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교구 사목국장 김영호 신부를 만나서 대구대교구의 보수성에 관한 논란을 되짚어 보았다. 지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실린 '권력의 아성에서 탈출하는 교회, 대구대교구'라는 기사에서 다룬 바와 같이 "이효상의 후예들의 도시"로서, 지난 박정희 정권 이후에 줄곧 "권력과 밀착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온 대구교구이지만 진보의 역사도 살아있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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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신부는 대구교구 설정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쇄신과 전환의 기회로 삼기를 갈망했다(사진/한상봉 기자) | 정치권력에 보호받고 수혜 누려온 대구대교구 40년
김영호 신부는 그동안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보호받고, 수혜를 누려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특히 1980년대 전두환 정권시절의 언론통폐합 때의 <매일신문>, 팔공산 도립공원 안의 '팔공컨트리클럽' 조성 등등의 예를 들었다. 대구대교구의 사회사목은 '복지'에 집중되어 있는데, 1970년대 후반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 엄청난 숫자의 복지기관을 정부로부터 수탁 또는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대구대교구 내부에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 5월 광주항쟁과 1987년 6월 민주화투쟁을 겪으면서 일부 사제들이 '시대의 징표를 외면하면 안 된다'며 교구장에게 직언하고 시대의 문제에 사제들이 함께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 대구교구는 사회, 정치적 문제 대신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사업에 주력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대구대교구가 안고 있는 정치적 문제이기도하고 또한 교구 직권자의 사적인 인맥의 한계이기도 하다.
(전임 서정길 대주교는 박정희 정권 초기에 유력한 대구지역 평신도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이효상 씨를 민주공화당에 입당시킨 장본인이며, 이효상 씨는 대구대교구와 군사정권이 밀월관계를 유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효상 씨는 1963년 국회의장으로 피선된 뒤로 8년(6대, 7대)동안 의장직을 유지하며 1969년에는 3선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켜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안정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1972년에는 유신체제 아래서는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 당 총재 상임고문 등을 맡으며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17년 동안 요직에 있었다. 그리고 이문희 대주교는 이효상의 아들이다.)
대구대교구가 보수의 길을 걸어갔지만, 진보적 신학을 바탕으로 교회쇄신을 바라는 사제들 또한 있었다. 이들 사제들은 교구로부터 징계를 받기도 했고, 교구는 '건전하지 않은 기도회를 엄금 한다'는 공문을 보내기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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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청은 남산동 일대에 성모당을 포함해 넓은 공간 안에 자리잡고 있다.(사진/한상봉 기자) |
대구대교구에서 배척당한 사람들, 교회 떠나
김영호 신부는 "대구교구는 보수적인 역사를 걸어왔다. 그러나 그 안에는 더 치열하게 싸워 온 사제들이 많다. 이들의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2011년 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는 대구대교구의 역사 편찬 과정에 이런 진보적인 흐름들, 교구에서 거부당하고 배척되었던 이들의 역사도 기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역사는 노동자, 빈민, 학생 등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적 투신과 헌신, 민주화 운동의 소중한 경험이 배어 있기 때문이고, 또한 이들이 역사가 대구교구의 역사를 더욱 의미 있고 풍요로운 역사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광주항쟁 이후 1980년대 초반에 경북대학교 가톨릭학생회(빨마) 학생들이 교구청을 점거한 적도 있었다. 이들은 "대구교구는 민족의 고통에 함께 하는 교회로 쇄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사건 이후로 1980년대 후반까지 대구교구에서는 가톨릭대학생회와 빈민운동, 청년운동 하던 거의 모든 조직들이 와해되었다. 교구는 '가톨릭'이란 이름으로 집회를 열지 못하도록 엄금했다. 이 때문에 교회에 실망한 젊은 활동가들이 대거 교회를 떠났다. 그래서 1987년 6월 항쟁 때에는 대구교구에서는 움직일 수 있는 교회의 단위조직이 하나도 없었다.
이러한 대구대교구 안의 진보적 학생운동이 1980년대 후반부터 복구되기 시작했다. 물론 교구에서 인준 받은 단체는 아니었지만, 단위 대학별로 '우리성서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성서동아리를 만들고, 관심 있는 사제들과 함께 활발한 모임이 추진되었다. 이 당시 운동의 흐름은 이후 생태운동으로 확대되어 귀농학교도 열고, 생협 및 생활한복 등 입을 거리와 먹을거리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운동도 함께 벌여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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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남산동 성모당에는 많은 신자들이 연일 찾아와 기도를 올린다. 대구대교구 7대 교구장인 서정길 대주교 상이 보인다. 서 대주교는 대구대교구가 권력밀착과 보수적 견해를 갖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사진/한상봉 기자) |
순명 강조하는 성모신심, 성직자 권위주의 부추겨
그러나 대구대교구에는 생협운동이 활발하게 자리 잡지는 못했다. 현재 한국교회의 모든 교구에서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등이 결성되면서, 많은 본당에 생협(생활협동조합-유기농직매장)이 있지만, 대구대교구 내 본당 안에는 생협이 거의 없다. 이를 두고 김영호 신부는 "대구대교구는 사제들의 권위주의와 성직자 중심주의가 강해서 설령 어느 사제가 본당에 생협을 만들어도 그 사제가 바뀌면 후임 사제의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없어지곤 했다. 본당의 모든 일이 본당 신부의 독단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대구대교구에서 유난히 주교와 사제 등 성직자 중심의 권위주의가 강하다. 안동, 영주, 대구 등 대구경북지역은 특성상 유가(儒家)의 분위기가 지배적이어서 사제들은 양반이나 선비처럼 여겨지고, 그래서 사제들이 아무리 평신도들을 하대(下待)해도 별로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라고 한다. 게다가 대구대교구의 유난히 깊은 성모신심이 성직자 권위주의를 강화시키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대구교구청이 자리 잡고 있는 남산동에는 유명한 기도처로 '성모당'이 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인 성모당은 1918년 초대 대교구장인 드망즈(안세화)주교에 의해 건립 되었다. 성모당은 프랑스 루르드 동굴을 모델로 지어졌는데, 안세화 주교는 부임 후 루르드의 성모께 3가지를 청원했다고 한다. "주교관과 신학교를 건설하고, 주교좌 성당을 증축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주교관을 위해 예정된 대지안의 가장 좋은 장소에 루르드의 동굴과 유사한 동굴을 세워 드리겠습니다." 성모당은 대구대교구 신자들의 성모신심이 자라나는 터전이 되었다.
성모신심은 성직자와 교회에 대한 조건 없는 '순명' 의식을 고양시켜 왔는데, 김영호 신부는 "성모신심은 순명을 강조해서, 자칫 신자들이 성직자와 교회의 입장에 반대하는 것은 '큰 불경(不敬)을 저지르는 것으로 여기는 유아적 신앙에 머물게 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대구대교구는 2000년 대희년에 즈음해 1차 시노드를 열었고, 교구설정 100년을 준비하면서 2차 시노드를 진행하고 있지만, 아무리 많은 논의가 있더라도 주교와 사제, 평신도들 사이의 소통의 부재가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신부나 주교님이 한 마디 하면 끝이라는 그런 냉소주의와 패배주의가 교구가 극복해야 하는 큰 문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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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구대교구 사제들은 4대강 사업 저지운동을 시작으로사회참여에 적극 나서고 있다. (사진/한상봉 기자) | 이명박이 신앙의 대상인가?
대구대교구는 '생명평화연대'라는 이름으로 사제들이 모여서 4대강 사업 저지운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교구 분위기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신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대부분 사제들이 먼저 "왜 정치적 운동을 하느냐?"며 따져 묻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나라당 비판하다가 대구에서 몰매 맞기 쉽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김영호 신부는 "4대강 사업 반대하는 걸 '정치적'이라고 매도하면 안 된다.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것만 정치고, 받아들이고 침묵하는 것은 정치가 아닌가? 특별히 이명박 정부의 일에 대해선 비판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교회는 복음의 잣대로 모든 것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 김영호 신부는 "교회가 정치에 간여해선 안 된다고 하는데, 교회 역시 지역주민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지역 문제에 대해 외면해선 안 된다."며 "이명박 정부가 신앙의 대상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비판 없이 무조건 순명하고 따라야 할 대상은 하느님뿐이다. 요즘은 교리마저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고자하는 신학적 논의가 허용되는 시대인데,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해서도 안 되고, 무조건 따라야 하고, 무조건 밀어줘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한나라당이, 이명박 정부가 언제부터 우리 신앙의 대상처럼 되었나?"고 지적했다.
대구지역은 지역 주민이나 교회나 마치 이성이 마비된 것처럼 보인다고 김 신부는 안타까워한다.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태도 없이, 무조건 "찬성이냐, 반대냐?"만 묻는다는 것이다. 진실이나 정의, 합리성과 공공성에 대한 관심은 없고 무조건 찬성과 반대로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분위기가 대구를 망치고 있는 주범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김영호 신부는 "앞으로도 우여곡절이 많겠지만, 시대가 바뀌고 있다. 변화하는 역사의 큰 물줄기는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대구교구만 해도 교구가 전향적으로 쇄신되기를 바라는 젊은 사제들이 많아지고 있어 희망적이다. 그런 절박함 속에서 새로운 것이 나올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경상도 기질이 "필(feel)만 꽂히면 물불 안 가리고 투신한다."는 점에서 방향을 잘 잡아주는 것(올바른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대구대교구 생명평화연대에 참여하는 사제들은 다양한 연령층의 사제들로, 연장 사제들이 앞에서 마당을 만들어 주고, 젊은 사제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참으로 고무적인 모습이고 또한 그런 모습에서 대구대교구의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한다.
교구설립 100주년, 대전환의 성령강림사건 일어 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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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는 설정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 지금 대구대교구는 변화의 큰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것처럼, 2011년 교구설정 100주년을 맞이하고, 새로운 교구장을 기다리고 있다. 2007년 이문희 대주교가 은퇴한 뒤로, 2009년 8월에 최영수 대주교가 선종하고, 그 후 조환길 주교가 교구장 직무대행으로 있다. 조환길 주교는 2010년 사목교서에서 "100주년 기념사업이 잘 추진되고 100주년이 우리 교구가 한 단계 도약하는 전환점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기도와 영성이 그 토대가 되어야 함을 잊지 말자"고 말했다.
그 전환점을 제대로 돌기 위해 대구대교구는 스스로 성찰하고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김영호 신부는 "교구설정 100주년을 맞으면서, 지난 2000년 대희년 때에 교황청이 근현대사에서 교회가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해 전 세계 시민들에게 용서를 청했던 것처럼 대구대교구도 100주년을 맞이해 교구가 지난 100년의 역사를 겸허히 성찰하고 반성하며 지역 사회에 범한 과오가 있다면 겸손히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구대교구가 지역사회에 헌신하는 새로운 교회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감사와 봉헌의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100주년에 대한 의미와 기대를 덧붙였다.
그러나 대구대교구는 새로운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난제들은 많다. 대구지역 자체가 분지로 쌓인 폐쇄적인 공간이라는 지리적 여건과 유가(儒家)적인 지역적인 정서와 오랜 보수화의 고착이라는 정치적 환경으로부터 교회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 역시 주교와 사제, 평신도들이 학연, 지연, 혈연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고 또한 교회 구성원들이 민주적 소통과 동반자적인 관계 안에서 교회에 참여 하기보다는 오랜 세월 지시와 통제아래 길들여져 왔으며, 이에 따른 사제들의 냉소주의와 패배주의, 평신도들의 교회에 대한 무관심과 개인주의적인 신앙관도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나 성령의 바람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불어올지도 모른다. 가톨릭교회의 결정적 전환을 이루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한 요한 23세 교황 역시 1959년 1월 25일 공의회 소집공고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나에게 넌지시 일러 준 바도 없고 보면, 나의 결정에 가장 놀란 것은 나 자신이었다." 요한 23세는 그 결정이 "불현듯 성령께서 감도하신"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은 성령께서 하시고 우리는 다만 손만 얹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대구대교구의 성령강림 사건이 발생하기를 기대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대구대교구청에서 나오는데 뜨거운 복중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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