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의 일상
임병식 rbs1144@daum.net
요즘 버스를 타고 자주 외출한다.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람을 쏘이고자 함이다. 뚜렷한 목적지가 없는 만큼 버스에 오르면 느긋하게 자리를 잡고 허리를 편다. 그러면서 차창에 비치는 정경을 바라본다.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풍경이 제법 볼만하다.
이렇게 하는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집사람이 세상을 떠나자 한동안 멘붕상태에 빠졌다. 무력증이 몰려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내의 죽음은 다른 죽음과는 차원이 달랐다. 흔히 아내의 죽음을 일러 고분지통(鼓盆之痛)이라고 한다. 그것을 막연히 단어로만 받아들렸는데 아픔의 크기와 실체를 느끼게 된다.
그간 나는 70평생을 살면서 부모님의 죽음, 형제자매의 죽음을 겪어보았다. 그때마다 아픔이 많이 밀려왔는데 아내의 죽음은 그 모든 것을 압도한 것이었다. 살을 맞대고 함께 자식을 낳고 길러서일까. 꼭 그것만도 아닐 것이다. 함께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가. 50년이 넘지 않았는가.
사람이 어떤 결행을 하는 데는 계기와 결심이 필요하다. 먼저 집에만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에 두 가지를 결심했다. 그중 하나는 헨드폰에 만보계를 설치했다. 애초에 만보를 걷는 건 무리이고, 되도록 많이 걸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버스를 타는 것이다.
전에 나는 거의 버스를 타지 않았다. 어디든지 승용차를 이용했다. 그러다가 차를 폐차 시킨 지 수년이 되는데, 그때는 택시를 이용하거나 지인의 차를 이용했다. 그 바람에 노선버스가 어디서 어디를 지나는지 전혀 모르고 살았다.
승차표는 미리서 확보한 것이 있었다. 예비로 사둔 것이 있고 차를 폐차시키니 시에서 버스이용카드를 지급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70세가 넘은 노인에게 일률적으로 승차카드를 주었다.
첫날은 버스 승강장에 서서 눈앞에 도착하는 2000번 버스에 올랐다. 어디로 가나 했더니 그 버스는 웅천을 지나 신월도 차고지에 도착했다.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승차한 나는 내려서 기다렸다가 다시 그 차에 올랐다. 그런데 이 버스는 여천을 지나더니 부영여고 뒷길을 거쳐 처음 내가 타던 여서동에 도착했다.
다음날에는 동네에서 777번을 타니 한재를 지나 서시장 쪽으로 내달렸다. 서교동 육교부근에서 무작정 내렸다.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것이 구경거리도 보였다. 인파를 헤치고 남산동 어시장으로 향했다. 비릿한 생선냄새가 코를 찔렀다.
별로 살 생각도 없으면서 가격을 물어보았다. 아귀가 큰 것은 2만원, 작은 것은 만 오천 원을 달라고 한다. 그만한 크기의 물메기도 물어보니 가격이 대동소이하다.
다음날은 집에 있는 책을 준비하여 81번 버스에 올랐다. 경찰서쪽으로 간다는 안내문자가 내왔던 것이다. 경우회에 책을 전달하고 이번에는 83번을 타고 한재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밖에도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노선버스가 많았다. 다 한번씩 타보자면 한 달은 걸리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보니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적어졌다. 돌아다니니 만나는 지인마다 얼굴 화색이 좋아졌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여수에서 함께 사는 조카가 구례로 바람이나 쏘이자고 하여 민물참게탕을 먹고 하동의 토지문학관 무대와 연지지 나무, 수석경매장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심란해하는 나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배려를 한 것이다.
버스투어를 하지 않는 날은 걷기를 한다. 주로 아파트 모퉁이를 걷는 것이지만 어느 때는 좀 더 멀리 나가 2키로미터쯤 떨어진 야산 초입까지 걷기도 한다.
아파트를 돌때는 3천보가 채 나오지 않는데, 외곽으로 나가 걸으면 일 만보가 쉽게 넘어선다. 걷는 것은 확실히 좋은 것 같다. 이것은 앞으로 계속 실천하려고 한다.
나는 집사람을 떠나보내면서 크게 느낀 것이 있었다. 남들이 다 해놓고 있다는 ‘무의미한 연명치료거절’ 등록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보니 병원응급실에서 실랑이가 있었다. 독감으로 인한 급성폐렴이 왔는데, 향후 예후를 물으니 2,3일 넘기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것저것 많은 주사를 꼽기에 연명치료는 거부한다고 하니, 엉뚱한 짓을 한 것이었다. 자녀들의 전화를 알려달라기에 별 생각없이 가르쳐주었더니 통화를 했는지 ‘최다한의 조치를 해달라’고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병원이라는 것이 환자나 보호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돈만 챙기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보다 더 황당한 것은 환자를 마음대로 특실에 일방적으로 입실시킨 것이었다. 일반병실은 하루 4-5만원인데 특실은 30만원이 넘었다. 가족과는 상의도 하니 않고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보고 ‘날강도’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보고서 상을 치른 후 나는 건강보험공단에 달려가 ‘무의미한 연명치료거부’를 한다는 신고부터 했다. 그 증서가 오늘 도착했는데, 왜 진작에 이것을 해두지 않았던가 후회가 된다.
내게는 한달 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며 느끼는 것은 살아가며 알아야 하고 챙겨야 할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에게 속지 않고 살려면 매사를 꼼꼼하게 챙기며 살아야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버스를 타거나 걷기를 할 때마다 ‘매사 불여튼튼’을 가슴에 새긴다. (2024)
첫댓글 반백년 생의 반려를 여의신 슬픔과 상실의 아픔 속에서도 변화를 찾아 활력을 회복해가시는 선생님 모습에 안도해봅니다
저도 연명치료 거부 신청을 해야겠습니다
노선별 시내버스를 타보는 것은 아주 유익한 발견인 것 같습니다 걷는 것도 좋고요 새로운 시도에 격려를 보내드립니다
평상심을 되찾기 위해 나름 이런 저런 방법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우선 밖으로 나오니 시간이 잘 가고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걷기운동은 건강에도 도움이 될듯 합니다.
연명치료 거부는 미리서 해두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병원에서는 돈벌기 위해 막무가내로 가족의 말은 무시하고 강행을 하려고 들더군요.
부모, 형제자매와는 불과 몇 년 함께 살지만, 부부는 50여년 한 이불 속에서 살았으니 더 애틋할 것 같습니다. 장자 같은 無爲自然을 일삼던 위인도 아내가 죽고 나니 鼓盆之歎하였으니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사모님과의 愛別離苦는 너무 아픈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마음을 心機一轉하시고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연명치료 거부, 사내버스 탑승과 만보걷기는 잘 하신 것 같습니다. 주옥 같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달아 주시니 고맙습니다.
집사람 떠난지 달포가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도 안정이 안되고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너무 추워서 외출도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