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강인춘 |
그는 서울의 3.1운동을 목격하고 경고문을 지참하여 충주에 돌아와 이를 충주읍교회에서 수백 장 인쇄하였다. 3월 10일경 범바위(虎岩里)에서 충주 농업간이학교 졸업기념 야유회가 열렸을 때 교사 유흥식(柳興植), 학생 오언영(吳彦泳), 장천석(張千石), 유석보(劉錫寶) 등이 만세시위를 모의하고 교회측과 연결을 맺게 됨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게 되었다. 4월 8일 역시 기독교인인 김종부(金鐘富)의 주창으로 주모자들은 탄금대 권태은(權泰殷)의 방에 모여 충주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하고 김종부는 칼로 자신의 왼팔을 찔러 그 피로 태극기를 그리고 장양헌의 구술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글을 태극기에 적어 내렸다.
그는 또 같은 기독교인 최명희(崔明熺)와 함께 엄정면 목계리 김종태(金鐘台)를 포섭, 만세운동을 벌이도록 했다. 그러나 거사 직전 비밀이 탄로나 장양헌을 비롯해 김종부 오언영 최명희 장천석 유석보 등이 체포되었다. 그해 5월 3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재판에 회부되어 장양헌은 징역 6개월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기독백과)
역사를 통하여 국난을 당하면 기독교인이 항상 선두에 선 것을 보게 된다.
신세원 목사 ...@kid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