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드 이야기
교과서 일리아드 읽기
전쟁의 씨앗이 된 황금 사과
최고의 미녀가 갖는 다는 황금 사과 하나로 빚어진 세 여신의 불화로, 트로이아의 왕자 파
리스는 그리스로 건너가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를 얻게 된다.
그리스 선단들 집결하다
메넬라오스의 형이자 그리스 전체의 대왕인 아가멤논은 트로이아에 복수하기 위해 그리스
의 모든 장군과 선단을 집결시킨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의 갈등
트로이아를 포위한 지 9년이 지날 무렵,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는 포로로 잡혀온 두 여인으
로 인해 크게 다투게 된다.
일대일 결투에 나서다
파리스와 메넬라오스는 전쟁을 끝맺기로 하고 둘만의 대결을 벌이는데, 파리스가 아프로디
테의 도움을 받게 되자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트로이아 왕가의 여인들
십 년째로 접어든 전쟁은 다시 한번 치열해지고, 트로이아의 총사령관 헥토르는 아내의 만
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전쟁에 임한다.
아가멤논 대왕이 보낸 사절단
아가멤논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뮈르미돈 막사에 있는 아킬레우스에게 사절단을 보내 전쟁에
다시 합류에 해 줄 것을 부탁한다.
레소스 왕의 백마를 훔쳐 오다
아가멤논과 헥토르는 서로의 진영으로 염탐꾼을 보낸다. 오뒤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트로이
아 진영에서 레소스왕의 백마를 훔쳐 온다.
붉은 소나기
그리스 진영으로 붉은 비가 쏟아져 내린다. 전쟁이 점차 격렬해지면서 양쪽 진영의 많은 장
군들이 부상을 입게 된다.
그리스 선단을 둘러싼 싸움
헥토르는 전차 부대를 몰고서 그리스 선단을 향해 사납게 돌진한다. 그리스의 검은 선단은
불길에 휩싸이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아킬레우스의 빛나는 황금 갑옷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나가자 그리스 군의 전세는 다시 살아난다. 하지
만 그는 헥토르의 창에 목숨을 잃고 만다.
헥토르에게 복수하는 아킬레우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위해 전쟁에 참가하여 결국은 트로이아 군을 몰아붙이
고 헥토르도 죽인다.
장례 경기를 벌이다
아킬레우스는 죽은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성대한 장례 경기를 벌인다. 하지만 그래도 분이
안 풀리자 헥트르의 시체를 계속 끌고 다닌다.
헥토르의 시신을 되찾아오다
프리아모스왕은 아킬레우스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아들 헥토르의 시
신을 되찾아온다.
사라진 토로이아의 보물
오뒤세우스는 트로이아의 신전에 있는 보물 팔라디온을 훔치기 위해 거지로 변장하여 몰래
성 안으로 들어간다.
아마조네스 여군 부대의 입성
트로이아를 지원하기 위해 여군 부대가 도착한다. 펜테실레이아 여왕은 용감하게 싸우지만
아킬레우스에게 목숨을 잃고 만다.
아킬레우스 전사하다
멤논 왕이 트로이아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오지만, 아킬레우스의 손에 죽게 된다. 아킬레우스
는 다시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둔다.
필록테테스의 독화살
전쟁이 점점 깊어지자, 그리스의 장군들은 필록테테스를 데려온다. 파리스는 그의 독화살을
맞고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거대한 트로이아의 목마
그리스 군은 목마를 만들어 해변에 세워 놓는다. 트로이아 사람들은 환호를 하며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 놓는다.
몰락하는 트로이아 성
목마 속에서 나온 특공대원들은 성 바깥의 병사들과 함께 트로이아를 잿더미로 만들고, 메
넬라오스는 헬레네를 찾아다닌다.
일리아스
〈전략〉
천벌,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언쟁
오, 여신이여, 아카이아(그리스와 같음)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을 가져다 준 펠레
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말해 다오. 수많은 용사들을 하데스(황천)로 다투어, 보냈
으며, 수많은 영웅들을 개와 독수리의 밥이 되게 하였으니, 이토록 제우스의 조언이 아트레
우스의 아들 아가멤논 대왕과 아킬레우스가 언쟁을 처음으로 시작하던 날부터 실현된 것이
다. 그러면 어느 신께서 그들에게 불화(不和)를 가져다 주었단 말인가 ? 그것은 제우스와
레토(제우스의 전처)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폴론 신의 탓이니, 아트레우스의 아들이 자기의
사제(司祭)인 크리세스를 불경(不敬)했었기 때문에. 그는 왕에게 분노가 치밀어 민중에게 경
고를 보내고자 그의 군주에게 흑사병을 보냈던 것이다. 크리세스가 딸을 찾고자 아카이아
함대로 귀한 보석을 가지고 왔었다. 더욱이 그는 손에 애원자의 화환을 아로새긴 아폴론의
홀(笏 : 예의를 갖추어 손에 쥐던 물건)을 들고 와서 아카이아 국민들에게 간청하는 것이었
다. 그러나 간청은 누구보다도 그들의 군주인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에게 했다.
"아트레우스의 두 아드님이시여, 그리고 모든 다른 아카이아 인들이시여. 올림포스에 거하시
는 제 신들께서 당신들이 프리암 시(市 : 프로시아 시와 같음. 헬레스 폰트 입구)를 정복하
고, 무사히 귀향하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저의 딸을 놓아 주시고 대가로 이것
을 받으시어, 제우스의 아드님 아폴론에게 경의(敬意)를 보여 주십시오."
이에 모든 아카이아 인들은 입을 모아 사제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가 올린 것을 받기로 했
으나, 아가멤논 왕만은 달갑지 않은지 심한 언사(言辭)로 그 사제를 맹렬히 물리쳤다.
"늙은이."
왕이 입을 열었다.
"우리 함대에서 빈둥거리는 꼴을 다시는 보이지 않도록 하고, 앞으로는 이곳에 얼씬거리지
않도록 하여라. 그대가 가져온 신의 홀이며 화환 따위는 그대를 이롭게 해 주지 못할 것이
다. 내가 그대의 딸을 놓아 주지 않을 테니. 그녀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알고스(그리스와 같
음) 내 집에서 길쌈도 하고 내 잠자리 시중도 들면서 해로(偕老)하게 될 테니까. 자, 비켜라.
성미 돋우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에게 해로울 것이다."
노인은 공포에 질려서 명령에 복종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출렁이는 해변을 따라 걸으며
레토께서 친히 낳은 아폴론 신에게 기원을 올리는 것이었다.
"간청합니다. 오, 크라이세와 성스러운 킬라를 보호하시고 그대 힘으로 테네도스를 통치하신
은활(銀)의 신이시여, 간청합니다. 오, 스민디안(소아시아에서 부르는 아폴론 이름)이시여 !
제가 일찍이 신께 영광을 드려 신전을 이룩하였다면, 황소와 염소의 살진 고기를 구워 올린
것을 기억하신다면, 저의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다나아(그리스와 같음) 사람들로 하여금 신
의 화살로써 저의 눈물의 대가를 받게 하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올리자, 아폴론 신이 이를 들었다. 그는 어깨에 활과 화살통을 메고 노한
나머지 올림포스 정상에서 내려왔다. 그의 등에서는 화살이, 떨리는 노여움과 더불어 덜거덕
거렸다. 밤처럼 어두운 얼굴을 하고서 자신의 함대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앉았다. 그들 중간
을 향해 화살을 날리니, 그의 은활은 죽음의 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그들의 개며 노새를 쏘
아 죽였으나, 이젠 사람들을 겨누어 살을 날리니, 종일토록 화장더미가 타올랐다.
꼬박 아흐레 동안 군중을 향해 화살을 날린, 열흘째 되던 날 아킬레우스는 전군을 소집했
다. 아카이아 사람들이 몰살되는 광경을 보고, 그들에게 연민을 느낀 헤라 여신에 의해 감동
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가 모이자, 그는 일어서서 그들을 향해 말했다.
"아트레우스의 아드님이시여, 우리가 멸망을 피하려면 이제 귀향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내 소견입니다. 전화(戰禍 : 전쟁으로 말미암은 재앙)와 역병(疫病 : 전염병)으로 전멸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사제나 잠언자 혹은 어떤 해몽가(꿈 또한 제우스 신의 뜻이니)에게 묻도
록 하심이 어떨지. 그들은 우리에게 포이보스 아폴론 신께서 왜 그토록 화를 내시고 계시는
지 알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약속을 어겼거나 우리의 축원이나 제물이 부족해서
마음이 상한 것이나 아닌지. 그렇다면 신께서 구운 양이며 큰 염소의 향기로운 제물을 받으
시고, 질병에서 사람들을 구해 낼 수 있을 것인가를 말해 줄 것 입니다."
이 말을 남기고 그가 자리에 앉자,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만사를 다 알고 있
는 가장 현명한 복점관(卜占官)인 테스토르의 아들 칼카스가 일어나서 입을 열었다.
포이보스 아폴론 신께서 내려 준 예언에 따라 아카이아 사람들의 함대를 일리엄(트로이아)
으로 안내해 온 자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모든 성실과 호의를 기울여서 그는 이렇게 좌중을
향해 말했다.
"신의 총아(寵兒 :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히 사랑을 받는 사람)이신 아킬레우스 장군. 그대
께서 제게 아폴론 신의 분노에 대해 말씀하라고 명하시니 일러 드리겠습니다. 하오나 먼저
말이나 행동으로 진정 저를 지켜 주실 것을 유념하시는 맹세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저는 힘
으로써 알지브 국민들을 통치하고, 모든 아카이아 사람들이 종속되어 있는 어느 한 분을 손
상시키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민이 한 왕의 노여움을 거스릴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왕께서 당장은 자기의 불쾌감을 참고 있다지만, 그일을 성취하는 날까지는 원한
을 품을 것입니다. 하오니 저를 보호해 줄 것인가를 맹세해 주십시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아킬레우스가 대답했다.
"신의 뜻에 따라 말해 주시오, 칼카스. 아폴론 신의 이름을 따라 그대는 기원하고 우리에게
그의 신탁(神託 : 신이 사람을 매개자로 하여 그의 뜻을 나타내는 일)을 밝히는 것이니, 내
가 살아서 세상을 대하고 있는 한 우리 함대에 있는 어느 다나아 사람이든 두려워하지는 마
시오. 그대가 우리 국민의 대군주이신 아가멤논 대왕을 뜻함이 아닐진대 말이오."
드디어 예언자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신께서 분노하심은 맹세에 대한 것도, 황소 백 마리에 대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아가멤
논 왕께서 사제를 모욕하여 몸값을 물리치고 그의 딸을 풀어 주지 않은 데서 오는 것입니
다. 그리하여 그 분께서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재난을 내리시고 앞으로는 또 다른 재난을
면치 못하게 할 것입니다. 활의 신께서는 대왕께서 그 총명한 여성을 돌려 보내되, 보상금도
몸값도 없이 할 뿐더러 크리세스에게 고귀한 선물을 올릴 때까지는 다나아 사람들을 이러한
재난에서 헤어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를 위로할 수 있으리라
고 믿습니다."
말을 마치고 칼카스가 자리에 앉자, 아가멤논은 화가 치밀어 일어섰다. 그의 심장은 분노
로 먹칠이 되었고, 그의 두 눈은 불꽃을 튀겼다. 그는 찌푸린 얼굴로 칼카스를 응시하며 다
음과 같이 말했다.
"흉악한 예언자여, 그대는 나와 관련된 유리한 소리는 한 마디도 해 본 적이 없소. 불리한
말만 골라서 지껄이기를 좋아했단 말이오. 좋은 말이라고는 한 번도 들려 준 적이 없소. 그
래 이젠 다나아 사람들 간에 일장의 예언을 하였는데, 아폴론 신께서 내가 크리세스의 딸,
그 여자의 대가를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화를 내리셨단 말이오? 그 여자를 내
집으로 데려갈 결심이었소. 얼굴이나 몸매, 이해심과 사람됨이 내 부인과 흡사해서 부인 클
루타임네스트라보다 더욱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오. 그래도 사람은 살리고 보아야 할 일, 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그녀를 포기할 것이오. 그러나 그대는 내게 대신 전리품을 찾아 주
어야 하오. 그렇지 않을 경우 알지브 사람들 중에 나만이 빈손이 될 터이니 말이오. 그것은
잘 되지 않을 거요. 모두들 들으시오. 내 전리품(戰利品 : 적군에게서 빼앗은 물품)이 사라
질 모양이니."
이때 아킬레우스가 답했다.
"모든 인간 중에 욕심이 많고 가장 점잖은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여, 우리 아카이아 사람들이
어떻게 그대에게 다른 전리품을 드리리까 ? 하나쯤 가져갈 공동 비축물이 없습니다. 여러
도시에서 얻은 것들은 분배하였으니, 이젠 무더기로 모으기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소녀를 신께 돌려 드리지요. 그리고 만일 제우스 신께서 우리로 하여금 트로이아 성을
함락케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우리는 그대에게 세 곱절, 네 곱절로 보답하겠소."
하자 아가멤논이 응수하였다.
"아킬레우스, 그대가 용감하다지만 이렇게 나를 속이지는 못하리다. 나를 속인다든지 설득하
지는 못할 것이란 말이오. 자신의 전리품은 간직하면서 나는 빈손으로 멍청히 앉아 그대의
말을 따라 그 소녀를 단념하란 말이지요? 아카이아 사람들이 내게 좋을 대로 공정한 교환품
을 보내도록 하시오. 그러지 않을 경우 내가 가서 당신 자신의 것을 가져가겠소. 그렇게 되
면 내가 누구에게 가든 그는 내가 가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리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재고
토록 하시죠. 현재로선 바다에 배를 띄어 적당한 사공을 찾아 내서 황소 백 마리의 제물을
싣고 크리세이스 또한 태워 보냅시다. 나아가 우리들 중에서 어떤 분을 우두머리로 동승케
합시다. 아이아스나 이도메네우스, 오디세우스 혹은 힘센 장사 펠레우스의 아들 당신 스스로
나서든지 합시다. 제물을 올려 신의 분노를 진정시키도록 말입니다."
아킬레우스가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대 거만하고 탐욕에 빠진 자여. 무슨 심사로 아카이아 사람들이 그대의 명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오. 침략과 공공연한 싸움에서 말이오. 난 트로이아 사람들이 나에게 해 주었던 푸
대접 때문에 이 곳에 원정을 온 것은 아니오. 그들과 말다툼할 일도 없다오. 그들은 내 송아
지, 망아지 한 마리 건드리지 않았소. 아니 프디아의 오곡(五穀)이 풍성한, 평원에 있는 곡식
하나 꺾어 내지 않았지요. 나와 그들 사이에는 산과 거센 바다로 된 커다란 공간이 있기 때
문이오. 우리는 당신을 따라왔지요, 이 오만한 양반아 ! 우리가 아니라 당신의 쾌락을 위해
서- 메넬라우스와 당신 자신에 대한 과오를 씻고자 트로이아로부터 만족을 얻기 위해서 말
이오. 이러한 사실을 잊은 채 내가 혈전고투(血戰苦鬪 : 생사를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싸움)
해서 얻은 것과 그리고 아타이아의 아들들이 준 전리품을 훔쳐 가고자 위협을 한단 말이오.
아카이아9 사람들이 트로이아의 부자도시를 점령하였을때, 훌륭했던 싸움이 내 손에서 끝났
는데도 난 그대가 차지했던 그런 훌륭한 전리품을 받지 못했던 것이오. 분배를 할 때 그대
의 몫은 가장 훌륭한 것들이었단 말이오. 그러니 이젠 내 함대로 돌아가서 손에 들어오는
것이나 가지고 싸움이 끝나는 것에 감사나 드려야겠소. 자, 난 프디아(데사리에 있는 아킬레
우스 국토)로 돌아갈 것이오. 그대를 위해 황금이나 귀중품을 모으느라 여기에 머물면서 수
치스러운 짓을 하느니, 내 함대를 거느리고 귀국하는 것이 훨씬 낫겠소."
그러자 아가멤논이 말했다.
"가겠다면 썩 물러가시오. 내가 무릎을 꿇고 머물러 주십사 하고 애걸치는 않겠소. 이 곳에
서는 내게 영광을 베풀 사람들이 많소. 그 중에서도 조언의 군주이신 제우스 신께서 같이하
시지요. 여기엔 당신과 같이 증오스러운 사람은 없지요. 당신은 늘 언쟁이며 싸움질만 일삼
으니 말입니다. 그대가 용감한들 무슨 상관이오 ? 그대를 이렇게 만드신 것이 신이 아니었
소? 그대의 함대와 동료들을 이끌고 고국으로 돌아가 밀미돈(아킬레우스의 족속)에 대해 뽐
내기나 하시오. 난 당신에 대해서도, 당신의 분노에 대해서도 상관치 않소이다. 나는 이렇게
할 것이오. 포이보스 아폴론이 내게 크리세이스를 빼앗아 가니 난 내 함대와 추종자들과 더
불어 그녀를 보낼 것이로되, 나는 당신의 진영(陣營)으로 가서 그대의 전리품, 아리따운 브
리세이스(아킬레우스가 점령한 도시에서 데려온 여성)를 데려갈 것이오. 그러면 당신은 내가
당신보다 얼마나 힘이 더 센지를 알게 될 것이며, 다른 자들도 감히 나와 동등하게 놓는다
든지 비교를 하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오."
펠레우스의 아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거센 심정은 칼을 뽑아 상대방의 옆구리를 찔러
아트레우스의 아들을 죽여 버릴까, 아니면 스스로 억제하여 자기의 분노를 참을 것인가 갈
피를 잡지 못했다.
이렇게 두 갈래의 길에서 망설이다 칼집에서 칼을 뽑는 순간 아테나 여신이(두 사람에게
똑같이 사랑을 아끼지 않는 헤라 여왕이 보냈으므로) 천국에서 내려와 펠레우스 아들의 아
름다운 머리를 잡아당기니, 그의 눈에만 이 여신의 모습이 비칠 뿐, 다른 사람들은 볼 수가
없었다. 아킬레우스는 놀라며 돌아서서 두 눈에서 번쩍이는 광채를 보고는 그녀가 아테나
여신임을 즉석에서 알아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방패의 주인 제우스 신의 따님이시여 ?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
멤논의 허식을 참관코자 오셨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건대-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지만-그는
이 오만에 대한 대가를 목숨으로 보상하게 될 것입니다."
아테나 여신이 대답했다.
"난 그대의 분노를 말리고자 천국에서 왔소. 그대 둘 모두를 보호하시는 헤라 여왕께서 나
를 보낸 것이라오. 언쟁을 거두고 칼을 뽑지 마시오. 정히 하겠다면 그를 말로 꾸짖으시오.
그대의 꾸짖음은 헛일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내가 말하지만-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니-그
대는 이후 지금과 같은 봉변 때문에 세 번의 훌륭한 선물을 받게 될 것이오. 그러니 칼을
거두고 내 말에 복종하시오."
"여신이시여."
하고, 아킬레우스가 대답했다.
"화난 자가 누구일지라도 그대 두 여신의 명을 따라야 하겠지요. 신들께서는 일찍이 자기들
을 숭배하는 자의 기원에 귀를 기울이시니,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길이겠지요."
그는 은빛 칼자루에 댄 손을 멈추고, 아테나 신의 명에 따라 칼집에 도로 밀어넣었다. 그
러자 아테나 여신은 방패의 부인 제우스 신이 계신 곳, 올림포스를 향해 신들에게로 돌아갔
다. 그러나 펠레우스의 아들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다시 아트레우스의 아들을 꾸
짖기 시작했다.
"개의 얼굴에다 암사슴의 심장을 지닌 주정뱅이여."
그가 고함을 쳤다.
"그대는 대군을 이끌고 싸움에 감히 나가 본 적이 없고, 선발된 전사와 함께 공격에 참가한
적이 없지요. 이런 일은 마치 죽음을 멀리하듯 피해 온 것이오. 그대는 마냥 돌아다니며 그
대에게 반대를 하는 사람에게서 약탈이나 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오. 그대는 연약한 무리
의 왕이라서 백성의 피나 빨아먹고, 한편으로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시여, 이러한 모욕을 할
기회는 이제 마지막이 될 것이오. 그래서 말하는데, 그리고 맹세코 단언하지만-자, 산 위에
있는 몸체에서 잘려진 날부터 잎도 싹도 돋지 않는 홀을 두고-도끼로 잎과 껍질을 벗겨, 지
금은 아카이아 자손들이 하늘의 율령이요 심판관으로 그것을 지니고 다니는-내가 분명히
그리고 솔직히 맹세하니 온 동포가 아킬레우스를 그릴 날이 올 것이나 만나지는 못할 것이
다. 그대 부하들이 살인마 헥토르(트로이아 왕의 장남. 트로이아 군의 총사령관)의 손에 쓰
러져 죽어 갈 때면 그대는 아카이아 사람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자에게 모욕을 퍼부었던 날
을 후회하며 분함 마음을 되씹을지언정 그들을 도와 줄 방도는 알지 못하리라."
이 말을 마치자, 펠레우스의 아들은 금징을 박은 흘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자리에 앉았다.
한편 아트레우스의 아들은 자리에서 다른 쪽으로 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때 필로스
사람 중에서도 달변가인 유연한 입의 소유자 네스토르(게레니아의 영주, 지혜의 노장군)가
일어나고,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말들은 꿀맛보다도 더욱 달콤했다. 필로스에서 사람들이
두 세대를 살다가 그의 통치하에서 사라져 갔으며, 지금 그는 삼대(三代)째를 통치하고 있었
다. 그는 정성과 호의를 다하여 그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토로(吐露)했다
"분명 커다란 고뇌가 아카이아 땅에 떨어졌습니다. 전쟁이나 상담에 있어 그토록 탁월한 그
대들의 언쟁을 들을 수 있다면 분명 프리암 족은 자손들과 더불어 기뻐 날뛸 것이며, 트로
이아 족도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할 것이오. 난 그대들보다는 연상이오. 그러니 나의 뜻을
따르시오. 더욱이 난 그대들보다도 훨씬 위대한 사람들과 친숙했었는데, 그들은 나의 조언을
무시하지는 않았다오. 이제 다시는 피리도우스와 드리아스의 지도자와 카에니우스, 엑사디우
스, 신과 다름없는 폴리페무스, 신의 동료인 아지우스의 아들 데세우스와 같은 그런 분들을
쳐다볼 수는 없을 것이오. 이들이야말로 이 지구상에 태어나신 최강자, 절대의 강자들이시
며, 가장 억센 산악 야만족들과 싸워서도 일격에 그들을 넘어뜨렸다오. 난 머나먼 필로스에
서 그들의 청을 받고 그들과 합류해서 마땅한 일인 것처럼 맞서 싸웠죠. 지금 생존해 있는
뉘라도 그들에게 대항할 자는 없다오. 그러나 내 말에는 순응해서 따랐습니다. 이게 보다 탁
월한 길이니, 그대들 자신도 내 말을 유념토록 하시오. 그러니 아가멤논이시여, 그대가 강자
일지라도 이 여자를 빼앗아 가지 마시오. 아카이아 자손들은 그녀를 이미 아킬레우스께 상
납했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대 아킬리우스여, 더이상 대왕과 겨루기를 삼가시오. 제우스의
은총으로 왕권을 쥔 왕이란 일반적인 권리를 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오. 그대는 강자요, 그
대 모친은 신입니다. 그러나 아가멤논 대왕께서는 그대보다 더욱 강자이십니다. 슬하에 보다
많은 국민을 거느리고 계시기 때문이죠. 아트레우스의 아드님이시여, 내가 간청하니 분노를
거두시고 아킬레우스 장군과의 언쟁을 멈추시오. 그분께서는 전쟁이 있을 때는 아카이아 국
민들을 위한 힘의 아성(牙城)입니다."
이에 아가멤논 대왕이 대답하였다.
"그대가 하신 말씀 모두가 지당하오. 하지만 이 친구는 우리의 군주가 되고자 바라고 있으
며, 주인이, 그리고 만인의 군주가, 만인의 왕이, 만인의 우두머리가 되고자 소망하오. 그렇
지만 어디 될 법이나 한 말이오 ? 불멸의 신들께서 그를 위대한 전사로 만드셨다고 하더라
도, 그들은 또한 그에게 그토록 무례한 말을 지껄이도록 권리를 주셨단 말입니까?"
아킬레우스가 말을 가로챘다.
"내가 당신의 말만 모두 듣고 있다가는 천박한 겁쟁이가 될 것 같소. 명령은 내가 아닌 딴
사람에게나 하시오. 난 더 이상 순종하지 않을 테니 말이오. 더욱이-지금의 내 말을 새겨
두시오.-이 여자 문제로 당신하고 또는 다른 어느 사람하고도 싸우지는 않을 것이오. 주었
던 것들을 다시 찾아가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내 함선에 실린 기타 어느 것도 강제로 가져
가지는 못할 것이오. 자, 다른 사람들이 목격할 것이오. 만일 그대가 그 따위 짓을 한다면,
나의 창이 붉게 물들리란 것을 말이오."
그들은 분에 못 이겨서 이토록 언쟁을 벌인 끝에, 일어나서 아카이아 함대에서의 회합을 해
체했다. 펠레우스의 아들은 메네티우스의 아들과 동료들을 동반하고 함대의 진지로 돌아갔
다. 한편, 아가멤논 대왕은 물에 배를 띄우고 스무 명의 선원을 선정했다. 그는 크리세이스
를 배로 호위해 와서 신에게 올릴 제물을 실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가 지휘를 하고 출범했
다. <하략>(김봉군외 1인 지학 문학교과서) - 김병철 옮김
요점 정리
작자 : 호메르스(Homeros) / 김병철 옮김, 천병희 옮김
갈래 : 영웅 장편 서사시
성격 : 서사적. 비극적
어조 : 삶과 죽음의 중대사를 논하는 장중한 어조
심상 : 묘사적. 서술적
제재 : 트로이 전쟁의 신과 영웅들
주제 :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용감한 영웅 정신
줄거리 : 전편 부분에서는 그리스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 왕이 아킬레우스에게 점령한 도
시에서 데려온 여인 브리세이스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아킬레우스는 전공(戰功)과 명예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고 몹시 분노한다. 그는 부하들과 같이 자기 함선에 틀어박혀 싸움터
에 나가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은 아킬레우스 없이 계속된다. 발 빠르고 용맹한 그를 겁내
어, 성 밖으로 나오지 않던 트로이아군은 총사령관인 헥토르의 지휘하에 들판으로 쏟아져
나와 일대 공세를 취한다. 그리스군도 아이아스, 디오메데스, 오디세우스 등이 선전하지만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어,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진다. 이때 비로소 아가멤논은 자
기의 경솔을 후회하고 아킬레우스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많은 선물로 보상할 뜻을 전하며
출진을 간청하나, 그는 단호히 거절한다. 선진 가까이까지 밀린 그리스군은 방루(防壘)와 참
호에 의지하여 버티어 보려하나, 이미 많은 장병들이 쓰러지고 함선이 모두 불타 버려, 항복
직전의 절망적인 상태에 이른다.
이 때 아킬레우스의 가장 친한 전우 파트로클로스가 이 곤경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
어 아킬레우스에게 다시 한 번 출전하도록 권해 보는 데서부터 중편 부분이 시작된다. 아킬
레우스는 여전히 완강하게 거부한다. 파트로클로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의 갑옷과 투
구를 빌려 입고 나가 싸운다. 그는 적병을 무찌르며 전진하다가 너무 적진 깊숙이 들어가
버린다. 트로이아군은 처음에 그가 아킬레우스인 줄알고 두려워하였으나, 곧 그의 정체를 알
고 그를 공격한다. 그리하여 대장 헥토르는 그를 죽이고 갑옷을 벗긴다.
전우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알게 된 아킬레우스는 눈물을 흘리며 분해한다. 복수하기로
결심한 아킬레우스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새 갑주로 무장하고 싸움터로 나가
종횡무진으로 적병을 무찌른다. 몰린 트로이아군은 성 안으로 쫓겨가고 헥토르만이 홀로 남
았으나, 아킬레우스는 그를 쳐서 죽이고 그 시체를 수레에 매달아 끌고 간다. 파트로클로스
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그 밖에도 포로 열두 명의 목을 메고 성대한 장례식을 올리기로 한
다. 이때 트로이아의 노왕(老王) 프리아모스가 신의 도움을 얻어 남몰래 아킬레우스의 막사
로 찾아가 아들의 시체를 돌려 달라고 간청한다. 증오의 화신처럼 분노했던 아킬레우스도
가엾은 노왕의 모습을 보자, 늙은 자기 아버지의 생각이 나서 배상을 받고 시체를 돌려 준
다. 약속대로 양군(兩軍)은 장례식을 위해 일시 휴전했으나 이미 헥토르를 잃은 트로이아군
의 패배는 명백해진다.
구성 : 《일리아스》(일리오스의 노래)의 구성은 전편이 24장으로 나누어져 있고, 장마다 5
백 행 내지 8백 행의 시로 되어 있으므로 전체 행수는 1만 5천7백 행에 이른다. 트로이 전
쟁 10년째 되는 해 전후 51일 동안 전쟁터에서 생긴 일들이 이 속에 담겨져 있는데, 그 중
중요한 사건은 제 1장, 제 9장, 제 15장, 제 16장에 나타나고, 그 밖의 장들은 이를 이어가는
삽화들이다. 그러나 크게 나누면 제 1장부터 9장까지는 전편, 제 10장부터 17장까지는 중편,
제 18장부터 24장까지는 후편이라고 볼 수 있다.
전편 부분에서는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 왕이 아킬레우스에게 점령한 도시에서
데려온 여인 브리세이스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아킬레우스는 전공(戰功)과 명예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고 몹시 분노한다. 그는 부하들과 같이 자기 함선에 틀어박혀 싸움터에 나
가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은 아킬레우스 없이 계속된다. 발 빠르고 용맹한 그를 겁내어 아직
까지 성 밖으로 나오지 않던 트로이군은 총사령관인 헥토르의 지휘하에 들판으로 쏟아져나
와 일대 공세를 취한다. 그리스군도 이아이스, 디오메데스, 오딧세우스 등이 선전하지만 후
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어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진다. 이때 비로소 아가멤논은 자기
의 경솔을 후회하고 아킬레우스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많은 선물로 보상할 뜻을 전하며 출
진을 간청하나 그는 단호히 거절한다. 선진 가까이까지 밀린 그리스군은 방루(防壘)와 참호
에 의지하여 버티어 보려 하나 이미 많은 장병들이 쓰러지고 함선이 모두 불타 버릴 듯 거
의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른다.
이때 아킬레우스의 가장 친한 전우 파트로클로스가 이 곤경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
어 아킬레우스에게 다시 한번 출진하도록 권해보는 데서부터 중편 부분이 시작된다. 아킬레
우스는 여전히 완강하게 거부한다. 파트로클로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의 갑옷과 투구
를 빌려 입고 나가 싸운다. 그는 적병을 무찌르며 전진하다가 너무 적진 깊숙이 들어가 처
음에는 그를 아킬레우스인 줄 알고 두려워했던 트로이군의 반격을 받아 헥토르는 그를 죽이
고 갑옷을 벗긴다.
전우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알게 된 아킬레우스는 눈물을 흘리며 분해한다. 여기서부터
가 이야기가 종말되기 시작하는 후편 부분이다. 복수하기로 결심한 아킬레우스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토스가 만든 새 갑주로 무장하고 싸움터로 나가 종횡무진으로 적병을 무찌른다.
몰린 트로이군은 성 안으로 쫓겨가고 헥토르만이 홀로 남았으나, 아킬레우스는 그를 쳐서
죽이고 그 시체를 수레에 매달아 끌고 간다. 파트로클레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그 밖에도
포로 열 두 명의 목을 베고 성대한 장례식을 올리기로 한다. 이때 트로이의 노왕(老王) 프리
아모스가 신의 도움을 얻어 남몰래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찾아가 아들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간청한다. 증오의 화신처럼 분노했던 아킬레우스도 가엾은 노왕의 모습을 보자 늙은 자기
아버지의 생각이 나서 배상을 받고 시체를 돌려준다. 약속대로 양군(兩軍)은 장례식을 위해
일시 휴전했으나 이미 헥토르를 잃은 트로이군의 패배는 명백해진다. (출처 : 김봉군 외 1인
저 지학사 문학교과서)
이와 같이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열화 같은 분노가 빚어내는 잔인한 전쟁의 이야기
이며, 방대한 규모의 전투 장면과 용사들의 용맹이 독자들의 마음에 생생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분노를 터뜨리고 복수심에 불타고 혹독한 살육을 마구 하던 영
웅도 마침내 고통을 통하여 연민에 도달하게 되고 인간의 고귀한 가치인 높은 품위를 보인
다는 점이다.
인물 :
제우스(Zeus)
고대 그리스 종교에서 최고신으로 하늘·기후 신으로 로마 신의 주피터에 해당한다. 천둥·
번개·비·바람을 보내는 신으로 간주되었고 그의 전통적인 무기는 벼락이었다. 신과 인간
의 아버지(지배자이자 수호자)라고 불렸다. 후에 그리스 신화로 흡수된 크레타 신화에 따르
면, 티탄족 왕인 크로노스는 자식 중의 1명이 그를 권좌에서 밀어낼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태어나기만 하면 잡아먹었다. 그러나 아내 레아는 제우스가 태어나자 배내
옷에 돌을 싸서 대신 삼키게 하고 제우스를 크레타의 한 동굴에 숨겨놓았다. 그 동굴에서
제우스는 요정(또는 암염소) 아말테이아의 손에 키워졌으며 쿠레테(젊은 전사)들에 의해 보
호되었다. 쿠레테들은 창검을 부딪치는 소리를 내어 제우스의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
지 않게 했다. 어른이 되자 제우스는 형제들인 하데스와 포세이돈의 도움을 받아 티탄족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크로노스를 권좌에서 몰아냈으며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형제들과 나누
어가졌다.
하늘의 지배자인 제우스는 신들을 이끌고 기간테스족(가이아와 타르타로스의 후손)을 격퇴
했으며, 동료 신들의 도움을 받아 그에 대항하는 여러 반란자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그
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따라서 기후의 신이 살고 있
는 집으로 생각되었던 올림포스 산의 최정상에 하늘이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른
신들도 그곳에서 제우스와 함께 살았으며 제우스의 뜻에 복종했다. 제우스는 올림포스 산
꼭대기에 앉아 전지(全知)의 힘으로 인간의 모든 일을 관찰하고 모든 것을 통치하며 선행은
상주고 악은 벌한다고 생각되었다. 제우스는 정의를 실행할 뿐 아니라 도시·가정·재산·
여행자·손님·탄원자 등의 수호자였다.
제우스는 바람둥이로 유명했고 이때문에 아내 헤라와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여신이나
여인들과 수많은 정사를 가졌으며,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동물의 모습을 취하곤 했는데,
예를 들면 헤라를 범할 때에는 뻐꾸기로, 레다를 범할 때는 백조로, 그리고 에우로파를 범할
때에는 황소로 변신했다. 자녀로는 티탄족 여신 레토와의 사이에 쌍둥이 남매 아폴론과 아
르테미스, 스파르타의 레다와의 사이에 헬레네와 디오스쿠오리, 여신 데메테르와의 사이에
페르세포네가 각각 태어났고, 티탄족의 메티스를 삼킨 제우스의 머리에서 아테나가 태어났
다. 또한 아내 헤라와의 사이에 헤파이스토스·헤베·아레스·에일레이티이아, 여신 세멜레
와의 사이에 디오니소스가 태어났으며, 그밖에도 여러 아들과 딸이 있다.
그리스의 종교학자들은 제우스를 그리스 신화의 최고신으로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아
테나나 헤라 등의 강력한 지방신들과 비교할 때 제우스의 보편성은 오히려 그를 덜 중요한
신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제우스 헤르케이오스(집의 수호자) 상과 제우스 크세니오스
(손님 접대자)의 제단이 각 집의 앞마당을 장식하고 있고 산꼭대기에 위치한 그의 제단에
순례자들이 참배하기는 했지만, BC 6세기말까지 아테네에는 제우스의 신전이 없었으며 올
림피아에 있는 그의 신전도 헤라의 신전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예술작품에서는 턱수
염이 나고 위엄 있는 키 큰 남자로 표현되며, 그의 가장 뚜렷한 상징물은 벼락과 독수리이
다.
트로이 전쟁 때는 중립을 지키지만, 아가멤논 왕과의 싸움에서는 아킬레우스를 지지한다.
헤라(Hera)
그리스 신화의 여신으로 티탄족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이며 제우스의 누이이자 아내로, 올림
포스 산 신들의 여왕이다. 로마인들은 헤라를 자기들의 주노 여신과 동일시했다. 그리스 세
계 전역에서 숭배되었고 그리스 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주로 제우스의 질투심 많
은 아내로 등장하여 제우스가 사랑하는 여주인공들에게 앙갚음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
주 일찍부터 제우스의 유일한 정식 배우자로 여겨졌으며, 에페이로스의 도도나에 있던 신탁
소에서 제우스와 짝을 이루었던 디오네를 곧 대신하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제우스와 헤라는 본래 땅이나 식물의 신이었으리라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헤라는 2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숭배되었다. 첫째,
그녀는 제우스의 배우자로서 하늘의 여왕이었고, 둘째, 여성의 생활과 결혼의 여신이었다. 2
번째 면에서 그녀는 자연히 여자의 출산의 수호신이 되었고, 아르고스와 아테네에서는 탄생
의 여신으로 에일레이티이아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렇지만 아르고스와 사모스에서는 하늘의
여왕이나 결혼의 여신이었을 뿐 아니라 이 도시들의 보호자 역할도 했으며, 이는 아테네에
서 아테나 여신의 지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기리는 아르고스의 의식은 농업적인 것이 분명하지만, '방패'라고 불리는 의식도 있
었고 사모스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무장행렬이 있었다. 이러한 개념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수
호신에게 주어진 역할에서 비롯되었다. 한 도시의 수호여신은 평화시와 전쟁시에 모두 중심
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헤라에게 바쳐진 특별한 짐승은 소였으며, 그녀의 새는 처음에는 뻐
꾸기였고 나중에는 비둘기였다. 그녀는 젊지만 우아하고 엄격한 기혼부인으로 묘사되었다.
트로이 전쟁에서는 아카이아(그리이스군)군을 정성을 다해 지원한다.
아테네(Athene)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도시의 수호신이자 전쟁, 공예, 실천적 이성의 여신으로 로마 신화의
미네르바와 동일하다. 본질적으로 도시적이며 문명적인 성격을 지녀, 전원적인 성격의 아르
테미스와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아마도 헬레니즘 시대 이전의 여신이었을 것이며, 뒤에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신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리스는 미노아와는 달리
군사경제가 발달했기 때문에 아테나는 초기의 가정적인 모습을 지니면서도 전쟁의 여신이
된 것이다.
아테나가 여러 그리스 도시에 있는 아크로폴리스와 연결되는 것은 왕궁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녀에게는 남편도 자녀도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원래부터 처녀로 묘사된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이른 시기부터 처녀성은 그녀의 속성으로 여겨졌으며, 이것은 그녀의
별명 아테나 팔라스나 아테나 파르테노스('처녀신 아테나')를 해석하는 바탕이 되었다. 전쟁
의 여신이었으므로 아프로디테와 같은 다른 여신들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궁궐의 신이었으
므로 신성(神性)을 침해받지 않았다. 〈일리아스 Iliad〉에서 아테나는 전쟁의 여신으로서 그
리스의 영웅들 편에 서서 사기를 높이고 싸움을 도왔는데, 그녀의 도움이란 곧 군사상의 용
맹성을 의미했다. 또한 〈일리아스〉에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전쟁의 신 아레스와 아테나
에게 전쟁을 벌일 영역을 정해주었다고 되어 있다. 아테나가 도덕이나 군사적인 면에서 아
레스보다 우월한 것은, 아레스가 단순히 유혈의 욕망을 상징하는 데 비해 아테나는 전쟁의
지적이고 문명화된 측면과 정의 및 기술의 덕성을 상징한다는 사실에서 우선적으로 기인한
다. 아테나의 우월성은 또한 그녀의 역할들이 더 다양하고 중요할 뿐 아니라 호메로스의 조
상들이 외국에서 들여온 아레스보다는 아테나를 민족적인 입장에서 더 높이 평가한 데서 비
롯된다. 〈일리아스〉에서 아테나는 영웅과 군인의 이상을 나타내는 신이었으며, 특히 접전
에서의 출중함, 승리와 영광의 화신이었다. 그녀가 전쟁에 참가할 때 입는 갑옷인 아이기스
(aegis)에 나타나 있는 대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그녀의 속성들은 공포·투쟁·방어·공
격 등이다. 〈오디세이아 Odyssey〉에서 아테나는 오디세우스의 수호신으로 나오며, 그뒤의
신화들에서는 페르세우스와 헤라클레스를 돕는 역할로 그려져 있다. 왕들의 수호신으로서,
전쟁뿐 아니라 훌륭한 조언, 신중한 자제, 실제적인 통찰력의 여신이기도 했다.
미케네 시대 이후 아테나의 영역은 궁궐에서 도시의 성채로 바뀌었다. 여러 지방에서 숭배
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주로 그녀의 이름을 딴 아테네와 연관된다. 그녀가 거기에서 도시의
수호여신인 아테나 폴리아스('아테네 도시의 수호자')로 등장하게 된 것은 고대 도시국가가
군주제에서 민주제로 바뀜에 따른 것이었다. 그녀는 아테네 시의 상징으로 유명해진 올빼미
를 위시하여 새들과 연관이 있었으며 뱀과도 관계가 깊었다. 그녀의 탄생과정과 아테네 시
의 종주권을 놓고 싸운 포세이돈과의 결투는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에 새겨져 있다. 헤시오
도스는 〈신통기 神統記 Theogony〉에서 아테나가 어떻게 어머니 없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는지를 이야기했고, 핀다로스는 이에 덧붙여 헤파이스토스가 제우스의 머리를 도끼로
쳐서 아테나가 태어났다고 했다.
아테나의 탄생축제인 판아테나이아(Panathenaea)는 식물의 성장과 결부되었다. 프로카리스
테리아(Procharisteria)도 봄이 옴에 따라 땅에서 여신이 솟아오르는 것을 축하하는 행사였
다. 그러나 아테나가 식물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도시를 위한 그녀의 일반적 활동의 부산
물일 뿐이다. 아테나는 일반적으로 공예 및 숙달된 일상적 작업의 여신이었다. 그녀는 특히
방사(紡絲)와 방직(紡織)의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지혜와 정의를 상징하
게 된 것도 기술의 후원자로서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아테나는 보통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방패와 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피디아스와 아이스킬로스는 아테나의 이미지가 문화적으로 확산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피디아스는 파르테논 신전에 있는 금과 상아로 된 아테나 파르테노스(Athena Parthenos)를
비롯하여 3개의 뛰어난 아테나 상을 조각했다. 그리고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에우메니데스
Eumenides〉에서 아테나는 아테네의 장로회의 아레오파고스를 세웠고, 교착상태에 빠진 재
판에서 피고 오레스테스를 위해 재판의 표결이 동수일 때는 무죄라는 선례를 남기는 것으로
그려진다. 트로이 전쟁에서 아카이아군 편에 서서 눈부신 응원을 보낸다.
아프로디테(Aphrodite)
고대 그리스의 여신으로 성애(性愛)와 미의 여신으로, 로마인들에게는 베누스가 된다. 그리
스어로 아프로스(aphros)는 '거품'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프로디테는 우라노스(하늘)의 아들
크로노스가 아버지의 생식기(生殖器)를 잘라 바다에 던진 데서 생겨난 하얀 거품으로부터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사실 아프로디테는 바다와 항해의 안전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널리
숭배되었으며, 스파르타·테베·키프로스 등지에서는 전쟁의 여신으로도 숭배되었다. 그러나
사랑과 다산(多産)의 여신이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결혼을 관장하기도 했다. 매춘부들은 아
프로디테를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생각했지만 그녀에 대한 공적인 숭배의식은 대체로 경건했
고 엄격하기까지 했다.
많은 학자들은 아프로디테 숭배가 동양에서 전래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녀의 특징 중 많
은 부분이 셈족에게서 유래한 것은 분명하다. 호메로스는 키프로스 섬이 아프로디테 숭배로
유명했다는 점에서 그녀를 키프로스인이라고 했지만, 호메로스 시대에 아프로디테는 이미
그리스화되어 있었으며 그 또한 아프로디테가 제우스와 그의 여자인 도도나의 디오네 사이
에서 태어났다고 여겼다. 〈오디세이아 Odyssey〉에서 아프로디테는 절름발이 대장장이 신
인 헤파이스토스와 어울리지 않는 결혼을 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미남인 전쟁의 신인 아레
스와 연애하는 데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이들 사이에서 하르모니아가 태어났음). 인간들과
도 여러 번 사랑에 빠졌는데, 그중 중요한 인물로는 트로이의 목동이었던 안키세스(그와의
사이에 아이네아스를 낳았음)와 미남 청년 아도니스(원래는 셈족의 자연신으로 이슈타르-아
스타르테의 남편인 이슈타르)가 있다. 아도니스는 사냥중에 멧돼지에게 죽음을 당했으며, 아
도니아 축제 때는 여자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도니스 숭배는 저승세계의 특징을 보
이며, 델포이에서는 아프로디테 역시 죽은 자들과 결부되었다.
아프로디테 숭배의 중심지는 키프로스 섬에 있는 파포스와 아마투스, 미노아의 식민지 키테
라 섬이었는데, 키테라에서는 아프로디테 숭배가 선사시대부터 행해진 것 같다. 그리스 본토
에서 아프로디테 숭배의 중심지는 코린트였다. 그녀는 에로스, 그레이스(자비), 호라(계절)와
밀접히 연관됨으로써 풍요의 촉진자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그녀는 세상의 창조적 요소
인 게네트릭스(Genetrix:산모)로서 널리 숭배되었다. 그녀를 수식하는 말인 우라니아
(Urania:천상의 거주자)와 판데모스(Pandemos:모든 사람의)를 플라톤이 부정확하게 받아
들여 지적이고 일반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다. 실상 우라니아라는 명칭은 특정한
동양의 신들에게 쓰였던 경칭이며, 판데모스라는 명칭은 도시국가 내에서의 그녀의 지위를
나타낼 뿐이다. 비둘기·석류·백조 그리고 도금양(桃金孃)이 그녀의 상징이었다.
초기 그리스의 예술에서 아프로디테는 동양의 나체 여신상 또는 다른 여신들과 마찬가지로
입상·좌상으로 표현되었다. 아프로디테가 처음으로 독자적인 모습을 갖게 된 것은 BC 5세
기의 조각가들에 의해서였다. 가장 유명한 조각은 프락시텔레스가 크니디아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것으로, 그것은 뒤에 밀로의 비너스 같은 헬레니즘 걸작품들의 전형이 되었다. 트로이
아 전쟁 때는 트로이군 편에 서서 싸운다.
아폴로(Apollon) :
(영)Apollo. 별칭은 Poibos(영어로는 Phoebus).
그리스 종교에서 다양한 기능과 의미를 지니는 신으로, 그리스의 모든 신들 중 가장 널리
숭상되고 영향력 있는 신으로 그의 본래 성질은 분명하지 않지만, 호메로스 시대 이래로 그
는 신적인 거리를 지닌 신으로, 멀리서 메시지를 보내거나 위험을 경고해주고, 인간에게 그
들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정화시켜 주며, 종교적인 법과 도시의 법령들을 주재하
고, 예언과 신탁을 통해 인간에게 미래의 일과 그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뜻을 전달해 주었다.
신들조차 그를 두려워했으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레토만이 그의 존재를 견디어낼 수 있
었다. 이러한 거리감·죽음·공포·두려움은 그를 상징하는 활에 집약되어 있다. 반면 그의
보다 부드러운 성격은 그의 또다른 상징물인 리라에서 보이는데 이는, 음악·시·춤을 통해
올림포스(신들의 거주지)와의 교류의 기쁨을 나타낸다. 또한 민간에서는 그의 별칭인 알렉시
카코스('악을 막아주는 사람')가 시사하듯이 야생동물과 잔병에 대한 신성한 수호자로서 농
작물과 가축의 신이기도 했다. 그의 별칭인 포이보스는 '밝다' 또는 '순수하다'는 의미로,
그가 태양과 관련되어 있다는 견해가 널리 퍼졌다. 아폴론의 또다른 별칭은 노미오스('목동
')였는데, 그는 제우스의 무기를 만들던 키클롭스들을 죽인 데 대한 벌로 페라이 왕 아드메
토스의 마부와 목동이라는 천한 신분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리케이오스라고도 불렸
는데, 이 별칭은 아마 그가 늑대들(lykoi)로부터 양떼를 보호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목동들과 양치기들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음악을 즐겼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것이 아폴론의
원래 역할이었다고도 주장했다.
아폴론은 모든 신들 중 가장 그리스적인 신이었지만, 그 기원은 분명 외래적인 것으로 그리
스 북부나 아시아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따르면 아폴론과 쌍둥이 누이인 아
르테미스는 델로스 섬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아폴론은 피토(델포이)로 가서 그 지역을 수
호하던 암룡 피톤을 죽였다. 그는 돌고래로 가장하여 크레타인의 배 위로 뛰어올라 선원들
을 그에게 복종시킴으로써 그의 신탁소를 세웠다. 그리하여 피토는 돌고래(delphis) 사건 이
후 델포이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예전에 그곳에서 숭상되던 땅의 여신인 가이아 대신 아폴
론 델피니오스가 숭상되었다. 초기 그리스 시대(BC 8~6세기)에 델포이 신탁의 명성은 멀리
아나톨리아의 리디아까지 퍼져나가 그리스 전역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했다. 아폴론의 중
개인 피티아는 50세가 넘는 그 고장의 여자로서 아폴론의 영감을 받아 아폴론의 주(主)신전
에서 신탁을 전했다. 그러면 성직자들이 그 신탁들을 해석하고 운문으로 만들었다. 그리스
본토와 델로스 및 아나톨리아에도 아폴론의 다른 신탁소들이 있었지만, 델포이의 신탁소 만
큼 중요하지는 않았다.
아폴론을 기리는 그리스의 축제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8년마다 열리는 델포이 스텝테리온
으로, 이 축제 동안에 소년이 피톤의 살해 장면을 재연하고 일시적으로 템페 계곡으로 추방
되었다. 아폴론과 관련된 연애 사건들은 많지만 대부분 불행하게 끝난다. 다프네는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애쓰다가 월계수로 변했으며(그후 월계수는 그를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음), 코로
니스(아스클레피오스의 어머니)는 부정한 행위가 드러나 아폴론의 쌍둥이 누이 아르테미스
의 화살을 맞아 죽었으며, 카산드라(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딸)는 그의 구애를 거절한 끝에
진실한 예언들을 해도 아무도 믿지 않게 되는 벌을 받았다. 이탈리아에서는 아폴론이 일찍
부터 알려졌으며, 그리스에서처럼 주로 치료 및 예언과 연관되었다. 그의 신전 가까이에서
악티움 전투(BC 31)가 벌어졌기 때문에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크게 숭배했다. 미술품에
서 아폴론은 수염이 없는 젊은이로 묘사되는데, 옷은 입고 있기도 하고 벗고 있기도 하며,
활이나 리라를 들고 있는 경우도 많다.
포세이돈(Poseidon)
그리스 신화에서 일반적으로 바다와 물의 신으로 그리스의 가장 오래된 물의 신으로 바다를
의인화시킨 폰토스와는 구별된다. 포세이돈이라는 이름은 '땅의 남편'이나 '땅의 주인'을 의
미한다. 전통적으로 고대의 주신(主神) 크로노스와 풍요의 여신 레아의 아들이며, 주신 제우
스와 하계의 신 하데스의 형제이다. 이 3형제가 아버지를 폐위시켰을 때 바다의 왕국이 포
세이돈의 몫이 되었다. 포세이돈의 무기는 삼지창이지만 원래는 긴 손잡이가 달린 작살이었
을 것이다.
포세이돈은 지진의 신이기도 하며 그리스에 있는 가장 오래된 그의 숭배지 중에서 많은 곳
이 내륙에 있다. 또한 말[馬]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날개 달린 괴물 메두사와의 사이에
서 날개 달린 말 페가소스를 낳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포세이돈이 그 지방에 처음
으로 말을 도입한 초기 그리스 민족의 신으로서 그리스에 전해졌으리라는 데 동의한다. 포
세이돈은 비록 아티카의 지배권에 대한 경쟁에서 아테나에게 지기는 했지만 그곳에서도(특
히 콜로노스에서) 히피오스('말들의'라는 뜻)로서 숭배된다. 다른 곳에서는 육지의 샘과 관
련이 있다. 포세이돈은 살모네우스의 딸인 티로와의 사이에서 펠리아스와 넬레우스를 낳았
고, 그리하여 테살리아와 메세니아 왕가의 시조신이 되었다. 포세이돈의 그밖의 자손은 대개
오리온이나 안타이오스, 폴리페모스처럼 거인이나 야만인일 것이다. 포세이돈의 일반적 성격
은 거칠다.
포세이돈을 기념하는 주요한 축제는 유명한 운동경기들이 벌어지는 이스트미아로 코린트의
이스트모스 근처에서 2년마다 열린다. 바다의 신으로서 포세이돈의 특성은 미술작품에서 두
드러지게 표현되었고, 삼지창·고래·다랑어 같은 상징물을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
다. 로마인들은 포세이돈을 바다의 신으로서 넵투누스와 동일시하면서 그의 다른 면들은 무
시해버렸다. 트로이에 대한 해묵은 원한으로 아카이아군 편을 든다. 또한, 오디세우스에게
가혹한 운명을 내린다.
아레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 또는 좀더 정확히는 전투의 정령(精靈)으로 로마 신화에서
이와 비슷한 마르스와는 달리 그는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았으며, 널리 숭배되지도 않았고,
잔인한 전쟁과 학살의 혐오스러운 측면을 상징했다. 그를 제우스와 그의 아내인 헤라의 아
들로 묘사한 호메로스 시대 이후로 아레스는 올림포스의 신이 되었으나, 그의 동료 신들이
나 심지어 그의 부모조차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일리아스 Iliad〉 889행 이하). 그런데도
전투에서는 그의 누이인 에리스(분쟁), 아프로디테가 낳은 그의 아들들인 포보스(공포), 데이
모스(참패) 등이 그를 따랐다. 또한 그와 관련된 전쟁의 신이 2명 있었는데, 사실상 아레스
자신과 동일한 에니알리오스와 그의 여성짝인 에니오가 그들이었다. 아레스 숭배는 주로 그
리스의 북부지역에서 이루어졌으며, 주요한 신들 숭배에 흔히 보이는 사회적·도덕적·신학
적 측면들은 없었지만, 지방에 따라 흥미로운 특징이 많았다. 스파르타에서는 초기에 전쟁
포로들을 제물로 바쳤다. 또한 에니알리오스에게 밤의 제물로 개(지하 또는 황천의 신이라
는 것을 나타내는 특이한 제물)를 바쳤다. 라코니아의 게론트라이에서 열린 그의 축제 기간
에는 여자들이 신성한 숲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테게아에서는 여자들이 특별
한 제물을 바쳐 기나이코토이나스(Gynaikothoinas:'여성들의 접대자'라는 뜻)인 그를 찬양
했다. 아테네에서는 아레오파고스(아레스의 언덕) 기슭에 그를 모신 신전이 있었다.
아레스와 관련된 신화는 많지 않다. 그는 일찍부터 아프로디테와 연관되었는데, 사실 아프로
디테는 지방에 따라서는(예를 들면 스파르타) 전쟁의 여신으로 알려졌는데, 그것은 분명히
그녀의 초기 특성 중 하나였다. 때로 아프로디테는 아레스의 정식 아내로 알려졌으며, 그 둘
사이에서 데이모스와 포보스, 하르모니아가 태어났다고도 한다. 그는 케크롭스의 딸인 아글
라우로스와의 사이에서 알키페를 낳았다. 그는 적어도 헤라클레스와 싸운 상대 중 2명인 트
라키아의 시크노스와 디오메데스의 조상이었다. 단지에 있는 그림에서 아레스는 무장을 갖
춘 전사의 전형으로 묘사되는 것이 보통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프리즈에는 올림포스의 신들
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에 평화 시의 복장을 한 아레스가 끼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는 또
한 페르가뭄에 있는 제단의 대형 프리즈에도 나타난다. 헤라와 아테네에게 아카이아군을 돕
기로 하고는 트로이군에게 도움을 준다.
아르테미스(Artemi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으로 야생동물·사냥·식물·순결·출산의 여신으로, 로마 신화
의 디아나와 동일하다. 시골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던 여신이며, 지방에 따라 성격과 역할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님프들과 함께 산·숲·늪지를 춤추며 돌아다니던 야생적인 성격을 가진
여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르테미스 숭배는 헬레니즘 시대 이전에는 크레타 섬이나 그리스 본토에서 유행했던 것 같
다. 그러나 지방의 아르테미스 의식에 다른 신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지방
사람들이 아르테미스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자기들의 자연신들과 동일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에서도 크레타 문명과는 다른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사냥꾼의 이상(理想)을 구현하는 그녀는 사냥감을 죽이기도 했지만 보호하기도 했다. 특히
어린 새끼들을 보호했으며, 그때문에 호메로스는 그녀를 '동물의 여주인'이라고 지칭했다.
항상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다니면서 '부드러운 화살'(gentle darts)로 여인들을 갑자기 죽게
하기도 했다. 이것은 오빠인 궁술가 아폴론이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남자들을 갑자기 죽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올림포스 산의 다른 신들의 역할이 시인들의 작품 속에서 전개되는 반
면, 아르테미스는 주로 제사의식을 통해 전승되었다. 드리아스(나무의 요정)를 상징하는 처
녀들이 춤을 추는 것은 아르테미스를 나무의 여신으로 숭배하는 제사의식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데, 이 역할은 크레타의 종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며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역에서
특히 유행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림나이아와 림나티스(호수의 여신)로 불리면서 물
과 야생 채소를 감독하고 우물·샘물의 요정들인 나이아스들을 데리고 다녔다. 반도의 일부
지역에서 추는 아르테미스의 춤은 거칠고 음탕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밖의 지역에서 가장
일반적인 아르테미스의 모습은 동물의 여주인이다. 시인·예술가들은 보통 그녀가 수사슴과
사냥개를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제사의식은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다. 예를 들면 아티카에 있는 할라이 아라페니데스에서 벌어지는 타우로폴리아 축제에서는
남자의 목을 칼로 그어 떨어지는 피를 바치며 아르테미스 타우로폴로스(황소의 여신)를 숭
배했다.
여러 학자들은 아르테미스가 원래 아시아의 대모신(大母神)과 비슷한 크레타 산맥의 어머니
에서 비롯된 모신(母神)이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예술로 나타난 그녀의 모습을 반드시
원래 모습에 대한 종교적 해석으로만 볼 수는 없으며, 또한 그러한 단순화에는 많은 어려움
이 따른다.
아르테미스는 출산의 여신으로서 에일레이티이아와 자주 동일시되기도 하고 때로는 쿠로트
로포스('간호사')로 불리기도 했지만, 산파와 간호사는 어머니와는 다른 것이다. 연애 및 임
신은 아프로디테가 관장하는 분야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르테미스의 님프들과 관련된 사랑
이야기들은 본래 모신이었을 여신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호메로
스 이후의 시들은 아르테미스의 순결을 강조했다. 호메로스의 송가 제5편에 따르면, 아프로
디테와는 달리 그녀는 사냥, 춤, 음악, 그늘진 숲, 정의로운 사람들의 도시들에 기쁨을 느꼈
다고 노래하고 있다. 도시생활에 관한 언급은 예외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정복되지 않는 야
생성의 여신인 아르테미스가 성적 욕망, 길들이고 정복하는 힘으로부터 자유로웠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르테미스의 분노는 잘 알려진 것인데, 이것은 신화가 인간에 대한 자연의 적대감을 그녀
의 속성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조각가들은 아르테미스의 무자비한
분노를 주제로 삼기를 꺼렸으며, 비교적 부드러운 BC 4세기경의 정신이 만연할 때까지 아
르테미스는 위대한 조각가들의 주제로는 인기가 없었다. 트로이군 편에 서서 싸우기는 하지
만, 효과는 별로 없다.
레토(Leto)
(라)Latona.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티탄족의 여신으로 코이오스와 포이베의 딸이며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전설은 주로 델로스와 델포이를 무대로 한다. 제우스의 자
식을 임신한 레토는 출산할 피난처를 찾다가 황량한 섬 델로스에 도착했다. 전설에 따르면
델로스는 원래 파도를 따라 떠도는 바위였는데, 레토가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출산할 수
있도록 바다 밑바닥에 고정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나온 전설에 따르면 레토의 방랑은 그녀
가 제우스의 아이들을 낳는 데 화가 난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질투심 때문이라고 한다. 아
폴론이 태어난 후 곧 델포이의 건설이 이루어졌다.
레토는 리키아 여신인 라다(Lada)와 동일시되었던 듯하며, 다산(多産)의 여신과 쿠로트로포
스(어린이들의 양육자)로도 알려져 있다.
크로노스(Kronos)
Cronus, Cronos라고도 씀.
그리스 종교의 신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 이전의 주민들에게서 숭배를 받았으나 그리스인에
게는 그렇지 못했다. 후에 로마의 사투르누스 신과 동일시되었다. 크로노스는 농업과 관계있
다. 아티카에서 크로노스 축제인 크로니아는 수확을 기념하는 축제였는데 로마에서 농사 신
을 기리는 사투르날리아와 비슷했다. 예술에서 크로노스는 원래는 노인으로 묘사되는데 손
에 든 것은 낫이었겠지만 하르페, 즉 반월도로 그려지곤 한다. 신화에서 그는 우라노스(하
늘)와 가이아(땅)의 아들인데 어머니 가이아의 지시로 하르페를 가지고 아버지를 거세시킨
다. 이렇게 해서 하늘과 땅이 갈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뒤 크로노스는 누이 레아를 배우자
로 삼아 헤스티아·데메테르·헤라·하데스·포세이돈을 낳았는데 이들을 모두 잡아먹었다.
그러나 제우스가 태어나자 레아는 제우스를 크레타에 숨기고 남편을 속여 대신 돌을 먹게
한다. 제우스는 안전하게 성장해서 아버지로 하여금 삼켜버렸던 형제 자매들을 토해내게 하
고 싸워 이긴다. 싸움에서 진 크로노스는 타르타로스에 있는 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고도
하고 황금시대의 왕이 되었다고도 한다. 크로노스는 자기 아이들을 잡아먹었다는 점에서 이
방신과 자주 동일시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셈족의 바알림(예를 들면 카르타고에 있는 수
많은 로마 비문에 언급되는 바알 사투르누스)과 인간 제물을 받았던 몰록 등이다.
디오네(Dione)
그리스 신화에서 주신(主神) 제우스의 애인으로 일부 외딴 지역에서는 제우스와 함께 숭배
받았다. 통상 제우스의 동반자이자 아내가 헤라라는 사실로 보아 디오네가 헤라보다 먼저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묘사되며 〈일리아스 Iliad〉에서
는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아프로디테를 낳았다고 나온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 Theogon
y〉에서는 단지 오케아노스의 딸이라고만 나오며, 디오니소스의 어머니라고 기록한 작가들
도 있다.
디오니소스(Dionysos)
(영)Dionysus/Bacchus. 로마에서는 Liber라고도 함.
그리스·로마 종교에서 풍작과 식물의 성장을 담당하는 자연신으로 특히 술과 황홀경의 신
으로 알려져 있다. 트라키아와 프리기아에서 전래했지만, 출생과 죽음 및 원래 크레타의 여
신인 아리아드네와의 결혼에 얽힌 기이한 전설은 그에 대한 숭배가 헬레니즘 시대 이전 미
노스 문명의 자연종교로 복귀한 것이었음을 암시해준다.
가장 널리 퍼진 전설에 따르면, 카드모스(테베의 왕)의 딸이지만 원래는 프리기아의 대지의
여신인 세멜레와 제우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디오니소스라고 알려져 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세멜레를 질투한 나머지, 세멜레를 부추겨 제우스가 참모습으로 나타나게 해달라고
소원하게 하여 그가 정말 신인지 확인해 보도록 했다. 제우스는 그 요구에 순순히 응했으나,
인간인 세멜레가 견뎌내기에는 그의 힘이 너무 컸던 까닭에 세멜레는 제우스에게서 나온 번
갯불에 타죽고 말았다. 하지만 제우스는 세멜레의 태내에 있던 아들을 자기 넓적다리 속에
집어넣어 달이 찰 때까지 키웠다. 이렇게 해서 디오니소스는 2번 태어나게 되었고, 그뒤에는
헤르메스 신이 상상의 장소인 니사로 그를 데려가 바코스 숭배자들의 손에서 자라도록 했
다.
디오니소스는 수액(樹液), 즙, 자연 속의 생명수를 상징하는 존재로 간주되었으므로 그를 기
려 흥청망청 잔치를 벌이는 의식이 성행했다. 이러한 디오니소스 축제(바코스 축제)는 미케
네 문명 이후 여자들 사이에서 세력을 넓혀갔으나 남자들은 그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
였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테베의 왕 펜테우스가 바코스 숭배자들의 행동을 염탐하려 하다
들켜 몸이 갈갈이 찢겼으며, 아테네인들은 디오니소스 숭배를 멸시한 벌로 성불구자가 되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가정을 버린 채 언덕으로 모여들어, 사슴가죽옷을 입고 담
쟁이덩굴관을 쓴 차림으로 제례 때 외치는 소리인 '에우오이!'(Euoi)를 질러댔다. 그들은 티
아시(성스러운 무리)를 이루어 티르소이(회향나무 가지에 포도덩굴의 잎을 엮어 매고 끝을
담쟁이덩굴로 장식한 것)를 흔들면서 피리와 팀파니의 반주에 맞추어 장작불 옆에서 춤을
추었다. 디오니소스 신의 영감을 받게 되면 이 바코스 숭배자들에게 신비한 힘이 생겨 뱀과
동물에게 마법을 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모파기아(omophagia:날고기먹기) 축제에 탐닉
하기 전에 산 제물을 갈갈이 찢을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게 된다고 여겨졌다. 바코
스 숭배자들은 이 신이 제물로 바치는 짐승의 몸으로 화한다는 믿음에서 그를 브로미오스
(외치는 자), 타우로케로스(소의 뿔을 지닌 자), 타우로프로소포스(소의 얼굴을 한 자)라는
이름으로 찬양했다. 디오니소스 숭배는 소아시아, 특히 프리기아와 리디아에서 오랫동안 성
행했으며 아시아의 여러 신에 대한 숭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디오니소스는 어머니 세멜레를 데려오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갔다고 하며 또 이탈리아 남부
에서는 페르세포네와 연관되기도 했지만, 이 신이 저승과 원래부터 관계가 있었는지는 의심
스럽다. 디오니소스는 예언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델포이의 사제들로부터 아폴론과 거
의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트라키아에 신탁소를 갖고 있었고, 나중에는 포키스의 암피클레이
아에 있는 병을 치료하는 신전의 후원자였다.
디오니소스의 추종자들 가운데는 사티로스 같은 풍요의 정령도 있었으며, 의식에서는 자연
의 생식력을 상징하는 남근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디오니소스는 가끔 짐승의 모습을 취
했으며 여러 동물과 연관되었다. 그의 개인적인 상징물로는 담쟁이덩굴 화관, 티르소스(지팡
이), 칸타로스(손잡이가 2개 달린 큰 술잔) 등이 있었다. 디오니소스는 초기 미술에서는 턱
수염이 난 남자로 그려졌으나, 그뒤에는 연약한 청년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바코스 축제는
도자기 화가들이 즐겨 그린 주제였으나, 바코스의 비밀 집회장소는 BC 186년에 발표된 원
로원의 칙령에 따라 이탈리아 전역에서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일리아드 6장과 14장에서 단
두 번 언급된다.
헤르메스(hermes)
그리스의 신으로 제우스와 마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흔히 로마의 메르쿠리우스나
카베이리 가운데 하나인 카스밀로스 또는 카드밀로스와 동일시되었다. 헤르메스라는 이름은
돌무더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헤르마(herma)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리스에서 돌
무더기는 이정표나 경계를 가리키는 데 썼다. 헤르메스를 숭배했던 초기 중심지는 아르카디
아였으며, 그곳에 있는 킬레네 산은 그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아르카디아에서 그는 특히 다
산의 신으로 숭상되었고 남근상으로 표현되었다.
문학과 제사에서 헤르메스는 항상 소와 양의 보호와 연관되었으며 식물의 신, 특히 판이나
님프들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러나 〈오디세이아 Odyssey〉에서는 주로 신들의 사
자(使者)이자 죽은 사람을 하데스로 인도하는 안내자로 나온다. 그는 또한 꿈의 신이기도 해
서 그리스인들은 잠들기 전 마지막 헌주를 그에게 바쳤다. 사자로서 그는 길이나 문간의 신
이기도 했던 것 같고 여행자들의 수호자였다. 우연히 발견한 보물은 그가 선물한 것이었고
뜻밖에 얻은 행운도 그의 덕분이었다. 떳떳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이득의 신이라는 개념과
역할은 그가 다산의 신이라는 데서 자연스럽게 파생된 것이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아폴론
의 경쟁 상대로서, 아폴론처럼 음악을 후원하고 키타라를 만들었으며 때로는 음악 그 자체
를 만들었다고 믿어졌다. 웅변의 신이기도 했고 몇 종류의 널리 알려진 점(占)을 주재했다.
헤르메스에게 바쳐진 숫자는 4였고, 매달 4번째 날이 그의 생일이었다. 고대 예술에서 그는
양식화된 헤르마와는 별도로, 긴 튜닉을 입고 모자와 날개 달린 장화를 신은 수염을 기른
성인 남자로 표현되었다. 때로는 양을 어깨에 멘 목가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또는 신들의
사자로서 사자의 지팡이인 케리케이온(카두케우스)을 지닌 모습으로 그려진다. BC 5세기 후
반부터는 수염이 없고 알몸인 젊은 운동선수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
사전)
내용 연구
이해와 감상
Ilias, (영)Iliad는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24권으로 된 서사시로
그리스인들은 이 작품이 〈오디세이아 Odyssey〉와 더불어 그리스 민족의 단일성과 영웅적
자질을 나타내는 상징이자 도덕적 교훈과 현실적 교훈까지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이 시는
그리스군 사령관 아가멤논에게 무시당한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그 때문에 트로이 전쟁에서
일어나는 불운한 결과를 그리고 있다. 주요내용은 트로이 전쟁 마지막 해의 단 4일간에 걸
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 이전의 전쟁 과정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가 묘사되어 있고 인
간과 신을 망라한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총 24장으로 되어 있는 "일리아드"의 본문 중 제1장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중심으로 한 전쟁 이야기로서, 방대한 규모의 전투 장면과 용사들의 용맹함이 독자들의 마
음에 생생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수심에 불타 혹독한 살육을 하던
영웅도 마침내 고통을 당하면서 연민에 도달하게 되고, 인간의 고귀한 가치인 높은 품위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트로이아의 별명인 일리오스(Ilios)에서 유래한 것이며, '일리오스 이야기'라는
뜻이다. 20년 간에 걸친 트로이아 공방전의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을 노래한 것이다. 스파
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로 절세의 미녀인 헬렌을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에게 빼앗긴 그
리스는 트로이아로 출병한다.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트로이아를 공격하지만 트로이아 성(城)
은 쉽사리 함락되지 않는다. 한편 자신의 딸이 포로가 된 데 격노한 아폴론 신이 벌로서 역
병(疫病)을 내리는데, 이에 대한 수습책 때문에 벌어진 언쟁에서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한
그리스 군 제일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와 전차
를 빌려서 그의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적을 패주시켰으나 그 자신은 트로이아의 용장 헥
토르에게 살해당한다. 이 사실을 안 아킬레우스는 복수를 하기 위하여 어머니 테티스가 특
별히 만들어 보낸 갑주(甲胄)를 입고 출전하여 적장 헥트로를 무찌르고 그 시체를 욕보인다.
헥토르의 부친 프리아모스 왕은 신들의 비호(庇護) 아래 야음을 틈타서 아킬레우스의 막사
를 찾아가 헥토르의 시체를 인수하여 돌아오게 되며, 트로이아의 여자들이 그의 장례식 때
통곡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은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하여 볼 수 있다. 첫째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그의 비극적 운명에 관한 개인적 이야기이다. 둘째는 모든 전쟁의 성격을 담고 있는 트로이
아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 번째는 인간과 신에 대한 관계, 인간과 그의 외부에 존재하
는 자연력과 우주의 관계를 묘사하려고 시도한 부분이다. 이 세 부분은 죽음, 명예, 전쟁 등
과 같은 수많은 주제들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호메르스는 특별한 사건이나 행동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일리아스"의 신들을 사용
하였다. 한 병사가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멀리 화살을 쏘았을 때, 이 병사는 아레스(전쟁의
신)가 그를 도운 결과라고 믿었다. 한편, 신들은 좋은 행동뿐만 아니라 나쁜 행동을 설명하
는 데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리아스"의 제16장에서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와 싸우고 자
신을 비난하기보다는 제우스를 비난한다. 이렇듯, "일리아스"의 등장 인물들은 보통 사람의
비정상적인 모든 행동들을 신의 도움 혹은 탓으로 돌리고 있다.
심화 자료
주인공 아킬레우스의 비극성
"일리아스"의 주제는 트로이아 시 밖에서 야영 진지를 치고 있는 그리스 장군 중에서도 가
장 용감한 아킬레우스의 분노이다. 아킬레우스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펠레우스 왕의 아들
로 어릴 때 황천의 강 스티크스에 몸을 담가 불사신이 되었으나 발 뒤꿈치만은 물에 젖지
않았다. 이 약점은 영웅의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 아킬레우스는 폭력을 위해 사는 사람이
며, 오직 맹렬한 행위를 통해서만 삶의 의미를 얻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트로이아 앞에
머물고 있으면 살해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평화롭게 살기보다는 싸우다 죽는 비극의 필
연성을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분노로 인해 사령관과 동료 왕들과 단절되고 외톨이가 된
다. 이런 면에서 그는 성격적 결함으로 인해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는 그리스 성격 비극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일리아드의 배경
펠레우스(아킬레우스 아버지)와 신(神) 테티우스가 결혼할 때에 불화의 신인 에리스만 참
석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에리스가 화를 내고 신들에게 불화를 일으키기 위해 황금의 사과
를 던지며 최고의 여신에게 이것을 줄 것을 제의한다. 결국,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가 파
리스 왕자에게 아름다움의 심판을 받는데, 파리스 왕자는 미인을 주겠다는 아프로디테에게
황금 사과를 준다. 그러나 당시 최고의 미인이었던 헬렌은 이미 스파르타의 왕인 메넬라우
스에게 시집을 간 후였다. 그럼에도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힘을 빌어 헬렌을 트로이로 납
치하였다.
그런데 헬렌이 메넬라우스에게 시집을 갈 때, 다른 구혼자들은 만일의 경우에 모든 목숨을
걸고 싸워, 그의 남편에게서 헬렌을 빼앗는 자를 쳐부수겠다고 맹세를 한 적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헬렌을 찾아올 대원정군이 만들어지고,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총사령관이 된다.
아카이아(그리스)의 함대는 아울리스에 집결하였다. 그런데 아가멤논 왕이 사냥을 하다가
아르테미스의 사슴을 쏘는 바람에, 그녀의 노여움을 산다. 예언자는 그 노여움을 푸는 길이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니아를 바치는 것이라 하여, 그녀는 결국 제물이 되고 만다. 이 잔인한
행동 때문에 아가멤논의 부인은 남편을 영원히 미워하게 된다. 고국을 떠난 아카이아 인들
은 트로이를 공격하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일리아드의 내용은 원정 10년째 되는 해부터
시작된다.
일리아스 (Ilias)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전하는 그리스 최대 최고의 서사시.
1만 5693행, 24권. 각권마다 그리스 문자의 24 알파벳순(順)으로 이름이 붙어 있다. 옛날에는
각권마다 그 내용에 부합되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알파벳순으로 이름을 붙이는 방법은 BC
3세기에 처음으로 쓰인 권별법(卷別法)이었다. 《일리아스》는 트로이의 별명 일리오스
(Ilios)에서 유래한 것이며, ‘일리오스 이야기’라는 뜻이다. 10년간에 걸친 그리스군의 트
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노래한 것이다.
스파르타왕 메넬라오스의 왕비로 절세의 미인인 헬레네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유혹해
간다. 이에, 그리스인들은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지휘로 1,000척의 배를 거느리고 트로이를
공격하지만 트로이성(城)은 함락되지 않는다. 자기의 딸 헬레네가 포로가 된 데 격노한 아폴
론신(神)이 벌로 액병(厄病)을 내린다. 이 수습책 때문에 벌어진 말다툼에서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한 그리스 최고 영웅 아킬레우스가 노하여 싸움에서 손을 뗀다. 이 아킬레우스의
이탈이 바로 《일리아스》의 주제이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간청
으로 주신(主神) 제우스는 신(神)들에게 양군을 원조하지 말도록 명하여 그리스군을 패배케
한다. 패배한 그리스군의 참상을 좌시할 수 없어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
우스의 무구(武具)와 전차를 빌려 그의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적을 패주(敗走)시켰으나
그는 트로이의 장수 헥토르에게 살해된다. 이 소식에 접한 아킬레우스는 복수하기 위하여
헤파이스토스가 특별히 만들어준 갑주를 입고 출전하여 헥토르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욕보
인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왕은 신들의 비호(庇護)로 야음(夜陰)을 틈타 아킬레우스
의 막사를 찾아가 헥토르의 시체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것으로 끝맺는다.
《일리아스》는 비극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에 집중하여, 트로이 공방 50일 동안의 이야
기 속에 10년의 전망을 담았으며, 과거를 뒤돌아보고 미래를 암시함으로써 비극성을 강조하
였고, 여러 가지 비유로 자연계와 인간계의 관계를 특색 있게 묘사하였다. 무용(武勇)을 노
래하고 그리스 기사도를 찬양한 이 시는 BC 900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시는 마침내
그리스의 국민적 서사시가 되었고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유럽 서사시의 모범으로
서 라틴 문학을 거쳐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트로이(Troy)
(그)Troia (라)Troia/Troja/Ilium. Ilios, Ilion이라고도 함.
아나톨리아 북서부에 있던 고대도시.
스카만데르 강 북쪽과 헬레스폰트 해협의 남쪽 어귀로부터 약 6.4㎞ 떨어진 트로아스 평야
에 있었다. 트로이 전설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으며, 호메로스 서사시
의 근간을 이룬다. 광활한 유적 덕분에 트로이는 고대세계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적지
가 되었다.
고고학상의 트로이
청동기시대에 트로이가 누렸던 세력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통로를 지배하는 전략적인 위
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BC 3000~2000년에 번성한 문화 중심지로서, 트로아스의
농업 공동체들을 지배하던 왕권의 수도였다. BC 1100년경부터 버려졌다가 BC 700년경에
그리스 정착민들이 트로아스를 차지하기 시작하자 트로이에도 다시 사람들이 살게 되었으며
일리온이라는 이름으로 4세기까지 존속했다. BC 6세기말부터 이 지역은 페르시아인, 알렉산
드로스 대왕, 아시아 남서부의 셀레우코스 왕조, 페르가몬 왕국, 로마인들에 차례로 점령당
했다. BC 85년 로마인이 약탈한 후 같은 해에 로마 장군 술라가 부분적으로 복구시켰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다른 황제들이 많은 애정을 기울였다. 그러나 324년에 콘스탄티노플이
건설되고 나서 일리온은 망각 속으로 사라져갔다.
투르크인들이 히사를리크라고 불렀고 그리스·로마 시대의 일리온 유적을 포함한 것으로 오
랫동안 알려졌던 구릉이 1822년 찰스 맥라렌에 의해 호메로스 시대의 트로이 소재지로 밝혀
졌으나, 학자들이 그 사실을 인정한 것은 하인리히 슐리만이 1870년에 발굴을 시작한 이후
였다. 1890년 슐리만이 죽은 뒤에도 그의 동료인 빌헬름 되르펠트에 의해(1893~94), 그후에
는 신시내티대학교의 원정대에 의해(1932~38) 발굴작업이 계속되었다. 슐리만과 되르펠트는
집들이 건설되어 사람들이 살다가 마침내는 파괴되어 버린 아홉 기(紀)를 나타내는 9개 주
요지층의 순서를 밝혀냈다. 제1~7기 트로이는 요새, 트로아스의 수도, 왕의 가족·신하·노
예들이 살았던 왕의 거주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1~5기는 청동기시대 초기(BC 3000경~
1900)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 기간 동안의 주민들이 에게 해 제도, 키클라데스 제도, 미노아
문명의 크레타 섬, 헬라도스 문화기의 그리스 본토에 살던 주민들의 선조였을 것이며, 아나
톨리아 남서부 또는 시리아로부터 온 것으로 추정된다. 트로이 제6·7기는 청동기시대 중기
와 말기(BC 1900경~1100)에 해당한다. 불과 한 세대 동안 지속되었던 제7a기는 BC 13세기
경 발생한 화재로 파괴되었는데, 아마도 이때의 트로이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Iliad〉에
묘사된 프리아모스 왕의 도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의 파괴 이후 약 400년간 이곳은
사실상 버려졌다. 그리스인이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제8기이며,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
의 일리온은 제9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로마의 전설
트로이의 전설은 그리스·라틴 문학에서 계속적으로 발전되어 왔다. 가장 초기의 문학적 증
거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Odyssey〉에서 주요 이야기는 이미 골격을
갖추고 있다. 〈일리아스〉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일부는 분실된 연작시가
〈키프리아 Cypria〉·〈아이티오피스 Aethiopis〉· 〈소(小) 일리아스 Little Iliad〉·
〈일리오스의 약탈 Sack of Ilios〉에서 나타났으며 개개의 주제들이 나중에, 특히 그리스
희곡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트로이 출신의 용사 아이네아스 이야기는 로마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 Aeneid〉의 제2권에는 트로이 약탈에 대
해 가장 잘 알려진 설명이 들어 있다. 마지막으로 딕티스 크레텐시스와 다레스 프리기우스
라는 이름의 작가들이 쓴 것으로 통용되는 의사(擬似) 연대기들이 있다.
그리스에서는 테우크로이와 다르다노이라는 이름들이 대체로 '트로이인들'과 같은 말로 사
용된다. 그래서 전설은 스카만데르 강의 아들 테우크로스를 트로아스의 첫번째 왕으로 만들
었고, 제우스와 엘렉트라(아틀라스의 일곱 딸인 플레이아데스 중의 한 사람)의 아들인 다르
다노스를 그의 사위이자 후계자로 삼았다. 다르다노스의 아들 에릭토니오스는 트로스의 아
버지이며, 트로이인이라는 말의 기원이 된 트로스에게는 일로스·아사라코스·가니메데스
(이다 산에서 제우스에게 납치됨) 등 3형제가 있었다. 일로스는 얼룩소가 알려준 지점에 일
리움(트로이)을 건설했으나 이 도시는 그의 아들 라오메돈이 승계했을 당시에 아직 성벽이
세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라오메돈은 성벽을 쌓기 위해 포세이돈과 아폴론 신을 고용했으나
그들이 성벽을 다 쌓은 후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포세이돈은 트로이를 괴롭히기 위해 바
다괴물을 보냈으며 헤라클레스는 라오메돈의 딸 헤시오네를 괴물로부터 구출해냈다. 그러나
라오메돈은 헤라클레스에게 약속했었던 말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헤라클레스와 그의 동료들
이 트로이를 약탈하고 라오메돈과 그의 아들들을 살해했다. 이때 막내아들 프리아모스만이
헤시오네가 지불한 보상금으로 석방되었다.
부유하고 강한 왕인 프리아모스는 아내 헤카베와 첩들 사이에서 50명의 아들과 12명의 딸을
낳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파리스는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자'를 위한 것이
라고 표시해놓은 황금사과를 놓고 아프로디테·헤라·아테나 중에서 누가 받을 자격이 있는
지를 심판하도록 요구받았다. 아프로디테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주었고 그리스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스파
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만난 뒤 사랑에 빠져 그녀와 도주하고 말았다. 헬레네
를 찾기 위해 그리스인들은 메넬라오스의 형인 아르고스·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의 총 지휘
하에 대원정을 시작했다 (→ 색인 : 트로이 전쟁). 트로이인들은 헬레네를 돌려줄 것을 거절
했다. 트로아스 내부와 근처의 작은 도시들이 그리스인에 의해 약탈당했으나 트로이는 소아
시아와 트라키아 동맹군의 지원을 받아 10년 동안 포위공격을 견디어냈다. 신들 역시 편이
갈라져서 특히 헤라·아테나·포세이돈은 그리스 편을, 아프로디테(아사라코스의 손자인 트
로이 용사 안키세스와의 사이에 아들 아이네아스를 두었음)·아폴론·아레스는 트로이 편을
들었다. 전쟁 10년째에 시작된 이야기인 〈일리아스〉는 아가멤논과 그리스의 가장 훌륭한
용사 아킬레우스 사이의 반목과, 그로 인한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와 프리아모스
의 장자 헥토르의 전사를 기록하고 있다.
헥토르가 죽은 뒤에는 두 외국 동맹군인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아와 에티오피아의 왕이자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 멤논이 트로이 편에 가세했다. 아킬레우스가 이들 두 사람을 모
두 죽였으나 파리스가 화살로 아킬레우스를 살해했다. 트로이를 함락시키기 전에 그리스인
들은 성채로부터 팔라스 아테나의 목조상(팔라디움)을 훔치고, 렘노스로부터 헤라클레스의
화살과 병든 궁수 필록테테스를, 또 스키로스로부터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피
로스)를 데려와야 했는데,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모두 성공적으로 해치웠다. 마침내 아
테나의 도움을 받아 에페이오스가 거대한 목마를 완성했다. 여러 명의 그리스 용사들이 목
마 안에 숨고, 나머지는 포위공격을 포기한 척하면서 근처의 섬 테네도스로 빠져나갔다. 프
리아모스의 딸 카산드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트로이인들은 탈주자임을 가장한 그리스인 시
논의 말만을 믿고 그 목마를 아테나에게 바치는 공물로서 트로이 성벽 안으로 가져왔다. 그
목마를 파괴하려고 애썼던 라오콘 신관(神官)은 바다뱀에게 죽음을 당했다. 밤이 되자 그리
스인 함대가 돌아왔고 목마 속에서 나온 그리스인들이 트로이의 성문을 열었다. 뒤이은 철
저한 약탈에서 프리아모스와 남아 있던 그의 아들들이 살해당했고, 트로이 여자들은 그리스
의 여러 도시로 가서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스 지도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겪은 위
험하고 종종 비참하기까지 했던 항해여행은 2개의 서사시 〈귀향 Nostoi〉과 〈오디세이
아〉에 그려져 있다. 엘렉트라는 자신의 후손에 대한 슬픔 때문에 플레이아데스 성단 중 자
신의 별을 가장 희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중세의 전설
중세기 작가들은 호메로스 작품들을 직접 접한 적은 없었지만, 트로이 전설의 영웅적이고
로맨틱한 이야기를 자신들 시대의 궁정연애나 기사도적 사랑의 개념과 끼워 맞출 수 있었고
특히 프랑스·영국의 국가 기원을 설명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중세기 판(版)의 주요출처는 딕티스 크레텐시스와 다레스 프리기우스가 쓴 허구적인 전쟁담
이었다. 다레스는 서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가 쓴 의사연대기가 트로이 측에 유
리하게 기록되었고 몇몇 서구 국가들의 기원이 트로이인 것으로 여겨져서 서구의 공감을 불
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엑시터 출신의 조지프, 슈타더의 알브레히트, 플릭세쿠르의 장, 워터퍼
드의 조프루아, 세르베스 코팔 등이 다레스의 글을 작품의 소재로 이용했지만, 트로이 주제
를 이용한 핵심적인 작품은 브누아 드 생트모르가 쓴 프랑스의 로맨스 〈트로이 이야기
Roman de Troie〉(1154~60)이다. 방대한 시(詩)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이아손과 헤라클레스에
의한 최초의 트로이 파괴, 프리아모스에 의한 재건, 파리스의 헬레네 유괴, 트로이의 포위공
격과 전쟁들, 영웅 오디세우스의 방랑을 포함한 전후 이야기 등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헬레네와 파리스, 아킬레우스와 플릭세나, 트로일로스와 브리세이다(크레시다) 간의 사
랑이야기가 강조되었다. 후일 중세기 작가들은 〈트로이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시
칠리아의 판사 구이도 델레 콜론네가 1287년경에 라틴어 산문 〈트로이 파멸의 역사
Historia destructionis Troiae〉를 완성하고부터는 이것에서 소재를 얻었다. 구이도의 산문
은 오랫동안 독창적인 것으로 명성을 누렸지만 사실은 〈트로이 이야기〉의 축약판이었다.
트로이의 전설은 15세기에 특히 부르고뉴 왕실의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부르고뉴
공 도서실에는 트로이에 관한 필사본이 17개나 소장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구이도의 작품에
기반을 둔 라울 르 페브르의 〈트로이 역사집 Recueil des histoires de Troye〉(1464)은 윌
리엄 캑스턴에 의해 영어로 번역·인쇄(1474경)된 최초의 책이 되었다. 또한 구이도 작품의
스페인어·이탈리아어·덴마크어·네덜란드어·스웨덴어·아이슬란드어·체크어 판도 나왔
다. 트로이 전설의 인기는 특히 프랑스 문학 같은 중세의 다른 문학에서 전설 자체와 전설
속의 인물·주제가 많이 언급된 데서도 입증된다. 그 주제는 또한 필사본 채색과 태피스트
리 등의 중세예술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다.
트로이의 흩어진 영웅들이 몇몇 서구 국가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를 세웠다는 문학적 또는
심지어 애국적인 전설이 수천 년간 지속되었다. 7세기 중엽에 프랑크족 연대학자 프레데가
리우스는 일단의 트로이인들이 트로이 시 파괴 이후 자신들의 왕 프란키오의 지휘 아래 라
인 강, 도나우 강, 지중해 사이 지역에 어떻게 정착했는지를 설명했다. 프랑크족의 기원을
트로이인으로 보는 이 최초의 견해는 이후 계속해서 연대학자·계보학자·찬사가 간에 반추
되었다. 16세기에도 여전히 끈질기게 남아 있던 이 신화는 장 르메르 드 벨주의 〈갈리아의
삽화와 트로이의 진기함 Illustrations de Gaule et singularites de Troie〉(1510~13)과 롱사
르의 민족서사시 〈라 프랑시아드 La Franciade〉(1572)에 영감을 주었다. 영국에서는 영웅
아이네아스의 증손자이자 로마인의 전설적인 시조인 브루투스가 영국인의 시조이면서 트로
이아노바(뉴트로이[런던])의 창건자라는 비슷한 전설이 일찍이(9세기 이전) 형성되었다. 저지
의 웨이스(바스)가 자신의 작품 〈브루트 이야기 Roman de Brut〉(1155)에서 맥을 이은 이
전설은 셰익스피어의 시대가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구비 서사시로서의 일리아스
일리아스가 호메로스 개인의 창작이나 그 전부터 전해 오던 것을 집대성한 것이냐는 여전
히 논란 거리이고 또 호메로스를 개인으로 보지 않고 집단으로 보기까지 한다. 이런 모든
것은 구비 서사시의 본래적 성격에 부합되며 오랫동안 구전(口傳)되어 왔기 때문에 틀에 박
힌 문구(文句)와 정형적인 형용사가 수없이 사용되었다.
일리아스(Ilias)
노래하소서, 여신(시가의 여신 무사를 말함. 회랍의 시인들은 그들의 작시가 신의 영감에 의
해 이루어진다고 믿었음)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테살리아에 살던 종족. 「일리아
스」의 주인공으로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한 희랍인들 가운데 가장 용감하고 잘 생긴 청년
장수.)의 노여움을, 아카이아 인들(여기서는 희랍인 전체를 가리킴.)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
통을 안겨다 주었으며 영웅들의 수많은 굳센 혼들을 아이데스(지하의 세계를 다스리는 신)
에게 보내고 그들의 몸뚱이는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노여움을! 인
간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희랍군의 총수인 아가멤논을 가리킴.)과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에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 날부터 이렇듯 제우스(신과 인간들의 아버지)의 뜻은 이루어
졌도다.
여러 신들 중에 누가 이 두사람을 서로 싸우고 다투게 했던가?
레토와 제우스의 아들(아폴론)이었다. 그가 왕(아가멤논)에게 노하여 그의 진중에 무서운 역
병을 보내니 백성들이 잇달아 쓰러졌던 것이다.
그 까닭은 그의 사제 크뤼세스를 아트레우스의 아들이 모욕했기 때문인즉 사제는 자기 딸을
구하기 위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몸값을 가지고 또 손에는 멀리 쏘는 아폴론의 화환을
감아 맨 황금 홀을 들고 아카이아 인들의 날랜 함선을 찾아가 모든 아카이아 인들, 특히 백
성들의 통솔자인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아가멤논과 그의 아우 메넬라오스)에게 이렇게 간청
했다.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과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다른 아카이아 인들이여, 그대들이 프리
아모스(트로이아 왕. 헥토르의 아버지)의 도시를 함락하고 무사히 귀국하는 것을 올림포스의
궁전에 사는 여러 신들께서 부디 허락해 주시기를! 다만 제우스의 아들인 멀리 쏘는 아폴론
을 두려워하여 내 사랑하는 딸을 돌려 주고 대신 몸값을 받아 주십시오." <중략>
[중략된 부분 줄거리] 크뤼세스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이라고 하나 아가멤논은 거절한다. 크
뤼세스는 아폴론에게 기도하여 도움을 청하고 아폴론은 희랍군을 공격한다. 아킬레우스가
회의를 소집하여 아폴론이 노여워한 까닭을 예언자에게 묻는다. 예언자가 크뤼세스의 딸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하자 아가멤논은 그 대신 다른 명예로운 상을 요구한다.
그러자 그를 향해 걸음이 날랜 고귀한 아키레우스가 이렇게 대답했다.
"가장 위대한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여, 욕심 또한 가장 많은 그대여, 기상이 늠름한 아카이아
인들이 어떻게 그대에게 상을 줄 수 있겠소? 위는 공동 재산이 많이 쌓여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오. 함락한 도시에서 노획한 전리품(적군으로부터 빼앗은 물품.)들은 이미 분배가 끝났
으며 그것을 백성들에게서 다시 거두어 들인다는 것은 옳지 못한 짓이오. 아무튼 지금은 그
여인을 신에게 내주시오. 하지만 언젠가 제우스께서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트로이아 성
을 함락케 해주시면 그 때는 아카이아 인들이 그대에세 세 배 네 배의 보상을 해줄 것이
오."
그러자 그를 향해 통치자 아가멤논이 이렇게 대답했다.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여, 그대 비록 용감하기로 이렇게 꾀로써 나를 속일 생각은 마오. 나
를 속여 넘기거나 설득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래, 그대 자신은 상을 갖고 있으면서 나는 내
것을 빼앗기고도 가만히 앉아 있기를 바라는 게요? 그리고 나에게 그 여인을 돌려주라고 명
령하는 게요? 기상이 늠름한 아카이아 인들이 내 소원대로 손실을 보상해 줄 만한 명예의
상을 준다면 좋소. 하나 만일 그들이 주지 않는다면 그 때는 내 몸소 가서 그대의 것이나
아이아스(살라미스의 영주 텔라몬의 아들이며 아이아코스의 손자. 사촌인 아키레우스에 버
금가는 용맹한 장사.)의 것이나 오뒤세우스(이타케 왕국의 영주이며 라에르테스의 아들로서
유명한 「오디세이」의 주인공. 지략이 풍부하고 참을성이 많은 장수)의 것을 가져가겠고.
그대는 내 발걸음이 향하는 자에게 노여움이 남게 되리라. 하나 이 문제는 차후에 다시 거
론하기로 하고 우선은 검은 배를 성스러운 바다 위에 띄우고 지체 없이 선원들을 모집하여
헤카톰베(황소 100마리의 제물로 성대한 제물의 뜻)를 배에다 싣고 볼이 예쁜 크뤼세스도
태우도록 합시다. 그리고 아이아스든 이도메네우스(크레테의 왕으로 훌륭한 창수임.)든 고귀
한 오뒤세우스든 아니면 모든 인간들 중에서 가장 무서운 그대 펠레우스의 아들이든,
여러 왕들 중에 누가 그들의 지휘자가 되어 우리를 위해 제물을 바치고 멀리 쏘는 신의 마
음을 달래도록 하시오."
그러자 그를 노려보며 걸음이 날랜 아킬레우스가 이렇게 말했다.
"오오 그대 파렴치한 자여, 그대 교활한 자여, 이래서야 어찌 아카이아 인들 중에 누가 그대
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하여 심부름을 가거나 적군과 힘껏 싸울 수 있겠소? 내가 싸우려고
이곳에 온 것은 트로이의 창수들 때문이 아니오. 그들은 내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
으니까. 그들은 내 소나 말을 약탈해 간 적도 없거니와 전사들을 기르는 기름진 프티에 땅
에서 내 곡식을 망친 적도 없소이다. 우리 사이에는 울창한 산들과 파도 소리 요란한 바다
들이 수없이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이오. 그대 파렴치한 철면피여, 우리가 그대를 따라 이 곳
에 온 것은 메넬라오스와 그대를 위해 트로이아 인들을 응징함으로써 그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함이었소. 그런데도 이런 사실들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내가 피땀 흘려 얻었고 아카이아
의 아들들이 내게 준 내 명예의 상을 그대가 몸소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다니. 아카이아
인들이 트로이아 인들의 어떤 번화한 도시를 함락할 적마다 나는 한 번도 그대와 동등한 상
을 받아 보지 못했소. 치열한 전투의 노고를 더 많이 감당해 내는 것은 내 팔인데도 분배할
적이면 그대의 상은 월등히 더 컸으며 나는 지치도록 싸운 뒤 보잘 것 없는 물건을 소중히
간직하고 배로 돌아가곤 했오. 하지만 이제는 프티에로 돌아가겠소이다. 부리처럼 생긴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편이 훨씬 낫겠소. 여기서 모욕을 받아 가며 그대를 위해 부와 재
무을 길어다 줄 생각은 추호도 없소이다." (출처 : 김윤식·김종철 저 한샘 문학교과서)
이해와 감상
본문은 일리아스의 첫 부분이다. 아폴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방안을 놓고 아가멤논과 다
투다 자기의 명예가 훼손되자 아킬레우스는 격분하게 된다. 아가멤논에 대한 분노로 그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다가 그의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분노로 그 앞의 분노는 잊
고 출전하여 헥토르를 죽인다. 요컨대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이 작품의 중심 모티브인 것이
다.
질병, 그리고 분노의 이야기
노여움을 노래하라, 시(詩)의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그 저주스러운 노여
움이야말로 수없이 많은 괴로움을 아카이아 군(기원전 2000년경 남하하여 펠로폰네소스지방
에 정주했던 그리스인)에게 주고 또 많은 씩씩한 용사들의 넋을 저승으로 보내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은 들개와 사나운 짐승들의 밥이 되었다. 한편, 그러는 중에 제우스(그리스 신화
중, 최고의 신. 천상을 지배하는 동시에 인간 사회의 정치, 법률, 도덕등 모든 생활을 지배
함) 의 뜻은 이루어져 갔으니, 그것은 맨 처음 군사들의 우두머리인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
가멤논과 용맹한 아킬레우스가 싸움을 하여 사이가 나빠진 뒤의 일이다.
그런데 여러 신들 중에 어느 신이 왜 이 두 사람을 맞붙어 싸우게 했는가. 그것은 레토(제
우스신의 아내) 와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태양·의료·궁술·음악 및 시의 신) 으로서, 그가
왕에게 화를 내고 아카이아 군 진중(陣中)에 무서운 질병을 퍼뜨렸으므로 병사들은 잇따라
쓰러져 갔다. 그 까닭은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 왕이 아폴론의 제사장인 크리세스를
모욕했기 때문이다. 즉, 처음에 그가 아카이아 군의 진지 가까이 끌어올려져 있는 쾌주선으
로 찾아왔는데, 그것은 아카이아 군에게 잡혀 있는 자기 딸을 많은 배상금을 치르고 되찾으
려는 생각에서였다. 손에는 궁술(弓術)의 신 아폴론의 거룩한 표지인 술을 단 황금 홀장(笏
杖) (신을 상징하는 지팡이로, 손잡이 부분에 둥근 고리가 있고 몸통에는 신과 관련된 그림
들이 새겨져 있다.) 을 들고, 죽 늘어선 아카이아 군의 모든 장수들에게 간청했다. 그 중에
서도 특히 병사들의 우두머리인 아트레우스 집안의 두 아들 (아가멤논과 그의 아우 메넬라
오스) 에게 대하여
"아트레우스 집안 여러분들, 또 그 밖의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아카이아 군의 어른들이
여, 당신들에게 올림포스산 위에 살고 계시는 신들이 프리아모스 도성을 쳐서 빼앗기를 허
락하시도록, 그리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도록 빕니다. 그러니 내 딸을 부디
나에게 돌려 주시고, 그 대신 이 배상금(제사장의 딸은 원래 전쟁 포로로 잡혀 간몸이므로
그 몸값을 말한다.) 을 받아 주십시오. 제우스의 아들인 궁술의 신 아폴론의 신위를 두려워
하며."
이렇게 말하자 다른 아카이아 군 장수들은 모두 입을 모아 찬성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 막대한 배상금을 받으라고 권유했으나,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만은 이에 대해 분노
하여 제사장에게 모욕을 주어 내쫓으며 폭언을 퍼붓기를
"이 이상 더 그대를 나는 속이 깊게 파인 이 배들 옆에서 만나지 않으련다. 지금 어물거리
고 있거나 나중에 또 찾아오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그 때는 신의 홀장도 술도 그대 몸을
더 이상 지켜 주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 처녀를 돌려 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나
이를 먹어 늙기 전에는. 고향에서 먼 아르고스 땅 (펠로폰네스 지방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
로 보인다.) 에 있는 내 거성에 있으면서 북을 움직여 베를 짜고, 또 내 침상을 돌보며 날
을 보내게 할 것이다. 그러니 어서 돌아가시지, 나를 화나게 하지 말고, 되도록 무사히 돌아
가고 싶거든."
이렇게 말하자 노인은 두려움으로 왕의 말을 쫓기는 했지만, 파도 소리 요란한 바닷가를
묵묵히 걷더니 인기척이 없는 데로 가서 아폴론 신에게 지성스럽게 기원했다. 레토가 낳은
아름다운 머리칼의 신에게.
"제 소원을 들어 주시옵소서, 궁술의 신이시여. 온 크리세를 지켜 주시고, 거룩한 킬라 섬
과 테네도스 섬릉 위세도 당당히 다스리시는 스민테우스여, ('쥐의신' 이라는 뜻으로 아폴론
의 별명 중 하나. 아폴론은 트로이 지방에서는 이러한 별명으로 불렸는데 그 지방 토템
(Totem)인 쥐와 신의 융합을 나타낸다.) 일찍이 내가 신전의 지붕을 이어 드렸고, 또 진심
으로 살찐 암소와 산양의 허벅다리를 구워서 제물로 바친 적이 있었다면 이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다나오이 군이 아폴론 신의 화살에 의하여 내 눈물의 앙갚음을 받도록 해 주시옵소
서."
이렇게 빌면서 한 그 말을 포이보스 아폴론 (아폴론 신의 별명으로 '빛나는 자' 또는 '정
결한 자' 라는 뜻이다. 상황에 따라 여러 별명이 번갈아 사용되고 있음을 유의한다.) 이 듣
고 마음 속으로 큰 노여움을 불태우며 올림포스의 산봉우리를 타고 내려왔다. 두 어깨에는
활과 탄탄히 덮개를 한 화살통을 메고 있었으므로, 아폴론이 몸을 흔들며 걸을 때마다 노여
움으로 이글대는 그의 어깨 위에서는 많은 화살들이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아폴론은 마치
밤이 내리듯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선진으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는 활
을 당기기 시작했다. 은으로 만든 활에서는 무서운 굉음이 일었다. 화살은 먼저 노새와 발이
빠른 개들을 덮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병사들을 향하여 날카로운 화살을 신이 잇따라 당겨
맞히자, 질병의 화살에 쓰러진 병사의 시체를 태우는 불길은 꺼질 줄 모르고 계속 타올랐다.
(신과 인간의 관계 : 이 작품은 신과 인간의 세계가 함께 뒤섞이고 있음을 주목한다. 이처
럼 신화의 세계가 인간 세상과 공존한다는 인식이 오랫동안 서구 문화의 기반이 되어 왔다.
이러한 인식은 그리스 문화가 지닌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데, 인간 중심적이고 사색적
인 그리스인들은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같은 질서를 지닌 것으로 보았다.) 아흐레 동
안 이처럼 신의 화살은 진중을 샅샅이 내리덮쳤다. 열흘째 되는 날에 아킬레우스가 회의장
으로 무사들을 모았다. 그것은 흰 팔의 여신 헤라가 그의 마음에 일으켜준 생각 때문이었다.
즉, 여신은 다나오이 군이 자꾸 쓰러져 가는 것을 보고 그들을 딱하게 여겼던 것이다. 병사
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을 때, 그들 중에서 가장 발이 날랜 아킬레우스가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다.
"아크레우스 집안의 왕이여, 이제는 우리들이 이렇게 격퇴 당했으니, 비록 우리들이 죽음을
만의 하나라도 면했다손 치더라도 싸움과 질병이 한통속이 되어 아카이아 군을 지게 하려고
든다면, 고국으로 되돌아갈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누구든 점쟁이나 제사장 또는
꿐풀이를 잘 하는이에게 물어 봅시다. 꿈이라는 것도 최고신 제우스께서 보내시는 것이니까.
그러면 그가, 어째서 포이보스 아폴론이 이처럼 진노하셨는지 말해 줄 것이외다. 우리들의
서약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계신지 아니면 헤카톰베 (원래 '황소 백마리의 제물(祭物)이라
는 뜻이나 '일리아스'에서는 짐승의 종류나 수와 관계없이 '성대한 제물' 이라는 뜻으로 쓰
이고 있다.) 때문에 불만을 품고 계신지를. 그리고 새끼 염소나 잘 자란 산양의 기름진 살을
구운 연기를 받으시고, 우리 군에서 질병을 몰아 내 주실 뜻은 가지고 계시지 않은지를."
이렇게 아킬레우스는 말을 마치고 앉았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테스트로의 아들
칼가스가 일어섰다. 새점(鳥占)을 치는 점쟁이 가운데서도 특히 첫째로 꼽히는 자로서, 지금
의 일이며, 앞으로의 일이며 또 전에 있었던 일에도 영통(靈通)하였고, 아카이아 군 선대를
자신의 점술로 일리아스 아폴론이 내린 것이었다. 그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한 회의장에서
일어나 말하기를
"오, 아킬레우스여, 제우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당신이 궁술의 신 아폴론님께서 진노하신 까
닭을 말하라고 명령하였으므로 나는 말하려고 하오. 하지만 당신께서는 정신을 잘차려 진심
으로 성심껏 말과 힘으로 나를 지켜 주시겠다고 맹세해 주오. 그것은 이제부터의 나의 말이
어떤 한 인물을 성나게 할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그는 아르고스 인 전부를 크나큰 위세로
복종케 하며 아카이아 군을 복종시키고 있는 인물이오. 그런데 한 나라의 왕으로서 지체가
낮은 인간에게 화를 낼 경우에는 언제나 한결 더 엄격한 것이 보통이오. 그래 그 당일은 노
여움을 억지로 누르고 참을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완전히 풀어질 때까지는 언제까지고 계속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있게 마련이오. 그러니 아무 일 없도록 지켜 주겠노라는 당신의 확실한
약속이 필요하오."
(욕구의 갈등에 의한 불행의 초래 : 인간의 분쟁은 인간의 본능과 욕구에 따라 생기며, 그들
은 또 신의 질서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는 점도 감상의 초점이 된다.)
이에 대답하여 발이 날랜 아킬레우스가 말하기를
"안심하고 용기를 내어 무엇이든 알고 있는 대로 신의 예언을 모두 말해 보라. 제우스가 사
랑하시는 아폴론에게 맹세코, 그대 칼가스여, 언제나 그대의 기도로 다나오이 군에게 신탁을
밝혀 전해 주었으므로, 절대로 내가 살아 있는 한, 아니 이 눈이 성한 동안은 깊게 파인 이
배들 옆에서 다나오이 군 가운데 그 누구라 하더라도 그대에게 폭력을 쓰게 하지는 않겠다.
설사 아가멤논일지라도, 그 사람은 지금 온 아카이아 군 중에서 단연 남보다 뛰어났음을 자
랑하는 자이기는 하지만."
그러자 그 때 비로소 기운을 내어 이 훌륭한 예언자는 입을 열었다.
"신께서는 서약에 대해서나 또는 헤카톰베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제사장 때문이오. 그 사람에게 아가멤논이 치욕을 주고 딸을 돌려 주지도 않는데다 몸값을
받아 주지도 않았소. 그 때문에 궁술의 신 아폴론께선 우리들에게 고난을 주었고, 또 앞으로
도 줄 것이오. 그리고 또 빛나는 아름다운 눈을 가진 처녀를 그리운 아버지에게 돌려 주기
전에는, 그 흉측한 질병을 거둬 주지 않을 것이오. 그것도 그냥 몸값도 받지 말고 돌려 줌은
물론 신에게 바칠 신성한 헤카톰베를 크리세로 가지고 가야 하오. 그러면 비로소 우리들도
신의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이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앉았다. 그러자 모두를 향해서 아트레우스 집안의 용사가 일어섰
다. 광대한 나라를 다스리는 아가멤논으로, 불쾌함을 드러낸 얼굴빛에 가슴 속은 걷잡을 수
없는 노여움으로 시커멓게 끓어올라 두 눈은 활활 타오르는 불을 방불케 하면서, 먼저 칼라
스를 심술 사나운 눈으로 노려 보며 말하기를,
"너는 나쁜 예언만을 알리는군, 여태까지 한 번도 기쁜 일은 무엇하나 말해 준 적이 없다.
언제나 너는 나쁜 점만 치며 기뻐하고 있고, 일찍이 좋은 예언은 한 번도 말해 준 일이 없
어. 이번만 해도 너는 다나오이 군에게 신탁을 전한다면서, 궁술의 신 아폴론이 우리 군사에
게 고난을 주는 것은 모두 내가 제사장의 딸 크리세스를 내 곁에 붙들어 두고 싶어서 억류
해 놓고 몸값을 받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정실인 아내 클리타임네
스트라보다도 그 처녀가 더 좋은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아내와 견주어도, 몸매며 손발의 생
김새며 또 성품과 손재주, 무엇 하나 빠진 데가 없다. 그러나 불가피하다면 돌려 보내주기로
하겠다. 정말 그래야만 한다면, 이는 내가, 병사들이 죽는 것보다 무사하기를 바라기 때문인
데, 그렇다면 나에게 당장 다른 포상을 마련해 다오. 아르고스 군 가운데서 나만 혼자 아무
런 포상이 없대서야 정당하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내가 탄 포상이 딴 데로 가 버리는 것
은 여러분도 지금 똑똑히 보는 바와 같다."
이에 대해 이번에도 용사 아킬레우스가 말하기를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여, 그대는 어느 누구보다도 지체가 높은데다 물욕 또한 대단한 사람
이오. 어떻게 그런 그대에게 기상이 늠름하기만 한 아카이아 군이 포상을 드릴 수 있겠소.
정말이지 아무도, 어디에 공유(共有)의 재물이 잔뜩 쌓여 있다고 들은 사람은 없소. 여기저
기서 빼앗아 온 물건은 모두 이미 나누어 가졌으니 병사들에게서 그것을 다시 찾아 모으는
것은 좋지 않소. 아무튼 당신은 지금 그 처녀를 신에게 돌려 주셔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이
번에는 아카이아 군이 세 갑절, 네 갑절 그 갚음을 받을 것이오. 만일 앞으로 제우스 신이
트로이의 훌륭한 성벽을 가진 도성을 치게 해 주신다면 말이오."
(사건의 예고 : 트로이와의 본격적인 전쟁이 예고되는 대목이다.)
이에 대답하여 아가멤논 왕이 말하기를
"신과도 견주어질 만한 아킬레우스여, 하기야 그대는 용사이기 하지만, 절대로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되오. 도저히 나를 설득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그대 자신은 포
상을 받고 있으면서 나는 아무것도 받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게 하려는 거로군. 그래, 나
더러 처녀를 돌려 주라는 건가. 그렇다면 그 대가로 기상이 늠름한 아카이아 사람들이 그에
충분히 맞먹을 정도의 포상을 주면 더 좋고, 또 충분히 주지 않을 경우에는 내가 직접 나서
서 빼앗을 것이다. 그대 몫이든 빼앗아 오겠다. 나에게 빼앗긴 사람은 분명히 화를 내겠지만
말이야. 그러나 그것은 언젠가 또 나중에 천천히 새악하기로 하고, 지금은 어서 검은 배를
반짝이는 바다에 끌어내리게 해야지. 배 안에는 사공들을 알맞게 배치하고 헤카톰베도 실어
주자. 그리고는 볼이 아름다운 처녀 크리세스를 태우는 것이다. 그리고 또 누구든 한 사람
타협할 대장이 지휘관으로 타도록 해야겠는데, 아이아스 (살리미스 왕 텔라몬의 아들, 풍제
와 용맹에 있어 아칼레우스에 버금가는 용사.)나 이도메네우스(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의 손
자) 나 또는 존귀한 오디세우스(이다케 섬의 왕으로서 라에브테스의 아들. 지모가 뛰어난 용
장으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나 혹은 그대가 말이야. 펠레우스의 아들이며 모든 무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무서운 사람 말인데, 우리들을 위해서 제사를 올려 궁술의 신 아폴론을 달
래도록." (후략) (출처 : 김대행외 1인 저 교학사 문학교과서)
(이 작품은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그 결과로 일어난 친구의 죽음과 복수를 중심으로 전개되
며, 그에 대항하는 헥토르 또한 아킬레우스에 못지 않은 용맹을 지닌 영웅으로 그려져 있다.
여기에 수록된 것은 전체 24권의 맨 첫머리이다.)
내용 연구
노여움을 노래하라. 시의 여신이여 : 시의 여신은 무사(Mousa)를 말한다. 호메로스를 비롯
한 그리스의 시인들은 그들의 창작 행위가 신적인 영감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여러 신들 중에 - 맞붙어 싸우게 했는가 : 앞부분에서 서술되고 있는 상황이 왜 벌
어지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결과를 먼저 제시한 다음 그 원인을 서술함으로써
인과적 흥미를 노리고 있다. 사람들의 일이 아니라 신의 일로 서술하고 있는 점을 통해서
이 작품이 신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네들에게 올림포스 - 신위(神威)를 두려워하며 : 그리스 서사시의 독특한 어법이 나타
나 있는 구절이다. 이 화자는 제사장이라는 신분을 내세워 아폴론 신은 물론 다른 신의 위
세까지도 동원하여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 있다. 표현은 완곡하지만 당시의 사회 질서로 보
아 이 정도의 말이면 강압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신을 내세워 의사를 전달하는 부
분에서 드러나는 완곡한 표현법에 유의해서 읽도록 한다.
그러면 그 때는 신의 - 지켜 주지 못할 것이다 : 비록 신의 곁에 가까이 있는 제사장의 신
분이라하더라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가멤논의 안하 무인격적인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가장 발이 날랜 아킬레우스 : 그리스 군의 용사 아킬레우스의 가장 큰 장점은 발이 빠르다
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날랜 발의 소유자인 용사도 결국은 빠른 발을 지탱해 주는, 흔히 아킬
레우스 건이라고 부르는 곳에 화살을 맞아 죽게 된다. 운명과도 같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을 '아킬레우스 건'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누구든 점쟁이나 - 보내시는 것이니까 : 이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신의 뜻을 물어 보는 절차을 거쳤다. 주로 제사장이나 예언자 등이 신과 의견 교환
을 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나 여기에는 해몽가가 등장하고 있다.
아카이아 군 선대를 - 이끌어 온 사람이었다 : 당시에는 항해술이나 전술이 별로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점성술을 통해 뱃길을 읽고 전쟁에 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칼카스는 바로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왕으로서 - 품고 있게 마련이오 : 한 나라의 왕은 문맥상으로 아가멤논
을 가리킨다. 왕의 신분으로서 함부로 화를 낼 수 없어 일단 자신을 억제하겠지만 그만큼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두고 화풀이를 할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너는 나쁜 예언만을 알리는군. - 말해 준 일이 없어 : 원래 예언이란 대부분 불행한 일에
대해서 이루어졌다. 언제 닥칠지 모를 불행에 대처할 방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다. 그런데도 아가멤논은 자기의 행위에 관계된 일을 언급하는 데 불만을 품고 예언자의 역
할을 매도하고 있다.
이르고스 군 가운데서 - 할 수 없지 않은가 : 제사장의 딸은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상인데 그녀를 놓아 준다면 나로서는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한 셈이 되니 불공평한 일이 아
닌가.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는 전쟁 후에 상하를 막론하고 철저한 논공 행상이 이루어졌음
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어떻게 그런 그대에게 - 드릴 수 있겠소 : 여기에서 기상이 늠름하다는 것은 '정직한'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정직하기만 한 아카이아 군으로서는 그대같이 물욕
이 대단한 사람에게 줄 만큼 많은 재물을 쌓아 두거나 감추어 두지 못했으니 다른 포상을
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아가멤논을 경멸하는 어조가 나타나 있다.
그대 몫이든 - 빼앗아 오겠다. : 여기에 열거된 사람들은 모두 이전 전쟁에서 아가멤논과
함께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아가멤논으로서는 다른 용사들은 다 자기 몫을 챙켜 놓고 있는
데 유독 자신만 전리품을 내놓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
이 부분에서는, 전쟁을 수행하는 장수들이 처녀 하나를 반환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하
찮아 보이는 일을 통해 분열로 치닫는 데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뜻을 음미하는 것이
감상의 핵심이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과의 의견 차이로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다가 그의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전사하자 분노하여 출전하게 되고, 그래서 헥토르를 죽인다. 분노 때문
에 행위가 결정되는 아킬레우스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보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좋은
감상에 이르는 길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
이 작품에서는 신의 질서가 한데 어울려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트로이 전쟁이라고 하는
현실적 사건도 신들의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되듯이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대립도
신들의 문제와 뒤엉켜 있음을 보게 된다. 이처럼 신과 인간의 세계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데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 오늘날의 과학
적 합리주의 와 달랐던 시대에는 신화적 상상력에 의해 모든 것을 설명했다는 해석이다. 다
른 하나는 신과 인간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데서 조화를 추구하는 사고 방식을 엿볼 수 있
다는 해석이다.
일리아드 목차로 가기
전쟁의 씨앗이 된 황금 사과
아득한 옛날, 사람이 신들만큼이나 영웅스럽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뮈르미돈의 왕 펠레우스
는, 발이 아름다워서 <은빛 발>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바다의 요정 테티스를 아내로 맞이
하게 되었다. 이들의 혼인 잔치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고, 저 높은 올림포스 산의 신들
도 초대되었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 가는 참인데 초대되지 않은 손님 하나가 불쑥 그 자리에 나타났다.
누구인가 하면 바로 불화의 여신 에리스였다. 에리스는 어디에서든 불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 혼인 잔치에도 초대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에리스가 그 자리에 나타나 험상궂은 얼굴
을 하고선 자기가 당한 모욕을 복수하겠노라고 벼르는 것이었다.
복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에리스가 한 일은 겨우 잔칫상을 향해 황금 사과 한
개를 던진 것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처음엔 별 일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에리스는 손님들을
향해 숨을 한 번 크게 쉬고는 곧 사라져 버렸다.
에리스가 던진 사과는 과일 접시와 포도주 잔 사이에 놓여 있었다. 손님 중 하나가 허리를
구부리고 그 사과를 집어 올렸다. 사과의 한 귀퉁이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그러자 여신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세 여신이 그 사과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
다. 헤라 여신은 자기가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의 아내이자 모든 신들의 왕후되는 여신인 만
큼 그 사과는 마땅히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테나 여신은 자신이 지니고 있
는 지혜의 아름다움은 다른 모든 신들이 지닌 지혜의 아름다움보다 앞서는 만큼 그 사과는
당연히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프로디테 여신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아름다
움의 여신을 젖혀 놓고 감히 그 사과의 주인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세 여신 사이에는 입씨름이 벌어졌고, 이 입씨름은 말싸움으로 발전했다. 말싸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치열해졌다. 세 여신은 그 곳에 모인 손님들에게, 그 사과가 누구의 것이 되어야
마땅한지 심판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신들의 부탁을 들어 주지 않았다. 어느 여
신을 편들어 주든, 나머지 두 여신으로부터 원한을 사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세 여신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신들의 궁전이 있는 올림프스 산으로 돌아갔
다. 신들 중에는 이 여신을 편드는 신이 있는가 하면 다른 여신을 편드는 신들도 있었다. 신
들은 이렇게 편이 갈린 채로 오래오래 싸웠다. 얼마나 오랜 기간이었는가 하면 이 말싸움이
시작되던 당시 인간 세상에서 태어난 아기가 자라 전사, 혹은 목동이 될 때까지였다. 신들은
모두 죽지 않는 존재들이라서, 때가 되면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세월은 알지
못했다.
에게 바다의 북동쪽 해안에는 트로이아라고 하는 도시국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트로이아는
바닷가 언덕 위에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도시 국가였다. 이 도시가 이렇게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트로이아의 가까운 해협을 통해 비옥한 흑해 연안을 오르내리는 장
삿배로부터 통행세를 걷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도시 국가의 왕 프리아모스는 넓은 영
토와, 갈기가 유난히 긴 말을 많이 가진 임금이었다. 그에게는 아들도 많았다. 신들 사이에
서 황금 사과를 두고 말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할 무렵 프리아모스의 왕비 헤쿠바는 막내 아
들을 낳았다. 프리아모스 왕 내외는 이 막내 아들에게 파리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막내 왕자의 탄생은 트로이아의 커다란 경사여야 했다. 그러나 왕비 헤쿠바가 파리스를 배
고 있을 때 왕궁의 점쟁이들은 왕비가 장차 트로이아를 잿더미로 만들 말썽꾸러기를 낳을
것이라고 예언한 일이 있었다. 마침내 헤쿠바에게서 아들이 태어나자 왕은 하인 하나를 불
러 왕자를 데리고 나가 빈들에 버리라고 명했다. 하인은 왕의 명령대로 따랐다. 그러나 달아
난 송아지를 찾으로 다니던 한 목동이 버려진 왕자를 발견하고는, 데리고 가서 자신의 자식
삼아 기르게 되었다.
왕자는 키가 훤칠하게 힘이 세고, 아주 잘 생긴 청년으로 자라났다. 달음박질과 활쏘기라면
그를 당해 낼 장사가 인근에는 없었다.
그는 이다 산 기슭의 떡갈나무 숲과 고원 지대에서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 곳에서 숲의
요정 오이노네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오이노네도 청년을 사랑했다. 오니노네에게는
사람이 입은 상처는 아무리 지독한 상처라도 말끔히 낫게 해주는 재능이 있었다. 청년과 오
이노네는 숲속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전히 그 황금 사과를 두고 아옹다옹하던 질투심 많은 세 여신은 올림프
스산에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이다 산 기슭에서 목동 노릇을 하는 키가 크고
잘 생긴 청년을 보게 되었다. 세 여신은 모르는 것이 없는 신들이라서 그 청년이 자기 정체
를 모른다면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공정하게 심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
다. 세 여신은 이제 황금 사과를 두고 입씨름하는 데도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세 여신은 사과를 청년에게 던졌다. 파리스는 엉겹결에 손을 내밀어 그 사과를 받았다. 세
여신은 풀잎 하나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사뿐히 땅 위로 내려서서는, 누가 황금사과의 주인
이 될 만큼 가장 아름다운 셋 중에서 고르게 했다.
먼저 아테나는 여신이 눈부신 갑옷을 차려 입은 모습으로 앞에 나섰다. 아테나는 칼날 같
은 잿빛 눈으로 파리스를 바라보면서 자기에게 그 황금 사과를 던져 주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지혜를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다음에 헤라 여신은 신들 궁전의 왕후에 어울리는 차림으로 나서면서 자기에게 그 황금 사
과를 준다면 어마어마한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주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깊은 바다처럼 파란 눈을 가진 아프로디테가 꼬아 놓은 금실 같은 타래 머리를
하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면서 앞으로 나왔다. 아프로디테는 자기에게 황금 사과를 던져 주
면 자기만큼 아름다운 아내와 짝을 지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파리스는 그 여신만큼 아름다운 아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지혜와 권력을 주겠다는 두 여
신의 약속을 잊고 말았다. 심지어는 떡갈나무 숲에 두고 온 <검은 머리> 오이노네도 잊어
버리고 말았다. 파리스는 그 황금 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던졌다.
그 순간 아테나와 헤라는 황금 사과를 자신들에게 던져 주지 않은 파리스에게 앙심을 품었
다. 잔칫날 손님들이 예측했던 그대로였다. 두 여신은 아프로디테에게도 원한을 갖게 되었
다. 하지만 디프로디테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트로이아 왕자인 그 목동에게 한 약속을 지키
기로 마음먹고는 자리를 떠났다.
아프로디테는 어느 보름날 밤에 프리아모스 왕의 부하들로 하여금, 파리스가 치는 소떼의
임금격인 가장 크고 아름다운 황소 한 마리를 훔치도록 조화를 부렸다. 파리스는 그 소를
찾기 위해 산을 내려와 트로이아로 갔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어머니인 헤쿠바가 우연히 파리스를 보게 되었다. 헤쿠바는 청년이 자
기의 다른 아들들과 닮은 것을 확인한 데다 나름의 느낌도 있고 해서, 그 청년이 바로 아주
어릴 때 자기 품을 떠났던, 그래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막내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헤쿠바는 너무 기뻐 울면서 그 청년을 왕 앞으로 데리고 갔다. 막내 왕자가 살아 있는 데
다 그처럼 훤칠한 대장부로 자란 것을 본 사람들은 점쟁이들의 예언을 잊고 말았다. 프리아
모스 왕은 막내 아들을 왕궁으로 맞아들이고 트로이아의 다른 왕자들에게도 그랬듯이 살 만
한 집을 내주었다. 파리스왕자는 그 집에 살면서 이따금씩 사랑하는 오이노네가 기다리는
이다 산의 떡갈나무 숲으로 되돌아가고는 했다. 한동안은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한편, 에게 바다 건너편에서는 또 하나의 혼인 잔치가 있었다.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
와 헬레네 공주의 혼인 잔치였다. 헬레네를 두고 남자들은 <예쁜 뺨> 헬레네라고 불렀다.
그녀는 인간 세상의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헬레네의 아름다움은 온 그리스
땅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많은 왕과 왕자들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했다. 험한 바위
섬 왕국 이타카 왕 오뒤세우스도 그러한 왕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헬레네의 아버지는 수많은 구혼자들 중에서 메넬라오스를 사윗감으로 골랐다. 그는
그 많은 구혼자들이 어쩌면 사윗감으로 선택되지 못한 데 앙심을 품고 자기 사위를 해코지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사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헬레네
를 위해서라도 일제히 돕겠다는 맹세를 하게 했다. 오뒤세우스는 헬레네에게 구혼했다가 거
절당하고 헬라네의 사촌인 페넬로페와 혼인했다. 하지만 바로 이 때 한 맹세에 따라 헬레네
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달려가 도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헬레네가 아름답다는 소문은 그리스 땅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이윽고 아프로디테 여신
이 짐작했던 것처럼 트로이아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파리스는 그 소문을 듣는 순간, 사람
들의 말대로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인지 아닌지 직접 가서 제 눈으로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오이오네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와 함께 있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파리스는 막무가내엿다. 그는 더 이상 떡갈나무 숲에 있는 오이오네의 동굴로 올라가지도
않았다. 파리스는 바라는 것이 있으면 기어이 손에 넣고야 마는 성미였다. 그는 아버지 프리
아모스 왕에게 배를 한 척 빌려 줄 것을 요청했다. 파리스와 뱃사람들은 프리아모스 왕이
내어 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섰다.
에게 바다가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은 순조로웠다. 마침내 그리스 반도에 이른
그들은 해변을 따라 올라가 배를 대고, 무수한 언덕을 넘어 요새 같은 메넬라오스 왕의 왕
궁에 이르렀다.
노예들이 파리스 일행을 맞았다. 그들은 우선 오랜 항해로 인해 몸에 달라붙은 소금기와
먼지를 말끔히 씻었다. 그리고는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왕을 만나기 위해 큰 접견실로 들어
갔다. 접견실 한가운데에는 화로가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왕의 발치에는 왕의 사랑을 독차
지하는 사냥개들이 웅크린 채 엎드려 있었다. 메넬라오스 왕이 말했다.
"어서들 오시오. 나그네들이여. 누구신지 어디에서 오셨는지, 나의 왕궁으로는 무슨 일로 오
셨는지 들어 봅시다."
"저는 바다 건너에 있는 머나먼 나라 트로이아의 왕자인데 이름은 파리스라고 합니다. 먼
나라가 보고 싶어 이렇게 왔습니다. 메넬라오스 전하의 명성은 트로이아의 해변에까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훌륭한 임금이시며 나그네에게 너그러운 분이시라고요."
파리스가 대답했다.
"자, 그러면 앉아서 무얼 좀 드시겠소? 그렇게 먼 데서 오느라고 퍽 고생하셨겠구료."
메넬라오스가 파리스 일행에게 자리를 권했다.
파리스 일행이 자리에 앉자 고기와 과일과 황금 술잔에 찰랑거리는 포도주가 앞에 차려졌
다. 그들이 먹고 마시면서 여행중에 겪은 일을 주인에게 들려 주고 있는데, 왕비인 헬레네가
접견실로 들어왔다. 헬레네의 뒤로 두 명의 시녀가 따라 들어왔다. 한 명은 헬레네의 딸을
안고 있었고, 또 한 명은 짙은 보라색 털실이 감긴 상아 실톳대를 들고 있었다. 화로 저쪽,
왕비 자리에 앉은 헬레네는 실을 감기 시작했다. 실을 감으면서 헬레네는 나그네들의 이야
기에 귀를 기울였다.
순간순간 파리스의 눈길과 헬레네의 눈길이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자옥한 연기 속에서 마주
치곤 했다. 파리스는 메넬라오스의 왕비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고 생각
했다. 헬레네는 옥수수 대궁처럼 매끈했고 들꿀처럼 향기로웠다. 한편 헬레네의 마음을 끈
것은 나그네 왕자가 젊다는 점이었다.
메넬라오스는 헬레네의 아버지가 자기 취향에 따라 선택해 준 사람이지 헬레네 자신이 선
택한 사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메넬라오스
는 헬레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메넬라오스의 수염에는 벌써 흰 올이 나타나기 시작한
터였다. 그러나 파리스의 금빛 수염에는 흰 올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의 눈은 반짝거렸
고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파리스를 바라보는 헬레네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헬레네는 감고 있던 보라색 실을 잡아챘다.
파리스와 그 일행은 여러 날 동안 메넬라오스 왕의 손님으로 궁전에 머물렀다. 오래지 않
아 파리스는 왕비 헬레네를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가엾은 오이노네
는 파리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파리스는 오로지 헬레네 생각만 했다. <예
쁜 빰> 헬레네를 두고 떠날 생각을 하니 파리스는 눈앞이 아득했다. 날이 감에 따라 파리스
왕자와 헬레네 왕비는 궁전 안의 서늘한 올리브 숲 속과 흰 꽃이 핀 편도나무 가지 밑을 함
께 걷기도 했다. 파리스는 보라색 실을 감으며 그 나라 민요를 부르는 헬레네의 발치에 앉
아 있기도 했다.
드디어 메넬라오스 왕이 사냥을 떠나는 날이 왔다. 파리스는 핑계를 대고 따라나서지 않았
다. 그래서 파리스 일행은 궁전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왕이 떠나 궁전이 호젓해지자 파리스와 헬레네는 단 둘이서 은빛 올리브 나무 그늘을 거닐
었다. 파리스의 부하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왕비의 시녀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파리스는
자기가 여기까지 온 것은 오로지 헬레네를 만나 보기 위해서였고, 만나 보는 순간 온 가슴
으로 사랑하게 되어 혼자는 돌아갈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런 소리는 하는 게 아니에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래요. 첫째는, 나는 아미 다른 남자
의 아내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당신의 그 말 때문에, 당신이 떠난 뒤에 내가 더 견디기 어려
워질 것이기 때문이에요."
헬레네가 대답했다.
"사랑스러운 헬레네여. 내 배가 바닷가에 있답니다. 나와 함께 갑시다. 마침 당신의 지아비
인 메넬라오스 왕은 먼 곳으로 가 있습니다. 우리, 당신과 나는 남남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줄기에서 뻗어 나온 두 개의 덩굴이랍니다."
파리스는 조르고 헬레네는 망설이고 ………. 귀뚜라미 우는 한나절, 두 사람은 몇 번이고
밀고 당기기를 거듭했다. 하지만 헬레네의 상대는 파리스였다. 그는 자기가 바라는 것은 기
어이 손에 넣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헬레네의 가슴 깊은 곳에서 파리스를 따라가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헬레네는 지아비와 딸과 명예를 등졌다. 울부짖으며 애원하는 시녀들을 등진 채, 파리
스는 부하들과 함께 헬레네를 데리고 배가 대기하고 있는 바닷가로 갔다.
이로써 파리스는 아프로디테가 약속한 신부를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일 때문에
무서운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읽었다
나는 책이라는 것은 어떤 시기에 읽었느냐에 따라서 그 책의 맛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책
의 맛은 물론 저자가 의미하는 것을 포함한 다양한 것들을 말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
인 스키마(배경지식)에 따라서 그 책이 담고 있는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하고 또 다
른 측면에서 더 나아가 저자보다 한 수 위(?)이거나 아니면 저자가 의도했던 것들과 동떨어
진 것들을 그 책이 담고 있는 함의를 유추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책은 어릴 시절 나에게는 귀중한 지식의 보고였다. 당시 나에게는 책 속에 활자로 찍
힌 것들은 사실로 항상 각인되었고, 그 책 속의 인물처럼 살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
른다. 책이 내게 주는 의미의 수준은 지금 생각해 보면 읽을 당시의 지적 수준을 넘지는 못
하는 것같았다. 우리 집의 조그만 골방에서 읽었던 책들을 지금도 소장하고 있는 데, 그 소
장한 책들을 다시 한번 꺼내서 보면 또 다른 세계로 그 책은 다가 왔었다.
그러나 사실 산다는 것은 우리같은 이에게는 그처럼 한가하게 읽었던 책을 다시금 보게 하
는 여유는 주지 않고, 나 역시 그런 부류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보고, 또
언제 보아도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주는 책을 선택하라고 하면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
는 일리어드 이야기를 주저하지 않고 들 수 있겠다.
신들과 영웅이 혼재하던 시대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는 한낱 어린이들 이야기거리로 전락했지
만, 따지고 보면 지금도 그런 시대의 연장인지 모른다. 트로이아전쟁의 원인이 얼마나 단순
한가? 물론 여러 가지 관점과 해석이 있을 수 있고, 역사라는 것의 이면적 측면을 모르기에
말도 안 되는 해석일 수도 있지만, 하여간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가 헬레나라고 하는 빼어
난 미녀와 사랑에 빠져 남편을 버리고, 아이조차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트로이아로
가 버리는 일이 오늘날에는 없는 것일까? 그런 관계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존재한다는 것
이다.
어쩌면 무분별한 사랑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인명이 죽었으며, 한 국가가 초토화되었는가?
그러나 그것을 무분별이라고 하기에는 그 남녀에게는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거기서 신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한 신들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황금의 사과를 가지면 무엇이 달
라진다고 이렇게 인간의 세상을 만드는가? 나는 신이 아니기에 그들의 뜻을 모르는 것일
까? 명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하찮은 것들을 다른 이들은 목숨을 걸고 있고? 세상은
무엇이 진실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원죄는 없어지는가? 에리스는 단지 파티에 초대되
지 못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이런 일들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는가?
책을 이렇게 다양하게 읽다 보면 삶의 다양성에 대해 보다 관대해짐을 느낀다. 우리는 책을
통해 세상의 맛을 엿 볼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
그리스 선단들 집결하다
사냥에서 돌아온 다음에서야, 메넬라오스 왕은 왕비가 트로이아 왕자와 함께 도망치고 없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암담한 슬픔과 함께 열화 같은 분노를 느낀 그는 곧 사방으로 사람
을 풀어 트로이아 왕자의 잘못을 알리고 형인 아가멤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검은 수염〉
아가멤논은 그리스 모든 도시 국가의 왕들 위에 군림하는 대왕이었다.
사자의 문이 있는 황금 시대 뮈케나이의 궁전에서 아가멤논은 모든 군사와 배를 집결시키
라는 명령을 내렸다. 퓔로스의 노왕 네스토르에게도 명령이 떨어졌다. 들비둘기가 나직하게
울어대는 티스베에도 그 명령이 전해졌다. 험악한 땅의 우레 같은 고함소리로 유명한〈우레
목〉디오데메스, 험한 바위섬 이타카를 다스리는 꾀주머니 왕 오뒤세우스, 심지어는 크레타
섬의 이도메네오스에게까지 명령이 전해졌다.
크레타에서, 아르고스에서, 이타카에서, 본토와 섬에서 검은 배들이 꼬리를 물고 몰려 나오
기 시작했다. 도시 국가의 왕들은 농사를 짓고 있던 부하, 고기잡이를 하고 있던 부하들을
불러들여 활과 창으로 무장하게 했다. 병사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하루 속히〈예쁜 뺨〉헬
레네를 되찾고, 그녀를 꾀어낸 왕자의 죄를 물어 트로이아에 복수할 것을 맹세했다.
아가멤논은 아울리스 항구에서 자신의 배에 탄 채 선단이 집결하기를 기다렸다. 배가 모두
집결하자, 아가멤논은 마침내 선단을 이끌고 트로이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선단에는 마땅히 합류했어야 할 장군이 하나 빠져있었다. 그 일의 내력은 이렇다.
파리스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은빛 발〉이라 불리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는 펠레우스
왕의 아들을 낳았다. 펠레우스 왕과 테티스 왕비는 이 아들의 이름을 아킬레우스라고 지었
다. 신들은 왕비 테티스에게 만일 아킬레우스의 몸을 저승 세계를 흐르는 강 가운에 하나인
스튁스 강물에다 담그면, 그 거룩한 물의 영험으로 전쟁터에서도 죽지 않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테티스는 기꺼이 신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아들을 머리부터 그
검고 쓰디쓴 강물에 담그자니 발목을 담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테티스의 손이 닿은
아킬레우스의 발목만은 그 스튁스 강물에 적셔지지 않았다. 테티스가 그것을 깨달은 건 이
미 때늦은 다음이었다. 스튁스 강물에 담그기는 한 번밖에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테티스
는 이 일이 있는 후부터 늘 아들을 걱정하게 되었다.
아킬레우스가 소년이 되자 아버지 펠레우스는 나이가 몇 살 더 많은 파트로클로스를 친구
로 딸려 아들을 테살리아의 케이론에세 보냈다. 케이론은 가슴 위쪽은 사람이고 아래쪽은
말인 켄타우로스이며, 그들 중에서도 가장 현명한 켄타우로스였다. 케이론은 아킬레우스를
다른 소년들과 합류하게 하고, 말 타는 법(케이론 자신의 등이 곧 말 잔등이었다), 칼과
창과 활 쓰는 법, 하프 켜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케이론은 이러한 것들을 다 가르친 다
음에야 아킬레우스를 아버지 펠레우스의 궁전으로 돌려 보냈다.
그러나 아가멤논의 소집 명령이 떨어지고 검은 선단이 발진하자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스
퀴로스 섬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 섬의 뤼코메데스 왕에게, 자기 아들에게 처녀 옷을 입혀
그 섬나라 공주들 사이에다 숨겨 달라고 부탁했다. 아들을 전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킬레우스 같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의 이런 터무니없는 요구에 고분고분할 수 있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테티스는 오로지 아들의 안전만을 생각하느라고 무슨 마법을
걸지 않았나 싶다. 배가 집결할 동안 아킬레우스는 뤼코메데스 왕의 딸들 사이에 숨어 있었
다.
그러나 전쟁으로부터 아들은 보호하기 위해 꾸민 테티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선단
이 물결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던 도중, 선단의 병사들이 마실 물을 싣기 의해 스퀴로스 섬
에 상륙했던 것이다. 그 섬에서는 아킬레우스 왕자가 숨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뤼코메데스 왕은 군대의 상륙을 환영하면서도 아킬레우스 왕자 같은 사람은 알지도 못한다
면서 딱 잡아떼었다. 상륙 부대의 지휘관은 낙심첨만이었다. 왜냐하면 점쟁이 우두머리 칼카
스가 아킬레우스 없이는 트로이아를 함락시킬 수 없다고 예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공연히 꾀주머니 장군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수염과 눈썹
을 검게 물들이고 머리카락을 붉은 모자 속으로 감춘 다음 장사꾼 옷을 구해 입고 방물장수
로 변장했다.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등에는 커다란 봇짐을 짊어진 채 그는 뤼코메데스의 왕
궁으로 들어갔다.
궁전 앞마당에 방물장수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왕의 딸들이 우루루 몰려 나왔다. 아킬레우
스도 처녀처럼 너울을 쓰고 그들 사이에 묻어 나와 방물장수의 봇짐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방물장수가 봇짐을 풀자 왕의 딸들은 제각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금
관을 집는 처녀, 호박색 목걸이를 집는 처녀, 하늘빛처럼 푸른 옥 목걸이를 집는 처녀, 붉은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수놓은 치마를 집는 처녀도 있었다. 처녀들이 모두 하나씩 집고 나니
방물장수의 봇짐은 곧 바닥이 났다. 봇짐의 맨 바닥에는 자루에 황금 징이 박힌 큼지막한
청동검이 하나 들어 있었다. 너울로 얼굴을 가린 채 다른 처녀들이 물건을 다 고르고 돌아
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듯한 마지막 처녀가 앞으로 걸어나와 그 칼을 집었다. 그런데 잡는
것부터가 아무리 보아도 그런 무기를 많이 다루어 본 솜씨였다. 예전에 익숙했던 솜씨로 칼
을 잡는 순간, 어머니 테티스가 아킬레우스에게 걸었던 마법이 풀렸다. 아킬레우스 왕자는
너울을 풀어헤치면서 외쳤다.
“이것이야말로 내 것이다!”
그러자 선단의 왕들과 장군들이 달려와 아킬레우스 주위로 몰려들면서 좋아했다. 그들은
아킬레우스가 입고 있던 여자 옷을 벗기고, 전사에게 어울리는 짧은 킬트 치마와 소매 없는
외투로 갈아 입힌 다음 허리에는 칼까지 채워 주었다. 연합군 장군들의 부탁을 받은 아킬레
우스는 아버지 펠레우스 왕의 궁전으로 되돌아가 선단에 합류할 군대와 배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어머니 테티스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랑하는 너를 안전한 곳에다 두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이제 네 운명은 네가
선택해야 한다. 네가 여기에 머물면 오래,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군
대를 따라간다면,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사람들의 이야기에 네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의
명예를 얻을 수는 있으나 네 수염에 흰 올이 생길 때까지는 살지 못한다. 다시 아버지의
왕궁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어머니, 저는 오래 살지 못해도 명예로운 삶을 택하겠습니다.”
아킬레우스가 손가락으로 칼을 어루만지면서 대답했다.
아버지 펠레우스 왕은 아킬레우스에게 군대를 실은 배 오십 척과 친구 겸 전우로 파트로클
로스까지 딸려 보냈다. 어머니는 울면서 아들의 몸에다 지아비 펠레우스의 갑옷을 입혀 누
었다. 그것은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펠레우스를 의해 손수 만들어 준 갑옷이었다.
마침내 아킬레우스는 선단을 이끌고 트로이아로 향하는 연합군 선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의 갈등
그리스 선단의 항해는 순조롭지 못했다. 폭풍이 선단의 진로를 방해하는가 하면 난데없이
나타난 적의 함대와도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연합군의 선단은 트로이아 성
이 보이는 해안에 까지 이르렀다.
이 때부터 선단에서는 트로이아에 누가 먼저 상륙하는가를 두고 겨루기가 벌어졌다. 노잡
이 들은 서로 먼저 상륙하고 싶었던 나머지 노젓는 속도를 높였다. 그 바람에 뱃머리가 바
다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이 겨루기에서 승리한 것은 프로테실라오스 왕자가 지휘하던
배였다. 그러나 왕자가 해변에 발을 딛는 순간, 트로이아 진영에서 날아온 화살 하나가 왕자
의 목줄기를 꿰뚫고 말았다. 왕자는 모래톱 위로 쓰러졌다. 이로써 프로테실라오스 왕자는
그리스 최초의 상륙자이자 기나긴 트로이아 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나머지 그리스의 군사들은 그의 뒤를 이어 트로이아 군을 휘몰아쳤다. 트로이아 군은 잘
훈련 된 그리스 연합군에 대한 방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했다. 그리스 군사들은 해가 떨
어졌을 때도 해변의 모래 언덕, 트로이아 평원의 갈대밭, 거친 들풀 위에다 재빨리 잠자리를
마련할 줄 아는 선수들이었다.
그리스 연합군은 배를 해안에 끌어다 붙이고, 배 앞에서 집회장도 만들고 오두막도 얽어
놓았다. 트로이아 해변의 삽시간에 작은 항구 도시 비슷한 마을로 변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전쟁이 계속되는 몇 해 동안 뗏장과 목재로 얽어 세운 그 마을에 살면서 긴 싸움을 치뤄 내
었다.
아홉 번이나 야생 편도나무가 꽃을 피웠고, 아홉 번이나 트로이아 성 밑의 가파른 바위 사
이로 돋은 떨기나무 가지를 말렸다. 배의 재료로 쓰였던 나무들이 썩어갔고 조국을 떠나올
때 병사들이 지니고 있던 그 뜨거운 야망도 점차 무디어져 갔다.
그리스 연합군은 포위 공격전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성 주위에다 참호를 팔 줄도 몰랐고
트로이아 동맹국의 보급품과 군대가 지나는 길목을 지킬 줄도 몰랐다. 그들은 또한 성문을
부술 줄도, 성벽 위로 올라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늙은 왕과 늙은 신하들이 지휘하고 있던 트로이아 군대 역시 성 안에서만 죽치고 있다가
이따금씩 성문을 열고 나가 작은 접전을 벌일 뿐이었다. 트로이아 군대의 지휘관 중에서 시
도 때도 없이 성문을 열고 나가 그리스 진영을 짓밟는 장군은, 트로이아 군의 사령관이자
왕의 맏아들인 헥토르뿐이었다.
그러나 트로이아 주위의 작은 해안 도시들은 그리스 군대에게 무참히 짓밟혀야 했다. 검은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건넌 그리스 연합군은 이런 작은 해안도시들을 급습하여, 가축은 양
식으로 삼고 말은 전차를 끌게 했으며 여자들은 잡아서 조예로 삼았다.
편도나무가 열 번째로 꽃을 피울 즈음, 이런 해안 지방의 소도시를 기습한 그리스 연합군
은 아름다운 그 두 처녀를 포로로 잡아왔다. 전쟁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그뤼세이스와 브리
세이스가 바로 그 두 처녀였다. 크뤼세이스는 전리품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차지하는 대
왕 아가멤논에게 주어졌고, 브리세이스는 그 기습 공격을 지휘했던 아킬레우스에게 상으로
주어졌다.
태양신 아폴론을 섬기는 사제였던 크뤼세이스의 아버지는 그리스 진영으로 와서 몸값으로
금을 낼 터이니 딸을 돌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이를 거절하고 노인을 잔뜩
욕보이고는 돌려보냈다. 겉으로 보기에 이 문제는 이것으로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직후에 그리스 진영에는 열병이 돌았다. 많은 병사들이 열병으로 죽었고,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밤이고 낮이고 해변에 자옥했다. 절망에 빠진 그리스 연합
군은 점쟁이 칼카스에게 열병이 퍼진 원인을 알아보게 했다. 그는 하늘을 나는 새들을 관찰
하고 모래판에다 그려가며 점을 쳤다. 칼카스는 태양신 아폴론이 사제가 당한 모욕을 대신
분풀이해주느라고 은으로 만들어진 활로 연합군 진영에다 열병의 화살을 쏘아대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크뤼세이스 처녀를 아버지에게 돌려 보내지 않는 한 아폴론의 분노는 누그
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들은 아가멤논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장군들은 그에게 처녀를 돌려 보내자고 말
했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주어진 브리세이스를 차지하게 해준다면 크뤼세이
스를 돌려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 즈음 아킬레우스는 이미 브리세이스에게 정이 들어서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보호해 주
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브리세이스를 위해서라면 칼을 뽑는 것도 사양하지 않
을 기세였다.
그러나 아프로디테카 파리스와 트로이아를 편드는 것에 맞서 그리스 연합군의 편을 들기로
작정하고 있던 아테나 여신은, 아킬레우스의 마음 속에 대왕과 맞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품게 했다. 그래서 아킬레우스는 자기가 대왕과 맞서는 순간 전쟁은 연합군의 패배로 끝난
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장군 네스트로가 그들을 화해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의 불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나이는 젊지만 그리스 연합군의 장군 중에서 가장 자존심이 강하고 성질이 급했던 아킬레
우스는, 아가멤논 대왕을 가리켜 얼굴은 마치 개와 같고 가슴은 겁쟁이 사슴같을 뿐아니라
욕심 많은 비겁자라고 욕했다.
"대왕은 전투에서는 별 활약도 하지 않으면서 전투가 끝나면 다른 사람이 차지한 전리품까
지도 차지하려고 합니다. 전리품뿐만 아니라 명예까지도 독차지하려고 합니다. 이유는 단 하
나, 대왕에게는 그럴 만한 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아가멤논의 표정은 비구름이라도 낀 듯이 어두워지면서 어롷게 응수했
다. "나는 대왕이다. 네 말마따나 나에게는 그럴 만한 권력이 있다. 이것을 잊어 버려선 안
된다. 너는 또한 대왕으로서 그럴 만한 권리도 가지고 있다. 너는 많은 왕자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라."
두 사람의 싸움은 나날이 험악해져 갔다. 다른 장군들로서는 그 싸움을 말릴 수가 없었다.
결국 막말을 한 사람은 아킬레우스였다.
"아가멤논 장군. 당신은 내 명예를 더럽혔소. 따라서 신들 앞에서 맹세하거니와 더 이상 당
신을 위해서 싸울 수 없소. 나는 명예가 회복될 때까지 트로이아를 상대로 싸우는 싸움에서
는 어떠한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오."
아킬레우스는 회의장을 뛰쳐나가 자기 부대의 진영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뒤로는 자기 부
대, 자기 나라의 검은 선단 밖으로는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지휘를 받던 군
대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가멤논은 불같이 오르는 화를 삭이면서 아폴론 신에게 제물로 받칠 집짐승과 함께 크뤼
세이스를 자기 배에 싣게 했다. 그리고 오뒤세우스에게 명령을 내려 처녀를 아버지에게 되
돌려 주도록 했다. 배가 떠나자 아가멤논은 부하를 보내어 아킬레우스의 진영에 있던 브리
세우스를 자신의 막사로 데려오게 했다.
처녀가 울면서 아가멤논의 부하들에게 끌려가고 있었지만 아킬레우스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저 선 채로 가만히 지켜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러나 처녀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아킬레우스는 차가운 바닷가로 달려가 모래톱에 주저
앉아 대성 통곡하기 시작했다.
바다 밑 수정궁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통곡소리를 들은 바다의 여신 <은빛 발>테티스는,
바다위를 오르는 바다 안개처럼 물 위로 솟구쳐 올랐다. 테티스의 모습은 아들의 눈에만
보였다. 테티스는 아들 옆에 앉아 머리카락과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슬퍼하느냐? 네 가슴에 맺힌 슬픔이 무엇인지 나에게 말해 보아라."
아킬레우스는 울먹이면서 자신이 통곡하고 있는 사연을 말했다.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한 그는 어머니에게 부탁을 했다. 신들의 아버지인 벼락의 신 제우스에게 탄원해서 트로
이아가 한번만 승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다. 트로이아가 이기게 되면 아가멤논은 자기
휘하 장국 중의 하나인 아킬레우스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
켜 준 뒤 되돌아와 달라고 애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테티스는 아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곧바로 제우스에게 탄원할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들의 아버지가 다른 일로 세계의 반대쪽 끝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
다. 그래서 테티스와 아킬레우스는 제우스 신이 올림포스 산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만 했다.
아킬레우스는 열이틀 동안이나 자기 배에서 기다리면서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 동안에 오뒤세우스는 격식에 맞는 제물과 기도문, 죄를 닦는 데 필요한
제사용구들과 함께 크뤼세이스를 그녀의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내고 해변으로 돌아와 있었
다. 크뤼세이스의 아버지는 아폴론 신에 의한 열병의 저주는 이미 풀렸다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연합군에 생기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브리세이스는 아가멤논 대왕의 진영에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배 안에서 가슴 속
에 사무친, 장미 송이처럼 붉은 분노를 다독거리고 있었다.
일대일 결투에 나서다
열이틀째 되는 날, 벼락의 신 제우스가 올림포스 산 위로 돌아왔다. 테니스는 제우스에게
다려가 트로이아 군에게 한 차례 승리를 안겨 달라고 탄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왕 아가
멤논과 그리스 연합군의 장군들이 자기 아들 아킬레우스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해 달라고 빌었다. 제우스는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테티스의 부탁
이니 들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곰곰히 생각했다. 그러다 그 날 밤. 나무로
지은 막사에서 잠을 자고 있는 아가멤논으로 하여금 가짜 꿈을 한 토막 꾸게 했다. 가짜 꿈
에서는 현명한 노장군 네스토르가 대왕의 침대 옆에 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
다.
"왕 중의 왕이신 전하, 군대에 전투를 준비하게 하십시오. 제우스 신께서는, 만일 대왕께
서 내일 트로이아를 공격한다면 전화의 군대에게는 승리, 트로이아 군대에게는 슬픔과 죽음
을 안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가멤논이 꿈에서 깨어난 것은 희붐한 새벽 빛이 문간을 밝히고 있을 때였다. 그는 꿈을
떠올리자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다. 그러나 새벽 빛이 빛줄기로 변할 즈음부터는 꿈이 사실
과 반대일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아가멤논은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갑옷을 입고 부하들에게 전투
준비 명령을 내리는 대신 여느 때 입는 헐거운 겉옷과 망토를 걸치고 손에는 대왕을 상징하
는 금장식이 수놓인 올리브 나무 지팡이를 쥐었다. 그런 다음 왕과 장군들을 소집하여 꿈
이야기를 들려 주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어 보았다. 걱정스러워하는 대왕의 마음이 전
해지자 듣고 있던 군사들 중에서도 싸우자고 고함을 지르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염
려스러운 듯이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왕이 엉뚱한 제안을 했다. 연합군의 정신 상태를 시험해 보고 싶다는 것
이었다. 그는 연합군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포위 공격전을 너무
오래 끌어왔으니 이제는 배를 바다 쪽으로 도리고 막사는 모두 불태워 버리고 그리스 본토
로 돌아가겠다고 말이다. 만일 자신의 말을 곧기 듣고 배 쪽으로 달려가는 병사들을, 그들이
미처 배에 이르기 전에 지휘관들이 다시 돌려 세운다면 분위기가 좀더 살아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포위 공격전은 실제로도 너무 지루하게 끌어오고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고향 땅과 두고 온 처자식이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아가멤논의 말을 듣자마자, 서풍 앞에서 파도를 일으키는 바다처럼 그 자
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성을 지르며 배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 뒤로 먼지 구름이 일었다. 지
휘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만은 바위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지휘관들에게 대왕이 농담 삼아
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그렇게 오래도록 공격해 온 트로이아를 두고 떠나는 것은 부끄
러운 일이라고 외쳤다. 그는 외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지휘
봉 삼아 흔들면서 마치 양치는 목동처럼 병사들을 제자리로 내몰았다. 병사들은 모두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지만 낙심천만이었다. 사기가 오를 리가 없었다.
병사 중의 한 명이 항의했다. 테르사테스라는 이름의 안짱다리 병사였다. 그는 무리 가운
데서 앞으로 나와 장군들을 조롱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지휘관들을 욕보이는 한편, 병사들
에게 따를 만한 가치가 없는 지휘관들을 떠나 싸움터에서 도망치라고 말했다.
오뒤세우스는 서둘러 테르사테스의 입을 막지 않으면 병사들의 마음이 흔들릴 것으로 판
단하고는, 그를 붙잡아 왕위를 상징하는 지팡이로 흠씬 두들겨 주었다. 테르사테스는 피를
흘리면서 어린애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오뒤세우스는 데르사테스를 땅바닥에다 내동댕이친 다음 실컷 비웃어 주었다. 가까이 있
던 이들도 모두 그를 비웃었다. 웃음은 무리 속으로 퍼져갔다.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병사들은 영문도 모른 체 따라 웃었다. 그들은 창칼을 높이 치켜들고는 오뒤세우스를
환호했다. 오뒤세우스와 백발의 네스토르는 대왕을 대신해 전투 준비를 외쳤다.
그리스 군은 각 부대별로 자기네 왕과 장군과 지휘관들의 명령에 따라서, 사로잡은 말에
마구를 채워 전차를 끌게 했다. 그리고는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물밀듯이
들판을 휩쓸고 나아갔다. 그 모습은 마치 짝짓기 철이 되어 먼 땅에서 원래 살던 늪으로 돌
아오는 두루미떼 같았다.
아킬레우스가 싸움터에서 등을 돌렸다는 소식에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트로이아 연합군
은 그리스 연합군을 맞기 위해 성에서 몰려 나왔다. 포위전이 시작된 이래 실로 처음으로
두 군대가 맞붙은 것이었다.
두 개의 긴 전투 대열이 서로 마주 보고 섰다. 트로이아 군에서는 파리스가 거들먹거리며
평원으로 나왔다. 그는 어깨에 표범 가죽을 걸치고, 손에는 두 개의 청동머리 장식이 박힌
창 두 자루와 큰 활을 들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 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누구든지 나와서
자기와 일대일로 싸우자고 말이다.
헬레네의 지아비인 메넬라오스는 먹이감을 앞에 둔 사자처럼 좋아했다. 그는 전차에서 뛰
어내렸다. 갑옷이 햇빛에 번쩍거렸다. 그러나 자기와 싸울 상대가 누구인가를 알아 낸 파리
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무섭기도 한 데다 몹시 부끄러워진 그는 트로이아
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헥토르는 파리스를 겁쟁이라고 놀려준 뒤, 어떻게 하든 그의 용기를
북돋워 주려고 했다. 파리스가 다시 용기를 내자, 헥토르는 그리스 군에게 파리스와 메넬라
오스와 일대일 싸움으로 전쟁을 아예 끝내 버리자는 제안을 했다. 그의 제안은 곧 사생결단
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헥토르는 만일 그 싸움에서 파리스가 지면 헬레네를 금은보석과 함께 첫 지아비인 메넬라
오스와 그의 군사들에게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반대로 메넬라오스가 그 싸움에서 목
숨을 잃는다면 헬레네는 트로이아에 그대로 남고 그리스 연합군은 빈손으로 바다를 건너 본
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리스 군은 이에 동의했다. 헥토르는 신들도 이 일대일의 조건부 대결을 용납할 것인지
그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트로이아 성안으로 사람을 들여보내 제물로 쓰일 양 두 마리를
몰아 오게 했다.
이윽고 두 마리의 양이 도착했다.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파리스는 갑옷을 빌어 이
었다. 번쩍거리는 가슴 가리개와 다리 보호대를 하고, 꼭대기에 말총이 촘촘히 박혀 움직일
때마다 바람에 나부끼는 큼지막한 투구도 썼다. 태양이 달아오르기 시작하면서 날씨가 몹시
더워졌다. 그리스 군과 트로이아 군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갑옷을 벗고 방패에 기댄 채
일대일의 싸움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한편,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베틀로 보라색 겉옷감을 짜고 있던 헬레네는 파리스와 자기
의 첫 지아비 사이에 결투가 벌어진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헬레네는 베틀에서 일어나 머
리에 너울을 쓰고 가까운 성루 위로 올라갔다.
프리아모스 왕은 몇몇 원로들과 함께 벌써 그 곳에 올라와 있었다. 왕은 평원과 그 평원에
서 마주 진치고 있는 양쪽 군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헬레네가 올라오는 것을 본 원로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여인을
놓고 싸우는 것은 수치가 아니지만, 만일 헬레네가 자신의 첫 지아비에게 돌아간다면 트로
이아로서는 무척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느냐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헬레네를 늘 자애로 거두어 주던 프라이모스 왕은 헬레네가 원로들의 수군거림에
흠칫하는 것을 보고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가까이 오게 하고서 이런 말을 해주었다.
"얘야,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만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너희 나라와 우리 나라 백성
들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도 다 신들의 뜻이 아니겠느냐"
헬레네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저에게 늘 자애로우십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남편과 자식을 두고 떠나기
전에 죽어 버렸어야 했는데……. 뻔뻔스럽게도 파리스를 따라와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하다
니, 저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프리아모스 왕은 헬레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성루에서 뛰어내릴 것 같았던지, 그녀
를 가까이 끌어와 곁에 두고 그리스 진영의 장군들을 가리키며 이름을 물었다. 혹시라도 그
녀가 딴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나란히 선 채로 한동안 평원을 내려
다보고 있었다.
두 나라의 군대 사이로 가로놓인 평원에 간단한 제단이 마련되었다. 양쪽 장군들은 양을 죽
여 그것을 제물로 삼아, 두 사람의 일애일 싸울 결과가 어떻게 나든 간에 반드시 승복하겠
노라고 맹세했다. 곧 네모닌 싸움터가 마련되었다. 심판관으로 뽑힌 병사들이 투구에다 두
개의 나무조각을 넣고 제비뽑기에 들어갔다.
누가 먼저 창을 던지느냐, 그것을 결정하는 제비뽑기였다. 헥토르가 투구를 흔들었다.파리스
의 제비가 잘 다져진 싸움터 바닥에 떨어졌다. 모두들 침을 삼키고 결과를 기다렸다.
"파리스다! 파리스가 먼저 창을 던진다!"
파리스가 창을 뒤로 한껏 젖혔다가 던졌다. 그러나 파리스의 창끝은 메넬라오스의 방패에
박힌 사마귀 모양의 징에 맞고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메넬라오스가 그 우렁
찬 목소리로 신들의 아버지 이름을 불렀다.
"위대한 제우스시여! 제 식탁에서 소금을 함께 먹고, 제 지붕아래에서 함께 잤음에도 불구
하고 저를 배반하게 한 못된 짓을 저지른 이 자에게 그 값을 치르게 하소서!
그는 마음을 속에 쌓인 원한을 있는 대로 실어 힘껏 창을 던졌다.
창끝은 파리스의 방패와 가슴 가리개를 뚫고 윗옷까지 뚫었다. 그러나 파리스가 몸을 옆으
로 비튼 덕분에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메넬오스는 고함을 지르고 큰 칼을 흔들면서 파리
스에게 돌진해왔다. 그러나 그의 칼은 파리스의 투구 위에 달린 빗살 모양의 구리 장식에
맞으면서 네 조각으로 부러졌다. 부러진 칼날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메넬라오스는 쓸모 없게 된 칼을 버리고는 마치 먹이를 공격하는 표범처럼 파리스를 덮쳤
다. 그리고는 투구 위에 달린 말총 장식을 거머쥐고 그리스 진영으로 끌고가려고 했다. 그러
나 아프로디테 여신은 파리스의 턱 밑에 묶여 있던 투구의 턱끈을 끊어 버렸다. 메넬라오스
는 말총 장식만 한 줌 거머쥐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말총 장식을 잡고 파리스의 투구를 공중에서 한 차례 돌리고는 그리스 진영의 한복판
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런 다음 싸움을 끝장내기 위해 다시 파리스쪽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트로이아의 왕자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아프로디테 여신의 파리스를 겉옷으로 감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한 뒤, 프리아모스 왕의 궁전 중에서 가장 높고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메넬라오스가 사라진 적을 찾아 고함을 지르면서 길길이 날뛰고 있을 동안, 그리스 군사들
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자신들과 트로이아군 사이에 했었던 약속대로라면 이제 헬레네는
자기네 진영으로 돌아올 것이고, 그러면 헬레네와 함께 모래톱 가까이에 있는 배로 달려가
오래 전에 떠나온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프리아모스 왕에게 손을 잡힌 체 설루에서 평원을 내려다보던 헬레네도 그리스 진영의 병
사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아프로디테 여신이 헬레네의 곁으로 다가
갔다. 내리꽂히는 제비처럼 눈깜짝할 사이였기 때문에 여신이 거기에[ 왔다는 것을 아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프로디테 여신은 헬레네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네가 거처하던 곳으로 가자. 네 지아비 파리스가, 손님을 맞는 큰 방에서 너를
부르고 있으니....."
그러자 헬레네가 대답했다.
"파리스는 이제 저의 지아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지났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저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헬레네가 거절한다고 해서 물러설 사랑의 여신이 아니였다. 여신은 살짝 눈살을 찌
푸리면서 말했다.
"네 마음은 잘 알지만. 이 날 이 때까지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 주었던 사랑을 증오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너를 증오하던 그리스 인들을 마음돌리기가 어렵지 않은 것
처럼 트로이아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 역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곧 두 나라 사이
의 참혹한 주검을 보게 됙 것인즉, 이게 바로 네가 바라던 바가 아닌가."
헬레네는 겁이 났다. 그녀는 너울로 얼굴고 가리고 여신을 따가 파리스의 살던 집으로 갔
다. 파리스는 넓은 방 안의 침대 가에 앉아 있었다. 무장을 벗은 그의 모습은 목에 남아 있
는 투구끈에 죈 자국만 아니라면, 싸움터에서 왔다기보다는 잔칫집에서 방금 돌아온 사람
같았다.
성난 얼굴을 하고 그 앞에 선 헬레네가 소리쳤다.
"네 그래요, 싸움터에서 돌아왔다, 이거죠? 그렇다면 내 인사를 받으셔야지요.
내 인사는 이렇답니다. 두나라 군대 사이에서 차라리 나의 첫 지아비, 네넬라오스의 손에 죽
어 버리지 그랬어요?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분처럼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을 거예요."
그러자 파리스가 일어나 헬레네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말하지 마오. 싸움터에서 막 돌아온 사람에게 그렇게 모진 말을 하는 법이 아니라
오. 메넬라오스와는 또 한 차례 싸울 때가 올 거요. 어쨌든 내가 그동안 당신에게 쏟아온 사
랑을 잊지 말아 주오."
"당신이나 두 나라 사이의 맹세를 잊지 마세요. 그 맹세로 인해 나는 다시 메넬라오스의
아내가 되었어요. 나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여자가 아니에요."
헬레네는 한 차례 파리스를 쏘아보고는 돌아서려고 했다. 그러나 아프로디테 여신은 알고
있었다. <예쁜 뺨>헬레네가 자기 나라의 백성들에게 돌아가면 전쟁은
날 테지만 트로니아 왕국은 결국 패배자가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되면 파리스에
게 했던 약속은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고, 자신은 신들의 눈에 우스꽝스러운 여신으로 보
일 것이 아닌가. 아프로디테 여신은 헤라와 아테나늬 조롱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
다. 그래서 여신은 헬레네에게 마법을 걸어 그녀의 앞에서 서 있는 파리스를 십 년 전의 모
습으로 보이게 했다. 배를 항구에 기다리게 하고 스파르타의 올리브 숲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던, 바로 그 때에의 파리스로 말이다.
헬레네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어 트로이다 성의 그 방에서 파리스와
함께 살기로 했다.
트로이아 왕가의 여인들
전쟁은 그 날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해도 두 진영의 휴전 협정이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에 숨돌릴 여유는 있는 셈이었다. 따라서 그 틈을 이용해 평화회담을
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리스 연합군 편에 서 있던 아테나 여신은 그 휴전 협정을
깨뜨리기로 마음먹었다.
아테나는 트로이아 연합군에 참전하고 있던 왕자 중의 하나인 판다로스로 하여금 이런 생
각을 하게 했다. 그리스의 장군 중에서도 빼어난 장군인 메넬라오스를 활로 쏘아 죽이면 멋
지소 근사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판다로스는 큼직한 자기 뿔활에다 화살을 하나 먹여
힘껏 당겼다가는 깍지손을 놓았다. 화살은 똑바로 날아가 메넬라오스 왕의 가슴 가리개를
꿰뚫었다. 왕의 가슴에선 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아우인 메넬라오스가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가멥논은 몹시 불안해 했다. 만일에 메
넬라오스가 죽는다면 그리스 군의 사기는 떨어질 것이라고, 그리스 연합군은 귀국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트로이아 연합군은 메넬라오스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출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
문이었다.
메넬라오스는 놀란 말을 진정시키듯 아가멤논을 안심시키고는 이런 말을 했다.
"병사들에게 겁을 주면 안 됩니다. 보십시오. 화살이 깊게 박히지는 않아서 화살촉만 뽑으
면 싸우는 데 별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리스 진영의 의사 마카온이 와서 화살촉을 뽑았다. 과연 상처가 그리 깊지는 않았다.
그러나 휴전은 깨어지고 병사들은 벗었던 갑옷을 다시 입었다. 전투 준비를 알리는 뿔나
팔이 울렸다. 십 년만에 처음으로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질 모양이었다.
양쪽 군대는 일제히 가운데 있던 평원으로 진격했다. 트로이아 연합군은 각기 저희 나라
말로 갈가마귀 떼처럼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 연합군 사이에서는 죽음처럼 고요
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마침내 양쪽 군대가 격돌했다. 방패와 방패가 맞부딪쳤다. 마치 산골짝물이 콸콸 소리는
내고 흘러내리면서 무수한 바위를 굴리는 것과 비슷한 광경이 벌어졌다. 치고 받고 밀고 당
기느라고 싸움터가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올랐다. 양측이 만나면서 길게 형성되어 있던 전선
은 두 줄기의 산골짝물이 만났을 때처럼 소용돌이와 역류가 일었다. 각각의 소용돌이마다
작은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 보병들 사이에서건 전차병 사이에서건 눈에는 눈, 칼에는 칼
이었다.
한 병사가 쓰러지면 그 병사의 시체를 둘러싸고 전리품으로 갑옷을 벗기려는 적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칼을 휘두르며 함께 싸웠던 전우의 명예를 지키려는 병사 사이에 또 한 차례
의 싸움이 벌어지고는 했다. 자옥하게 인 먼지가 달라붙어 병사들의 모습이 하얗게 보였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화살과 돌멩이에 병사들은 차례로 무너져 갔다.
그 싸움터를 <우레목> 디오메데스는 흡사 전투에 휘한 사람처럼 누비고 다녔다, 그가 지
나가는 곳마다 시체가 쌓였다. 그 모습은 마치 홍수가 지나간 자리에 부러지고 찢긴 나무
등걸이 쌓이는 것과도 비슷했다.
헥토르는 뤼키아 왕 사르페돈의 도움을 받으면서 천신만고 끝에 그리스 연합군을 검은 선
단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뒤세우스와 디오메데스의 반격을 받고 다시 뒤로
밀려 나야 했다.
해가 기울고 불볕 더위가 사그러들 무렵, 치열하던 전투는 그리스 연합군에게는 유리하게,
트로이아 연합군에는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트로이아 연합군은 어느 새 자기 진영의
성문을 등지고 싸워야 할 정도로 그리스 연합군의 공격에 밀려나 있었다.
바로 그럴 즈음 트로이아에서 가장 용하다는 점쟁이가 헥토르를 찾아왔다. 점쟁이는 전사
자들 사이에 서서 헥토르에게, 지휘권을 잠시 아이네이아스에게 맡겨 두고 성 안으로 들어
가 왕비를 만나 보라고 했다.
점쟁이의 말은 이랬다.
"왕비님께 이렇게 말씀 드리십시오. 시녀를 불러 보석이 박힌 옷가지를 모두 모으게 한
뒤, 아테나 신전으로 올라가 여신의 무릎에 놓으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 연합군을
돕는 손길을 잠시 멈추고 트로이아 백성에게도 자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시라고요. 트로
이아 백성 또한 여신의 백성이 아니겠습니다?"
헥토르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이네이아스에게 지휘권을 넘겨 주고 성 안으
로 들어갔다. 어찌나 서둘러 잰 걸음으로 걸었던지 그가 등에 맨 소가죽 방패가 자꾸만 발
뒤꿈치와 뒤통수를 찍을 정도였다.
성 안으로 들어간 헥토르는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의 왕궁이 있는 성채로 달려갔다. 그의
어머니는 잔 가장자리까지 남실남실하도록 따른 포도주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가, 헥토르에
게 어서 마시고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헥토르는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어머니. 싸움터에서 오는 길이라 몸이 이렇게 지저분합니다. 저의 손은 너무
부정을 탄 손이라서 신들에게 제물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바로 싸움터로 돌아가야 할 처
지여서 지체할 여유가 없습니다."
점쟁이의 말은 전한 헥토르는 어머니를 남겨 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가 그 길로
싸움터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헬레네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해야 할 것 같
았지 때문이었다. 그는 왕궁 안뜰을 가로질러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이 파리스에게 내어 준
집으로 갔다.
파리스는 그 집의 맨 위에 있는 방에 있었다. 파리스는 무장하고 싸움터로 나갈 생각은
않고 활을 가지고 장난질을 하고 있었다. 방 한 구석에서는 헬레네가 베틀에 앉아 시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큼지막한 벽걸이를 짜고 있었다. 헬레네는 등을 보이며 앉아 있었지만 방
안 분위기는 냉랭했다.
문간에 선 채로 헥토르가 아우에게 소리쳤다.
"성벽 아래에서는 십 년 전 네가 저지른 못된 짓 때문에 수많은 부하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제 일어나거라. 무기를 가지고 하는 장난은 당장 집어치우고 갑옷을 입고 부하들과 합
류하도록 해라."
파리스는 웃었다. 사람의 분노를 일시에 가라앉게 하는 미소였다. 그는 일어나 가슴 가리
개를 집으면서 말했다.
"형님, 거칠기는 합니다만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제가 겁쟁이라서 여기에 이렇게 있
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한 짓을 생각하고 마음이 약해진 나머지 잠시 뜰을 들이고 있었
을 뿐입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다시 힘이 돌아올 것이고, 그러면 나가서 병사들과 합류할
생각입니다. 형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보십시오. 헬레네는 싸움터로 나가라는 말 한 마
디 없이 저러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갑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
헬레네가 돌아다 보지도 않고 말했다.
"신들이 조금더 자비로우셨다면, 저는 여자가 등을 떠밀어야 싸움터로 나가는 사람의 옆에
는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헬레네는 그제서야 일어나, 옆에 있는 의자 위에 놓여 있던 물들인 양털 깔개를 판판히 퍼
주고 헥토르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그러자 헥토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지금 달려가서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 합니다. 그러자면 시간이 없습니다. 저 친
구에게 빨리 무장하고 나가라고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서두르면 내가 성문을 나갈 때 함께
나갈 수 있을 겁니다. "
밖으로 나온 그는 자기 집으로 내달았다. 그러나 아내 안드로마케는 집에 없었다. 하녀의 말
에 따르면, 트로이아 군이 밀리고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를 굳히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
치 미친 사람처럼, 아기를 안은 시녀를 데리고 성문 위로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헥토르는 성문 위로 올라가 보았다. 아내는 성채 지붕 위에 있었다. 옆에는 아들 아쉬튀어낙
스를 어르는 시녀가 서 있었다.
안드로마케가 달려와 남편의 손을 잡고 울면서 싸움터로 돌아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가면 못 돌아오십니다. 저희들에게는 다시는 못 돌아오십니다."
"아마도 그럴테지. 그래서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이라오."
안드로마케는 섧디섧게 울었다.
"저에게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습니다. 오빠 일곱은 한 날 한 시에 저 암흑의 저승,
하데스의 나라로 갔습니다. 당신은 그 동안 저에게 아버지와 오빠, 사랑하는 지아비 노릇을
해주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당신마저 잃을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와 당신의
아들을 가엾게 여겨 주세요. 싸울 만큼 싸우셨으니 이젠 저희들과 함께………."
헥토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투구의 말총 장식이 싸움터 쪽으로 쏠렸다.
"그대와 함께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소. 또 하나의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오.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오. 아니고말고, 나는 트로이아가 멸망
할 때가 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이 일로 인한 내 슬픔은, 그 날이 와서 그대가
노예로 끌려가 남모르는 아낙네의 집에서 베를 짜고 낯선 우물에서 물을 나르는 것을 생각
할 때 오는 슬픔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오. 그 날이 오면 나는 아마도 죽어서 흙에 묻혀
있겠지. 그래서 그대가 끌려가면서 지르는 비명 소리도 듣지 못할 테지."
그는 손을 내밀어 어린 아들을 받아 안으려 했다. 그러나 아기는 몸을 움츠렸다. 말총 볏이
출렁거리는 구리 투구가 무서워서 그러는 것 같았다. 안드로마케는 슬픔에 젖어 있는 데도
헥토르는 웃고 있었다. 그는 투구를 벗어 바닥에다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아들 아스튀어낙스
가 웃으면서 그의 품에 안겼다. 헥토르는 아기를 한 차례 어르고 뺨에 입을 맞춘 다음 신들
에게 아들의 앞날을 부탁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런 다음에야 아들을 안드로마케에게 넘겨주
고 무엇을 했으면 좋을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 둘을 한꺼번에 껴안고는 가만히 있었다.
"울지 말아요. 시녀를 데리고 내려가 여자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 하도록 하시오. 전쟁은 남
자들의 일이라오."
헥토르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투구를 집어 쓰고 그 자리를 떠났다.
아가멤논 대왕이 보낸 사절단
파리스는 형과 합류했다. 두 사람은 험한 말을 나눈 사람들 같지 않게 나란히 성문을 나
와 싸움터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이 돌아오자 트로이아 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
졌다. 싸움터는 다시 트로이아 성벽에서 앞으로 앞으로 옮겨갔다. 그리스 군은 뒤로 밀려 조
만간 검은 선단을 세워 둔 해변가까지 이를 지경이었다.
올림포스 산정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아테나 여신의 눈에도 그 날의 참상은 눈뜨
고 못 볼 정도였다. 그래서 여신은 트로이아 성채에 있는 자기 신전 앞에 바쳐진 보석 옷
을 거들떠보지는 않았지만, 그 날의 전투는 그것으로 끝내게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아테나 여신은 헥토르로 하여금, 해가 지기 전에 한 차례의 일대일 결전을 끝으로 그 날
전투를 마무리 지을 생각을 하게 했다. 그가 생각하는 일대일 결전이란 파리스가 시작했던
메넬라오스와의 일대일 결전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벌였던 어중간하게 끝나는
그런 결전은 아니었다.
헥토르는 그리스 군을 추격하는 트로이아 군대를 불러들이고 아가멤논에게 사절을 보내어
자기 뜻을 전하게 했다. 양쪽의 군사들이 빈 평원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을 때, 그는 앞으
로 나서서 그리스 진영을 향해 자기와 싸울 사람을 내보내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메넬라오스가 그 날 두 번째 도전도 자신이 받아들이겠노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대왕
아가멤논은 허락하지 않았다. 메넬라오스가 용장 헥토르와 비교해 아무래도 상대가 되지 않
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진영에서는 다시 한 번 나무 조각을 투구
에 넣고 흔들어 제비를 뽑았다. 뽑힌 사람은 그리스 중에서 키가 가장 크고 힘도 제일 센
살라미스 사람 아이아스였다.
그 날 들어 두 번째로 평원에는 네모진 싸움터가 만들어졌다. 아이아스는 그 싸움터 안으
로 전쟁신 만큼이나 씩씩한 모습으로 헥토르를 맞으러 들어섰다. 그는 청동에다 소가죽을
일곱 겹이나 입힌 큼직한 방패를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싸우기 전에 으레 그렇게 하듯이
한 차례씩 상대를 조롱하고는 창 던질 자세를 잡았다.
헥토르가 먼저 창을 던졌다. 그의 창은 청동과 여섯 겹의 소가죽을 뚫고는 일곱 번째 소가
죽에 박혔다. 이번에는 아이아스가 창을 던졌다. 아이아스의 창은 헥토르의 방패를 뚫고 가
슴 가리개에 꽂혔다. 창이 꽂히는 순간, 헥토르가 목을 뒤튼 바람에 그 창끝도 헥토르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두 사람은 투창을 들고 어울려 서로 상대를 몰아 부쳤다.
아이아스의 창날이 헥토르의 목줄을 베었다. 헥토르의 목에서는 금방 검붉은 피가 콸콸 쏟
아졌다. 헥토르도 투창으로 찌르고 들어갔다. 그러나 아이아스가 몸을 비켜 창끝은 아이아스
가 들고 있던 방패의 장식에 스쳤을 뿐이었다.
헥토르는 투창을 버리고 가까이 있던 바위를 하나 집어들어 아이아스의 방패를 향해 던졌
다.
아이아스는 뒤로 물러서면서 그보다 더 큰 바위를 찾아들고는 있는 힘을 다해 헥토르를 향
해 던졌다. 헥토르는 바위를 막다가 방패가 부숴져 버려 그만 무릎에 힘이 빠지고 땅바닥으
로 벌렁 쓰러져 버렸다.
헥토르는 세상이 가물가물하고 빙빙 도는 것처럼 보였지만, 곧 힘을 차리고 일어나 칼자
루로 손을 가져갔다. 아이아스도 칼을 뽑아들었다. 둘은 한 덩어리처럼 붙어 서서 칼질을 주
고 받았다. 그러자 양쪽 진영에서 전령이 달려나와 두 장군에게 싸움을 중단하라는 뜻을
전했다. 두 사람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용맹을 떨친 듯한 데다가 벌써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을 집고 선 헥토르의 눈이 석양으로 붉게 물들었다. 헥토르는 트로이아 연합군 사령관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아이아스에게 말했다.
"오늘 싸움은 이 정도로 끝내자. 신들이 누구에게 승리를 안기는지, 나중에 다시 싸워서 확
인해 보기로 하자. 날이 저물고 있으니 싸움은 여기에서 일단 멈추고 밤을 맞는 것이 좋겠
다."
"당신의 말이 옳다."
아이아스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헥토르가 말을 이었다.
"그대와는 싸움터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해어지되 서로 선물
을 주고 받고 헤어지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면 뒷날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은 적으로서 싸
우다가 헤어질 때는 친구가 되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헥토르는 부하에게 손잡이가 은으로 세공된 칼 한 자루를 가져오게 해서 아이아스에게 주
었다. 아이아스는 답례로 넓직한 보라색 허리띠를 주었다. 두 사람은 헤어져 각자 자기네 진
영으로 돌아갔다.
옛 무덤과 잡목수풀 위로 밤이 내렸다.
다음 날 양측은 잠시 휴전하기로 했다.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아 연합군은 전사자들이 시
체를 모아 평온에서 화장하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 날 밤과 그 다음 날 내내 그리스 군은
자기네 진영 주위에다 말뚝을 밖고 뗏장을 켜켜이 쌓아 방어벽을 세웠다. 방어벽 앞에는 어
떤 전차도 뛰어넘을 수 없을 만큼 넓고 깊은 도랑을 파 놓았다. 그리고 양쪽에는 높게 솟은
자리를 만들어 그 곳에서 창을 던지고 활을 쏠 수 있게 했다.
해가 떠오르자 전투는 다시 시작되었다. 이리 치고 저리 몰리기를 수없이 거듭한 길고 처
절한 하루였다. 헥토르는 전차병이 둘이나 바로 자기 옆에서 차례로 전사하는 바람에 그 때
마다 새 전차병을 뽑아야 했다. 그는 새 전차병에게 거친 말의 고삐를 쥐어 주고 자신은 닥
치는 대로 적을 무찔러 나갔다.
디오메데스가 그리스 연합군을 몰아 트로이아 성벽 밑까지 트로이아 군을 밀어부치게 되었
다. 그런데 신들의 왕 제우스가 이것을 보고는 하늘의 소나기 구름이라는 소나기 구름은 다
한곳에 모았다. 땅을 울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디오메데스의 말 바로 앞으로 떨어졌
다. 섬광이라 유황 냄새에 놀란 디오메데스의 말들은 뒤로 돌아서서 아군 속으로 뛰어들면
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해 저물 녘이 되자. 그리스 군은 도랑과 방어벽 뒤로 물러갔다. 그들의 뒤를 막아 주는 것
은 검은 선단뿐이었다. 절망감 때문에 그리스 군의 사기는 형편없이 떨어져 있었다.
그 날 밤, 트로이아 연합군은 성 안으로 철수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성
밖에 말을 묶어 두고 성 안으로 사람들을 들여보내 포도주와 먹을 것을 내어오게 했다. 트
로이아 병사들은 평원에다 모닥불을 피웠다. 이렇게 피워진 모닥불의 수는 하늘의 별보다도
많은 것 같았다.
오십 명씩 한 부대를 이룬 트로이아 군은 말에게는 흰 보리를 먹이고 저희들은 먹고 마시
고 음악을 즐기기까지 하면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다음 날에는 자신들이 승리
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한편, 그리스 진영에서는 낙담한 아가메논이 지휘관들을 소집했다.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벼락의 신 제우스가 그리스 군에게서 등을 돌린 이상, 헬레네니 트로이아 정복이니
하는 생각은 다 부질없는 것이니 이젠 그만 두자고 말했다. 진영을 불사르고 밤을 틈타서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말에 디오메데스는 온 진영에 다 들릴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여기에서 더 싸울 용기가 없는 모양이니 대왕이나 고향으로 돌아가시게 합시다. 나머지
사람은 싸워서 기어이 트로이아를 장악합시다."
대왕이 포위를 풀자는 말을 한 것은 사실 그 날이 처음이었다. 연합군의 사기가 떨어질 대
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디오메데스의 이 말 한 마디는 전사들의 사기를 다시 북돋우면서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퇴각함으로써 전사한 전우들을 욕보일 생각
이 없었던 것이다. 지휘관들은 디오메데스와 뜻을 함께 하고 원하던 것을 얻을 때까지 싸우
겠다고 소리쳤다.
원로들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노인인 네스토르 장군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어떤 대가를 치루든 아킬레우스를 다시 싸움터로 돌아오게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오."
네스토르는 아가멤논 대왕이 아킬레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처녀 브리세이스를 돌려 준다고
약속하고, 황금 덩어리와 말 여러 필을 선사함으로써 전날 그를 모욕했던 것을 사과해야 한
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킬레우스가 돌아와 우리와 함께 싸운다는 소문이 적에 귀에 들어가면, 그들은 아킬레우
스가 전차에 타기도 전에 사기를 잃고 말 것이오. 그러면 우리는 적을 몰고 가 예전처럼 성
벽 안에 묶어 둘 수 있을 것이오. 아니, 그보다는 농부가 수수를 베듯 아주 요절을 내어 다
시는 성문 밖으로는 나서지 못하게 하면 더욱 좋겠지요."
아가멤논이 검은 수염을 뽑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 역시 네스토르
의 지혜로운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아킬레우스와는 가까운 친구 사이인 오뒤세우스와 아이사스, 그리고 아킬레우스가
테살리아 산의 케이론에게 맡겨지기 전까지 그를 가르친 적이 있는 스승 포에니쿠스는 그리
스 진영의 맨 끝 해변으로 끌어올려져 있던 아킬레우스의 검은 선단으로 찾아갔다.
아킬레우스는 지붕을 뗏장으로 덮은 막사 문간에 앉아 가로대가 은으로 만들어진 하프를
켜고 있었다. 파트로클로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투구를 닦으면서 다소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그 하프 소리를 듣고 있었다.
다가오는 전우들의 모습을 본 아킬레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파트로클로스에
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내어오게 했다. 잠시 후, 오래간만에 만난 전우들은 아뮤 일도 없었
던 것처럼 먹고 마셨다.
술자리가 끝나자 나머지 사람들을 대신해서 오뒤세우스가 말했다.
"우리가 온 까닭은 밝히겠다. 대와 아가멤논이 전에 자네를 모욕했던 일에 대해 사과의 뜻
을 전해 달라기에 이렇게 오게 되었다네. 대왕은 처녀 브리세이스를 돌려주고 자네 명예를
되찾는 데 필요한 황금과 여러 필의 말, 노예를 선물로 주겠다고 했네. 그리고 귀국하면 넑
은 땅을 주고 공주와 혼인시키겠다는 약속까지 했지. 이제 자네는 화를 풀고 싸움터로 돌아
와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네."
옆에 서 있던 파트로클로스의 가슴은 기대로 부풀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어서 그 자신조차도 삭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뒤세우스의 말이 끝나자 아킬레우스가 말했다.
"대왕의 약속 한번 번드르르하군. 하지만 그가 왜 그런 약속을 했겠는가? 하나뿐인 귀중한
내 목숨을 저 싸움터에 내 맡기라고 그러는 것일 테지. 그런 대왕을 따를 바에는 아침 물길
에 배를 몰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네.
그는 화가 났던지 화덕 앞에 놓인 땔감 하나를 걷어 차고는 말을 이었다.
"대왕의 선물 따위는 필요 없어. 아내도 내가 골라서 얻겠네."
그 때 포에니쿠스가 일어섰다. 노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장군이 어릴 당시 나는 장군에게. 분노를 잘 다스리고 용서할 때가 되면 용서할 줄도 알아
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 했습니다. 지금까지 장군에게 쏟아진 비난이 근거 없는 것이었던
만큼.
장군이 화나 있는 건 장군의 명예에 비춰볼 때 당연한 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대왕은 지
금 그것을 수습하려고, 그래서 장군의 절친한 친구들을 보내어 이렇게 용서를 빌고 있는 것
입니다. 이제 분을 삭이십시오. 장군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 하는 전우들에게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아이아스도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게다 한 여자 생긴 일인데 대왕은 그 여자를 장군에게 돌려보내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요지부동이었다.
"아이아스. 오뒤세우스. 그리고 포에니쿠스. 나의 친구들이여. 아가멤논에게로 돌아가 내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나는 헥토르가 트로이아 군을 몰아 여기에 있는 나의 검은
선단을 공격할 때까지는 싸우지 않을 거라고 말이오. 그 때가 돼서야 나는 창을 들어 핵토
르에게 창이라는 것이 어떻게 써야 하는 물건인지를 가르쳐 줄 것이오."
이 말 한 마디를 듣고서 세 명은 사절은 대왕 아가멤논의 막사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레소스 왕의 백마를 훔쳐 오다
그 날 밤 그리스 연합군의 지휘관들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가멤논은 숫제 뜬 눈
이었다. 마음이 뒤숭숭해서 막사에서 통 잠을 이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침대에 깔려
있던 사자 가죽 이불을 걷어 어깨에 두르고는 현명한 장군 네스토르를 찾아나섰다.
그때 멜넬라오스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우연히 검은 선단 뒤에서 만나게 되었다. 트로이아 병사들이 평원 위에 피우고
있는 무수한 모닥불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마침내 메넬라오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처럼 잠 못 이루는 젊은 병사 하나를 은밀히 트로이아 진영으로 보내. 저자들이 모닥
불을 둘러싸고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듣게 하면 좋을 듯 합니다. 그러면 내일 우리가 대비할
방책을 세우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마침 대왕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정말 좋은 생각이다. 어디 한번 해보기로 하지.하지만 먼저 원로 회의에 안걸을 붙여 보아
야 한다."
두 사람은 네스토르를 부르고 원로들을 소집했다. 모두들 갑옷 입을 여유가 없어서 이불 삼
아 쓰고 왔던 짐승의 털가죽을 두르고 모여들었다.
대왕 일행은 우선 선단 방어선을 지키는 젊은 병사들이 졸지 않고 제대로 지키고 dLT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도량을 건너 트로이아 군의 모닥불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가서 그
계획에 대해 의논했다.
네스토르가 말했다.
"어둠을 이용해 젊은 병사 하나를 트로이아 진영으로 들여보내 우리가 심문할 만한 적 병사
하나를 잡아 오게 하든지. 모닥불 주위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엿듣고 오게 하든지 합시다. 그
러면 아침에 저들이 우리를 공격할 것인지. 아니면 성으로 들어갈 것인지를 알아낼 수 있고.
따라서 대비책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
노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디오메데스가 벌떡일어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하지만 하나가 아니라 둘이 가야합니다. 함께 갈 사람을 제가 뽑을 수 있
다면......."
"그럼 뽑으시오."
대왕과 장군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오뒤세우스를 선택했다.
오뒤세우스가 천천히 일어서면서 말했다.
"한밤중을 넘겼으니 가려면 빨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은 젊은 병사들로부터 무기와 가죽투구를 빌었다. 청동투구는 불빛을 받으면 번쩍거
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사냥감을 찾으러 나서는 두 마리 사자처럼 어둠 속으로,
그리고 평원에 흩어진 시체사이로 묻어 들어갔다.
한편.같은 시각에 트로이아 진영에서도 헥토르가 지휘관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은밀하게 그
리스 진영으로 파견할 염탐꾼을 뽑고 있었다.헥토르는 염탐꾼을 보내어 그리스 군의 보초
근무상태를 알아보고. 병사들의 사기가 죽어있는 것이 확인되면 새벽에 기습을 감행할 생각
이었다.그는 누구든 그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면 적진에 있는 말 중에서 가장 좋은 말 두 마
리를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트로이아 진영에는 돌론이라고 하는 생김새도 보잘 것 없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젊은이
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발은 어느 누구보다 빨랐다. 그가 이 세상에서 탐내는 것은 오로지
혈통 좋은 말뿐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말했다.
"헥토르 장군, 저에게 아킬레우스의 전차를 끄는 말 두 필을 주겠습니까? 그러면 지금당장
그리스군의 진영, 아가멤논의 막사로 숨어들어 장군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조리 알아 가지고
오겠습니다."
돌론은 활을 들고 늑대가죽을 어깨에 걸치고는 바닷가에 있는 그리스 진영을 향해 발소리를
죽이고 내달았다.
그러나 디오메데스와 오뒤세우스는 트로이아 진영으로 가는 도중에 저쪽에서 오는 돌론을
발견했다. 그들은 시체사이에 숨어 돌론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사냥개가 토끼를
좇듯이 뒤쫓아갔다. 돌론은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늧췄다.그는 두 명의 장
군의 뒤에 바싹 달라붙은 채 따라오고 있어서 그들을 따돌릴 수도 자기 진영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방어벽 바로 앞에서 돌론을 덮치고는 곧 일으켜 세워다. 멱살을 잡힌 돌론은 이
를 딱딱 부딪치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부자인 자기 아버지가 엄청
난 액수의 몸값을 지불할 것인즉 제발 자기의 죽이지 말라고 애원하였다.
"몸값 이야기를 하기 전에, 너의 진영에서는 멀고 우리 진영쪽으로는 너무 가까운 이 곳에
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그것부터 말하라."
오뒤세우스가 물었다.
"헥토르 장군 께서 그리스 진영을 염탐해 오면 나중에 아킬레우스의 전차를 끄는 말 두 필
을 주겠다고 약속해서 오게 돼었습니다.
돌론이 대답했다.
오뒤세우스가 그 말을 듣고 어둠 속에서 코웃음을 쳤다.
"꿈 한번 큰 녀석이군. 아킬레우스의 말은 인간 세상의 말이 아니다. 더구나 아킬레우스나
아킬레우스의 명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 몰 수가 없는 말이다. 어쨌든 잘 만났다. 내가 묻는
대로 대답해라. 트로이아 군이 평원에서 야영하고 있는 것은 새벽에 우리를 기습하기 위함
인가. 아니면 지금은 꽤 잘 싸우고 있지만 여차하면 성 안으로 도망치기 위함인가? 트리오
아 군의 초소는 어디어디에 있는가? 오늘 밤 헥토르 는 어디에서 자며 그의 전차를 끄는 말
은 어디에 있느냐?
문득 오뒤세우스의 머리속에 트로이아 진영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말을 훔치는 것도 재미있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유명한 도둑이었던 할아버지의 피가 오뒤세우스의 핏줄에도 흐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들론은 다 말해야 살려줄 것 같아서 오뒤세우스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헥토르 장군은 주무시는 것이 아니고 지ㄹ금 원로들과 회의중 이십니다. 트로이아 병사들
은 성안에 있는 가족들을 염려해 졸지 않고 잘 지키고 있습니다만. 연합군 중에서도 다른
나라에서 온 병사들은 가족이 안전한 곳에 있기 때문인지 파수 보는데 별로 신경을 쓰지 않
습니다.
새벽에 기습 공격 여부는 제가 돌아가 그 동안 염탐한 것을 보고하는데 달려있습니다. 그리
고 장군께서 말을 빼앗고 싶은 모양이신데 트로이아 진영에서 가장 값지고 혈통 좋은 말은
오늘 막 도착해서 연합군에 합류한 트라키아 왕 레서스의 막사에 있습니다. 이 막사는 우
리 진영의 동쪽 끝에 있습니다. 백조처럼 하얗고 덩치가 크고 바람같이 빠른 이 두 마리의
말은, 신들에게나 어울리는 금은으로 장식한 레소스 왕의 전차를 끕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돌론은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디오메데스는
매정하게 말했다.
"우리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 그리스 진영을 염탐하려고?"
디오메데스가 칼을 뽑아 드는 순간 들론의 머리가 어깨 위에서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
다.
"죽어 마땅하지. 다음 목표는 트라키아 왕의 말이오."
오뒤세우스가 말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염탐꾼의 시체를 갈대와 나뭇가지로 덮고, 그의 활과 담비 가죽 모자는
근처 나뭇가지에다 걸어 두었다. 돌아올 때 길을 찾는 표적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다시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레소스 왕의 막사에 이르렀다. 병사들은 파수도 세우지 않은 채 골아
떨어져 있었다. 레소스 왕은 한가운데 놓인 전차 옆에서 자고 있고 주위에는 열두 경호병이
잠들어 있었다.
디오메데스는 순식간에 소리도 없이 레소스 왕과 열두 경호병을 죽였다. 오뒤세우스는 시
체를 옆으로 치우고 말을 몰아낼 길을 열었다. 아직 싸움터에 나가지 못한 말이라 혹시 시
체를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를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을 가죽끈을 자르고 상아색 전차로부터 말을 풀어 내었다. 전차도 훌륭하긴 했지
만 그것까지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날이 희붐해지면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낌새가 느껴졌
기 때문이었다. 하얀 말잔등에 훌쩍 뛰어오른 두 장군은 말을 몰아 트라키아의 죽은 병사들
과 잠든 병사들, 반쯤 잠에서 깨어난 병사들 사이를 지나 그리스 진영으로 달렸다. 그들은
달려가는 길에 나뭇가지에 걸어 둔 돌론 의 담비 가죽 모자와 무기까지도 두루 챙겼다.
두 장군은 수많은 왕들과 지휘관들부터 환영을 받았다. 두 사람의 그 동안의 경위를 보고
하자 모두들 함성을 질렀다. 레소스 왕이 죽었으니 트라키아 군이 귀국을 서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전투에 지치지 않은 수천 트라키아 운의 합류를 사전에
막은 셈이었다.
디오메데스는 자기가 타고 온 말에게 꿀에 버무린 밀을 먹였다. 오뒤세우스는 돌론의 피
묻은 모자와 무기를 자기 배의 고물에다 내려놓다 아테나 여신에게 제물 올릴 준비를 했다.
제사가 끝나자 두 장군은 바다로 뛰어들어 밤새 설쳐대느라고 팔과 목과 다리에 묻은 피
와 땀을 말끔하게 씻었다. 바닷물에 씻은 다음에는 노예들이 데워 놓은 물에 다시 한번 몸
을 깨끗이 닦아 내고는 음식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이제 서서히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붉은 소나기
분명히 날이 샜는데도 그리스 진영의 하늘은 어둡기만 했다. 제우스가 하늘의 검은 구름이
라는 검은 구름은 모조리 모아 그리스 진영의 하늘에다 퍼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진영
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는 트로이아 진영의 하늘은 화창했고 햇살도 강렬했다. 갑자기
그리스 진영을 뒤덮고 있는 구름으로부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피처럼 붉은 비였다.
그러나 붉은 비가 불길한 조짐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리스 진영의 사기는 전날보다 훨씬
높았다. 디오메데스와 오뒤세우스가 그리스 군의 사기를 드높여 놓은 셈이었다.
아가멤논 대왕은 밝은 얼굴로 갑옷을 차려 있고 나와, 앞에는 보병을 배치하고 그 뒤에는
전차 부대를 배치하여 보병을 지원하게 했다. 그리고 전차 부대 뒤로는 창 부대와 활 부대,
그리고 투석기 부대를 배치했다.
이윽고 트로이아 군이 위에서 그리스 군을 덮쳐 누르듯 공격해 내려왔다. 양 진영의 군대
는 격돌하면서 낫으로 수수를 베듯 그렇게 적을 베어나갔다. 오래지 않아 트로이아의 용감
한 병사들의 투구가 그리스 병사들 사이에서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리스 군이 트로이아
진영으로 깊숙이 들어가 찌르고 베기 시작한 것이었다. 머리 위로는 화살이 쉭쉭 소리를 내
면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목동들이 염소 다리를 한 개구쟁이 신인 판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유난히 조심하는 시
각, 모두가 졸음을 느끼는 정오가 되었다. 아가멤논은 결사대를 이끌고 무섭게 밀고 들어갔
다. 그는 이 공격에서 수많은 적군의 지휘관들을 베었는데 헥토르의 두 아우도 거기에 섞여
있었다. 보병은 보병을 베고, 전차병은 전차병을 찌르는 무서운 공격이었다. 그리스 결사대
가 트로이아 부대를 치고 들어가는 광경은, 마치 바람 부는 날 불씨가 숲에 떨어져 이 나무
저 나무를 차례로 태워나가는 것과도 같았다. 전차 끄는 말들은 전차병을 잃은 다 부서진
전차를 끌고 좌충우돌하면서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짓밟고 다녔다.
그리스 군의 결사적인 공격에 트로이아 군은 성문 바로 앞까지 밀려났다. 트로이아 군은
거기에서 헥토르의 명에 따라 병사들을 점검하고 허물어진 대열을 다시 정비했다. 그리고
잠시 숨을 돌리면서 그리스 군의 다음 공격에 맞설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리스군의 공격은 성문앞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아가멤논이 팔에 창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상처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는 전차를 타고 검은 선단이 집결해 있는 본대로 돌
아가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광경을 내려다 본 헥토르는, 사자를 공격하는 사냥개 떼를 향해 소리지르는 사냥꾼처럼
고함을 지르면서 선두에서 부하들을 몰고 공격해 내려왔다. 그리스군은 물보라가 치듯이 뿔
뿔이 흩어졌다, 트로이아 군은 단숨에 그리스 군을 검은 선단 있는 곳까지 밀어부칠 기세였
다. 그러나 오뒤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도중에서 그들을 막고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고 있
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던진 창에 트로이아 지휘관이 넷이나 말에서 떨어졌다.
그리스 군은 다시 힘을 얻고 트로이아 군을 밀고 나왔다. 헥토르가 다시 전열을 정비하려는
찰라, 디오메데스가 칼로 그의 투구를 내리쳤다. 디오메데스의 칼이 헥토르의 청동 투구를
뚫은 것은 아니었지만 헥토르는 전차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부하들이 방패로 헥토르를 감쌌다. 헥토르는 곧 일어났다. 그의 눈이 다시 번쩍거리기 시작
해따. 그는 다시 자기 전차에 올랐다. 전차병이 말의 잔등에 채찍질을 했다. 헥토르의 전차
는 그리스 공격 부대의 왼쪽 날개를 겨냥하고 나아갔다.
디오메데스는 헥토르를 공격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늘 그렇듯이 싸
움터 언저리에서만 살살 맴돌던 파리스가 디오메데스를 보고는 활에다 살을 먹여 그를 향해
쏘았다. 화살은 디오메데스의 발을 꿰뚫고 땅바닥에 꽂혔다. 디오메데스가 화살을 뽑아 내는
순간 오뒤세우스가 그 큰 방패로 디오메데스를 가려 주었다. 디오메데스는 전차에 실려 검
은 선단이 있는 해변의 본진으로 후송되었다.
싸움터 한복판에서 싸우는 그리스 장군은 오뒤세우스뿐이었다. 트로이아 군은 사방에서 그
를 협공했다. 오뒤세우스는 한 곳에 우뚝 서서, 궁지에 몰린 멧돼지가 사냥개를 뿌리쳐 내듯
이 그렇게 트로이아 군의 칼날을 막아 내었다.
그러나 한 트로이아 군의 창날이 그의 가슴 가리개를 뚫고는 갈비뼈 사이에 박혔다. 오뒤
세우스는 도망치는 그 창병을 돌아다 보고서 들고 있던 창을 던졌다. 창은 그 창병의 양 어
깨 한가운데 꽂혔고 창병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오뒤세우스는 그 때까지도 옆구리에 꽂힌
채 덜렁거리던 창을 뽑아 내고 나서, 있는 힘을 다해 세 차례나 고함을 질러 그리스 전우들
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아이아스와 메넬라오스가 그 소리를 듣고서 트로이아 군을 헤치고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메넬라오스가 전차에다 그를 싣고 싸움터를 빠져 나갈 동안 큰 방패를 든 아이아스가 오뒤
세우스의 자리를 채웠다.
그 때 헥토르가 그리스 군의 왼쪽 날개에서 되돌아 나왔다. 그의 주위에서 함성이 일었다.
파리스가 또 하나의 화살을 날렸다. 이번에는 마카온이 그 화살에 맞았다. 부상병을 치료하
던 의사 마카온의 부상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전차에 실려 네스토르의 막사로 옮
겨졌다.
목숨을 잃지 않은 대부분의 그리스 장군들은 부상을 당하고 싸움터를 떠나 있었다. 그런데
트로이아 군의 창병들이 다시 몰려왔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동안 아킬레우스는, 자기 배의 위로 불쑥 솟은 고물 위에 선 채
싸움의 진행 과정을 살펴볼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카온이 부상당해 네스토르의
전차에 실려갈 때는 달랐다. 그는 친구인 파트로클로스를 불러 마카온의 상태가 어떤지 살
펴보고 오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카온을 잃는다면 부상병 치료는 누가 한단 말인가? 큰일이군."
파트로클로스가 달려갔다. 마카온은 네스토르의 막사에서 그의 여종인 헤카메데의 보살핌
을 받고 있었다. 헤카메데는 마카온이 원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포도주에다 치즈를 풀어 먹
이고 있었고, 또 하나의 시중드는 사람은 화살을 뽑아 내고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마침
네스토르가 젊은 전사 시절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뛰어들고 싶었
지만 파트로클로스는 노장군의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문지방에 선 채로 애를 태웠다.
노장군의 이야기가 끝나자 파트로클로스는 마카온의 용태를 물었다. 마카온 자신이, 죽지는
않겠지만 부상병을 며칠동안 돌보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파트로클로스가 돌아서서 나오려는데 네스트로가 그를 불러 세우고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
을 만한 말을 했다.
"자네 나라 사령관 아킬레우스에게 가서 전하게. 아직까지도 화가 덜 풀려 싸움터에 나올
수 없다면 다른 장군에게 지휘를 맡겨서라도 뮈르미돈 군사들을 내보내라고 말일세. 자네
는 아켈레우스와 키가 비슷하니까 만일 자네가 그의 갑옷을 입고 나서면 트로이아 군은 아
킬레우스가 나온 줄 알고 혼비백산할 것이네. 누가 감히 아킬레우스와 대적하려고 하겠는
가."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가 있는 곳으로 내달았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그의 걸음을 지
체하게 했다. 지휘관 중의 하나인 에우뤼폴로스였다. 에우뤼폴로스는 장딴지에 화살을 맞고
는 절뚝거리며 자기 막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창을 내 어깨에다 걸고 거기 매달리게."
파트로클로스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를 막사까지 데려다 주었다. 친구이기도 한 에우뤼
폴로스가 함께 있어 달라고 애원하는 바람에, 파트로클로스는 단검으로 화살촉을 파내고 상
처를 씻어 준 다음 통증을 가라앉히는 고약을 붙여 주었다.
그리스 선단을 둘러싼 싸움
헥토르는 최전선 부대에게 그리스 군 방어선 앞의 도랑을 건너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전차
끄는 말들이 도랑 앞에서 그 너비와 깊이를 가늠해 보고는 무서운지 힝힝힝 울었다. 도랑을
넓고 깊기도 하려니와 바닥에는 끝이 뾰족하게 깎인 말뚝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결국 트로이아 전차병들은 전차는 건너편에다 두고 다섯 명씩 짝을 지어 지휘자의 뒤를 따
라 도랑을 뛰어넘었다. 헥토르와 파리스, 헬레노스와 아이네이아스, 그리고 사르페돈을 앞세
운 트로이아 연합군은 밀집 대형을 이루었다. 그런 다음 수많은 소가죽 방패로 방벽을 만들
어 세우고 그리스의 방어벽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리스 전차들이 드나드는 방어벽의 문은
열려 있었다. 말하자면 그 문은 싸움터에서 후퇴한 병사들을 위한 퇴각로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스 병사들은 서로 엉킨 채 문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트로이아 군에서 고집세기로 이름난 아시오스가 그 문을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정면
을 향해 밤색말을 몰아갔다. 그러나 먼 북쪽 나라에서 온 두 라피타이 창병이 문 앞에 버티
고 서 있었다. 문 양쪽의 방어벽 위에서 돌덩이와 창을 던지는 전우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
을 뿐이었다. 아시오스의 공격은 두 창병의 창끝에서 좌절됐다. 문 앞은 여전히 퇴각하는 병
사와 도망치는 병사들로 어지러웠다.
같은 방어벽의 다른 문 앞에서는 선봉을 맡고 있던 헥토르의 부대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제우스의 새인 독수리가 그들 머리 위를 날다가 부대 한복판에다 살아 있는 핏빛 뱀 한 마
리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나쁜 징조로 받아들였다.
공격을 다음 날로 미루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헥토르는 그들에게 말했다.
"가장 좋은 징조가 무엇인지 말해 주랴? 그것은 바로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트로이아 군의 사기는 이 말 한 마디로 되살아났다.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헥토르의 뒤
를 따랐다.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싸움판에서는 시르페돈이 친구이자 전우인 글라코스외 함께 산사자
처럼 방어벽으로 달려갔다. 트로이아 연합군은 물밀 듯이 그 뒤를 좇았다. 그들은 마침내 방
호벽에 구멍을 뚫었다. 더구나 글라코스가 팔에 화살을 맞는 바람에 화살촉을 뽑을 때까지
퇴각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어벽의 나무에는 무수한 핏자국이 찍혔다. 어느 지점이 되었
든 방어벽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나 고함소리와 창칼 부딪치는 소리로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
었다.
헥토르 부대는 있는 힘을 다해 나무 문짝을 부수고 방어벽을 허물고자 했다. 그러나 방어
벽 안에는 그리스 군이 방패로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방어벽이 있었다. 방어벽 위에서는 화
살과 창이 어지럽게 트로이아 군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헥토르는 커다란 바위(두 사
람이 힘을 합해도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바위였지만 제우스 신은 그 바위를 양털보다
가볍게 만들었다)를 번쩍 쳐부서지면서 목재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헥토르는 부하들에게 따라오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자신이 먼저 뛰어들었다. 트로이아 귄의
표효는 둑 터진 산골짝의 물소리를 방불케 했다. 그들은 문을 지나 양쪽에 서 있는 방어용
말뚝 울타리로 접근했다. 밀물 간은 트로이아 군의 굥격에 그리스 군은 뒤쪽에 정박해 있던
배 안으로 들어갔다.
트로이아 군이 그리스 전영 한복판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확인한 제우스 신은, 검은 겔리
온 선고물에서 벌어지는 싸움판에서 눈길을 거두고 다른 일을 생각했다.
그러나 바다의 신이자 지진의 신인 푸른 머리카락의 포세이돈은 그리스 군이 처한 절망적
인 상황을 모른 체하지 않았다. 그는 수레에다 바람같이 빠른 말을 매고는 바다 밑에 있는
궁전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돌고래가 뱃머리와 나란히 달리듯 바다의 괴수들이 그와 나란
히 달려나왔다. 마치 해변으로 밀려드는 흰 파도처럼 포세이돈 일행이 물 속에서 솟은 곳은
그리스 진영의 바로 옆이었다.
포세이돈은 지상으로 솟구치자마자 말과 마차는 그 자리에 두고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모습을 감춘 채로 트로이아 군에 밀리고 또 밀리는 그리스 군 사이로 들어가, 그들
의 사기를 북돋우면서 한 발도 물러나지 말라고 응원했다. 누구의 격려를 받고 있는지 모르
면서도 이로써 힘을 얻은 그리스 군은 철벽 같은 저항을 했다. 포세이돈 신의 힘이 그들에
게 흘러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트로이아 군을 밖으로 밀어 내고 검은 선단을 둘
러샀다.
밀고 밀리는 어지러운 싸움의 와중에서 헥토르와 아이아스가 만났다. 아이아스는 배의 용
골판 굄돌 구실을 하는 바위를 집어 번쩍 쳐들고는 헥토르에게 던졌다. 바위는 방패를 들고
있는 팔 위와 투구 끈 바로 밑을 때렸다. 헥토르는 백정의 도끼에 맞은 황소처럼 무너져 내
렸다. 들고 있던 방패와 창이 쓰러진 그의 몸 위로 떨어졌다.
트로이아 군이 재빨리 그를 둘러쌌다. 군사들이 좌우 양쪽과 뒤쪽을 방패로 가려 길을 내
자 몇몇 병사들이 그를 싸움터 밖으로 부축해 내었다. 용맹스러운 장수 헥토르가 죽은 듯이
끌려나가는 것을 본 그리스 군(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포세이돈 신은 그 때까지도 그들 속
에 있었다)은 바다위로 휘몰아치는 폭풍 소리보다 더 큰 함성을 지르면서 트로이아 군을 방
어벽 너머로, 도랑 너머로, 이윽고 평원으로 밀어 내었다.
제우스 신이 다시 토로이아를 내려다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제우스는 평원으로 밀리는
트로이아 군과 병사들의 부축을 받고 크산토스 강가에 이른 헥토르가 피를 토하고 있는 걸
보게 되었다. 그는 그것이 자기 아우 포세이돈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포세
이돈이라면 제우스에게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힘으로 보아도 결코 제우스에게 뒤지지 않
는 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제우스는 태양의 신이자 활의 신이며 인류에게 공포를 불어넣은 신 아폴론을 불러 내었
다. 그리고는 지상으로 내려가 헥토르에게 새로운 생명과 헥토르 자신도 일찍이 보도 듣도
못한 정도의 힘을 불어넣어 주고 오라고 말했다.
아폴론은 태양의 눈으로부터 새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지상으로 날아내려갔다. 헥토르는
부하들로부터 찬물 찜질을 받고 있었다. 아폴론은 헥토르에게 새로운 생명과 신성이 깃든
힘을 불어 넣어 주어다. 그러자 헥토르는 벌떡 일어나서 갑옷을 찾아 입고는 다시 싸움터로
되돌아갔다.
그리스 병사들의 눈에 폭풍우같이 밀고 들어오는 헥토르의 모습이 보였다. 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을 본 그ㄹ리스 병사들은 혼비백산했다. 무수한 그리스 병사들이
선단 쪽으로 후퇴햇지만, 아이아스와 최전선의 투사들은 인간 방패를 만들고 헥토르를 대적
했다. 그러나 헥토르는 트로이아 전차 부대를 이끌고 천둥치는 소리를 내면서 달려와, 던져
진 창이 가죽 방패를 뚫듯이 갓 만들어진 방패를 돌파했다. 최전선이 무너지면서 그리스 병
사들이 풍비박산했다. 평원과 도랑과 방어벽 문 앞에서는 무수한 인간이 무수한 인간을 죽
이는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다.
트로이아 병사들이 시체에서 갑옷을 벗기려 하자 헥토르가 외쳤다.
"지금은 그까짓 전쟁 쓰레기를 챙길 때가 아니다. 선단으로 공격해 들어가라. 뒤에서 얼쩡
대는 놈이 있으면 죽여서 개들에게 던져 주리라!"
헥토르는 채찍을 어깨 위로 높이 쳐들었다가 말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그 뒤를 따르는 전
차들이 제우스 신의 벼락 같은 소리를 내면서 지축을 흔들었다. 병사들이 내던지는 창은 흡
사 제우스 신이 던지는 번개 같았다.
트로이아 군은 도랑 앞으로 전차를 몰고 갔다. 이번에는 말들고 도랑 바닥에 끝이 뾰족하
게 깎인 말뚝이 촘촘히 박혀 있었는데도 흠칫거리지 않았다. 전차가 도랑을 뛰어넘는 모습
은 마치 가라앉아가는 배 위를 뛰어넘는 파도 같았다. 전차는 바닥에 걸리적거리는 시체 더
미는 물론이고 막사의 똇장 지붕과 울타리까지 뛰어넘고는, 앞을 가로막던 그리스 군을 빗
자루로 쓸어 버리듯이 내몰며 나갔다. 창칼과 도끼를 휘두르면서 그들은 선단 속으로 진입
했다. 그리스 군은 겔리온 선 갑판에 비둘기 무리처럼 오구구 모여 해전 때나 쓰는 긴 갈고
리를 들고 트로이아 군에 대항하려고 했다.
가장 격렬하고 중요한 전투가 계속될 동안, 신으로부터 신통한 힘을 나누어 받은 헥토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싸움터에 있었다. 싸움으로 인한 광기로 그의 눈은 벌겋게 이글거리고
있었고 입기에는 양털 같은 게거품이 묻어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영웅의 광휘가 횃불처
럼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는 전차를 달리면서도 끊임없이 고함을 질렀는데, 그 소리는 온 싸
움터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불을 질러라! 검은 선단에 불을 질러라!"
병사들은 먹을 것을 조리하던 모닥불 불씨로 횃불을 만들어 들고는, 말꼬리 같은 연기가
나는 불꽃을 머리 위로 흔들면서 헥토르의 뒤를 따랐다. 죽은 자들이 켜를 이루며 두껍게
쌓여 있었다. 산 자들은 헥토르의 지휘 아래 시체의 산을 딛고 배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갑
판에서는 그리스 군이 필사적으로 트로이아 군의 승산을 저지했다
트로이아 군이 맨 앞에 있는 겔리온 선을 지나 물밀듯이 밀려들자 아이아스가 부하들에게
소리 쳤다.
"힘을 내라. 힘을 내 헥토르를 막아라. 저놈이 우리 선단 사이를 누비면서 하는 짓거리.
그것은 춤이 아니다."
아이아스는 이갑판 저갑판으로 뛰어다니면서 키 큰 사람의 서너 길은 족히 되어 보이는 갈
고리로 적군을 찍었다. 그 모습은 흡사 네마리의 말을 몰면서 이 말잔등에서 저 말잔등으로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기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연기와 불꽃이 솟구쳐 오르면서 소금물에 절여져 있던 배의 널빤지가 우지직우지직 소리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도 헥토르의 전령은 계속해서 외쳐대었다.
"불을 질러라! 검은 선단에다 불을 질러라!"
파트로클로스가 싸움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따라서 그리스 지영 중에서도 가장 후미진
에우뤼폴로스의 막사를 나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파트로클로스가 보기에 선단의 반은 불
길에 휩싸인 것 같았다. 전투는 선단을 중심으로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킬레우스의 빛나는 황금 갑옷
쿵쾅거리며 무너져내리는 듯한 가슴을 안고 파스로클로스는 뮈르미돈 족의 막사로 내달았
다.싸움터와는 달리 그 곳은 여전히 평온했다. 배 위에서는 아킬레우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
었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맞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는 거요. 파트로클로스? 나들이하는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우는
계집아이처럼 우는 거요? 장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소? 아니면 내 아버지라도 돌아가셨소?
아니면 어리석은 허물의 죄값으로 죽어가는 그리스 군이 불쌍해서 우는 거요?"
"그리스 군이 죽어가는 것은 저희들이 지은 허물의 죄값 때문이 아닙니다. 단 한 사람의 어
리석음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한 사람. 아가멤논은 이미 사령관께 그
허물을 바로잡을 의향을 밝힌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령관께서는 거절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파트로클로스의 머리 속에 문득 노장군 네스토르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
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만일에 사령관께서 우리가 모르는 이유 때문에 싸움터로 나갈 수가 없다면 저에게 사령관
의 갑옷과 전차와 말을 빌려주고 뮈르믿돈 군의 지휘를 맡겨 주십시오. 트로이아 군은 사령
관께서 몸소 나온 줄로 알고 기가 죽을 것입니다. 그려면 그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한 2천
의 우리 뮈르미돈 군이 이 싸움의 전세를 뒤집어 놓을 것입니다."
아킬레우스는 전날 헥토르가 칼과 햇불을 들고 자신의 배있는 곳까지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
한 결코 싸움터로 나서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을 떠올리자 목이 메어 왔다. 그러나 파트로클
로스의 말을 좇으면 맹세를 깨뜨리지 않고도 결과적으로는 싸움터에 합류한 셈이 될 것 같
았다.
"내 갑옷을 입고 내 말을 몰고 가시오. 나인 것처럼 꾸미고 뮈르미돈 부대를 지휘하시오. 우
리배를 다 태우기 전에, 우리의 귀향 길을 끊기 전에 트로이아 군을 쳐부수도록 하시오. 그
러나 이 선단에서 적을 몰아내거든 뒤쫓지 말고 여기 있는 내게로 돌아오시오."
파토클로스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아킬레우스가 병사들을 소집할 동안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었다. 아킬레우
스와 아가멤논이 불화를 빚기 전부터 트로이아 군이 두렵게 여긴 것은 갑옷이었다.아킬레우
스의 전차병 아우토메돈은 서풍의 신의 핏줄을 타고나 죽음을 모르는 두 마리의 말 크산토
스와 발리우스, 그리고 때가 되면 죽을 운명을 타고 태어난 말 페다소스의 목에 멍에를 채
우고는 전차 앞에 메었다. 페다소스는 발이 빠르고 용기가 있으며 특히 옆걸음질에 능한 말
이었다. 싸우고 싶어서 이리 떼처럼 눈에 불을 켜고 있던 뮈르미돈 병사들은, 그 동안 아킬
레우스와 아가멤논의 불화로 싸움터에서 줄창 돌림쟁이가 되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대열을
짓고 출전을 기다렸다.
이윽고 파트로클로스가 전차에 올랐다. 병사들은 방패의 숲에 싸인 채 그 전차 뒤에 바싹
붙어 트로이아 군을 향해 나아갔다. 뮈르미돈 군이 트로이아 군의 옆구리를 공격하는 순간,
트로이아 군은 천둥치는 소리를 내며 앞서나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과 말과 전차를 보고는
그만 기가 꺽이고 말았다.
그러나 아킬레우스 자신은 그싸움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막사 안에서 고풍스런 금술
잔에 핏빛 포도주를 따르고 그것을 문턱 앞의 마른 땅에 부으면서 제우스 신에게 기도했다.
"제우스 신이시여 저 사람에게 영광을 베푸소서. 힘을 주소서. 저 사람이 선단을 유린하는
적을 쫓아버리고 돌아오게 하시되 다친 데 없이 예 친구인 저에게 돌아오게 하소서."
제우스는 그 기도를 듣고는 절반은 들어 주고 절반은 들어 주지 않았다.
파트로클로스는 뮈르마돈 병사들에게 따라오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선단을 포위하고 있는
트로이아 군사들에게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는가 하면 횃불 든 적병을 덮치기도
하였다.
횃불은 적병의 손 안에서 일렁거리다 주인이 목숨을 잃는 순간 땅바닥에 떨어졌다 꺼져 버
리고는 했다
순식간에 선단 주위의 적이 격퇴되었고 불길도 잡혔다 트로이아 군은 다시 도량을 건너 저
편으로 밀려갔다. 도량은 부서진 전차로 메워져 있었다. 전차에서 풀려난 말들은 평원을 가
로질러 도망치고 있었다.
그 말떼를 뒤쫓아 아킬레우스의 말들이 도랑을 건넜다 파트로 클로스는 말떼를 모았다 말
떼가 트로이아군과 트로이아 성중간에 위치하는 파트로클로스 말떼의 퇴로를 차단하고 병사
들이 침을 삼키며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 진영으로 몰고갔다.
보병과 전차병 할것없이 수많은 병사들이 죽음을 당했다 트로이아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뤼
키아 왕 사르페돈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르페돈이 쓰러진 자리로 헥토르가 지휘하던 트
로이아군이 몰려들었다
그의 시신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결국 사르페돈의 시신
을 차지한것은 그리스 군이었다. 그리스군은 시신에서 번쩍거리는 갑옷을 벗기고는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그러나 사르페돈은 다름아닌 제우스 신과 인간 세상의 어머니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사르페돈의 시신은 그리스 인들이 보는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없어졌는지 어디로 옮겨갔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눈에 보이지 않은 쌍동이 형제휘
프노스와 타나토스가 아버지 제우스 신의 명을 받고 그 큰날개를 펄럭거리며 내려와 사르페
돈의 시신을 뤼키아로 데려가 버린 것이었다 뤼키아인들이 저희왕의 장례식을 예를 갖추어
치러줄수 있게 하기위해서였다
파트로클로스는 선단주위에서 트로이아군을 완전히 몰아내면 추격하지말고 돌아오라던 아
킬레우스 왕자의 당부를 떠올렸어야 했다. 그러나 구름을 모은느 신 제우스는 아들의 죽음
에 화가 난 나머지 파트로클로스의 머리에 광기를 불어넣어 싸움 미치광이가 되게함으로써
아킬레우스의 당부 같은 것은 완전히 잊어 버리게 했다.파트로 클로스는 전차병 아우토메돈
에게 연방고함을 질러대면서 트로이아군을 추격했다 그는 트로이아군을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느라고 뮈르미돈군을 저만치 뒤에두고서 혼자 트로이아 성벽 밑에 이르렀다 싸움 미치광
이가 되어버린그는 세차례나 그까마득한 성벽을 기어 오르려다가 세번 모두 성위로부터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서야만 했다.
전차를 탄채 정문앞 큰길에 있던 헥토르는 전차병에게 전차를 똑바로 아킬레우스쪽으로(파
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있었으므로)쪽으로 몰라고 명했다. 성벽밑에 서 있
던 파트로클로스는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하나 들어올려 헥토르를 향해 던졌다. 바윗덩어리
는 헥토르를 빗나가는 전차병에게 맞았다. 전차병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파트로클로스는
그때부터 세 번이나 트로이아 군의 철통같은 전투 대형을 공격했다. 한번 공격할때마다 아
홉명의 트로이아 병 사가 목숨을 잃고는 했다. 뒤따라온 뮈르미돈 군대가 그의 뒤를 받쳤다.
그날의 전투가 어떻게 끝날것인지 예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트로클레스가 네 번째
로 트로이아 군을 공격하는 순간 아폴로 신이 아무도 모르게 그뒤로 다가와 그의 어깻죽지
를 때렸다 파트로크로스의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투구가 머리에서 벗겨져 전차 끄는 말발굽
아래로 떨어졌다.
그제서야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가 아킬레우스가아니라 파트로클로스인 것이 밝혀진 셈
이었다. 그의 창은 부러져 있었고 어깨에 메고 있던 방패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 둥그렇게
파트로클로스를 둘러싸고 있던 트로이아 군 중에서 한 병사가 창으로 그이 등을 찔렀다.눈
앞에서 붉은 안개가 어른거리고 있었음에도 파트로클로스는 창을 잡고 병사를 찌르려 했다.
그러나 그순간, 헥토르가 썩 나서면서 창으로 그의 배를 찌르고 창날로 그어 버렸다. 파트로
클로스는 쓰러졌다. 눈앞에 보이던 붉은 안개가 검은 안개로 변하면서 그의 생명은 그를 떠
나갔다.
파트로클로스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 ,자기를 내려다보고서 있는 헥토르에게 말했다.
"죽음은 그대의 곁에도 가까이 서있다. 그대는 바로 이 문앞에서 , 이갑옷의 임자인 아킬레
우스 장군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트로이아 군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들 죽어가는 자가 멀리 본다는 것
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트로클레스의 숨이 끊어지자 헥토르는 그의 몸에서 신들이 만들어 선물로 준 아킬레우스
의 갑옷을 벗겻다.전투가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는 틈을 타서 헥토르는, 자기 갑옷은 벗어
성 안으로 들여보내 아테나 여신의 신전에 바치게 하고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었다. 그
리고 나서야파트로클레스의 시신을 구고 벌어진 또 하나의 싸움터로 뛰어들었다.
정오의 불볕 태양 아래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트로이아 군은 시신을 빼앗아 성 안
의 개들에게 던져 주고 싶어했고, 그리스 군은 선단으로 모셔 정중한 장례식을 치려 주고
싶어했다.
파트로클로스의 전차병으로 나섰던 아우토메돈은 처음에는 그 싸움에 합류할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의 전차를 끌던 말 두 마리(옆걸음질에 능한 페다소스는 그 때 이미 죽고 없었
다)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선채 , 그 오랜 포위 공격 기간 동안에 저희들을 아껴 주던 주인
친구의 죽음을 애 도하며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마리의 말은 그곳에서 움직이려고 하
지 않았다. 싸움터에서 도망치려고도, 싸움에 가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제우스는 슬픔에
빠져 있는 그 두 마리의 말을 내려다 보고 있다가 아버지인 서풍의 신을 생각해서 가슴에는
불길을 다리와 구부러진 목에는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아우토메돈 자신도 조금전과는 전혀
다른 전사가 되어있는 기분이었다 그제서야 아우토메돈은 싸움터로 뛰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해가 머리위를 지나 점차 서쪽으로 기울수록 전황은 조금씩조금씩 그리스군에 불리
해져 갔다
그리스군은 조금씩 물러섰고 트로이아군은 조금씩 다가섰다 그러나 뮈르미돈용사들은 낡은
외투처럼 누더기가 된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트로이아군과 싸우는
한편으로 피가 엉겨붙고 싸움터의 먼지에 절여진 시신을 선단이 있는 곳으로 조금씩조금씩
운반해갔다 아이아스와 그 부하들은 방패와 투팡으로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운반하는 뮈르
미돈 병사들을 호위했다.
헥토르에게 복수하는 아킬레우스
네스토르의 아들 안틸로코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알리러 아킬레우스에게 달려가 그리스
병사들은 모두 길을 비켜주었다 그리스 병사들은 그소식이 어쩌면 아킬레우스를 다시 싸움
터로 되돌아오게 할수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안틸로코스가 숨을 헐떡거리며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이르렀다 아킬레우스는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던 나머지 막
사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그때 안틸로코스를 통해 그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다.
"파트로클로스 장군이 전사했습니다 지금밖에서는 파트로클로스의 알몸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장군이 알몸인 것은 헥토르가 갑옷을 벗겨갔기 때문입니다."
아킬레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화롯가에서 고개를 숙이고 자기 머리카락에다 화로에서
퍼낸 재와 검은 먼지를 끼얹었다 안틸로코스가 달려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안틸로코스로서
는 아킬레우스로서는 아킬레우스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 혹시 자살이나 하려는 것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깊은바다에서 바다의 요정인 테티스가 아들을 위로하러 올라왔다 하지만 아킬레우스
는 오랜 친구를 죽인 헥토르에게 복수하는데 자신의 목숨을 걸겠다고 말했다.
테티스가 흰팔로 아들을 껴안고서 말했다. "갑옷도 없이 싸움터로 나갈수는 없는 일이다 맨
몸으로 갔다가는 헥토르를 만나기도 전에 트로이아 군의 창에 몸을 상하고 말게다 그러니
오늘밤만 넘기도록 해라
내가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신에게 올라가 갑옷을 주문하고 내일아침에는 이세상 인간은 본
적도 들은적도없는 방패와 투구 그리고 가슴 가리개를 가져다 주마" 테티스는 이렇게 말하
면서 사라졌다. 테티스의 음성은 해변에서 한숨을 쉬는 파도 소리와 같았다.
한편, 파트로클로스의 갈갈이 찢긴 시신을 서로 차지하려는 싸움은 선단의 방어벽 가까
이까지 와 있었다.
야수의 발톱 같은 슬픔에 가슴을 쥐어뜯기던 아킬레우스는 밖으로 나갔다.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방어벽으로 올라간 그는 떨어져가는 붉은 태양을 등지고 섰다. 그가 두른 머리띠
위로 불덩어리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흡사 야간 공격전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봉화 같기
도 했다. 거기 그렇게 선 채로 그는 목청껏 트로이아를 저주했다. 그 소리는 성벽을 공격하
면서 병사들이 내지르는 함성 같았다.
그는 세 차례 고함을 질렀는데, 트로이아의 말들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힝힝거리면서
도랑을 건너다 말고 물러서고는 했다. 세 차례나 트로이아 병사들의 가슴이 공포로 오그라
들었다. 트로이아 병사들은 거기까지 쫓아온 목적도 잊었는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 순
간을 틈타 뮈르미돈 용사들은 파트로클로스의 몸에 묻은 먼지를 대강 털고 선단 앞 방어벽
의 문 안으로 시신을 들여갈 수 있었다.
방어벽의 문이 잠기면서 벽 위에 파수병이 무수히 배치되었다. 병사들이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관 위에 눕히고 나자 아킬레우스가 그 옆으로 다가갔다. 그는 자기 자신이 가야 했
는데도 불구하고 파트로클로스에게 자기 전차와 말을 주어 싸움터로 보낸 것을 후회하고,
살아서 되돌아오지 못하게 된 것을 슬퍼했다.
병사들은 갈갈이 찢긴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옮겼다. 평소에 파트
로클로스부터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 온 여자 노예들은 울면서 시신에 묻은 피와 먼지를 씻
기고는 희고 부드러운 천으로 그의 몸을 감쌌다.
해가 지고 밤의 고요가 찾아들었다.
헥토르의 참모 몇몇은 헥토르에게 트로이아 성으로 들어가 안전을 꾀하는 것이 좋지 않겠
느냐고 제안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아킬레우스가 최전선에 나설 것이고, 그렇게 되면 트로
이아군이 위태롭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헥토르는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
다.
"성 안이 피난민들로 붐비는 것은 그대도 알지 않는가? 아킬레우스, 올 테면 오라지. 평원
에서 아킬레우스를 맞이하겠노라."
그래서 평원은 다시 한번, 잡목수풀과 옛 묘지 사이에 지펴진 트로이아 연합군의 모닥불
로 인해 마치 무수한 별이 박힌 밤 하늘 모양이 되었다.
아킬레우스의 막사 앞에서 여자들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통곡했다. 뮈르미
돈 병사들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킬레우스도 옛 친구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올림포스 산 꼭대기의 대장간에서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는 테티스가 보는 가운데 불
을 지피고 황소 스무 마리의 가죽으로 만든 풀무로 바람을 일으켜 불을 부쳤다. 그는 청동
과 은, 주석과 금을 녹여 번쩍거리는 가슴 가리개와 장딴지 가리개, 붉은 색깔의 장식 볏을
넣은 금 투구와 방패를 만들었다. 특히 헤파이스토스는 방패에다 도시, 바다, 전투 장면, 사
자 사냥, 곡식 걷이가 끝난 평원, 포도가 오종종하게 열린 포도 덩굴, 피리소리에 맞추어 춤
추는 남녀의 그림을 박아 넣었다.
새벽이 되자, <은빛 발> 테티스는 헤파이스토스가 아들을 위해 만들어 준 갑옷을 들고
올림포스를 내려왔다. 아킬레우스는 그 빛나는 갑옷을 입었다.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용
기와 적개심이 아킬레우스의 가슴 속에서 솟아올랐다. 그러나 개인의 명예와 관련된 문제에
민감한 오뒤세우스는 아킬레우스가 무턱대고 뮈르미돈 군대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가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했다. 오뒤세우스의 말에 따르면, 먼저 아가멤논과 정식으로 화해하고 신들
에게 제물을 바쳐 이를 알리는 예식을 거행한 후, 일찍이 아킬레우스가 거절한 적이 있는
아가멤논의 선물을 받아 들인 뒤에 출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아가멤논은 사람을 보내어 선물을 전했다. 선물을 전해 준 사람들은 아킬레우스에게, 아가
멤논을 대신해서 그 동안의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 아킬레우스는 이제 금덩어리,
노예, 값비싼 말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브리세이스조차도 귀찮았다. 하지만 그는 그 선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을 받아야만 비로소 화해의 절차를 끝내고 싸움터로 달려갈 수 있
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두 사람의 화해는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뮈르미돈 족을 비롯해서 모든 그리스 병사들이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파트
로클로스의 복수가 끝나기까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손을 대지 않으려 했다.
그가 전차에 올라 막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였다. 헤라 여신으로부터 딱 한 차례 인간
의 말을 할 수 있는 권능을 받은 그의 백마 크산토스가 갈기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고
는 말했다.
"아킬레우스 장군님. 장군님만 슬픈 것이 아니고 저희들도 슬픕니다. 저희들은 아버님 제
퓌로스(서풍)처럼 내닫고 싶습니다만, 아무리 그렇게 달려도 장군님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곧 목숨을 잃으시게 됩니다."
백마 크산토스의 말에 아킬레우스가 대답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헥토르가 살아 있는 한 그 자리를 피하지 않겠다. 그러니 그
동안 만이라도 힘껏 달려 다오."
그러자 두 마리의 백마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적진을 향해 내달았다.
아킬레우스는 그 날 하루 종일 뮈르미돈 군대의 선두에서 트로이아 군을 무찔렀다. 그는
트로이아 군을 강으로 밀어넣었다. 핏빛으로 흐르는 강은 트로이아 군을 보호하면서 아킬레
우스를 금방이라도 삼킬 듯이 용틀임쳤다. 숱한 병사들이 그 강물에 떠내려갔다. 아킬레우스
는 트로이아 군을 추격하여 강을 건넜고, 건너쪽 강변에서도 무수히 많은 트로이아 군을 죽
였다. 얼마나 죽였던지 땅은 진홍빛으로 물들고 시체를 밟은 말이 전차의 차축과 뼈대에 무
수한 핏덩어리를 튀겼을 정도였다. 그는 마지막 승리의 영광을 앞두고 트로이아 군을 압박
해갔다. 아킬레우스와 뮈르미돈 군대는 트로이아 군을 성문 앞까지 추격했다. 트로이아 군은
성 안 사람들의 활짝 열어 놓은 성문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그러나 헥토르만은 창을 움켜쥔 채 성의 정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성벽 위에서 아들
의 모습을 지켜 보던 프리아모스 왕은, 신들이 준 갑옷을 입고 유성처럼 달려오는 아킬레우
스를 보자 아들에게 어서 성 안으로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헥토르는 오래 전에 만나
기로 약속이라도 되어 있는 것처럼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아킬레우스를 기다렸
다.
그가 그렇게 기다렸던 것은 자신의 최후가 멀지 않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전날 평원에서 야영해야 한다고 주장해 엄청나게 많은 부하들을 죽게 한 책임
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킬레우스를 죽임으로써 부하들의 죽음
을 복수할 수 있으며,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자기 목숨으로 그 빚을 갚겠다고 결심했던 것이
었다.
아킬레우스는 전속력으로 전차를 몰아 돌진해왔다. 헥토르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검은 선단이 오고 나서 십여 년 세월이 흐르도록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헥토르는 돌아서
서 도망쳤다. 그는 도망치느라고 트로이아 성을 세 바퀴나 돌았다. 세 차례나 거룩한 무화과
나무를 지나고 평화시에는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쓰이던 우물가를 지났다. 헥토르는 사슴처
럼 도망쳤고 아킬레우스는 표범처럼 추격했다. 헥토르가 용기를 되찾은 것은 세 번째로 성
의 정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돌아서서 적을 맞았다.
아킬레우스의 창이 그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어찌나 가까이 스쳤던지 바람소리가 그의
귀에 들렸을 정도였다. 헥토르 역시 창을 던졌다. 그러나 그의 창은, 도시와 전쟁터의 풍경
과 피리 소리에 맞추어 춤추는 남녀가 새겨져 있는 아킬레우스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아킬레우스에게는 창이 하나 더 남아 있었지만 헥토르에게는 없었다. 헥토르는 칼을 뽑아
들고 외쳤다.
"불명예스럽게 죽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는 아킬레우스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칼로 찌
를 만한 거리까지 접근하는 순간, 아킬레우스가 그의 목을 겨누고 창을 던졌다. 그는 휘청거
리다 땅바닥에 쓰러졌다.
"개떼와 까마귀 떼가 땅에 묻히지 못한 너의 살을 찢어 먹을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먼지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는 헥토르를 내려다보면서 내뱉었다.
헥토르는 그에게 애원했다.
"아버지가 금덩어리로 내 몸값을 치를 것이다. 그러니 내 시체를 아버지께 내어 드려 제대
로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다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자비를 베풀 기분이 아니었다.
"안 돼! 할 수만 있다면 네 살을 찢어 먹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개떼에게 던져 주어 개
들로 하여금 너의 살을 놓고 다투게 해주지. 네 아버지가 네 몸무게와 맞먹는 금덩어리를
가져 온다 해도 소용 없다."
헥토르는 더 이상 애원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내 아우 파리스가 바로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일 것이다. 내 말을 명심하라."
마지막 숨결을 토해 내고서 헥토르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의 영혼은 저승을 향해 길을
떠났다.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몸에서 하루 전만 해도 자신의 것이던 갑옷을 벗겨 내고 있을 동안
그리스 진영의 최전방에 있던 병사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병사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
아도 되는 헥토르의 시체를 구경하고는,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 전에 저마다 한 차례씩 시체
에다 창질을 했다.
아킬레우스는 시체에다 해괴한 짓을 했다. 그는 헥토르의 발목 뒤, 발뒤꿈치에서 장딴지에
이르는 힘줄 뒤쪽을 잘라 구멍을 내고 거기에 소가죽 끈을 꿰어 묶고는 그 끈의 한쪽 끝을
전차 뼈대에다 묶었다. 되찾은 갑옷을 전차에 실은 그는 전차에 올라 손수 고삐를 잡고 채
찍으로 말 엉덩이를 때렸다. 말은 선단 방어벽을 향하여 서풍처럼 달려나갔다.
말이 달리자 헥토르의 시체는 울퉁불퉁한 땅바닥 위에서 때로는 뒤틀리면서 때로는 엎어지
고 쓰러지고 하면서 끌려갔다. 헥토르의 검은 머리카락은 전쟁터의 먼지와 온갖 쓰레기를
주위가 자옥해지도록 휘날리게 했다.
장례 경기를 벌이다
헥토르의 어머니 헤쿠바를 비롯한 트로이아 여인들은 트로이아 성 정문 위의 망대에 서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헥토르의 죽음을 통곡하기 시작했다.
안드로마케는 자기 집 다락방에서 금빛 꽃을 수놓으면서 헥토르의 겉옷을 짜고 있었고, 안
방 하녀는 주인이 싸움터에서 돌아오면 몸을 닦을 수 있도록 물을 데우고 있었다. 안드로마
케의 귀에 망루에서 여자들이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드로마케의 손에서 날실 사이로
들어가던 베틀의 북이 툭, 떨어졌다. 시어머니의 통곡 소리에 외마디 비명까지 들은 안드로
마케는 여자들이 통곡하는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하녀 둘을 데리고 망루로 올라갔다.
안드로마케는 망루에 이르러서야, 아킬레우스의 전차에 매달린 채 선단 쪽으로 끌려가면서
헥토르의 시체가 일으키고 있는 먼지 구름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통곡하는 여자들 사이에
서 안드로마케의 몸이 화살에 맞은 새처럼 무너져 내렸다.
정신을 차린 안드로마케는 울고 또 울었다.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남게 된 아들 때문에 울
었고 견줄 데 없이 비참하게 죽은 헥토르 때문에 울었다. 한시 바삐 시신을 찾아 장례식을
치러 주지 않으면 영혼은 하데스의 나라인 저승에 들지 못하고, 산 자의 땅과 죽은 자의 당
사이에 있는 경계를 외로이 방황하게 될 터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안드로마케는 또다
시 울음이 나왔다.
그러나 시체가 되어 장례식도 치러지지 못하고 누워 있는 영웅은 헥토르뿐만이 아니었다.
사냥감을 배불리 잡아먹은 사자처럼 포만감을 느끼며 잠들어 있는 아킬레우스에게 파트로
클로스의 망령이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왜 나를 화장해서 묻어주지 않습니까? 저승의 나라 망령들은 나를 저희 동아리에 끼워 주
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하데스의 검은 문 앞을 서성거린답니다. 자, 내 손을 한번 더
잡아 주십시오. 하데스의 문으로 들어서면 다시는 이렇게 와서 장군을 뵐 수 없게 될 테니
까 말입니다."
아킬레우스는 오랜 전우의 손을 잡아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
다. 망령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잠을 깬 아킬레우스는 부하들에게 화장할 장작
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아킬레우스의 부하들은 멀리 떨어진 내륙의 이다 산에서 나무를 베고 장작을 만들었다. 그
리고는 노새 무리에 등짐을 지워 해변으로 실어 내었다. 아킬레우스의 명에 따라 그들은 장
소를 정하고 장작을 쌓아 거대한 화장단을 세웠다.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이 화장단으로 올려
지자 전우들은 저마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도하느라고 머리카락을 자라 시신 위에 뿌
렸다.
아킬레우스도 머리카락 한 타래를 싹둑 잘라 파트로클로스의 손에다 쥐어 주었다. 전우의
명예에 어울리게 가축도 여러 마리 잡았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전차를 끌던 말
네 마리, 파트로클로스가 매우 좋아하던 사냥개 두 마리도 죽여서 화장단 위에다 올리게 했
다. 슬픔과 분노로 제 정신이 아니었던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아 군의 포로 열두 명도 울대를
끓어 올리게 했다. 부하들은 여러 항아리의 기름과 꿀을 화장단 가에다 부었다. 해질녘이 되
자 아킬레우스가 횃불로 화장단에다 불을 붙였다. 나무의 잔가지와 기름과 꿀에 불이 붙었
다. 북풍과 서풍의 신이 와서 불길을 불어 주었다. 화장단은 밤새 타다가 해가 희붐해질 녘
에야 사그러졌다.
부하들은 장군이 생전에 아킬레우스와 술을 마시곤 하던,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황금 술잔
에 재가 되어 버린 파트로클로스를 담았다. 술잔을 땅바닥에 놓고 주위에다 돌을 쌓아 조그
만 방을 만든 다음 그 위를 흙으로 덮으니 곧 무덤이 되었다.
아킬레우스는 흙을 덮긴 하되 돌로 쌓은 방은 밀봉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자기가 죽거든 화장해서 그 재를 파트로클로스의 재가 든 술잔에 넣어 잘 섞은 후에야 돌로
쌓은 무덤을 밀봉하라고 명령했다.
이윽고 장례 경기가 열렸다. 죽은 사람의 명예에 어울리게 장례 경기를 열어 주는 것이 당
시의 관례였다.
아킬레우스의 보물 창고에서 나온 상품들이 진열되었다. 경기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첫
경기는 전차 경주였다. 그리스 연합군에서 가장 빼어난 전차와 말, 그리고 다섯 명의 전차
몰이가 출전했다. 선수들은 평원을 질풍처럼 내달았다. 그들 뒤로 먼지 구름이 일었다. 아득
한 옛날 그 평원에 세워졌던 이정표가 반환점이었다. 전차는 반환점을 돌아 선단 방어벽 앞
의 관중들 앞으로 오게 되어 있었다.
디오메데스가 앞섰다. 고함을 지르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는 말의 엉덩이에다 연방 채찍질
을 해댔다. 그의 전차 바퀴는 땅에 닿지 않는 것 같았는데도 뒤로는 먼지가 피어올랐다. 1등
상은 그에게 돌아갔다. 음악과 살림살이에 재주가 있는 여자 노예 하나, 발이 세 개 달린 황
금 솥 하나가 상품이었다.
그 다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네스토르의 아들 안틸로코스였다. 안틸로코스는 말의 속도 덕
분이었다기보다는 말 모는 기술로 메넬라오스를 간발의 차로 따돌리고 들어왔다. 안틸로코
스에 이어 메넬라오스의 말발굽 네 개가 천둥소리를 내면서 결승점을 지났다. 안틸로코스와
메넬라오스에게 각각 2등상과 3등상이 돌아갔다. 상품은 혈통이 좋은 암말 한 필과 1등상보
다는 조금 작은 황금 솥이었는데 두 사람이 상의해서 서로 좋은 것을 갖도록 했다. 이어서
메니오네스가 들어왔고 한참 있다가 에우멜로스가 들어왔다. 마차가 부서지는 바람에 손수
말을 몰면서 전차를 끌고 왔기 때문에 늦었다는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그들에게도 상을 내
렸다.
이어서 권투 경기가 베풀어졌다. 거인이자 권투 잘 하기로 유명한 에페이오스와 아르고스
군의 대장 에우뤼알로스가 맞붙었다. 두 사람은 아랫도리를 벗고 넓적한 가죽 허리띠를 매
었다. 두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서로 치고 빠지고 했다. 격렬한 싸움인데도 꽤 오래 계
속되었다. 결국 에페이오스가 에우뤼알로스의 턱에 일격을 명중시키고는 노새 한 마리를 상
으로 받았다. 에우뤼알로스는 선 채로 땅바닥에다 피를 토했다.
다음에는 씨름 경기가 열렸다. 아이아스와 다친 상처가 이제 갓 나은 오뒤세우스가 짝짓기
계절을 맞은 두 마리의 뿔사슴처럼 맞붙었다. 그러나 실력이 엇비슷해서 결판이 나지 않았
다. 아킬레우스는 두 사람의 경기를 중단시키고 상을 반씩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어서 벌어진 달리기 경주에서는 오뒤세우스를 당할 상대가 없었다. 그는 이 경기
에서 포도주를 섞는 은사발을 따냈다. 마지막으로 아킬레우스는 전사한 사르페돈의 갑옷을
가져오게 한 뒤, 구경꾼 사이에다 창을 하나 꽂아 그 위에 걸고는 창시합할 사람은 나오라
고 했다. 갑옷은 먼저 상대에게 피를 흘리게 하는 사람이 차지하게 된다고 했다. 디오메데스
와 아이아스가 갑옷을 입고 구경꾼 한가운데 만들어진 공터로 나섰다.
두 사람은 세 차례나 맞붙었다. 피가 서서히 달아오르자 아이아스가 창으로 디오메데스를
찔렀다. 창끝은 디오메데스의 방패를 뚫고 가슴 가리개에 꽂혔다. 이번엔 디오메데스가 아이
아스의 목을 겨누고 방패로 숨기고 있던 창을 내질렀다. 구경꾼들은 둘 중 하나가 다치는
것을 염려해 경기를 중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경기는 중단되었다. 두 장군은 사르페
돈의 갑옷을 나누어 가졌다. 해가 질 즈음 경기에 참가했던 선수들은 마무리 잔치를 벌이기
위해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몰려갔다.
마무리 잔치가 끝나고 장수들은 잠자리로 돌아갔지만 아킬레우스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과, 다시는 누릴 수 없는 함께 사귀고 나누었던 세월
을 슬퍼하면서 혼자 울었다. 그러다 자리를 박차고 해변으로 달려간 아킬레우스는, 날이 희
붐해질 때까지 해변 모래톱을 미친듯이 걸었다.
하지만 새 아침이 밝아와도 아킬레우스의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슬픔 때문에 맑은
정신을 잃어 버린 사람처럼 마굿간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말을 끌어내 멍에를 채워 전차
에 맨뒤, 헥토르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갔다. 헥토르의 시체는 여전히 땅바닥 위에 엎어져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다시 헥토르의 시체를 전차에다 비끄러매고 방어벽을 나가, 파트로클
로스의 뼈무덤을 세 바퀴나 돌았다. 그 동안 헥토르의 시체는 물론 흙먼지 위를 계속해서
끌려 다녔다.
그는 열이틀 동안이나 밤으로 낮으로 똑같은 짓을 했다. 그러나 그 동안 아폴론 신이 헥토
르의 시체를 가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거칠게 다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체는 더
이상 상하지 않았다. 신들은 결국 아킬레우스가 광기 때문에 스스로 제 명예와 친구의 명예
와 땅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다는 쪽으로 뜻을 모았다. 신들은 어떻게든 아킬레우스를 저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헥토르의 시신을 되찾아오다
신들은 테티스를 올림포스 산 꼭대기로 불러 올렸다. 그리고는 테티스에게 일렀다. "가서
아들에게 이르세요. 제우스 신을 비롯한 올리뮤ㅗ스의 신들은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체
를 다루는 것에 화가 났다고요. 헥토르의 시체를 그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에게 돌려 주라고
하세요. 프리아모스 왕이 몸값을 알맞게 치를 테니까요."
아킬레우스는 어머니로부터 그 말을 들었다. 슬픔에 젖어 어떤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
지 않던 아킬레우스도 어머니의 말만은 다소곳이 들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신들은, 종종 신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무지개 여신 이리스를 프리
아모스 왕에게 보냈다. 프리아모스 왕은 왕궁에서 머리에다 먼지와 재를 뿌린 채로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리스 여신은 프리아모스 왕에게 말했다.
"아킬레우스에게 가서 몸값을 낼 테니 아들의 시신을 돌려 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아킬레
우스도 마다하지 않을 거예요."
늙은 프리아모스 왕은 보물 창고로 가서 향내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를 열고는 열두 벌
의 비싼 예복, 열두 벌의 겉옷과 수놓인 웃옷을 꺼냈다. 열 개의 금덩어리, 번쩍거리는 황금
솥, 그리고 트리키아 백성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무척이나 아끼고 자랑스러워 하던 금술잔을
꺼내 그 옷더미 위에 놓았다.
프리아모스 왕은 남아 있는 두 아들 파리스와 데이포보스를 불렀다.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잇던 왕은 맏아들 헥토르가 죽었는데도 뻔뻔하게 살아 남아 있는 두 아들을 꾸짖고는, 수레
를 한대 준비해 몸값으로 치를 물건을 거기에다 실으라고 명했다.
두 아들은 수레 위에다 몸값을 싣고 나귀를 비끄러맸다. 그러자 프리아모스 왕을 신들에게
기도를 하고 포도주를 제물로 올린 다음, 미리 준비되어 있던 전차에 올랐다. 왕은 수레 몰
이와 전령 하나만을 데리고 정문을 빠져나가 어둠에 잠긴 평원으로 들어서서 선단 족으로
말을 몰았다.
프리아모스 왕은 알지 못했지만 나그네의 수호신인 헤르메스가 그의 옆에 붙어 있었다. 헤
르메스 신은 그리스 군을 만날 때마다 날개 달린 지팡이로 툭툭 건드려 그들을 잠재웠다.
그래서 그리스 진영에서 노왕의 전차와 몸값 실은 수레를 본 병사는 하나도 없었다. 프리아
모스 왕 일행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방어벽을 지나 이윽고 갈대 이엉으로 덮인 아킬레우
스의 막사에 이르렀다. 프리아모스 왕은 전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아킬레우스의 부하
들이 수레에서 몸값을 내리고 있을 동안 헤르메스 신은 가만히 올림포스로 돌아갔다.
아킬레우스는 막사 안에서 부하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프리아모스 왕은 아킬레우
스왕자에게 다가가 발 밑에 무릎을 꿇고는 관습에 따라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헥토르뿐
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여럿 죽인 그 손이 프리아모스 왕에게는 진흥빛으로 보였다.
왕은 애원했다.
"늙은 나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신들의 뜻을 좇으시어 내 아들을 돌려주기 바라오. 장군의
아버님을 생각해 보시오. 늙으신 아버님도 아들을 멀리 떠나 보내고 나처럼 슬퍼하실 게 아
니오? 하지만 그분에게는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이라도 있지 않소. 나를 불쌍하게 여
겨 주오. 내 아들을 위해 나는 오늘 도저히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던 일을 했소. 내 아들들
을 무수히 죽인 장군의 손에 입을 맞춘 일이 그것이오.?
아킬레우스는 멀리 있는 늙디늙은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도 프리아모스 왕처럼
머지 않아 슬픈 소식을 듣게 될 터였다.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 왕을 일으켜 세우고 다정
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여안고 울었다. 프리아모스 왕은 아들을 생각하면서 울었
고 아킬레우스는 자기 아버지와 파트로클로스를 생각하면서 울었다.
아킬레우스는 여종들에게 명하여 헥토르의 시체를 화장할 수 있도록 깨끗이 씻고, 프리아
모스 왕이 가져온 겉옷 중에서도 가장 좋은 옷으로 잘 싸도록 했다. 헥토르의 시체가 깨끗
한 겉옷에 싸여 빈 수레에 실리자 그는 음식과 술을 내어오게 했다.두 사람은 함께 먹고
마셨다. 프리아모스 왕은 그런 다음에야 몸값을 치르고, 되찾을 아들의 시신과 어두운 평원
을 가로질러 트로이아 성으로 돌어갔다.
온 트로이아 백성들이 성문으로 나와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했다. 헥토르의 시신은 생전에
살던 집으로 옮겨졌다. 여자들이 시신의 주위로 모여들어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
서 곡을 하고 만가를 불렀다.
안드로마케는 침대 앞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부짖었다.
"아직 이렇게 젊으신데 어째서 아내는 집 지키는 과부로, 아들은 아비 없는 자식으로 남겨
놓고 떠나십니까? 떠나시려면 집에서 떠나셔야지요. 저에게 손을 내미시든지 그게 안 되면
유언이라도 몇 마디 하고 가셔야지요. 어차피 울면서 보내야 할 긴 세월, 그래야 밤낮으로
떠올리기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으로 어머니 헤쿠바가 통곡하면서 말했다.
"헥토르, 그 많은 아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아. 살아 있을 때 그토록 신들의
사랑을 받더니, 그원수의 전차에 매달려 그렇게 끌려 다녔는데도 터진 데 멍든 데 하나 없
는 것을 보니 아직도 신들의 사랑을 받는 모양이구나. 아, 네 목숨을 앗아간 붉은 꽃 한 송
이 같은 상처 자국이 하나 있을 뿐, 너는 잠을 자고 있는 것 같구나."
세 번째로 검은 상복 차림의 헬레나가 그 흰 팔을 흔들면서 통곡했다.
"헥토르여, 트로이아 왕가의 왕자들 중 내 마음에 가장 가깝던 분이시여, 파리스가 나를 이
곳에 데려온 이후로, 진작에 죽었어야 했던 나에게 거친 말 한마디 퉁명스러운 말 한 마디
안하시던 분이시여, 모두가 나의 소행을 질타할 때도 따뜻한 가슴과 부드러운 말씨로 원망
을 자제하던 분이시여. 아, 나에게 화 있으라. 나에게 화 있으라. 이제 이 트로이아에는 나를
벗으로 여기는 사람이 없어지고 말았구나.……."
프리아모스 왕은 부하들에게 황소를 수레에다 매고 화장단 쌓을 장작을 실어오게 했다. 그
리고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장례식을 위해 열하루 동안의 휴전을 약속한 만큼 그리스 군
의 공격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트로이아 군사는 황소 수레를 끌고 산으로 올라
가 아흐레동안이나 장작을 베어 내려 성벽 밖에다 거대한 화장단을 쌓았다. 그리고는 열흘
째되는 날 헥토르의 시신을 화장단에 올리고 불을 붙였다.
불길이 가라앉자 트로이아 왕족들은 울면서 헥토르의 재와 뼈조각을 주워 모아 보랏빛 천에
다 쌌다. 그런 다음 이것을 다시 금상자에 넣어 미리 파둔 구덩이에 묻고 그 위를 돌로 쌓
았다. 왕족들은 장례 절차를 따르면서 사방을 살피며 몹시 조급하게 굴었다. 아킬레우스가
약속한 열하루가 거위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례를 마치고 성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관습에 따라 큰 잔치를 열었다.
<말을 길들이는 자>로도 불리던 헥토르의 장례식은 이렇게 끝이 났다.
사라진 트로이아의 보물
헥토르의 장례식을 위한 휴전이 끝났지만 트로이아 성 포위 공격전은 소강 상태로 들어갔
다. 십 년 동안 계속되어 온 상태와 비슷했다. 아킬레우스도 전투에 의욕을 잃은 것 같았고
트로이아 군도 사령관을 잃은 참이라서 성문을 나와 평원으로 나설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
이었다.
트로이아 군은 사실 자신들을 지원하러 오는 새 연합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맞이할
부대는 새벽의 신 에오스의 아들인 멤논 왕이 지휘하는 남쪽 나라 군대와, 아마조네스라고
불리는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막강한 전투 부대였다. 따라서 트로이아 군은 성 안에서 조용
히 그들을 기다리고 싶어했다.
트로이아의 높은 성체에 위치한 아테나 신전에 오래 전 하늘에서 떨어진 아테나 여신의 방
패 비슷한 거룩한 보물이 있다는 사실은, 트로이아 연합군은 물론이고 그리스 연합군도 알
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람들은 그 보물을 <팔라디온>, 혹은 <트로이아에 행운을
가져다 주는 보물>이라고 불렀다. 트로이아 백성들은 그 보물이 거기에 있는 한, 잿빛 눈의
여신이 그들을 도와 적군으로부터 트로이아를 지켜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트로이
아 백성들은 밤낮으로 그것을 지키고 그 보물이 거기에 있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힘과 위안
을 얻고는 했다.
오뒤세우스는 트로이아 성 한복판에 있는 경비가 삼엄한 산전에서 트로이아의 보물을 훔쳐
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되면 트로이아 백성들은 보물이
사라진 것을 나쁜 징조로 받아들이고 사기를 잃게 될 터였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하면
그 보물을 훔쳐낼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가 계획을 하나 세웠다.
델로스 섬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 중의
하나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재주가 있고 또 하나는 돌을 떡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으며,
나머지 하나는 진흙을 올리브 기름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다고 했다. 당시 그리스 연합군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공급해 주는 포에니키아 상인들에게 금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있었
다. 그런데 그 즈음은 금이 딸리고 있을 때였다.
오뒤세우스는 대왕 아가멤논에게 한 달만 말미를 주면 배를 타고 델로스로 가서 세공주의
뜻을 물어버고, 만일에 함께 가겠다면 데리고 오겠노라고 말했다. 마침 전투도 소강 상태에
접어든 즈음이어서 아가멤논은 그렇게 하라고 쉬게 허락해 주었다. 오뒤세우스는 한 달 안
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오십 명의 노잡이가 노를 젓는 겔리온 선에 올라 먼 바다로
나아갔다.
바로 다음 날 그리스 진영에 웬 거렁뱅이 하나가 나타났다. 그 거렁뱅이가 구부정한 몸을
이끌고 디오메데스의 막사로 와서는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디오메데스는 빵 조각과 살
코기가 조금 남은 뼈를 던져 주었다. 거렁뱅이가 굶주린 개처럼 뼈까지 빨아먹는 것을 보고
디오메데스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어떻게 이 곳에까지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거렁뱅이의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저는 이집트 인들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신세를 망친 크레아 해적이랍니다. 여러 해 동안
이집트의 채석장에서 일하다 거대한 바윗덩어리 사이세 숨어 채석장을 탈출했습니다. 당시
그 바윗덩어리는 뗏목에 실려서 나일 강을 따라 강변의 신전 공사장으로 운반되고 있었지
요. 채 석장을 탈출한 저는 포에니키아 장삿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이 배가 트로이아 남쪽
해안에서 석장을 탈출한 저는 포에니키아 장삿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이 배가 트로이아 남
쪽 해안에서 파선하고 말았습니다. 부서진 널빤지 조각에 붙어 해안으로 올라왔는데 살아
남은 사람은 저 밖에 없었습니다."
거렁뱅이의 말을 다 듣고 난 디오메데스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싶어 그에게 깔개 하나를 던
져주고 막사 앞에서 잘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다음 날부터 늙은 거렁뱅이는 온 막사를 다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한편 병사들과 함께 이
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가 가는 곳에는 꼭 입씨름이 벌어지고 했다. 어느 장군에게, 혹은 장군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험담할 거리가 있으면 이 거렁뱅이는 어떻게 알아 내었는지 그것을 진영에다
퍼뜨리고는 했다. 그래서 아가멤논은 몽둥이로 그를 두들겨 주었고 디오메데스는 엉덩이를
걷어찼으며, 이도메네오스는 자기 할아버지 험담을 퍼뜨리는 이 거렁뱅이를 창자루로 흠씬
두들겨 때려 주었다.
결국 거렁뱅이는 네스토르의 막사에서 금술잔을 훔쳐 내기까지 했다. 그것은 두 개의 손잡
이 위에 각각 비둘기가 새겨진 아름다운 술잔이었다. 술잔이 거렁뱅이의 지저분한 주머니에
서 발견되는 순간, 그리스 군은 입을 보아 이 거렁뱅이를 채찍으로 매우 쳐서 진영 밖으로
쫓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젊은 전사들 몇몇이 낄낄 웃으면서 거렁뱅이를 평원으로 끌고 나갔다. 나간 김에 아주 멀리
까지 가다보니 마침내 트로이아 성문 바로 앞까지 끌고 갔다. 무리를 이끌던 네스토르의 아
들 트라쉬메데스는 거렁뱅이의 멱살을 잡은 채 성문안의 트로이아 군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우리는 이제 이 뻔뻔스러운 거렁뱅이에게 질리고 말았다. 그래서 채찍 맛을 좀 보이려고
한다. 불쌍해 보이면 너희들이 거두어도 좋다. 너희가 거두지 않는다면 평원을 돌아다니다
굶어죽고 말겠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만일 되돌아온다면 눈알을 뽑고
팔에서 약병을 꺼내 바로 옆의 대리석 바닥에다 놓았다. 막상 여사제가 다가오자 그는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여사제가 오뒤세우스의 옆을 지나는 순간, 등잔불빛이 조그맣고 예쁜 약병 위에서 일렁거
렸다. 여사제는 허리를 굽혀 약병을 집고는 그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약병은 마개가 조
금 열려 있었다. 그 약병에서 풍겨나오는 향내는 여사제가 고향에서 맡던 꽃향기와 비슷했
다.
여사제는 마개를 열어 냄새를 맡아 보고는 혀끝으로 끈적끈적한 그 약을 맛보았다. 이제
까지 여사제는 그렇게 달콤한 것을 맛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너무 여러 차례 약병이 비도
록 맛본 것이 탈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여사제는 마개를 닫고 병을 있던 자리에 가만
히 내려놓고는 다시 기도문을 흥얼거렸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졸음이 여사제에게 밀려왔다. 여사제는 제단 앞에 쓰러지면서 깊고
깊은 잠 속으로 그대로 골아떨어졌다. 여사제가 들고 있던 등잔이 대리석에 떨어지는 순간,
불이 꺼졌다. 신전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그제서야 오뒤세우스는 약병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나 바닥에 잠든 사람들 사이를 엉금엉
금 기어 제단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어둠 속을 더듬어 <트로이아의 보물>을 확인한 뒤, 그
것을 집어 주머니 속에 있던 그 날 구걸한 빵부스러기 밑에 감추었다. 그리고 원래 보물이
있던 자리에는 미리 검은 흙으로 만든 가짜 보물을 놓아 두었다. 그는 다음에야 자는 사람
사이를 기어 처음 누워 있던 자리에 돌아와 신전 돌기둥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 때를 기다렸
다. 자던 사람들이 일어나고 신전의 문이 열리자 그는 다름 사람들에 섞여 신전을 나왔다.
이른 아침이어서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오뒤세우스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되
도록 음침한 곳만 찾아서 걸었다. 그렇게 걸어서 그가 간 곳은 트로이아 성의 산 쪽으로 나
있는, 그리스 진영과 반대편인 성의 동쪽 문 앞이었다. 그는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트로
이아에서는 빵르 충분하게 동냥질했으니 다른 도시로 가보겠다고 말했다. 병사들은 웃으면
서 트로이아보다 더 넉넉한 도시로 가기를 바란다며 성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이다 산의 숲으로 통하는 마찻길로 들어섰다. 숲이 시작되는 곳에 이르럿을 때, 트로
이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거리에 온 것을 확인한 오뒤세우스는 그 길에서 벗어나
숲 그늘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거기에서 어둠이 밀려오고 서늘한 밤 공기에 한기가 느껴질
때까지 푹 잤다.
잠에서 깨어난 오뒤세우스는 주머리를 비우고는 전날 구걸한 빵을 먹었다(시장했던 데다
가, 그리스 진영까지 가려면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시원한 산골짜기
의 개울물에 다 몸을 씻은 그는 헬레네가 준 옷을 입은 다음 칼을 차고 신전에서 훔친 팔라
디온, <트로이아의 보물>을 가슴에 품었다. 그런 뒤에야 개울물의 숲이 울창한 쪽 둑을 따
라 걸어, 크산토스 강 어귀에 다다랐다.
이윽고 그가 이른 곳은 그리스 진영의 맨 끝에 있는 초소였다. 초소를 지키던 병사들은
횃불을 들이대 자기들 앞에 있는 사람이 오뒤세우스 장군인 것을 확인하고는 함성을 질렀
다. 그러면서 병사들은 델로스로 떠난 배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오뒤세우스가 나타난 걸 의
아하게 생각했다.
그러자 오뒤세우스는 멀미가 나서 일단 배를 해변에 대게 했으며 부하들이 배를 점검할
동안 자신의 진영의 일이 궁금해서 걸어오게 되었노라고 둘러대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보초
를 잘 설 것을 당부하고는 아가멤논의 막사로 갔다. 대와 아가멤논은 막사로 장군들을 벌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장군들 역시 오뒤세우스가 온 것을 알고는 환호성을 올렸다. 아가멤논은 그에게 물을 포
도주로, 돌을 떡으로, 진흙을 올리브 기름으로 바꾼다는 델로스 공주들은 데리고 왔으냐고
물었다.
오뒤세우스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러나 대신 우리에게 훨씬 더 귀하게 여겨질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옷 속에서 <트로이아의 보물>을 꺼내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그
리고 나서 네스토르의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 상처난 어깨를 보여 주었다.
"자네, 앞으로 거렁뱅이를 쫓을 때 너무 심한 매질은 하지 않는게 좋아."
그 말에 장군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장군들에게 <트로이아의 보물>은 승리의 조짐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황소 열 마리를 잡아 제우스 신께 제사를
지냈다.
한편 트로이아 성 안에서는 보물이 없어진 것을 알고는 난리가 났다. 백성들은 충격과 절
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많은 트로이아 백성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고 믿게
되었다.
아마조네스 여군 부대의 입성
그즈음 파리스는 아마조네스 부대를 트로이아로 안내하고 있었다. 아마조네스 족은 머나
먼 테르모돈 강가에 사는, 여자 군인만으로 이루어진 부족이었다. 그들은 비록 여자들이긴
했지만, 전쟁터에서는 용감한 남자들 이상으로 어찌나 잘 싸우는지, 그들을 전쟁의 신 아레
스의 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아마조네스 족의 젊은 여왕 펜테실레이아는 사냥터에서 사슴을 향해 던진 창이 빗나가는
바람에 엉뚱하게도 동생 히폴뤼타를 죽인 일이 있었다. 가장 사랑하던 동생이었던 만큼 이
일로 인한 펠테실레이아의 슬픔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 후부터 펜테실레이아는 인생의 낙을
잃었다. 그녀에게 희망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구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죽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왕은 여자들로만 구성된 경호 부대를 거느리고 깊은 숲과 넓은 강
가에 숨어 살다가, 트로이아 성의 방어전을 지원하기 위해 트로이아로 오고 있었던 것이었
다.
그들은 깊은 숲길과 높은 산길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아는 파리스의 안내를 받았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트로이아에 이를 수 있었다. 오뒤세우스도 아마조네스 문제에 관한 한 입을
다물겠다고 한 헬레네와의 약속을 지켰으므로, 도중에 아마조네스를 노리고 숨어 있는 그리
스 군도 없었다.
입성하는 아마조네스 부대를 맞기 위해 성문 앞에 몰려 나와 있던 트로이아 병사들은, 그
들이 저희 전통에 따라 말을 타고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트로이아
같으면, 전차를 타고 들어오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별 무리 속의 달처럼
돋보이는, 처녀 병사들 속의 펜테실레이아 여왕에게 몰려들어 환호성을 질러댔다. 창을 흔드
는 병사들도 있었고, 말발굽을 향해 꽃을 던지는 병사들도 있었으며 여왕의 발에 입을 맞추
는 병사들도 있었다.
프로아모스 왕은 그 여군 부대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여왕에게는 금술잔과 수놓은 옷, 그
리고 손잡이가 은으로 된 칼을 선물로 주었다. 여왕 펜테실레이아는 그 칼을 뽑아들고는 바
로 이 칼로 아킬레우스를 쳐죽이겠노라고 맹세했다. 그 맹세를 들은 헥토르의 미망인 안드
로마케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이렇게 속삭였다.
불쌍한 애송이 같으니라고……,헥토르도 그 일을 하지 못하고 흙 속에 묻혀 버렸는데, 너 같
은 애송이가 어떻게할 수 있겠느냐?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펜테실레이아는 눈부신 갑옷을 입고 선물로 받은 새 칼을
찼다. 창과 튼튼한 방패를 들고 백마에 오른 펜테레이아는 열두 처녀 경호병과 트로이아 왕
족들을 거느리고 트로이아 군의 선두에 섰다. 그리고는 그리스 진영과 바닷가에 정박 해있
는 검은 선단 사이로 바람같이 공격해 들어갔다.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가 펜테실레이아가 오는 것을 본 병사들은 서로 이렇게 수근거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헥토르가 지휘햇던 트로이아 군을 이끌고 오는 저 장군은 누구인가?선
두에서 전차 부대를 지휘하면서 달려오는 것을 보니 흡사 신 같지 않은가!
트로이아 평원은 그 전에도 여러 번 그랬듯이 무수한 양귀비 꽃이라도 핀 것처럼 다시 붉게
물들었다.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아마조네스 부대는 그리스 군 중에서도 가장 용감한 정예 부대를 만
나 혹독한 값을 치렀다. 태양이 머리위를 채 지나가기도 전에 아마조네스 부대의 절반이 죽
음을 당했다. 여왕이 더할 나위 없는 슬픔과 분노를 느낀 것은 당연했다. 부하들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쫓긴 여왕은 그리스 전차 부대에 뛰어들었다. 그리스 전차병들은 산 속
에서 암사자에 쫓기는 가축 무리처럼 흩어졌다. 여왕이 외쳤다.
너희들은 프리아모스 왕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다. 오늘이야 말로 트로이아가 그리스에 그
값을 물게 하는 날이다. 디오메데스, 아킬레우스, 아이아스려,그리스의 용장이라 불리는 이들
이여, 나와서 내 창을 받아라!
여왕 펜테실레리아는 몇 차례나 트로이아 왕가의 군사들을 선두에 서서 그리스 군을 공격
했다.얼마 남지않은 아마조네스의 병사들은 여왕 옆에서 여전히 경호병 노릇을 했다. 여왕의
지휘를 받는 트로이아 전차들은 시체 위를 덜컹거리면서 그리스 군 속을 누볐다.펜테실레이
아 여왕은 흡사 검은 구름 사이로 보이는 번개처럼 동에 번쩍 서에서 번쩍했다. 그리스군은
다시 도랑 뒤로 밀려났다. 헥토르가 살아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트로이아 군속에서 횃불
든 병사들이 뛰어나와 검은 선단의 배에다 불을 지르려고 했다.
아킬레우으와 아이아스는 싸움이 시작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두 장군은 나름대로 트로이
아 군에게 기습 공격을 감행하느라고 진영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여왕 펜테실레이아
와 트로이아 군이 도랑을 건너는 것과 때를 같이 해서 진영으로 돌아온 두 장군은, 트로이
아 군을 선단에서 떼어 놓기 위해 질풍처럼 군사들을 몰아쳤다. 아이아스는 아마조네스는
본 척도 하지 않고 바로 트로이아 군을 공격했다. 어칼레우스는 여왕을 공격하는 한편, 여와
을 호위하고 있던 마지막 남은 다섯 처녀 경호병들을 순식간에 죽었다. 그토록 아껴오던 처
녀 경호병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 여왕은 두 그리스 장군을 향해 돌진해 왔다.
여왕이 아킬레우스를 향해 창을 던졌다. 하지만 창은 아킬레우스 방패에 맞으면서 땅바박
에 떨어졌다. 여왕은 아이아스에게도 창을 던지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나는 전쟁 신의 딸이다! 내 창 맛을 보아라!
그러나 그 창도 아이아스의 방패에 맞고 떨어졌다.아이아스와 아킬레우스가 껄껄걸 웃었다.
아킬레우스는 웃으면서 자기 이외에는 아무도 들지 못하는 창을 쳐들었다.여왕의 손이 칼
집으로 가는 순간 아킬레우스가 창을 던졌다. 창은 여왕 펜테레이아의 구리 방패를 뚫고 가
슴에 꽂혔다. 상처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콸콸콸 쏜아져 내렸다. 아킬레우스는 칼을 뽑아 이
번에는 여왕의 백마를 베었다. 여왕과 말이 동시에 거꾸러지면서 숨을 놓았다.
펜테실레이아 여왕은 폭풍에 쓰러진 어린 포플라 나무처럼 먼지 구덩이에 널부러져 있었다.
투구도 벗겨져 있었다. 펜테실레이아 여왕의 시체를 둘러선 그리스 병사들은 머리카락을 풀
고쓰러져 있는 여왕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놀라곤 했다. 아킬레우스는 슬픔과 동정을 느끼며
이미 숨이 끊어져 있는 여왕의 죽음을 애도했다.
여왕에 대해 비슷한 동정을 느끼고 있던 그리스군사들은 퇴각하는 트로이아 군을 더 이상
추격하려고도, 여왕과 처녀 경호병들의 갑옷을 벗기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여왕과 처녀
경호병들의 주검을 관에 넣어 프리아모스 왕에게 보내 주기까지 했다.
전날 아마조네스를 위한 환영 잔치를 베풀어 주었던 프리아모스 왕은, 그들의 주검을 화장
하고 그 재를 황금 관에 넣어 트로이아 왕들의 무덤에 묻어 주었다.
아킬레우스 전사하다
트로이아 장군과 왕자들, 그리고원로들이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프리아모스 왕도
함께 했던 그 자리에서 트로이아 인들은 멤논 왕이 올 때까지 성 안에서 방어만 하기로 결
정했다. 그들은 멤논 왕이 에디오피아 군대를 이끌고 출발한 시점이 아마조네스가 출발한
시점과 비슷했던 만큼, 조만간 트로이아 지원군을 몰고 당도하리라 믿고 있었다. 트로이아
군에서 가장 냉정한 사람으로 알려진 폴뤼다마스는, 기다릴 것도 싸울 것도 없이 헬레네에
게 올 때의 갑절쯤 되는 보석을 주어 메넬라오스에게 돌려 보내면 될 게 아니냐고 주장했
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파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폴뤼다마스를 비겁자라고 소
맃치면서 헬레네와 조금만 가까이 지내 보면 트로이아의 운명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을 자
라고 비난했다.
트로이아 군은 평원에서 후퇴하고 성안에서 기다렸다. 드디어 멤논 왕이 도착했다. 파리스
와 아킬레우스를 제외한다면 그만큼 풍채 좋은 사람은 트로이아 평원에 있을것 같지 않았
다. 멤논 왕은 이만 빼면 흰 것이 하나도 없는 군대를 이끌고 왔다.에디오피아의 강렬한 태
양에 그을려 병사들은 모두 새까맣게 되었다.
프리아모스 왕은 또 한차례 잔치를 베풀고는 커다란 금술잔에 포도주를 남실남실하게 따
라 멤논 왕에게 건네 주었다. 멤논 왕은 그 포도주를 단숨에 마셨다. 그는 싸움에 대해 큰소
리치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말을 했을 뿐이었다.
내가 만일에 훌륭한 장군이라면 싸움이 시작돼 봐야 드러날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은 일찍
자는 것이 좋습니다. 아침이면 싸워야 할 사람들이 잠을 안 자고 술 마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됩니다.
아침이 왔다. 멤논 왕은 새까만 군사들을 이끌고 평원으로 나갔다.만약 번쩍거리는 갑옷 차
림의 아킬레우스가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 싸움에 지치지 않은 멤논의 군사들을 보는 순간
그리스 군사들의 사기는 많이 꺆여 버렸을 것이다.
멤논 왕은 그리스 군의 왼쪽날개를 공격했다. 그는 이 공격전과 방어전에서 네스토르의 아
들인 안틸로코스와 맞붙었다. 멤논 왕이 이 젊은 왕자를 덮치는 기세는 흡사 검은 사자가
아기를 덮치는 것과도 같았다. 안틸로코스가 가까운 옛 왕릉 앞에 서있던 비석을 뽑아 멤논
에게 던졌다. 비석에 머리를 맞은 멤논 왕은 뒷걸음질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나 안틸로코스에게 창을 던졌다. 창은 가슴 가리개를 뚫고 안틸로코스의 가슴에
박혔다. 그는 이렇게 해서 아버지 네스토르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멤논 왕은 좌우를 무차별 공격하면서 안틸로코스의 주검에서 갑옷을 벗겨 내었다. 네스토
르는 아들의 주검에 접근할 수 없게 되자 전차를 타고 아킬레우스에게 달려가, 안킬로코스
의 주검이 욕을 보지 않게 도와 달라고 애원했다.
아킬레우스는 즉시 젊은 안킬로코스의 주검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이로써 멤논 왕과의
한 판 싸움은 피할수 없게 된 셈이었다. 멤논 왕은 아킬레우스를 맞기 위해 부하들을 뒤로
물렸다.멤논이 먼저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아킬레우스에게 던졌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방패
로 바위를 막으면서 달려나와 멤논 왕의 어깨를 찔렀다.부상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얼굴이
시커먼 멤논 왕은 창을 던져 아킬레우스에게도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입게 했다.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으나 아킬레우스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팔에는 아무리 부상
을 당해도 치명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킬레우스와 멤논 왕은 칼을 뽑아들고 맞붙
었다.
무수한 칼질이 서로의 방패와 투구를 때렸다. 두 사람의 투구 위에 달린 긴 말총 볏은 칼
에 잘려, 강풍에 떨어진 새처럼 땅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이 서로 노리는 것은
방패 가장 자리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무릎과, 방패와 투구끈 사이의 목줄이었다. 두 사람의
발 아래에서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이윽고 아킬레우스가 오랫동안 노리고 있던 곳을 먼저 재빨리 찌르고 들어갔다. 맴논은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아킬레우스의 청동 칼끝은 갈비뼈 사이로 파고 들었다. 맴논 왕이
땅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생명은 그의 몸을 떠났다.
아킬레우스는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진격했다. 온 그리스 군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스 군
은 트로이아 군을 성의 정문까지 추격했다. 정문은 병사들와 전차들, 쫒고 쫒기는 자들로 복
작거렸다. 그리스 군이 트로이아 성 안으로 밀고 들어간다면 기나긴 포위 공격전은 그것으
로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성문 위에는 파리스가 있었다. 파리스는 닳고 닳은
활시위를 새 것으로 갈아 끼우고 있었다. 그는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골라 시위에 먹이고
는, 성문을 밀고 들어오는 아킬레우스를 겨눠 사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화살이 날고 있을 동안 아폴론 신은 이것을 인도했다. 화살은 치열하게 접근전을 벌이고
있는 병사들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 드디어 아폴론이 노리던 과녁에 명중했다. 바로 무릎
가리개로도 가리지 못하는 발뒤꿈치였다. 아기 아킬레우스를 스튁스 강물에다 담글 때 어머
니 테티스가 손으로 쥔 곳, 따라서 스튁스 강물에 잠기지 못한 곳이 바로 아킬레우스의 발
목이었다. 아킬레우스의 몸에서 죽음이 파고들 수 있는 곳은 발목뿐이었다.
아킬레우스는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면서 외쳤다.
"어느 비겁한 놈이 멀리서 날 쏘았느냐? 그 자에게 이리로 내려와 창칼로써 나와 맞서라
고 하라."
그는 발꿈치에서 화살을 뽑았다. 피가 용솟음치며 흘러 나왔다. 피는 사방으로 튀었다. 아
킬레우스의 눈앞이 가물거리시 시작했다. 그는 비칠거리며 미친 듯이 창을 휘둘렀다. 그러나
힘이 다한 그는 걸음을 멈추고 창에 몸을 의지한 채 외쳤다.
"트로이아의 개들아! 나는 이렇게 죽는다만 너희들은 내 창끝을 피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겨우 이 말만을 남기고 아킬레우스는 앞으로 쓰러졌다. 갑옷이 땅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트로이아 병사들은 아킬레우스의 숨이 완전히 끊길 때까지 차마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
던지 그가 죽어가는 것을 구경만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죽어가는 사자를 바라보고 있는 사
냥꾼 같았다.
이로써 헥토르가 죽으면서 한 예언은 이루어진 셈이었다. 헥토르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아킬레우스가 성의 정문에서 파리스의 손에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었다.
그제서야 성문 앞 큰길에서 있던 트로이아 군사들이 아킬레우스의 주검을 갑옷째 차지하
기 위해 새카맣게 몰려들었다. 그리스 군사들 역시 장례를 치루려면 그 주검을 지켜 진영으
로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문에 그의 시신을 사이에 두고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양쪽 군사가 어찌나 빽빽하게 어우러져 있었던지 성벽 위의 트로이아 군사들은 저희 군사가
맞을까 봐 활도 쏘지 못했을 정도였다.
결국 오뒤세우스가 부상당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아킬레우스의 팔을 잡아 끌어 들쳐 업고
는 비틀거리며 선단 쪽으로 내달았다. 아이아스와 그의 부하들은 오뒤세우스의 뒤를 따르면
서 쫒아오는 트로이아 군을 막았다. 트로이아 군이 너무 접근할 경우엔 그들을 공격하여 다
른 트로이아 군 속으로 몰아넣고는 했다.
아킬레우스의 주검은 그의 막사로 옮겨졌다. 브리세이스를 비롯한 여자들이 그의 몸에서
피와 먼지를 닦고는 관 위에 눕히고 흰 겉옷으로 덮었다. 그리고는 곡을 하고 만가를 불렀
다. 살아 남은 그리스 장군들은 아킬레우스 자신이 얼마 전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
도하면서 그랬듯이, 긴 머리채를 잘라 그의 주검 위에 놓았다.
바다에서 그의 어머니<은빛 발> 테티스가 시녀 요정들을 데리고 물위로 솟아올랐다. 깊은
바다 수정의 방에서 여름 날의 파도처럼 솟아오르며 부르는 테티스 일행의 슬프고도 아름다
운 노래는 온 해변에 골고루 퍼져 나갔다. 공포에 질린 그리스 병사들은 해변에서 도망치려
고 했다.
그때 노와 네스토르는 이런 말로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혔다.
"두려워할 것 없다. 세상을 떠난 아드님을 보러 오신 그의 어머니와 바다의 요정들이다."
그제서야 그리스 병사들은 마음을 놓았다. 테티스와 바다의 요정들은 그를 둘러싸고는 인간
세상 여자들의 곡소리와 만가 부르는 소리에 신들 세상의 곡소리와 만가를 보탰다.
그리스 인들은 나무를 쌓아 거대한 화장단을 만들고 아킬레우스의 주검과 제물로 잡은 활
소, 꿀 항아리, 포도주 항아리를 올리고 불을 붙였다. 불이 사그러들자 영웅의 주검이 남긴
흰 재를 모아,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에서 꺼낸 손잡이가 두 개 달린 금술잔에 넣고 파트로클
로스의 재와 잘 섞었다. 이 금술잔을 다시 묻은 뒤 무덤을 높이 쌍호 봉우리 한가운데에 비
석을 세웠다. 그 땅을 지나는 사람과 바다로 나가거나 들어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누
구의 무덤인지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어서 아킬레우스를 추모하는 장례경기가 열렸다. 파트로클로스의 장례 경기 때처럼 전
차경주, 달리기, 권투와 시름 겨루기가 벌어졌다. 모든 경기의 우승자들에게 테티스는 귀하
고 명예로운 선물을 내렸다. 경기가 끝나자 테티스는 헤파이스토스 신이 특별히 만들어 준
아들의 귀하기 짝이 없는 갑옷을 가져다 무덤 앞에 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 갑옷을 가장 용감한 전사에게 드리겠습니다. 트로이아 군사들로부터 아킬레우스의 주
검을 빼앗아 이렇게 장례를 지낼수 있게 해준, 가장 큰 공을 세우신 분이 이것을 차지하도
록 하세요."
테티스는 이 말을 남기고는 바다의 요정들을 데리고 바닷속으로 되돌아갔다.
아이아스와 도윗세우스가 일어나 서로 자기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차지해야 한다고 말
했다. 두 사람은 각자 자기야말로 갑옷을 차지할 자격이 있으며 용감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
장 용감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왕 네트토르가 일어나 이런 말을 했다.
"남아 있는 우리들 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한 사람을 뽑아 이 갑옷을 준다는 건 예삿
일 이 아니오. 왜인 줄 아십니까? 이 갑옷을 차지하지 못한 사람은 속이 상할 것이고, 우리
가 자기를 푸대접한 것으로 오해할 것이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전과
다를 것이고,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큰 손실이 될 것임에 분명하오. 하지만 꼭 두 분 중에
서 한 분을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가 직접 하지는 말도록 합시다. 누구는 오뒤세우스를 선택
하고 누구는 아이아스를 선택한다면, 이 두 무리 사이에서도 적의가 싹틀 있으니 말이오. 우
리 진영에는 몸값이 지불되기를 기다리는 많은 트로리아 포로들이 있지 않소. 그들에게 심
판을 맡기기로 합시다."
"현명하신 말씀이오."
대왕 아가멤논도 만족스러워했다.
트로이아 포로들이 회의장으로 불려나왔다. 오뒤세우스와 아이아스는 그들 앞에서 연설을
함으로써 아킬레우스의 갑옷 소유권을 주장하기로 했다. 아이아스가 먼저 연설했다. 그런데
갑자기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포도주의 신 디오뉘우스가 아이아스를 취하게 만들어 버렸
다. 그래서 그의 연설은 엉망이 되었다. 그가 자기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좋았다. 하지
만 아이아스는 오뒤세우스를 깎아내리기 위해 그를 겁쟁이, 약골이라고 부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오뒤세우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이아스는 나를 겁쟁이, 약골이라고 합니다만 이렇게 부르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
는 일은 트로이아 인들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들은 나와 많이 싸워 보았으니 잘 알 것이고,
<트로이아의 보물>을 가져온 것도 나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파트클로
스의 장례 경기에서 나와 그가 싸운 것을 잊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부상을 갓 나은
몸으로 그와 싸웠습니다. 비기기는 했습니다만 이곳만 보아도 그는 나를 약골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트로이아 포로들이 의견을 모아 두 사람 중에서 오뒤세우스가 더 용감한 장군이며, 따라서
아킬레우스의 갑옷은 그의 차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아스의 얼굴이 검붉게 변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던
그는 친구들에게 끌리다시피 해서 회의장을 나갔다.
막사로 돌아갔지만 그는 그 날 해가 질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말도 하지 않았다.
디오뉘우스 신이 그에게 광기를 불어넣음으로써 벙어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어둠살이 끼
어 올 때까지도 아이아스는 그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둠이 깊어갈 즈음부터는 사악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맴돌았다. 그는 칼을 들고 어둠 속을 나섰다. 오뒤세우스의 막하를 찾아
가 그를 처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이아스는 오뒤세우스의 막사에 이르기 전에 양떼를 만났다. 그리스 군이 양식의
일부로 기르고 있는 양떼였다. 그는 양떼 속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양들을 죽이기 시작
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오로지 죽이기에만 열중한 것이다.
새벽이 오기 시작하자 그에게도 맨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오뒤세우스를 죽인 게
아니었으며, 대신 무수한 양의 시체 앞 피웅덩이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아스는 광기가 불러 일으킨 그런 불명예를 안고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칼을 뽑아 땅바닥에 거꾸로 단단히 세웠다. 그리고는 뒤로 조금 물러섰다가 그 칼끝 위로
몸을 던졌다. 칼끝이 심장에 박히면서 그의 광기도 그것으로 끝이 나 버렸다.
필록테테스의 독화살
아이아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알게 된 그리스 병사들은 통곡했다. 온 해변이 다 시
끄러울 정도였다. 오뒤세우스는 이런 말을 했다.
“트로이아 포로들이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나에게 주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지고 아이
아스가 이겨 그 갑옷을 차지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 것인가? 그랬어도 우리
그리스 군이 이렇게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되었을 것인가?” 그리스 군은 아이아스를 화장한
뒤 땅에 묻고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슬퍼했듯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스 군사들은 비록 그들이 헥토르를 죽이고 아마조네스와 멤논의 검은 군대를 물리쳤
으며 <트로이아의 보물>을 손에 넣었다고는 하나, 너무 많은 장군들을 잃었기에 가까운 장
래에 트로이아 성과 헬레네를 장악할 가능성은 십 년 전보다도 훨씬 적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절망에 빠진 그리스 장군들은 점쟁이 칼카스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 보았다.
칼카스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정신을 집중시키고 거기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들에게 말했다.
“렘노스 섬으로 가서 필록테테스를 불로 오십시오. 신들의 말씀에 따르면 필록테테스 없이
는 트로이아 성을 장악할 수 없습니다.”
필록테테스가 그리스의 렘노스 섬에 남게 되었던 경위는 이렇다. 십 년 전 트로이아를 향해
가던 그리스 선단은 물을 싣기 위해 렘노스 섬에 상륙했다. 그런데 그리스 군에 속해 있던
필록테테스는 그 섬의 산중에 살고 있던 독을 뿜는 용과 싸우게 됐다. 그 독 있는 용은 그
의 발을 물어 버렸다. 필록테테스가 결국 용을 쳐죽이기는 했지만 상처는 낫지 않았다. 독물
이 뚝뚝 듣는 상처는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가 어찌나 비명을 질러
댔던지 다른 병사들이 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리스 군사들은 필록테테스를 불쌍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꽉 막힌 공간이나 다름 없는 배
에다 그를 실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한적한 섬에다 두고 트로이아로 왔던 것이다. 그런
데 그로부터 십 년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야, 신들은 칼카스를 통하여 필록테테스 없이는
트로이아 성을 장악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디오메데스와 오뒤세우스는 그를 데리러 갔다. 적막한 무인도에 상륙한 그들의 귀에 고통
과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질러대는 필록테테스의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두 장군은 그 소리
나는 곳을 따라가다가 해변 바위 틈에 있는 동굴을 찾아 냈다.
필록테테스는 비참한 모습을 하고 거기에 있었다. 몸은 뼈만 남아 앙상했고 수염과 머리카
락은 길게 자라 있었으며 눈은 머리 깊숙이 쑥 들어가 있었다. 그는 활과 화살을 든 채 바
닷가 깃털 더미 위에 누워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동굴 바닥도 그가 잡아먹은 무수한
새들의 뼈와 깃털투성이였다. 그의 상처난 발에서는 여전히 독물이 뚝뚝 듣고 있었다.
오뒤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다가오는 것을 본 그는, 활을 들고 화살에다 자기 상처에서 듣
는 독을 묻혀 시위에 걸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손을 흔들어 적의가 없다는 뜻을 전하자 그
제서야 활과 화살을 바닥에 놓고 두 사람을 맞았다.
두 사람은 바위에 앉아 그 섬으로 온 까닭을 얘기했다. 그리고는 함께 가기만 하면 어떻게
든 상처를 낫게 해주고, 섬에다 버려 두고 왔던 일도 보상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의 말
을 들고 난 필록테테스는 함께 트로이아로 가겠다고 했다.
노잡이들이 필록테테스를 들것에다 실어 배로 옮겼다. 오뒤세우스는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
를 주워 불을 피우고, 거기에다 데운 물로 필록테테스의 상처를 씻어 주었다. 그런 다음 기
름을 바르고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 주기까지 했다. 그가 십 년 동안이나 막보지 못한 음
식과 포도주를 대접 하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을 트로이아를 향해 뱃길에 올랐다.
바람이 좋아서 검은 선단이 정박해 잇는 바다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뒤세우
스와 디오메데스는 필로테테스를 아가멤논의 막사로 데려갔다. 그는 대왕으로부터는 환영을,
마카온으로부터는 정성이 지극히 담긴 치료를 받았다. 아가멤논은 그에게 시중들 여자종 여
럿과 스무필릐 혈통 좋은말, 그리고 청동 그릇들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여종들을 시켜 그의
머리를 감기고 손질하고 빅기게 했다. 이렇게 해서 힘을 되찾은 필록테테스는 한시 바삐 활
을 들고 싸움터로 나가 트로이아 군을 향해 독화살을 쏘고 싶어했다.
그리스 장군들은 촉에 독을 묻히는 것은 의롭지 못한 짓으로 여겼다. 그러나 필로테테스
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십 년이라는 긴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익힌 것은 죽이는 일뿐이오. 나의 도움을 받
고 싶지 않다면 모르지만, 만일 받고 싶다면 내 방식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오."
그리스 군이 트로이아 성벽 밑에서 싸우고 있을 때였다. 파리스는 성벽 위에 서서 아래쪽을
향해 활울 쏘아대고 있었다. 필록테테스가 파리스를 보고는 이렇게 놀렸다.
"보아하니 활솜씨도 있고 아킬레우스 장군을 죽였을 정도의 화살도 있는 모양인데, 너만
있는줄 아느냐? 나에게도 활솜씨가 있고 헤라클레스로부터 대물림받은 활도 갖고 있다."
그리고는 재빠른 손질로 화살 하나를 시위에 걸어 쏘아 보냈다. 시위가 부르르 떨고 있을
동안 화살은 제 갈 길로 날아갔다. 화살은 파리스의 손등을 살짝 긁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심장이 세 번 뛸 동안 독은 그의 몸에 퍼졌다. 견줄 데 없는 고통이 불길처럼 파리스의 몸
속으로 퍼져갔다. 파리스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트로이아 군이
파리스를 성 안으로 들쳐 업고 들어 갔다. 의사들은 밤새도록 그를 치료했다. 그러나 그의
고통을 줄 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새벽이 되자 파리스가 소리쳤다.
"이제 내게 남은 희망은 단 하나뿐이다. 나를 이다 산 기슭에 사는 요정 오이노네에게 데
려다다오."
트로이아 병사들이 그를 들것에다 싣고 가파른 숲길을 올랐다. 파리스 자신이 애인을 만
나러 자주 오가던 길. 그러나 십 년 세월이 흐르도록 한 번도 다시 오가지 못했던 길이었다.
파리스를 들것에 실은 병사들은 마침내 오이노네의 동굴 앞에 이르었다. 안에서는 삼나무가
불에 타면서 내는 달콤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오이노네가 나짓하게 부르는 슬픈 노랫소리
도 들려 왔다.
파리스가 오이노네의 이름을 불렀다. 오이노네는 그 소리를 듣고 동굴 입구로 나왔다. 모
닥불이 지펴져 있기는 했지만 밖에서 보면 여전히 어두운 동굴을 배경으로 서 있는 오이노
네 마치 달처럼 창백했다.
병사들이 들것을 내리자 파리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오이노네의 무릎에다 손을 대고는
도와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오이노네는 치막자락을 걷어 쥐고 몸을 사렸다.
파리스가 사정했다.
"오이네노, 나를 미워하지 마시오. 나를 모르는 척하지 말아 주오, 이 고통은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한 고통이 아니오. 그대를 혼자 버려 두고 간 것은 나의 본뜻이 아니었소.,운명의
여신>모이라이가 나를 헬레네에게로 이끈 것이라오. 헬레네의 얼굴을 보기 전에 그대 품안
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나를 불쌍하게 여겨 주오. 한때 우리가 나누던 사랑을 생각
해서라도 여기 그대의 발치에서, 고통 속에 죽게 버려 두지는 말아 주오."
그러나 오이노네는 나지막하면서도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헬레네에게 반해 나를 떠난 뒤로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헬레네는 나보다 아름다
울터이니 분명히 나보다 더 잘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헬레네에게 가서 고통을 없
애 달라고 하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동굴로 들어가 모닥불 가에 앉아 울었다. 한동안 그렇게 울
고 나니 화가 풀렸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 동굴 입구로 나갔다. 그녀는 파리스가 당연히 거
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없었다. 파리스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자 들것 든 병
사들에게 어두운 숲 속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죽어가는 짐승이 그런 곳을 찾아들어간다
고 했던가. 오이노네가 여전히 동굴 입구에 서서 눈으로 그의 행방을 가늠하는 그 시각에
파리스의 숨은 이미 끊어지고 말았다.
들것 든 병사들은 서둘러 그의 시신을 떡갈나무 숲을 지나 성 안으로 옮겨 놓았다. 그의
어머니가 통곡하자 다른 여자들도 곡을 하기 시작했다. 헬레네는 헥토르가 죽었을 때 그랬
듯이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만가를 불렀다. 사람들은 화장단을 높게 쌓고 그의
시신을 그 위에 올린 다음 불을 붙였다. 불길은 어둠을 뚫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오이노네는 그런 줄도 모르고 어두운 숲 속을 헤매면서 사냥꾼에게 새끼를 빼앗긴 암사자
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녔다. 그러다 멀리 성 안에서 오르는 화장단의 불길
을 보게 되었다. 오이노네는 그 불길의 의미를 너무나도 달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서야
파리스가 온전하게 자기의 것이 되었다는 생각에서 울었다. 살아 생전에는 다른 여자에게
빼앗겼지만 죽어서나마 서로 만나 헤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오이노네는 달리기 시작
했다. 그녀는 가파른 떡갈나무 숲과 요정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숲 속을 내달아 평원에
다다랐다 평원에는 수많은 트로이아 백성들이 화장단의 불길 주위에 모여 있었다.
오이노네는 신부처럼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는 바른 발길로 군중 사이를 지나, 높이 솟는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는 불길의 혀가 별이라도 핥을 듯이 낼름거리는 속으로 뛰어
들러 파리스의 시신 옆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두 팔로 그의 시신을 안았다.
불길은 그 둘을 함께 태웠다. 불길이 사그러지자 사람들은 뒤섞인 재를 모아 황금 술잔에
단고, 돌로 만든 조그만 방에 그 잔을 넣고는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그로부터 긴 세월이 플렀다. 숲의 요정들은 무덤 위에다 두 그루의 찔레장미를 심었다. 이
찔레장미는 자라면서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서로의 가지를 상대 쪽으로 꼬아 나갔다. 그래
서 두 개의 가지가 아닌, 마치 하나의 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거대한 트로이 목마
파리스가 죽었지만 트로이아 왕가에서는 헬레네를 메델라오스에게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가면 비참한 죽음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트로이아 왕가로서는 헬
레네를 그런 지결으로 몰아넣는 불명예스러운 일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파리스의 형제
중 하나인 데이포보스에게 헬레에를 그의 집에 두고 보살피게 했다.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서 그리스 군은 트로이아 성에다 또 한 차례의 결정적인 공격을 가했다. 그러
나 트로이아 군은 튼튼한 성볍 뒤에서 화살을 소나기처럼 퍼부어 그들을 격퇴했다. 필로테
테스의 독화살도 소용 없었다. 독화살이 날아갈 때마다 트로이아 군이 돌로 된 성벽이나 나
무 문 뒤에 숨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병사들이 성벽을 기어오르면 트로이아 병사들
은 큰 돌을 떨어뜨려, 그리스 병사를 성벽에서 떨어뜨리거나 머리가 부숴지게 했다.
밤이 되자 그리스 군은 선단이 있는 곳으로 철수했다. 아가멤논은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
나 소집을 받고 달려온 장군은 얼마 되지 않아삳. 늘 그렇듯이 그들은 점쟁이 칼카스가 지
혜를 짜내어 주기를 기다렸다.
칼카스가 회의장 한복판에 서서 말했다.
"나는 매가 비둘기를 좇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둘기는 매의 추격에 쫓기다가 성벽 밑 바
위 틈에 숨더군요. 매는 꽤 오랫동안 비둘기를 따라 그 틈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더군요. 그래서 매는 위로 날아올라 역시 바위 틈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어리석은 비둘기가 태양 아래로 날아 나왔고, 매는 바로 그 순간 비둘기를 덮쳐서
죽였습니다. 우리 그리스 군은 바로 이 매를 본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린 힘만으로는 트로이
아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꾀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아테나 여신이 오뒤세우스의 마음에 기발한 생각의 씨를 뿌려 주었다. 원래
오뒤세우스는 꾀가 많아서 별명이 꾀주머니였다. 그는 일어나서 그리스 장군들에게 자기 생
각을 털어놓았다.
"병사들을 시켜 목마를 만드는 겁니다. 뱃속이 텅 빈, 거대한 나무 말을 만든단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군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들을 뽑아 완전 무장하게 하고 그 뱃속에 숨겨 놓
고서, 나머지 군대는 선단에 나누어 타고 고향으로 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아주 가는 것은
아니고 테네도스 섬 해안까지만 가서 그 섬 뒤에 숨어서 기다리는 겁니다.
트로이아 군은 칼카스가 말한 비둘기처럼 성밖으로 나오겠지요. 우리 그리스 군의 진영이
정말 텅 비었는지 궁금할 테니까요. 그러다가 거대한 목마를 보고는 우리가 왜 이런 목마
를 만들었는지, 왜 거기에다 두고 떠났는지 알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트로이아 병사들
이 목마를 너무 자세히 관찰하게 하면 안됩니다. 혹 이 목마를 해코지하거나 뱃속에 숨어
있는 우리특공대를 찾아내면 안 되니까요. 그러니 우리 그리스 인 하나를 뒤에다 숨겨 두
기로 합시다. 꾀 많고 용감한 사람이어야 하되 트로이아 병사들에게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
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뒤에 남겨 놓고는 트로이아 인들의 눈에 뛰게 합니다. 트로이아
병사들은 그를 사로잡고는 묻습니다. 그러면 그는 그리스인들이 마침내 희망을 버리고 고
향으로 배를 띄운 까닭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덧붙여<트로이아의 보물>을 훔쳐
아테나 여신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 한 그리스인들이, 여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거
대한 목마를 만들어 고향으로 가는 뱃길에 폭풍을 만나지 않게 해줄 것을 빌었다고 대답해
야 합니다.
그 말을 믿는다면 트로이아 인들은 이 목마를 성안으로 끌어 들여 아테나 여신의 신정에
전리품으로 바치겠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한밤중에 목마의 뱃속에 숨어 있던 특공대원들
이 밖으로 나와 성문을 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 때쯤이면 선단은 테네도스에서 돌
아와 트로이아 앞바다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칼카스가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 때 마침 새 두 마리가 오른쪽으로 날아갔다. 좋은 징조
라고 생각한 칼카스는 일이 계획대로 잘 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리스 전군에서 가장
솜씨 있는 목수이자 권투 선수이기도 한 에페이오스가 자기를 도울 병사들을 뽑아 일을 시
작했다.
다음 날 그리스 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사들이 손에 손에 도끼를 들고 이다 산으로 올라
가 나무를 찍었다. 이렇게 찍어 낸 참나무, 소나무, 단풍나무를 노새 등에 실어 그리스 진영
으로 운반했다. 에페이오스와 그 부하들은 나무를 갈라 판자를 만들기도 하고 다듬기도 했
다. 사흘만에 거대한 목마가 완성되었다. 늠름한 갈기는 아가멤논의 막사 지붕보다 높았다.
텅 빈배에는 스무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캄캄한 공간이 있었다.
오뒤세우스는 뒤에 남아 있다가 트로이아 군에 붙잡히는 역할을 맡을 지원자를 찾았다.
그러자 시논이라고 하는 젊은 병사가 일어나 자기가 그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그는 최전
선에서는 싸워 본 적이 없는 병사였다(만일에 최전선에서 싸웠다면 트로이아 병사들에게 낯
이 익었을 테고 그렇게 되면 곤란했다.) 그러나 용기만은 어떤 최전선 전투 경험자에 못지
않았다.
네스토르가 첫 번째로 목마의 뱃속에 숨는 특공대원이 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나이가 많아서 모두가 말렸다. 아가멤논도 두 번째로 지원하고 나섰다. 그러나 선단을 지휘
해서 테네도스 섬으로 가야할 사람도 그였고, 되돌아와서 연합군을 지휘해야 할 사람도 그
였다. 따라서 아가멤논도 곤란했다. 결국 메널라오스, 오뒤세우스, 디오메데스, 그리고 목마
를 만든 목수 에페이오스가 병사들을 데리고 목마 뱃속에 숨기로 했다.
그보다 조금 전에 메넬라오스가 오뒤세우스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만일에 트로이아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면(일단 뱃속으로 들어가기로 한 이상 기어이 함락시키지 못하면 그들
손에 죽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다스리는 도시 국가 중 하나를 주겠다면서 서로 가까이
살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게는 험
한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왕국 이타카 섬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래
서 이렇게 말했다.
"트로이아를 함락하고 우리 둘 다 살아 남는다면 그 때 내가 소원을 말하지요. 그대는 땅
이나 금덩어리를 주지 않고도, 사람을 주지 않고도 내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을 겁니다."
메넬라오스는 그 때가 오면 그 소원이 무엇이 되었든 기꺼이 들어주겠노라고 제우스신의
광명에 대고 맹세했다. 두 사람은 어깨동무를 하고 가서 갑옷을 챙겨 입고는 목마의 뱃속으
로 들어가 쪼그리고 앉았다.
뱃속에 숨을 특공대원들은 부드럽고 두꺼운 옷으로 몸을 감쌌다. 그래야 목마가 끌려갈
때 갑옷이 덜그럭거리는 바람에 들통나는 일이 없을 터였다. 특공대원들이 어둠 속에 쪼그
리고 앉아 기다릴 동안 밖에서는 병사들이 막사에다 불을 지르고 배를 띄웠다. 선단은 테네
도스 섬을 향해 나아갔다.
성벽에서 망을 보던 트로이아 병사들은 그리스 진영의 막사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는 연기
와 바다로 나아가는 선단을 보았다. 그들은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성문을 열고 해변으로
다가가 보았다. 그러나 혹시 그리스 군사들이 속임수를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완전 무장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과연 목재로 지어진 막사들은 불타고 있었고 진영에는 개
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굄목과 모래톱의 용골 자국만이 선단이 있었던 자
리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새 나무로 지어져 보릿대처럼 누런 빛깔인 목마는 바로 그
폐허가 된다시피 한 그리스 진영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프로아모스 왕과 왕가의 귀족들은 그 크기와 지어진 솜씨에 혀를 내두르면서 왜 그런 목마
를 지었는지 궁금해했다. 마음 한 켠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제사를 담
당하는 계급이 아주 놓은 사제 라오코온도 두 아들을 데리고 그 자리에 나와 있었다.
그는 목마에 다가서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소리를 질렀다.
"여러분, 그걸 만지지 마시오. 그리스 놈들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고 갔을 리 만무합니다.
틀림없이 무슨 꿍꿍이속이 있었을 겁니다. 저 속에 병사들을 숨겨 놓았다가 적당한 때 나
오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우리를 해치도록 사악한 마법을 걸어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입
니다."
그가 창을 들어 둥그런 목마의 배를 향해 던졌다. 창이 꽂히는 순간 속이 빈 목마의 배에
서 터엉 소리가 났다. 트로이아 병사들이 어쩌면 그를 도와 도끼로 배를 갈라 볼지도 모르
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였다. 병사들이 시논을 끌고 그 자리에 나타났다.
병사들은 프리아모스 왕 앞에다 시논의 무릎을 꿇리면서 말했다.
"갈대밭에 숨어 있는 걸 끌고 왔습니다. 발바닥을 불로 지지면 이 나무 괴물의 비밀을 털
어 놓을 것입니다."
그러자 시논이 외쳤다.
"나같이 비참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처음에는 내 백성이 내가 미워 죽이려 하더니 이번
에는 트로이아 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프로아모스 왕이 병사에게 시논을 일으켜 세우라는 눈짓을 보내면서 물었다.
"말하라. 무슨 까닭으로 너는 네 백성의 미움을 샀으며 모두들 떠났는데 무슨 연유로 여
기에 남게 되었는가. 네가 제대로 말하면 우리로부터는 미움을 안 받게 될지도 모르지 않느
냐?"
시논이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하, 물으시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팔라메데스의 친구이자 갑옷 담당입니다. 그런
데 사악한 오뒤세우스가 평소에 자기를 별로 안 좋게 보던 팔라메데스를 죽였습니다. 저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이 오뒤세우스의 귀에 들어갔던지 나까지 죽이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점쟁이 칼카스
가......"
시논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믿지 않으실 텐데 얘기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죽여주십시오. 아가멤논과
오뒤세우스도 제가 죽기를 바랄 것입니다. 저의 목을 자르시면 메넬라오스는 고맙다는 인사
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트로이아 사람들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프로아모스 왕은 얘기를 계
속하라고 명했다. 시논은 울면서 부들부들 떨며 얘기를 이어 나갔다.
"그리스 장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신들이 맡긴 뜻이 어떠한지 알아보았습니다.
그 뜻에 따르면 바람이 순조롭고 바닷가 고요하기를 바란다면 그리스 인 중 하나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군들이 칼카스에게 누구를 희생시켰으면 좋겠느냐고 묻자 칼카
스는 저, 시논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꽁꽁 묶이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 동안 그리스
병사들은 아테나 여신에게 평화를 비는 제물로 거대한 목마를 만들었고요. 저는 밧줄을 끊
고 도망쳐, 선단이 바다로 나갈 때까지 갈대밭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
쯤 저는 죽어 있을 것입니다."
시논이 어찌나 입담 좋게 얘기를 했던지 트로이아 병사들은 그 말을 믿고 손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어 주고는 뛸 듯이 좋아했다. 목마가 자기들에게 해코지를 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트로이아의 보물>인 팔라디온을 도난 당한 아테나 신전에 제물로 바치면 좋을 것 같
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트로이아 병사들이 목마를 끌어들이려는 찰나 끔직한 일이 벌어졌다. 거대한 두 마
리의 바다뱀이 아침 안개를 가르고 나와 해변으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두 마리의 뱀은 진홍
빛 볏을 세운 채 몸을 꾸불텅거리면서 물을 가르고 오는데, 어찌나 기세 등등한지 뒤로는
노 30개 짜리 겔리온 배가 일으키는 것과 맞먹을 만한 물결이 일었다. 사람들은 믿어야 할
지 믿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채로 바라보고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돌아서서 냅다 뛰었
다.
두 마리의 괴물은 해변으로 올라왔다. 눈은 바다의 불길로 번쩍거렸고 벌어진 입에서는 끝
이 갈라진 혀가 낼름거리고 있었다. 괴물은 식식거리면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그런데 바로 이 두 마리의 괴물이 라오코온의 두 아들을 덮쳐 똬리를 옥죄기 시작했다. 아
버지 라오코온이 두 아들을 구하러 달려갔지만 이미 때늦은 다음이었다. 괴물은 터지고 일
그러진 두 아들을 몸을 버려 두고 라오코온에게 달려들었다.
얼이 빠진 트로이아 병사들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창 같은 것을 던질 수 있었을 때는, 이
미 두 괴물이 라오코온을 감고서 목과 몸을 옥죄고 있을 즈음이었다. 라오코온은 하늘이라
도 찢을 듯한 비명을 한 차례 지르고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생명이 그의 육신을
떠난 것이었다.
그제서야 두 마리의 바다뱀은 평원을 지나 트로이아 성으로 들어갔다. 아테나 신전의 여사
제들이 그 뱀을 보았다. 뱀은 대리석 바닥을 지나고 거대한 여신상의 방패 뒤로 들어가더니
여신의 발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사라졌다.
프리아모스 왕 일행은 알아보지도 못하게 터지고 찌그러진 라오코온과 두 아들의 시체 앞
에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서 있었다. 그들은 두 마리의 뱀이 분노한 아테나 여신을 대신해
서, 여신의 거룩한 목마에 창을 던진 라오코온에게 복수했다고 생각했다. 여신의 화를 가라
앉히려면 그 거대한 제물을 성안으로 들여 신전으로 모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은 거대한 목마에 밧줄을 걸고 흡사 배를 진수시키듯이 목마의 앞에다 굴림 대를 달
아 굴렸다. 밧줄을 당기는 조가 편성되었다. 시논도 밧줄을 당기는 조에 들어 있었다. 목마
는 울퉁불퉁 한 평원을 지나 성의 정문으로 통하는 큰길로 들어섰다.
트로이아 백성들이 목마를 맞으러 정문 앞 큰길로 몰려 나왔다. 아이들, 처녀들 할 것 없이
삼으로 꼰 밧줄에 매달려 밧줄 끌어당기는 것을 도왔다. 앞일을 미리 아는 능력이 있는 프
리아모스 왕의 딸 카산드라는,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순간부터 목마는 트로이아의 재앙이 될
것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고함소리와 신을 찬양하는 노래와 춤에 파묻힌 채, 목마는 마지막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리
고 오랜 전쟁이 남긴 돌무더기를 지났다. 물론 뱃속에 숨어 있는 특공대원들과 함께였다. 정
문 위의 두 망대 사이를 지나고 가파른 길을 오르자 트로이아 성의 높은 지대에 자리잡은
성채, 아테나 신전의 안뜰이었다.
몰락하는 트로이아 성
온종일 트로이아 사람들은 기쁨에 겨워 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했다. 그들은 다음 날의 거룩
한 잔치를 준비하느라고 신전을 떡갈나무와 은매화 가지로 치장했다. 준비가 거의 끝나자
어둠이 내렸다. 사람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날이 뜨기 전이었다. 어둠에 묻힌 채 그리스 선단이 테네도스 섬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노
잡이들은 소리도 없이 노를 젖고 있었다.
비좁은 목마의 뱃속에 다닥다닥 붙은 채 웅크리고 있던 우뒤세우스 일행은 잔뜩 긴장한 채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논도 신전의 벽 위에서 몹시 긴장된 표정으로 바
다 쪽을 바라보면서 아가멤논 대왕이 지휘하는 선단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단에서
배들이 해변에 접근했다는 신호를 보내면 시논은 목마의 뱃속에 숨어 있는 특공대원들에게
그것을 알리기로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다음이라서 트로이아는 고요에 묻혀 있었다.
마침내 신호가 왔다. 바다 저쪽의 어둠 속에서 불빛이 반짝거렸다. 시논은 두근거리는 가슴
을 달래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 위에서 뛰어내린 그는 목마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
다. 목마는 달이 떠오르면서 은빛으로 빛나는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었다. 목마의 배
밑에 숨어 있는 특공대원들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에페이오스가 목마의 소나무 빗장을 열자 뚜껑 문이 열렸다. 거기에서 밧줄이 내려왔고 그
밧줄을 타고 메넬라오스와 오뒤세우스 그리고 디오메데스를 비롯한 특공대원들이 땅바닥으
로 내려섰다.
그들은 무장한 유령들처럼 소리 없이 신전 앞에서 성의 정문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는 문
지기들을 죽이고, 물밀 듯이 밀려오는 그리스 전우들을 위해 성문을 활짝 열었다. 잠든 트로
이아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병사들로 이루어진 검은 물결은 곧 불꽃의 강이 되었다. 횃
대를 하나씩 든 병사들이 정문 초소에서 불을 옮겨 붙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횃불을 들
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불을 질렀다.
잠을 자고 있다가 엉겁결에 무장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리스 군을 맞은 트로이아 군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했다. 어둠 속으로 아이들과 여자들의 비명이 퍼져 나갔다. 방패로 내
려치고 칼로 베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불길은 삽시간에 성 전채로 번져 갔다. 흡사 바
람을 받고 번지는 들불 같았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그 자리에 없었다. 목마의 배에서 내려온 뒤로 그를 본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아우토메돈을 비롯한 한 무리의 군사를 거느린 디오메데스는 왕의 침실을 찾아 내었다. 바
깥을 지키던 경호병들은 순식간에 몰살을 당했다. 그들은 지붕으로도 횃불을 던져 올렸다.
지붕 위에서 경호병들이 묵직한 기왓장을 벗겨 아래로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방패로 가린 채 그들은 도끼로 문을 두들겼다. 빗장이 부서져 내렸다. 청동 돌쩌귀가 부서지
면서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스 군은 안마당과 침실과 기둥사이를 누비면서 앞을 가로막는
경호병들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였다.
어떤 빗장도 어떤 칸막이도 어떤 칼도 그들을 막아 낼 수 없었다. 이 복도 저 복도로 몰려
다니던 그들은 마침내 가장 안쪽 뜰 앞에 이르렀다. 뜰에는 가정의 수호신을 위한 제단이
있고, 그 위로는 우람한 월계수 고목이 붉게 물든 하늘을 가리기라도 하듯 제단을 덮고 있
었다.
왕비와 왕자들은 바로 그 안뜰에 한 덩어리로 있었다. 흡사 폭풍우 몰아치는 날 둥우리에
오구구 모여 있는 비둘기 떼 같았다. 하지만 그 안뜰도 그들의 피난처는 되지 못했다. 제단
앞에 꿇어앉아 신들에게 기도하고 있던 노왕 프리아모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길과 전쟁의 광기에 취한 젊은 병사 하나가 프리아모스 왕의 한 수염을 잡고 제단 계단
으로 끌어내리고는 단칼에 왕의 몸을 갈랐다. 그의 못에서 용솟음친 피는, 그가 신들에게 제
물을 드리곤 하던 제단을 적셨다.
그리스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왕가의 여자들을 끌어 내었다.
성 안은 온통 불바다였다. 사방에서 죽고 죽이는 소기가 들려 왔다. 벽이라는 벽, 지붕이라
는 지붕은 모조리 내려앉았다. 십여 년이나 버티어 온 막강하던 트로이아 성이 무너지는 순
간이었다.
그러나 헬레네는 왕가의 여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메넬라오스는 불붙은 나무 조각들이 비오듯 쏟아지는 왕궁 속을 샅샅이 뒤지다 데이포보스
의 집을 찾아갔다. 프리아모스 왕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 있는 왕자가 데이포보스인만큼
헬레네가 거기에 있을 것으로 짐작했던 것이었다.
그 집 앞에 이르는 순간 메넬라오스는 집을 제대로 찾았다는 것을 알았다. 데이포보스는
가슴에 창을 맞은 채 입구에 쓰러져 있었다. 데이포보스의 피 웅덩이에서 시작된 핏빛 발자
국이 현관을 지나 건너쪽의 어두운 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메넬라오스는 사냥감의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그 발자국을 따라갔다. 가다가 그는 오뒤
세우스를 보게 되었다. 오뒤세우스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중앙의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나 있는 창으로는 지붕을 태우는 불길이 보였다. 그의 팔목은 검
붉은 피로 젖어 있었다.
메넬라오스는 칼을 뽑아 든 채 문 앞에 서서 물었다.
"헬레네는 어디에 있소? 만일에 그대가 헬레네를 숨기고 있다면‥‥‥."
오뒤세우스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오늘 아침 그대는 내게 맹세했소. 내가 요구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주겠다고 말이오.
그것이 무엇이든."
"그럼 요구하시오. 그러면 그것은 그대 것이 될 것이오. 나는 맹세를 어기는 사람이 아니오.
지금이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기는 하오만‥‥‥."
오뒤세우스가 말했다.
"나는 <예쁜 뺨> 헬레네의 목숨을 요구하오. 나는 이 목숨을,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례로 헬
레네에게 돌려줄 것이오. 내가 <트로이아의 보물>을 찾아 이 성으로 들어왔을 때 헬레네는
내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소."
그 큰 방 안에 오랫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벽 저쪽에서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
어서 더욱 무시무시한 침묵이었다. 그 때 헬레네가 옷자락을 모아 쥐고 숨어 있던 구석 자
리에서 앞으로 나섰다. 헬레네는 메넬라오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금발이 앞으로 쏟아져 내
렸다. 헬레네는 아무 말 없이 두 손으로 내밀어 메넬라오스의 무릎을 어루만졌다.
메넬라오스는 선 채로 헬레네를 내려다보면서 자기를 배신하고 파리스에게 가던 일, 집을
비우고 자식을 버리고 떠나던 일을 떠올렸다. 오뒤세우스에게 했던 약속만 아니라면 단칼에
죽였을 터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오뒤세우스에게 한 약속이 있었다. 그 약속 때문에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메넬라오스는 여전히 선 채로 헬레네를 내려다보면서 파리스가 오기 전에 서로 나누었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의 마음 속에서 연민과 사랑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가 뽑아
들고 있던 칼이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몸을 구부리고는 헬레네를 일
으켜 세웠다. 헬레네의 하얀 팔이, 불타는 트로이아의 연기 때문에 연방 기침을 해대는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
새벽이 왔다. 트로이아는 재가 되어 있었다. 아테나의 신전도 거대한 목마도 재가 되어 있
었다. 그리스 병사들은 금과 은, 상아와 보석을 나누어 가졌다. 프리아모스 왕은 왕가 수호
신의 제단 앞에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리스 병사들 손에 죽음을 당한 트로이아 병
사들의 시체는 거리에 쌓인 채로 개들과 독수리 떼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로이아의 여자들
은 선단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새 주인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안드로마케가 등을 떠밀리면서 뮈르미돈의 새 주인이 기다리는 배에 오르고 있을 즈음, 헥
토르의 아들은 이미 성의 망대 밑에 떨어진 채 죽어 있었다. 절망을 느낀 안드로마케가 던
졌던 것이었다. 카산드라 공주는 등을 떠밀리면서 아가멤논의 배에 올랐다. 불화의 여신이
한 알의 사과를 던진 이래, 그 모든 불화의 씨앗 노릇을 해왔던 헬레네만이 지아비 메넬라
오스의 배로 모셔졌다. 노예로서 등을 떠밀린 것이 아니라 왕비로 모셔진 것이었다.
오랜 포위 공격전은 이렇게 해서 끝이 났다. 싱그러운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그리스 대선
단은 얕은 물길로 나섰다. 노잡이들은 흥겨움에 젖은 채 노를 저었다. 그들의 뒤에 남은 것
은 물떼새의 울음 소리와 여전히 연기가 솟는 트로이아의 폐허뿐이었다. 선단은 오래 전에
떠나온 고향 항구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첫댓글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어릴 때 작은 책으로 읽다가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보구 싶네요.
네...저도 대충의 이야기는 알고 있습니다만 깊이는 모르고 있죠. 세계문학사에 빠질 수 없는 작품일 겁니다. 언제 기회 보아 집중 탐구를 해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