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자는 최치원의 17세 손인 최진립과 그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고
손자인 재경 최국선으로부터 28세 손인 문파 최준에 이르는 10대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린 일가를 일컫는 말이다.
경주 교동의 최부잣집 대문과 충의당忠義堂의 사랑채
경주 최부자집 의 가훈은 둔차鈍次 이다.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함 즉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이다.경주 최부자집의 집안을 다스리는 제가齊家의 가훈 '육훈'六訓과
자신의 몸을 닦는 수신修身의 가훈 '육연六然'이 있다.
'육훈六訓'
▒①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마라,
▒② 만 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만 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③ 흉년에는 남의 땅을 사지 마라,
▒④ 과객過客은 후히 대접하라,
▒⑤ 며느리들은 사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⑥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육연六然'
▒① 自處超然 자처초연: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② 對人靄然 대인애연: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③ 無事澄然 무사징연: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
▒④ 有事敢然 유사감연:,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⑤ 得意淡然 득의담연: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⑥ 失意泰然 실의태연: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
기와담 사이의 문양들. 귀면鬼面과 천년千年의 미소 이다.
泛海 범해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掛席浮滄海(괘석부창해) 돛달아 바다에 배 띄우니
長風萬里通(장풍만리통) 긴 바람 만리에 나아가네
乘槎思漢使(승사사한사) 뗏목 탔던 한나라 사신 생각나고
採藥憶秦童(채약억진동) 불사약 찾던 진나라 아이들도 생각나네
日月無何外(일월무하외) 해와 달은 허공 밖에 있고
乾坤太極中(건곤태극중) 하늘과 땅은 태극 중에 있네
蓬萊看咫尺(봉래간지척)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니
吾且訪仙翁(오차방선옹) 나 또 신선을 찾겠네
홀로가는 구름
孤雲 최치원崔致遠
여보게 자네
품안에 자식이오
內外도 이부자리 안에 內外지
야무지게 산들 뾰죽할 거 없고
덤덤하게 살아도 밑질 거 없다
속을 줄도 알고 질 줄도 알자
주머니 든든하면 술 한잔 받아주게
나도 돈 있으면 자네 술 사줌세
거물 거물 서산에 해 걸리면
지고 갈껀가 안고 갈껀가
중국 양주시의 [최치원기념관] 안의 최치원 동상
해운대라는 이름을 선사한 통일신라시대의
유명한 학자인 고운 최치원의 동상과 해원정
경주 최부자집 조상 최치원 일화 한토막
한·중 오랜 인연과 교류 강조
얼마 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한·중 정상회담에서 신라 말의 대석학 최치원崔致遠(857~?)의 시 '범해泛海' 일부를 소개하여 화제입니다.시 주석은 "한국과 중국은 역사가 유구하다" 며 "당나라 시대 최치원 선생님은 중국에서 공부하시고 한국에 돌아가셨을 때 '괘석부창해 장풍만리통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이란 시를 쓰셨다.풀어서 말씀드리자면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네'이다" 고 말했습니다.
최치원은 8~9세기 신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인이자 국제통이었습니다.
열두 살 때 당나라에 조기 유학을 떠나 빈공진사에 급제하는 등, 당나라가 요구하는 기준에 도달했던 외국인이었습니다. 최치원이 남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권은 한국 최고最古의 문집이며, 당나라 실록實錄을 보완할 수 있는 사료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황소黃巢의 난 때 적장賊將 황소에게 보낸 격문檄文은 명문 가운데 명문입니다.
중국에서 최치원에 대한 평가는 대단합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지성인 퇴계 이황, 율곡 이이는 몰라도 최치원은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입니다. 최치원이 벼슬살이를 한 적이 있는 양저우시揚州市에서는 당성唐城 유적지에 최치원기념관을 짓고 10월 15일을 '최치원의 날'로 정하여 매년 기념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학자를 이처럼 기리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최치원의 시 '범해泛海'는 28세 때 당나라 생활을 정리하고 신라로 돌아오면서 항해 도중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득한 대해大海에 배를 띄우니 속세에서의 욕망이 덧없이 느껴진다는 내용입니다.
중국 시인 소동파蘇東坡(1036~1101)가 '적벽부赤壁賦'에서 인간의 존재를 '푸른 바다에 좁쌀 한 톨'로 비유한 것과 비슷한 정취가 엿보입니다. 이런 시정詩情을 가질 수 있도록 한 소재가 봉래산입니다. 봉래산은 전설상의 산으로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는 듯, 나도 신선을 찾아보리라"고 한 것을 보면, 최치원은 항해 도중 삼신산을 생각하며 가보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시 주석이 인용한 구절은 첫 부분입니다. "돛 걸고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에 만리를 통하네 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라는 내용입니다. 돛과 바람이 조화를 이루어 배가 만리라도 흘러갈 듯 하다는 것입니다.
시 주석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구절을 해석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한국과 중국이 인연이 깊고 문화 교류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위 구절을 인용했음을 생각할 때,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중국의 유구한 전통문화(長風)', 특히 당나라 문화가 최치원 같은 훌륭한 인재를 통해 '주변 제국으로 전파됨(萬里通)'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조선일보 기사>
최치원崔致遠(857~?)
신라 말기 육두품 출신으로 857년 태어나, 12세 때 당唐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 18세에 빈공진사에 급제했다. 당나라 말기인 875년 소금장수인 황소黃巢가 일으킨 '황소의 난' 토벌에 참전하여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해지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 쓰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
신라로 돌아온 뒤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육두품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올라 개혁을 실시하려 했으나 귀족세력의 반대 등으로 좌절되자 은둔을 결심하였다. 유·불·선 통합 사상을 제시하였다.주요 저서로는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등이 있다. 부산 해운대의 빼어난 절경에 매료돼 동백섬 바위에 자신의 호 '해운海雲'을 새겨 <해운대> 라는 지명을 유래시켰다. 말년에 해인사 가야산에 들어가서 신선이 되였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