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피의 메리
그녀는 부친의 냉대 속에서 존귀한 공주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이복 여동생의 시녀로 전락했다. 또한 계모의 질투로 독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위태롭고 참담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은 신교도에 대한 피의 탄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바로 헨리 8세의 큰 딸이자 영국 역사상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메리 튜더이다.
비참한 운명
메리 튜더는 헨리 8세와 첫 번째 왕비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국왕의 첫 아이였지만 그녀의 탄생은 부모에게 그다지 기쁨을 안겨주지 못했다.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헨리 8세에게 공주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메리의 유년 시절은 침실의 침대나 옆에서 시중해 주는 시녀가 유일한 동무였다. 차갑고 냉담한 아버지는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다.
캐서린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급기야 이혼을 결정했다. 그러나 캐서린이 국왕의 합법적인 아내임을 고집하며 이혼을 거부하자 헨리 8세는 정신적 학대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잔인한 방법은 캐서린과 메리가 서로 가까운 곳에 거처하면서도 하루에 한 번씩만 스쳐가듯 얼굴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어머니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때였던 메리는 만날 때마다 늘 헤어지기 싫어서 캐서린의 치맛자락을 잡고 늘어지다 시녀와 근윕졍에게 끌려갔다.
헨리 8세가 교황청과 결별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고 나서 메리의 처지는 더욱 참담해졌다. 그녀의 어머니인 캐서린이 비참한 생활을 하다 숨지자 앤 불린이 메리를 온갖 구박과 학대로 괴롭힌 것이다. 이유는 간단햇다. 왕위 계승 서열에서 메리는 자신이 낳은 딸 엘리자베스의 유일한 적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에는 캐서린과 메리를 동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앤 불린이 정식 왕비로 대관식을 치르던 날에도 수많은 사람이 메리를 향해 애정 어린 환호를 보냈다. 그러하니 메리에 대한 앤 불린의 적개심과 불안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앤 불린은 걸핏하면 농담 반 진담 반식으로 메리의 밥에 독약을 넣을 것을 지시하기도 했으며, 시종과 결혼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잔혹한 계모와 무관심한 아버지, 그리고 수수방관만 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메리는 크나큰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메리의 수난은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1534년에 의회는 '계승법'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권이 앤 불린이 낳은 아이에게 넘어가면서 메리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일개 왕국의 공주에서 신분이 불확실한 사생아로 전락한 것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기 전에 헨리 8세는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메리에게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일할 것을 명령했다. 외톨이가 된 메리는 그 후 30여 년 동안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외롭고 힘든 시간과 싸워야 했다.
무자비한 보복
훗날 헨리 8세가 간통죄를 빌미로 앤 불린을 사형에 처하면서 메리는 오랜 세월 자신을 뒤덥고 있던 암흑의 그림자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 헨리 8세의 세 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는 선량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메리를 궁정으로 불러들여 국왕과 화해하도록 도와주었다. 메리 역시 비굴한 만큼 겸손이 담긴 편지를 써서 헨리 8세에게 충성을 맹세햇다. 그러나 비정한 헨리 8세에게는 딸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 그는 메리에게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지 않고 사생아의 신분을 인정할 것을 서면 형식으로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메리는 굴욕을 참으며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1547년에 헨리 8세가 죽고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바로 에드워드 6세였다. 마침내 메리는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더 이상 아버지의 그림자에 가려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게 되엇다. 에드워드 6세는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 가톨릭 전통 축제들을 없애고 적극적으로 신교를 보급했다. 목사의 결혼을 허락하고 교회 안의 성상을 철거했으며 단식도 폐지했다. 신교파 귀족들은 이 틈을 타서 인클로저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며 저항하는 농민들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신교파 귀족들의 탐욕과 폭력에 농민계층들이 강한 불만을 품게 되어 잉글랜드는 심각한 사회 분열의 위기에 처했다.
1553년에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한 지 채 7년도 되지 않아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왕위 계승 서열로 따지면 당연히 메리가 왕위에 즉위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신교파 귀족 노섬벌랜드(Northumberiand) 공작은 가톨릭을 신봉하는 메리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들이 불이익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 그는 기습적으로 헨리 8세의 조카이자 자신의 며느리인 제인 그레이(Jane Grey)를 왕위에 앉혓다. 그러나 당시 민심은 메리의 편이었다. 구교파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메리가 병사를 이끌고 런던에 입성하면서 제인 그레이는 즉위 9일 만에 쫓겨났다. 마침내 아버지 헨리 8세에게 온갖 박대와 모멸을 당하며 비천한 시녀로 전락했던 메리는 권력의 최고 자리에 올라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어린 시절의 비참한 경험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헨리 8세가 추진했던 종교 개혁으로 불똥이 튀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에게 어머니 캐서린과 헨리 8세의 결혼을 무효로 돌린 신교는 그야말로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메리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신교파를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먼저 노섬벌랜드 공작과 런던 탑에 유폐되었던 제인 그레이, 이들을 지지하던 귀족들을 차례로 참수했다. 또 신교 박해를 위한 법률을 부활시키고 1555년에는 헨리 8세 치하에 만들어졌던 교황 반대 법률도 철폐했다. 주교회 성직자들의 직위를 복권하고 라틴어로 된 성사를 부활시켰으며, 수도원을 재건했다. 또한 신교 세력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신교도들에게 무자비한 박해를 가했다. 집계에 따르면 당시 사형에 처한 신교도 수가 270여 명에 달했으며 그 가운데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이혼을 추진했던 캔터베리 대주교 크랜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밖에 교구로부터 추방된 교회 목사가 4분의 1에 달했으며 신교도 수만 명이 국외로 망명했다. 그래서 훗날 역사가들은 메리 여왕을 '피의 메리'라고 불렀다.
메리 1세는 추밀원과 의회의 만류를 뿌리치고 스페인 국왕 카를 5세의 아들인 필리페 2세와 결혼했다. 수많은 신하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왕자와의 결혼을 반대하고 심지어 반란까지 일으켰지만 메리 1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메리 1세보다 10여 세가 어린 펠리페 2세는 영국에서 겨우 3개월만 머무르고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설상가상 펠리페 2세와의 결혼으로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에 패하면서 대륙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칼레 항을 영원히 잃고 말았다. 1558년에 메리 1세는 난소 종양에 걸려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메리의 기일은 잔혹한 종교적 박해에서 해방된 축제일로 기념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메리 1세보다 열 아홉 살이 어린 엘리자베스 공주가 새로운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잉글랜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블러디 메리 칵테일]
칵테일은 여러 종류의 양주와 과일, 설탕, 꿀, 우유, 버터, 향료를 혼합하여 만든 혼합주이다. 블러디 메리 칵테일은 보드카와 토마토 주스의 배합으로 붉은 색을 띠고 있다. 색깔이 핏빛처럼 새빨갛다고 해서 '블러디 메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미국 금주법 시대에도 토마토 주스에 진을 섞은 음료가 비밀 주점에서 퍼져 유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