 定宗의 태실을 보호하는 사찰이었기에 억불숭유정책을 펴던 조선조에서도 조정의 보호를 받아 제대로 보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소백산맥 중에 1111m 우뚝 솟은 황악산 동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직지사는 조계종 제8교구 본사로서 신라 눌지왕 2년(418)에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선산에 도리사를 세운 다음해에 세웠다. 아도화상은 묵호자라고도 하는데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한 승려다. 사명을 직지사라고 한 것은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아도화상이 도리사에서 저 산 밑에도 절을 지을 좋은 터가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르쳤기에 곧을直 가르칠指라는 사명이 정해 졌다는 설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며 내가 칡뿌리 기둥을 찾으니 지금은 일주문 기둥을 큰 통나무로 교체하였기에 볼 수 없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소문났던 名泉을 찾으니 그것도 물이 말라있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1.000년 고찰에도 변화가 많아 인생무상을 느낀다.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이 나오는데 코끼리 100마리의 힘이 있는 금강역사가 지키는 문이다. 여기에는 애틋한 전설이 전해 온다. 합천에 사는 큰 부자에게 외동딸이 있었다. 과년인 딸이 그 좋은 혼처가 있어도 마다하고 고개만 젓고 있던 중 하루는 떠돌이 스님한분이 탁발하려고 들렸는데 이 집 딸이 그만 거지스님에게 뿅가서 식음을 전폐하고 몽니부리며 누워있었다. 할 수 없이 스님이 파계하고 이 처자와 혼인하여 아들 딸 낳고 잘 살던 중에 하루는 처가 이제는 안심하고 감췄던 가사와 장삼 그리고 목탁을 꺼내주었더니 남편이 승복을 입고 도망을 쳐서 이 직지사에 은둔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을 찾아 직지사에 들어가려고 금강문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숨을 거뒀다. 이때 직지사에 숨어있던 스님도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숨을 거뒀는데 금강역사가 출입통제한 것이라 한다. 조금 더 오르니 사찰의 수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사천왕문이 있다. 사천왕들은 불거져 나온 눈과 크게 벌린 빨간 입, 힘차게 솟은 근육 등 무서운 얼굴에다 손에는 큼직한 칼이나 창을 들고 발로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마귀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으나 사천왕은 동서남북 네 지역의 하늘과 땅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고 불도를 닦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다.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을 관장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을 관장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 등은 사방에서 사찰을 수호하고 있는데 이 사천왕문은 대웅전과 일주문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길가 왼쪽에 외로이 누워있는 盤石은 어느 날 15세 정도 된 아이가 이 돌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주지스님의 꿈에 현몽이 되었기에 나와 보니 童子인지라 데려다가 제자를 삼아서 가르쳤는데 이 동자가 바로 밀양에서 올라온 사명대사였다. 사명대사는 18세에 승과시험에 합격하여 직지사의 주지스님이 되었다가 훗날 임진왜란 때에 큰 공을 세우는 승군 총섭이 되었다. 직지사는 아도화상이 대웅전을 창건하고 능여대사가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영조 11년(1735년)에 다시 세웠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내부에는 보물 670호인 탱화가 걸려있다. 대웅전 앞 3층 석탑은 5.3m의 쌍 탑으로 통일신라 때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보물 606호이며 사명각에는 31세에 직지사의 주지가 된 四溟大師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비로전에는 알몸으로 고추를 내놓고 있는 동자상 등 얼굴모양이 각기 다른 1.000불이 모셔져 있다. 비로전 앞에 있는 3층 석탑은 대웅전 앞의 석탑과 비슷한 탑으로 통일신라 때의 작품으로 보물607호이며 석조 약사여래좌상은 보물 319호로 통일신라 때의 불상인데 높이가 1.61m다. 성보박물관에는 도리사에서 나온 국보 208호인 6각 사리함과 보물 1141호인 금동 자물쇠 등의 유물과 많은 경전, 전적 등의 불교유물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직지사는 가람배치가 좀 산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경내에는 배롱나무라는 백일홍이 한참 힘을 자랑하고 있고 이슬비가 내려서 그러는지 비교적 적조하여 편안함을 보여주고 있어 절간 같다는 표현이 이런 곳에서 나온 것처럼 한가하다. 다음은 국도를 타고 합천군의 초입인 삼가면 쪽을 향하여 남으로 달리던 중 양쪽으로 전개되고 있는 무한대의 사과밭이 펼쳐진다. 빨갛게 익은 김태희 얼굴 같은 사과의 아름다움에 취한 문인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는데 이 사과밭은 깨끗하고 신선한 아름다움을 무상으로 제공하여 우리들의 눈도 마음도 호강시켰으니 먹어보지 아니 하여 입은 서운하겠지만 고맙다. 마침내 해인관광호텔에 도착하였다. 도착즉시 호텔 내 2층 국화홀에서 제22회 한맥 문학가협회가 주관하는 행사가 김봉곤 사무국장 사회로 열렸다. 국민의례가 있은 뒤 송귀영 회장이 이 자리에 참석한 인사를 소개하였다. 경북도 부지사 이인선, 경북도의원 최옥주, 합천군수 하창환, 강석정 전 군수, 김진희 한맥문학사 회장, 문학가협회 명예회장 임향, 한맥문학 동인회 김동설 회장, 한국문협 합천지부장 김숙희,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김송배(합천 출신), 세미나 좌장을 맡을 조병무 박사 등이었다. 송귀영 회장 개회사(합천 출신)- 지루한 장마 비도, 극성을 부리던 더위도 한 발작 물러난 듯 시원한 곳에서 여러분을 뵙게 되어서 반갑다. 해인사는 1000년 전인 신라 때에 창건되어 500여 스님이 수도에 정진하는 청정도량인데 이런 뜻 깊은 곳에서 세미나를 갖게 된 것은 의의가 크다고 본다. 여러분께서는 많이 듣고 배우고 많이 깨달아서 우리나라 문학계에 마중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학은 우리문인들만의 소유가 아니다.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펼쳐서 심금을 울리는 서정적 작품을 남겨주시기 바란다. 오늘 참석하신 부지사님과 군수님을 비롯한 합천문인들과 참석한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드린다. 허창환 군수의 환영사- 이곳에는 오늘 호우주의보가 내려서 현장에 뛰어다니느라고 제대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점 이해하여주시기 바란다.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어제였는데 오늘은 50m/m의 비가 와서 시원해 졌다. 여러 문인들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우리군내의 여러 곳을 살펴보시고 좋은 문학작품을 남겨주시기 바란다. 이곳으로 장소를 선택 해 주신 송귀영 회장에게도 감사의 말씀 드린다. 경북 부지사를 대신하여 최옥주 도의원의 환영사- 합천에는 8만대장경과 30만평이나 되는 철쭉군락지가 있으며 영상 테마파크도 있어 과거로 여행하려면 합천으로 와야 한다. 정인홍, 남명 조식의 출생지가 이곳이어서 매년 200만 명의 손님이 찾아오는 곳이다. 황매산은 기가 많이 서려있는 곳이라는 소문이 났으니 이곳에서 기를 많이 받아가지고 좋은 글을 써 주시기 바라며 경북에도 선비의 고장 안동과 소수서원 등이 있으니 명년에는 경북으로 오시기 바란다. 참석했던 공무원과 도의원이 퇴장하고 문학행사를 가졌다. 하창환 군수와 조윤성 해인 관광호텔 대표이사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수고가 많았던 전임 집행부 임원인 임향 회장, 이두형 부회장, 김하경 사무국장에게 공로패를 전달하였다. 김진희 회장께서는 시인으로 등단한 수월 스님에게 신인상패를 수여하였다. 김진희 회장의 인사- 한맥문학은 올해 창간24주년이 되었는데 단 한 번의 결 간도 없이 계속 발간하였다. 이것은 시인 소설가 수필가 등 여러 문인들의 노력과 협조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아낌없는 성원과 협조를 바란다. 합천 문인회 소속의 문인들을 소개하고 오늘 참석한 한맥문학가 협회의 자문위원 부회장 감사 이사 등 임원들을 소개하였다. 다음은 시 낭송의 시간이다. 김송배 시 [海印寺에서]를 부회장인 이연숙 문인이 낭송하였고 이생진의 시 [그리운 바다 성산포]는 임솔내 시인이 長文인데도 암송으로 낭송하였으며 [鳶을 타고]는 권오정 시인이 자작시를 낭송, 끝으로 합천문인회장인 김숙희 시인은 시[영상 테마파크]를 낭송하였다. 현재 시각 18;00이다, 예정보다 1시간이 늦었지만 이제부터는 세미나가 기다리고 있다. [합천, 그 선비정신과 문학]을 테마로 하여 동덕여대 교수를 지낸 문학박사 조병무 시인이 좌장을 맡고 발표는 한국문협 부이사장인 김송배 문학평론가 겸 시인이 담당하였다. 먼저 좌장이 김송배 발표자를 소개하고 오늘 세미나를 진행하는 요령과 순서를 말했다. 김송배 시인의 발표- 오늘 발표의 순서는 1) 합천의 지형 및 산수개황 2) 가야산 해인사와 8만대장경 3) 고고한 선비정신과 남명 4) 합천 문인과 문학의 재조명 순으로 발표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상당한 시간이 경과되었기에 3) 고고한 선비정신과 남명을 위주로 발표하고 나서 여러분의 질문을 받겠다. 합천의 문인하면 南冥 曺植선생을 꼽는다. 남명의 제자로 김우옹, 곽재우 등이 있다. 선생은 1501년 삼가현 퇴동 외가에서 태어나시어 서울에서 성수침, 성운 등과 교류하면서 25세에 [성리대전]을 읽고 깨달은바 있어 성리학에 전념하셨다. 1538년 헌릉 창봉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삼가현으로 내려와서 계복당 뇌룡정 등을 짓고 제자들을 기르다가 단성 현감 직을 발령받았으나 이를 사임하는 글에 조정대신들의 잘못을 비판하고 국왕 명종과 문정왕후의 잘못도 직설적으로 지적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뿌리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자 오건 정인홍 하항 김우옹 최영경 정구 등 많은 학자들이 몰려와서 가르침을 받았다. 1561년 지리산 밑에 산천재를 지어 생을 마칠 때 까지 그곳에서 강학에 힘썼다.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지방의 큰 봉우리를 형성하는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문인이요 학자였다. 선생 사후인 1576년 후학들이 산천재 옆에 덕천서원을, 삼가현에는 회현서원(지금의 용암서원) 김해에는 신산서원을 세워 선생의 위업을 추모하고 있다. 합천문인 중에는 내암 鄭仁弘 선생이 있는데 지금의 가야면에서 출생하셨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글을 짓는 영특함을 보여 남명의 수제자가 되었다. 남명학파를 이끌고 정국을 주도하면서 당쟁이 치열했던 선조 조에서 벼슬길을 일시 사양했으나 광해군 때에 대북파의 영수가 되어 멀리서 정치를 원격 조정하는 때도 있었으나 인조반정으로 뜻이 꺾이고 말았다. 합천 출신 문인으로는 한국문단의 거목중의 하나로 소설가이며 아동문학가인 李周洪 선생이 떠오른다. 그는 50여 년 동안 소설 수필 시 희곡 동화 동시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는데 치밀한 구성과 논리적으로 정확한 문장 그리고 객관적인 묘사로 침착하고 세련된 문학 활동을 하였다. 부산수산대학의 교수였던 선생은 합천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한문수학을 하다가 서울로 올라가서 고학으로 문학공부를 한 뒤 일본으로 가서 노동을 하면서 문학에 심취하였다. 1925년 [신소년]에 동화 “뱀새끼의 무도”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가난과 사랑“이 입선되어 문인의 길로 들어섰다. 작품으로는 “김 노인” “늙은 체조교사” 등이 있으며 부산시 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하셨고 1998년 올해의 아동문학가로 선정되어 시상식과 함께 <이주홍 문학에 대한 심포지엄>이 열려 합천인의 긍지를 높여 주었다. 합천에는 “이주홍 어린이 문학관”이 있어 이주홍선생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아쉽지만 시간관계로 이렇게 간단히 발표를 마치겠다. 조병무 좌장-선비정신은 곧 문인정신이다. 선비정신은 의리를 중시하는 정신이나 소인배는 이익을 중시하며 이재를 밝힌다. 우리 문인들도 자기중심을 지키며 문예창작에 기여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질문을 받겠다. 이때 필자(한길수)가 손을 들고 질의하였다. “남명 조식선생은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실천적 덕목으로 무엇보다도 <義>를 강조하셨다. 임진왜란 때 남명문하에서 많은 의병장이 나왔는데 義와의 상관관계를 이야기 해 주시기 바란다.” 발표자와 좌장 “우리는 거기까지는 살피지 못하였는데 이에 대한 연구가 많으신 강석정 군수님께서 답변을 해 달라” 강석정 전 군수“남명 문하에서 의병이 쏟아져 나온 것은 사실이다. 정인홍 곽재우 조종도 곽순 이도 등이 의를 숭상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의를 실천하려고 의병으로 참전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래서 합천에서는 110명의 의병을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다. 좌장-더 질의 할 분이 없으면 이것으로 세미나를 마치겠다. 참여해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김봉곤 사무국장이 오늘 많은 협찬을 한 분들을 호명하자 모두 박수로 감사를 표하고 기념촬영을 끝으로 오늘의 행사를 마쳤다. 홀을 나와서 방 배정표를 보니 필자와 오남식 회장, 이기덕 부회장이 1424호에 배정되었기에 지정된 방으로 가서 배낭을 벗어놓고 1층의 식당으로 내려와 저녁식사를 마쳤다. 식후에 20;00부터 국화홀에서 화합의 한마당이 있다고 하나 참여치 않고 방안에서 오회장과 캔 막걸리를 마시며 쉬고 있는데 이기덕 부회장이 현장에서 먹음직한 포도송이를 전해주어서 맛보았다. 너무나 고마웠다. 2013, 8, 25. 합천은 면적 983.47m2에 인구 5만 여명, 1읍 16면에 군 의회 의원 10명이 있다. 삼한시대에는 변한에 속하였고 부족국가시절에는 합천지방에는 다라국이 초계지방에는 초팔혜국, 삼가지방에는 사이지국 등이 있었으나 고령지방에 있던 대가야국에 흡수되었다. 신라 진흥왕 23년(562년) 이사부와 사다함이 대가야국을 처서 대량주군 또는 대야성을 설치하여 신라가 관할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대야성에 도독부를 두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에는 주를 강양군으로 강등하였는데 고려 현종이 합주로 승격시켰으나 조선 태종13년(1413년)에 합천군이 되었다. 1914년에 삼가 초계 합천 세 고을이 합천으로 통합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합천하면 먼저 백제와 신라가 최후의 혈전을 벌린 대야성의 비극이 떠오른다. 642년(신라 선덕여왕 11년)은 백제 의자왕이 즉위한 이듬해다. 이해 8월에는 백제장군 允忠이 1만의 대군으로 대야성을 공격했다. 지금의 합천에 있던 대야성은 김춘추의 사위인 도독都督 金品釋(김품석)이 지키고 있었다. 성문을 굳게 지키며 결사 항전을 독려하고 있을 때 성내에 있는 식량창고에서 갑자기 불길이 솟았다. 식량창고가 불타자 성안의 민심은 흉흉해 졌고 신라군의 사기는 순식간에 꺾였다. 이때 품석의 보좌관 西川이 품석과 여러 장수들에게 투항을 권유하고 성을 열고 나서려고 했다. 이때 품석의 휘하에 있던 竹竹이 말리며 말했다.“백제는 약속을 안 지키는 나라인지라 신의가 없습니다. 쥐처럼 엎드려 삶을 구걸하기보다는 호랑이처럼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울면서 만류하는 죽죽의 읍소에 마음을 돌려서 모두가 끝까지 항전하다가 신라군은 전멸하였는데 도독 김품석은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랑부인이 임신 중이었는데도 사전에 살해한 뒤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윤충은 품석과 그 부인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사비(부여)로 돌아갔다. 황 강가에는 대야성이 남아있고 장렬하게 전사한 신라군 2000명의 넋을 위로하는 연호사가 있으며 충신 죽죽의 비도 세워있다. 새벽 05;30에 일어나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한 뒤에 밖으로 나오니 산뜻한 새 아침이다. 하늘은 맑고 주변은 푸른데 많은 문인들이 모여서 상호인사를 나누는 교류의 장이 서있었다. 밤새 비가 쏟아지더니 언제 그랬더냐 는 듯 시침을 떼는 아침! 레몬즙을 마신 듯 상쾌하고 청량한 아침이다. 늦더위가 아무리 발버둥 쳐본들 순리적인 질서는 거스를 수가 없었는지 아니면 이곳이 가야산 깊은 산중 이른 새벽이어서 인지 모르지만 여름도 저 만치 물러나 꼬리를 사리는 모습이 역역하다. 07;30에 호텔 내에서 아침식사를 했는데 산채정식도 아니고 된장백반도 짬뽕도 아니어서 도대체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명식사를 마치고 해인사를 탐방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海印寺는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인 법보사찰로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으며, 화엄경의 깊고 넓은 바다, 청정무구한 마음을 표현한 해인삼매에서 연유된 종찰로 유명하다. 고려 태조는 이 절에 머물렀던 희랑 스님이 후백제 견훤의 청을 뿌리치고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로 삼고 전답 500결을 하사했다. 그 뒤 1398년 조선 태조 7년에 강화 선원사에 있던 팔만대장경을 안전한 이곳으로 옮겨온 뒤 지금까지 잘 관리하고 있는 팔만대장경판은 1995년 12월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공식 지정되어 이제는 세계적인 문화재가 되었다. 심산유곡에 있는 해인사는 일주문 봉황문 구광루 대적광전 장경판전 등의 건물과 암자들이 즐비하여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곳은 신라 말 시무책을 신라조정에 건의했던 최치원 선생이 머물렀던 곳으로 최치원과 관련된 흔적들도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아침 일찍부터 길가에 나와서 찐 옥수수를 파는 노점상 아줌마들의 “사이소!” 소리를 들으며 맨 처음 우리들의 발길이 멈춘 곳은 해인사 성보박물관이다. 박물관에 입장하자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보물 999호인 실물 크기의 건칠 希郞大師 좌상이다. 희랑대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도움을 받아 해인사를 중창한 승려로서 생존 시 모습 그대로 만든 조각상인데 930년경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 한 그의 표정이나 복장 모두가 고려시대의 것 그대로라고 한다. 조선 영조 5년(1729년)에 제작된 영상회상도는 보물 1273호이고 세조대왕 어진은 경남문화자료 331호이다. 홍치4년(1491년)銘이 있는 동종은 보물 1253호이고 1098년에 제작한 대방화엄경판은 국보 206-16호이다. 박물관 역사실의 수정으로 만든 백호는 부처님 눈썹 사이에 있는 가늘고 긴 터럭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에게 선조가 하사한 옥으로 만든 玉花와 칠보촛대도 있다. 여름이 물러가는 계절이기에 푸름이 더욱 아쉬워지는 계절! 山寺에 이르는 굽이굽이 길동무가 되어주는 계곡의 청량한 물소리와 함께 산길을 오르는 우리들! 나무도 풀도 바위도 산새들의 노래와 산 매미들의 합창소리 마저 우리를 즐겁게 격려해 준다. 이런 아름다운 분위기에 더하여 시인이요, 시 낭송가이며 솔 향내가 물씬 풍기는 임솔내 문인과 같이 문학을 이야기하며 오르는 산길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호사이며 한 폭의 수채화요, 詩的인 정경이었다. 해인사 입구에 있는 비석거리에는 해인사 사적비, 묘길상탑(보물 1242호), 원경왕사비(보물 128호) 용성선사 사리탑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법어로 유명한 성철 선사의 사리탑이 있고 지운, 혜암, 일타 스님의 부도전과 20여기의 공덕비 등이 있다. 일주문 봉황문 해탈문을 들어서면 구광루가 있고 정중 3층 석탑과 석등이 있으며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위용을 자랑한다. 안동김씨 문중을 중흥시키려고 덕소 인근의 석실에 길지를 점지했던 학조대사가 성종 때 인수대비의 원력으로 해인사를 중창하면서 비로전을 대적광전이라 개칭하고 본존불과 협시불을 모셨는데 모두 목불이라고 한다. 우리는 구광루에 있는 영상실에서 해인사의 역사와 현황, 그리고 법보전과 수다라전에 보관중인 인쇄문화의 극치인 8만대장경을 판각한 유래와 과학적으로 보전 관리하는 내용에 대한 심도 있는 상세한 설명을 영상으로 보고 듣고 옆방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친견하는 행운도 덤으로 얻었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장경판전에는 들리지 못하고 탑 옆에 설치한 해인도 따라 돌기 현장과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학문에 전념했다는 학사대 터에서 자라고 있는 전나무를 바라보다가 하산하면서 순응, 이정 대사가 애장왕의 왕비병환을 낫게 해준 공로로 이곳에 해인사를 창건할 때 기념으로 심었던 1200년 된 나무가 천수를 다하고 남은 裸木을 보면서 하산했다. 명불허전이라 해인사 일주문에서 농산정까지 10리 거리에 펼쳐진 홍류천변의 풍광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봄은 보드러운 신록의 계절인데 붉은 색으로 도배한 철쭉이 병풍을 치고 여름에는 녹음과 개울 물, 가을에는 천지를 수놓은 단풍의 장관, 겨울은 백설로 덮인 설국의 나라 등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 없는 빼어난 경관을 번갈아 보여주는 파노라마 현장이 홍류동 계곡이다. 더구나 기기 묘묘 조화를 부리는 바위와 옥류가 흐르는 개천, 그리고 짙푸른 녹음이나 단풍을 讚嘆(찬탄)한 묵객들이 있었으니 홍류동 경치에 반해 농산정 바위에 시를 새겨 제시석을 남긴 고운 최치원을 비롯하여 김종직, 강희안, 강희맹, 송시열 등의 발길이 바빴었다. 홍류천을 따라 데크로 시설한 교량을 걸어 하류 쪽으로 가다보면 낙화담, 회선암, 제월담, 무릉교, 분옥담, 채필암, 취적봉, 음풍뢰, 원재암이 있고 농산정, 홍류동 등이 차레로 황홀한 모습을 보여주는 선경이 펼쳐진다. 바로 이것이 해인사의 寺格을 더 높여주는 광경이다. 신라 말 조정의 어지러운 정사를 바로잡도록 “시무책”을 건의했으나 묵살당한 최치원 선생은 홍류동 계곡의 농산정에 주로 머물며 그의 형인 현준, 정현 스님과 교류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발과 지팡이를 나란히 놓고 흔적도 없이 이 세상을 하직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신선이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가 분분하다. 우리들은 합천군에서 운영하는 영상테마파크에 들려 시계를 해방이전의 일제식민지시절로 돌린 京城 시가지를 재현한 현장에 가 보았다. 가호역에서 개표를 하고 홈으로 나가면 전차가 있고 마차도 보인다. 종로경찰서, 국도극장, 원구단, 은하수 식당, 반도호텔, 경성방송국, 경성역, 소공동 거리 등을 거닐며 먼 향수에 젖어보았지만 별 실감은 나지 않았으나 영화 촬영장으로 많이 애용하는 듯 했다. 합천읍내로 가서 이가네 한우에서 진짜 한우갈비탕으로 점심을 하고 대야성이 있는 황강을 건느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율곡면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 초계, 쌍책면에 있는 합천박물관에 도착했는데 맨 먼저 용봉문양 환두대도 큰 칼이 황금색을 번쩍이며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우선 강당으로 모여 해설사의 해설을 듣고 영상물로 다라국의 대강모습을 머리에 그리면서 현장으로 갔다. 합천박물관은 가야왕국인 다라국 지배층의 고분군에서 출토된 당시의 정치 사회 문화상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으며 합천 전체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합천역사관도 병설되어 있었다. 역사관에는 삼국시대 후기, 백제와 신라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 관련 자료와 함께 합천이 배출한 위대한 인물인 남명 조식 선생과 내암 정인홍 선생의 학문과 정치사상 등 합천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관한 자료도 전시하였고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활동과 한말 일제 때 저항운동자료도 전시하고 있었다. 가야시대 다라국의 지배자 묘역으로 알려진 옥전고분군의 유물 중 사료적 가치가 높은 용봉문양고리자루 큰칼과 금제귀걸이를 비롯한 각종 장신구, 철기 류, 토기 류 등 다라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유물 350여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으며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실물 크기로 복원한 가야시대 다라국 지배자의 무덤과 다라국 都城의 미니어처 및 다양한 영상 자료도 갖추어놓았다. 다라국의 복장을 하고 기념촬영을 하는 방도 마련하는 등 방문객을 위한 많은 배려가 고마웠다. 기록이 있어야 역사를 지배한다는데 다라국이 기록에 등장한 것은 양직공도(梁職貢圖)와 日本書紀에서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왕조에 등장하는 다벌국(多伐國)이 다라국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지만 다벌국은 지금의 대구인 달구 벌(達句火)이라고 한다. 지금의 합천군 쌍책면 다라리와 함께 성산리 일대에 옥전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어 다라국의 중심은 쌍책면 일대로 여겨진다. 한편 합천읍에는 신라의 대야성이 있는 걸로 미루어 볼 때 합천의 중심이 쌍책면에서 지금의 합천읍으로 옮겨진 듯하다. 이곳은 고분군이 있는 마을인 玉田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옥이 많이 생산되었고 옥전고분군에서는 신라식과 김해식의 목곽묘가 확인되었다. 다수의 옥 제품 및 보석제의 유물과 함께 토기와 금동제 관모, 환두 대도, 고구려 풍 투구 등이 출토되었고 로마에서 만든 유리컵이 발견된 걸로 보아 주변국이나 멀리 서양과도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인 유물인 용봉문양 고리자루 큰칼은 다라국의 왕이 얼마나 강성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다라국은 대가야에 소속되었는데 대가야가 신라에 패망하였기에 신라에 편입된 뒤에 大耶州(대야주)가 되어 옛 가야 땅을 관할하였다가 642년 대야성 전투로 신라가 패배함으로서 백제가 점령한 이후 신라가 삼한을 통일한 뒤 설치한 강주의 江陽郡이 지금의 합천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말없이 흘러 15;40이 되었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 듯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지만 가슴속에 추억만 간직한 채 상경하는 차에 승차하였다. 우리는 1박2일 신세를 진 빚을 다 갚지도 못하고 다라국을 뒤로하고 북으로 달리고 달려 서울 종각 역에 도착하니 정각 20;00다 한맥문학가협회가 주최한 2013년 여름세미나 “합천 그 선비정신과 문학”은 이렇게 무사히 그리고 아름답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는데 그래도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다.
2013, 10월호 한맥문학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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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잘 읽고 공부하고 갑니다.
합천에 다녀 오셧군요. 합천의 옛지명이 다라국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