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쩌런이라는 차이나타운 2
베트남 화교사회는 Cantonese들이 주축을 이룬다. 최초의 대규모 중국인 이주는「퀸」왕조의 첫 번째 중국인 황제가 현재의 北베트남 지역을 정복했던 BC 3세기경이었다. 그 후 10세기동안 계속된 중국의 식민지 기간 동안, 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수많은 이주민들을 받았으며 이러한 추세는 20세기까지 계속되어 1923 - 1951년간에도 약 120만 명의 중국인들이 베트남으로 이주했다.
그런 그들의 경제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1974년 北베트남 정부는 南베트남에 있는 화교들이 식품, 섬유, 화학, 금속, 기계, 전기 산업의 80%를 지배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南베트남 화교들은 도매업과 수출입무익에서 독점권을 가졌으며, 소매업의 50%이상을 지배했고 대기업 60개중 42개를 소유했다. 통일 후 이를 가만 놔두었을 리 없다. 1975년 공산주의의 승리 이후 많은 南베트남지역의 화교기업가들은 매판자본가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으며 재산은 몰수 되고 베트남 국적을 얻기 위한 화교들의 노력과 新사업분야에의 참여에 새로운 제약이 가해졌다.
1978-79년 동안 행해진「사회주의자로의 전환」캠페인은 화교(「Hoa」)공동체의 독립적 사업과 사회적 활동을 막았으며 사실상 모든 사업체를 폐쇄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중국․베트남 관계 악화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악화된 관계는 1979년의 중국국경침입과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입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계속되는 화교의 脫베트남 추세는 베트남 내 중국인수를 급격히 줄어들게 했다. 1978년 초 약 23만 명의 화교들이 베트남을 떠나 중국으로 입국했으며, 또 다른 22만 명은 배편으로 동남아를 향해 떠났다.
베트남 난민이 대규모로 발생한 1979년 화교의 인구는 87만정도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베트남 화교의 절반가량인 80만 명이 베트남 난민에 합류해 베트남을 떠난 것이 되며, 이는 전체 베트남 난민 160만 명 중에서 절반을 베트남 화교가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통일공산 정권의 탄압, 이로부터 자유를 찾아 베트남을 떠나 망망대해를 헤매는 소형목선을 탄 사람들, 우리는 이들을 보트피플(Boat People)이라고 한다. 그들 대부분이 그러니까 바로 화교였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중국에서도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아무튼 쩌런에 화교들은 전쟁의 또 다른 빌미를 제공한다. 1978년 중월 전쟁이 터지기 전의 당시의 신문보도를 보면 왜 중월 전쟁이 터졌으며 그 원인 제공은 바로 쩌런 지역의 화교들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 글을 읽어보자.
<中共-베트남 간의 전쟁 일보 직전의 위기를 몰아 온 베트남 거주 화교를 둘러싼 분쟁은 뿌리가 깊다. 베트남인과 중국인 사이에는 지난 2천 여년에 걸친 적대와 불신의 전통을 갖고 있으며, 이는 기원전 214년부터 서기 1420년까지 수 차례에 걸쳐 중국이 베트남을 직접 지배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베트남의 화교 추방으로 악화되어 가고 있는 中共-베트남 관계는 국교 단절 내지는 국지적인 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커졌다. 中共은 베트남 국경지대에 지난 수개월 동안 병력을 집결, 국경지대 군사력을 일층 강화시키고 있고 이에 맞서 베트남 측도 全軍에 비상경계령을 내리는 한편, 1백만 정규군을 보강하기 위해 5백만 인원의 민병대 모집에 나섬으로써 양국간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中共 부수상 등소평(鄧小平)은 최근 베트남이 화교를 계속 추방할 경우, 가혹한 보복 조치를 가하겠다고 경고했다. 中共은 베트남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중단한 데 이어, 베트남 내 20여개 건설 사업장에서 근무하고 있던 1천여 명의 기술자를 철수시켰고, 베트남에서 추방된 화교는 이미 10만 5천명을 돌파, 앞으로도 30만 내지 40만 명에 이를 것으로 中共 측은 예상하고 있다.
특히 등소평은 '베트남의 그 같은 무법적인 태도를 취한 이면에는 국제적인 요소가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베트남이 소련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시사해 주목을 끌고 있다. 베트남-캄보디아 분쟁 당시 소련과 中共이 각각 배후에서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지원한 것과 관련, 이번 中共-베트남 관계의 악화도 이같은 中蘇대립의 연장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베트남의 비상령 발동과 때를 맞추어 베트남을 지지하는 소련이 南支那海에서 대규모 기동훈련을 개시함으로써, 中共을 더욱 자극했다.
현재 베트남에 거주하는 화교는 약 150만 명으로, 지난 78년 3월 하순부터 이들이 대대로 살아온 생활 터전을 버리고 국경을 넘어 본국의 광서성(廣西省) 및 운남성(雲南省) 등지로 집단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대이동은 지금 현재도 연일 계속되고 있다. 이 같은 유례없는 화교들의 대이동에 대해 中共은 베트남 당국이 탄압과 학대를 가함으로써 화교들을 강제 추방하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반해, 베트남은 中共의 주장은 날조된 것으로 화교들이 헛소문을 믿고 불법적으로 베트남을 떠나고 있다는 식으로 맞서고 있다.
베트남의 공산화 이후 中共-베트남 관계는 계속 악화되어 왔는데, 베트남-캄보디아 분쟁에서 中共의 캄보디아 지원으로 이러한 관계 악화의 양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로 인해 베트남 화교들의 집단 출국 사태가 유발되었다. 집단 출국의 직접 동기는 지난 3월부터 발효된 新경제정책에 따른 개인사업의 폐지 정책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베트남 당국은 지난 3월 24일, 화교들에 의해 오랫동안 장악되어 온 이른바 '부르주아 상업'의 폐지를 선언하면서 화교들에게도 일반 베트남 도시민들과 더불어 시골의 新경제 개발지역으로 강제 이주, 노동에 종사할 것을 명령했다. 뒤이어 개인 상품 등의 재산을 강제로 압수했는데, 이에 반발한 일부 화교들이 사이공 등지에서 데모를 벌이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베트남'의 재건을 위해 시골로 이주하여 노동을 하거나, 아니면 국외로 떠날 수밖에 없는 양자택일을 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 당국은 개인 상업의 금지 조치는 화교들뿐만 아니라, 모든 베트남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라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여기에 해당되는 피해자의 90% 이상이 화교들이다. 中共은 베트남 당국의 이같은 사기업 국유화 조치에 반발한 화교 중 상당수가 피살, 혹은 체포되었다고 비난하면서 화교들에 대한 박해를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했는데, 北京의 외교 관측통들은 이미 수많은 화교들이 캄보디아 국경지대의 新경제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번 中共-베트남 관계 악화를 초래한 화교 문제에 대해, 中共은 특히 동남아 각국의 중국인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다. 中共은 이미 동남아 각국과 화교들에 대한 법적지위, 즉 동남아 각국이 화교들의 귀화를 강요하지 않으며 그들의 법적지위를 보장한다는 협정을 맺어 왔다.
만일 이번 베트남과의 화교 분쟁에서 中共이 그 보호자 노릇을 하는데 실패한다면, 中共은 非공산권 뿐만 아니라 공산권 內의 화교들이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른다. 현재 동남아에는 약 1천 4백 만 명의 화교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非공산 지역의 분포 상황을 보면 말레이시아에 4백만, 태국에 3백만, 인도네시아에 3백만, 필리핀에 2백만, 싱가포르에 150만, 버마에 50만 명이 각각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이 귀화했으나 정작 동화는 거부하고 있으며, 理財에 밝아 각국의 商權을 장악하고 있다.
소수집단의 상권 장악으로 동남아 각국에서 이들을 배척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데 베트남의 경우, 사이공 市의 촐론(쩌런)가에만 화교가 1백 만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소유기업체만 3만개에 이르는 등, 남베트남 패망 이전까지 현지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중공은 베트남이 적화된 후 베트남 거주 화교들의 국적선택의 자유 및 이들의 이중국적 금지 등의 협상을 벌여왔는데, 베트남은 지난 1955년에 조인된 中共-베트남 간 협정으로 베트남 내 화교들이 당시의 월맹 시민들과 같은 권리와 의무가 부여됐으며, 남베트남 거주 화교들의 태반이 이미 베트남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지적, 화교 문제 분쟁을 양국간 협상으로 타결하자고 요구해왔다.中共은 이번 화교 분쟁이 전쟁 상태로 발전할 경우, 소련의 베트남 지원을 위한 개입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최악의 사태는 피하려 하겠지만, 홍콩의 아시아 문제 전문가들은 좀처럼 사태 해결이 어려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중국과 베트남은 결국 전쟁을 한다. 이를 중·월 전쟁이라고 한다. 1978년 초부터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분쟁이 일어난 데 이어 5월에는 베트남에 거주하는 중국계 주민과 화교의 대량 추방을 둘러싸고 중공·베트남 공산정권이 대립하였으며, 1978년 말에는 중국 윈난성[雲南省] 및 광시성[廣西省]의 국경지대에서 군사충돌이 발생하였다. 중공측은 이에 제재를 가하겠다고 예고하고 있었는데, 1979년 2월 17일 중공군은 베트남을 전면 침공하였다. 중공 당국은 이것을 자위반격(自衛反擊)의 한정전쟁(限定戰爭)이라고 발표하였다.
캄보디아에 많은 병력을 보내고 있는 베트남도 이에 응전, 베트남 북서부의 지방도시 및 요충지대는 격전장으로 변했다. 원래 중공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반대하고, 그것을 소련의 지원에 의한 것이라 비난하며, 소련·베트남의 ‘대소패권주의(大小覇權主義)’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서, 중공-베트남 전쟁은 중·소 대립의 축도(縮圖)라고도 일컬어졌다. 중공군은 상당한 고전을 겪었으나 국경 부근의 베트남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지방도시를 제압한 다음, 3월 5일 자위반격의 목적을 달성하였다는 명분으로 철수를 개시, 3월 6일 철수를 완료하였다.
같은 해 4월 18일부터 중공 ·베트남은 교섭을 개시하였으나,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철수를 주장하는 중공과 이것을 거부하는 베트남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려, 교섭의 주목적인 국경선 확정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공산국 사이에 최초로 일어난 이 전쟁 이후 베트남 난민이 대량으로 발생하여 국제문제화 하였다. 양국은 1988년 1월 국경전쟁 종식에 합의하였으나 상호 영유권을 주장하는 난사군도[南沙群島]에서 다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양국 분쟁은 1989년 9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철군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가 지금 순항중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에 와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남지나해에 잠자고 있는 거대한 자원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지나해의 영토를 둘러싼 소규모 전투는 중국과 베트남사이에서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고려해, 중국의 움직임을 견제하면서도 표면상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베트남은 몇 년 전부터 군사력 특히 해양 전력의 강화에 임하고 있다. 우선 항공 전력의 근대화로서 베트남 공군은 러시아로부터 스호이 27 전투기를 12기를 구입했다. 거기에 계속해, 보다 강력한 스호이 30 MK2 전투기 24기를 구입했다. 마찬가지로, 베트남 해군 역시, 러시아로부터 킬로 636형 잠수함 2척을 구입하고, 게파르드 3.9 프리게이트 2척을 구입하고 그 외에도 8척의 소형 정을 구입했다. 양국의 전통적으로 지속되어 온 적대감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쩌런에 화교들이 유대인을 닮았다 싶다. 스페인이 이슬람으로부터 다시 기독교로 회복이 된 후 스페인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대거 추방했었다. 유럽게 가보면 알지만 오래된 왕궁이나 역사적 장소를 가면 대개 그 근처에 유대인 마을이 존재한다. 프라하도 스페인의 코르도바 등등 어디를 가든 그렇다. 그들은 머리가 좋고 이재에 밝아 왕족의 회계관리나 의사등 역할을 해 돈을 많이 모았다. 그런데 인플레가 극심해지자 잘 사는 이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하고 만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차이나타운이 번성하고 있지 않은가. 광동 인들은 어디를 가나 알아준다. 등소평은 당시 화교인들이 재산을 빼앗기고 시골로 추방을 당할 처지에 이르자 분개했었다. 지금도그 때처럼 민족적 의식이 우선하는 것이 아닌가. 민족은 바로 또 역사를 의미한다.
우리는 쩌런의 빙떠이 시장에서 자유시간을 갖았다. 나는 모카 커피를 갈아 봉지에 담았다. 밀봉까지 해주는 센스, 가격으로야 엄청 싼데 과연 그 특유의 맛을 내줄지는 잘 모르겠다. 일행들은 캐쉬너트와 악세서리를 샀다. 버섯이 넘쳐나는데 도시 알 수가 없어서 사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그 시절 이 시장은 저 아래 메콩델타로부터 큰 바다에 이르는 수 만 가지 한약재 농수산물의 집산지였다. 지금도 여전히 방대하다 할 것이지만 나는 암만해도 그 시절만큼은 명성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싶다. 화교들, 그들을 쫓을 재간은 이 세상 어느 천지에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