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youtube.com/watch?v=BDbF_-blBNI
2022년 11월 20일(주일) 갈라디아서 5:13~26 ‘성령의 열매맺는 삶’ 찬송가 182장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오늘은 갈라디아서 5:13~26 말씀을 중심으로 ‘성령의 열매맺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가을을 흔히 ‘결실의 계절’이라고 부릅니다. 가을은 농작물의 추수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은 겨울을 대비하여 가을에 먹이를 저장하고, 털을 가진 동물들은 이 시기에 털이 더 치밀하게 자라고 많은 새들은 겨울의 추위를 피해서 적도 쪽으로 이동하는 계절입니다. 사람도 살아가면서 열매를 맺게 되는 데,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 두 종류의 열매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육체의 일 곧 육체의 열매’((19~21절)이고, 하나는 ‘성령의 열매’(22,23절)입니다. 육체의 열매는 19절에서 21절에 제시되어 있는데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이고,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22절과 23절에 9가지를 제시하는데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그것입니다. 육체의 열매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그대로 놔두어도 저절로 맺는 열매입니다. 그에 비해서 성령의 열매는 제3위의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성도들 안에 거하시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하게 만들어서 맺게 하시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는 똑같이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 육체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있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어떤 특별한 사람들만 맺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된 성도들은 누구나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내가 참된 성도인지 아닌지, 내가 성령의 사람인지 아진지를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점이 됩니다.
성경에는 열매라는 단어가 201번이나 가록되어 있는데요. 구약성경에는 ‘열매’라는 단어가 127번이, 신약성경에는 74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첫 번째 등장하는 열매는 에덴동산에서 등장하는 ‘선악과 열매’와 ‘생명나무 열매’입니다. 또한 신약에서 열매를 강조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데요.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는 37번이 기록되어 있구요. 또한 바울 서신에는 23번, 야고보서에는 6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오늘 본문의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 외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 좋은 열매, 나쁜 열매, 빛의 열매, 의의 열매, 처음 익은 열매, 선한 열매, 입술의 열매가 있습니다. 이 열매들은 어떤 행동들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의 성품에 의한 열매와 삶에서 오는 열매는 모두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마태복음 7장 1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그 나무를 잎사귀가 아니라 열매로 판단할 수 있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 성도들로 세상의 빛이 되고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21절에서는 “진리를 따르는 자마다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는 그들이 범죄한 결과로 땅에 나타난 나쁜 열매입니다. 반면에 포도와 무화과열매는 의와 선한 삶의 열매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의 마음은 열매를 맺는 수확의 차이에 따라 네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길가밭, 돌짝밭, 가시떨기밭, 좋은 땅(옥토)입니다. 이 네 종류의 밭은 네 종류의 신자와 같은 데 그 중 옥토의 신자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나머지 밭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쭉정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이 ‘천국의 비밀’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들이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이유는 그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 15:8)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두 가지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살려면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25절). 성도가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을 도구 삼아서 기술을 연마하여 무언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되 육체이 지배가 아니라 본능의 지배가 아니라, 욕심의 지배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Be mastered by Holy Spirit) 자체를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본 시몬이라는 사람이 돈으로 성령을 얻으려 했을 때 사도들의 꾸중을 듣습니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성령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서 주인되도록, 내 삶에 주인이 되도록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 성령으로 사는 바른 길입니다. 열매맺는 성도의 특징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성령께 사로잡혀 사는 삶입니다. 나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전에는 본능이 지배하는 삶이었고, 죄가 지배하는 삶이었다면 예수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다음의 삶은 성령에 의해서 지배받는 삶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기 이전의 삶은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사는 탐욕의 존재였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로마서 7:5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기 전에는 율법 때문에 죄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성령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과 육체의 욕망대로 살고자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마치, 텔레비전 방송 저녁9시 뉴스 시간에 KBS 뉴스를 볼 것이냐, MBC 뉴스를 볼 것이냐, 채널을 어디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화면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채널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욕망대로 살 것인가?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결과에 대하여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스란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행복하면 행복한대로 우리가 선택을 잘 한 것이고, 불행하면 선택을 잘못하였기에 불행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살 것입니까, 아니면 육체의 욕망대로 살 것입니까? 성령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거룩함으로, 사랑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는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살려면 성령으로 행해야 합니다(25절). 25절에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도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 ‘성령을 따라’는 ‘성령 안에서(in)’또는 ‘성령에 의하여(by)’라는 뜻입니다. ‘행하라’는 원어는 ‘두루 다니다’라는 말로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성령으로 행한다’는 의미로 직역하면 ‘성령을 따라 일렬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는 성령을 따라 일렬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범죄 이후 죄의 종이 된 우리는 아무리 의롭게 되고자 애써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자유한 자’로 불러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육체의 소욕이 아닌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행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헛된 영광을 얻고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시기와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19절에서 21절의 육체의 일을 행하게 되고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합니다. 천국에 갈 수 없게 되고, 그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15절에도 “피차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고 성령으로 행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 안에 두 가지 소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체와 성령은 단순히 비슷하게 대적하는 관계가 아니라 16절에 보니 ‘성령’은 분명히 ‘육체’보다 우월적 대립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성령으로 행하면, 결코 육체의 욕심이 우리 안에 거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 안에는 항상 성령이 주시는 생각과 육체의 소욕이 존재합니다. 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이 주시는 생각과 마음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따라서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지 못하면 성령이 주시는 생각을 따를 수 없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됩니다. 롬 8:13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 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체의 소욕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받고 성령을 따라 행할 때 모든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성도의 내면에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동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혼란을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령과 육체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내 육체를 못박아야 합니다. 이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힘들다고 중단해서도 안되고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2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수준에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회심의 순간에만 머물러 있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아직도 이런 체험을 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믿음이란 기독교 교리에 동의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승리, 영광, 생명 이런 것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성취하신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만큼 십자가와의 교제는 중요하고 유익합니다. 우리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바울처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옛 사람과 세상과 육체와 그 정욕과 탐심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것을 안다고 해도 십자가를 질 생각도 하지 않고,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을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주님의 제자로써 주님의 길을 따르려면 우리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 오로지 주님 만을 바라보고 그 분의 뜻만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지 못한 사람은 자아를 이길 수도, 세상과 죄를 이길 수도 없습니다. 또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직까지 십자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옛 자신에게 미련을 끊지 못함으로 승리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옛 사람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어버릴 때까지 자신을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내적인 고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할 때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닮은 증거들이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힙니다. 성령의 열매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맺힙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맺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통한 성품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얼마만큼 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성령의 열매가 얼마나 맺혔는가? 를 계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마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3에서는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권고합니다. 우리 인간은 다 죄에 물들어 타락하고 부패하여서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가 성령님을 의지하면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히게 해주실 것입니다. 열매맺는 일을 성령께 맡기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날마다 말씀 속에서 내 죄와 부족을 보며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나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업적을 헛되이 자랑하며 내 영광을 구하지 않고 성령으로 살며 성령으로 행하는 비결이며, 그렇게 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신앙의 연수나 무성하게 달린 잎사귀보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성령의 열매가 많이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할 육체의 일을 그치고,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함으로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분노하고 다투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헛된 영광을 구하는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여주옵시고, 성령에 사로잡혀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날마다 나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성령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