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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강림절을 일러 교회의 생일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시고 난 후 제자들은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만났으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의 박해가 두려워서, 제자들은 거리에 나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따라서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에 힘썼습니다. 마침내 오순절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성령,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였습니다. 모여서 기도하는 자리에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고, 마치 불의 혀같이 갈리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숨어있던 방에서 나와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리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였습니다. 어떤 고난도, 박해도, 어떤 어려움도, 그들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오히려 그것을 영광으로 알고, 기뻐하며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에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에스겔서를 읽었습니다. 에스겔서의 시대적인 배경은 바빌론 포로기입니다. 주전 587년에 이스라엘 유다 왕국은 바빌론 제국에 의하여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유다왕국의 군사들은 밀려드는 바빌론 군대에 철저하게 짓밟혔고, 절대로 함락되지 않을 것으로 믿었던 예루살렘성도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예루살렘은 천연적인 요새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웬만한 외부의 공격은 막아내기에 적합한 지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지파별로 가나안 땅을 분배했는데, 가나안 족속인 여부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 성은 정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것은 사사시대를 지나서 다윗왕 때였습니다. 다윗 왕이 비로소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래서 예루살렘은 다윗의 도성이 되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쉽게 정복되지 않는 천연적인 요새였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이 절대로 함락되지 않는다고 하는 확신은 그런 지형적인 요인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어떤 도시입니까?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요, 하나님의 도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데, 하나님이 지켜주시는데, 그런 도시를 그 어느 나라 군대가 공격하고 함락시킬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인간적인 힘, 군사적인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제사장들이나 거짓 예언자들은 백성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져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세 차례에 걸쳐서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오고 말았습니다.
유다왕국은 망하고 왕과 지도자들까지 포로로 끌려온 상황이기에, 바빌론의 그 강력한 군대에 맞서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나라도 없고, 군대가 없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그들에게는 회복과 구원의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왔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졌기에 더 이상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의 은총을 덧입기를 기대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진 상황 속에서, 백성들에게는 신앙에 대한 회의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가? 하나님은 과연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의 주님이신가 하는 영적인 회의에 빠져든 것입니다. 그야말로 유다 백성들은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버렸다’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지로 끌려온 백성들 가운데, 에스겔이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백성들 모두가 절망에 빠져있는 현실 가운데 하나님은 이 에스겔을 당신의 예언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환상 중에 하나님은 에스겔을 어떤 골짜기로 데려가셨습니다. 그 골짜기에는 마른 뼈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골짜기에서 과거에 한바탕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었고, 그 전투에서 희생된 수많은 군인들의 유골이 그렇게 흩어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뼈들은 뜨거운 햇빛과 건조한 환경 속에서 바짝 말라 있었습니다.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죽음과 절망의 골짜기였습니다. 이러한 절망의 골짜기는,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도 무너지고,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와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듯 하였습니다.
이 절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물으셨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는데, 여러분이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과학적이나 경험적으로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니요, 살아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솔직하기는 하지만 물으시는 하나님 앞에 불신을 드러내는 것 같아 망설여집니다. 참,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입니다. 그 때 에스겔은 대답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대답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판단을 회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살아날 수 있다고 긍정하지 않으니 부정적인 판단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주님이 그 대답을 아십니다. 물론 그것들은 살아날 수 없습니다”라고 부정적인 의미로 풀어서 해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나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는지, 못 살아나는지, 나는 모르고,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면 뜻이라면 이 마른 뼈들을 살리실 것이고,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이고,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이 대답 속에는 에스겔의 믿음과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있습니다. 인간의 죽고 사는 것을 포함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역사, 절망의 탄식이 희망의 탄성으로 바뀌어질 수 있는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절망의 골짜기지만, 그러나 거기에 희망이 있다면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이 원하시면 능히 행하실 수 있다고 하는 바로 이 고백에 인간의 마지막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뼈들을 향하여 당신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에스겔은 마른 뼈들이 살아나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마른 뼈들에게 선포했습니다. 과연 에스겔이 마른 뼈들을 향하여 대언할 때 그 뼈들이 소리를 내며 움직이더니 서로 연결되고,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그 위에 가죽이 덮였습니다. 뼈들이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그 위에 가죽이 덮였으니 겉으로는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아직은 살아있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생기를 명하여 “그 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누워있는 사람들 속으로 생기가 들어가자 비로소 그 사람들은 살아 숨 쉬고 강력한 힘으로 전진하는 하나님의 군대로 변화되었습니다.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사람이 겉모습만 멀쩡하다고 해서 모두가 살아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나 목적을 찾지도 못하고 아무런 희망도 얻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기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생기입니다. 생기는 히브리어로 ‘루아흐’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창조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진흙을 빚어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겉 모습은 사람이지만, 아직은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코에 당신의 생기를 불어 넣으셨을 때, 진흙 덩어리 인간은 비로소 생령이 되었습니다. Living Being.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생기는 그래서 살리는 영입니다. 생명의 기운입니다.
오늘 에스겔이 본 골짜기의 마른 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자, 마른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그 위에 살이 돋고 가죽이 없였습니다. 분명히 사람의 꼴을 가졌지만, 생기가 들어가기 전까지는 살아있는 존재라 할 수 없었습니다. 생기가 그들 소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비로소 살아나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마치 진흙덩이와 같은 무기력한 절망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사람들이 새로운 존재로 재창조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마른 뼈와도 같이 메마르고 무감각하고 죽어있는 영혼이 살아나기 위해서, 절망과 무기력의 상태에서 벗어나 강력한 하나님의 군대로 변화되는데, 두 단계를 거쳐야 했습니다. 첫째로, 이렇게 놀라운 생명의 역사는 먼저 말씀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태초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을 때,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무질서와 공허와 허무와 혼돈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시니 거기에 질서와 의미와 생명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창세기 창조 이야기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이 있는 곳에 주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무질서 속에 말씀이 임할 때 거기에 질서가 생기고, 공허와 허무 가운데 말씀이 임할 때 거기서 인생은 충만한 의미를 찾게 됩니다. 가치관의 혼돈과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함에 절망하는 순간, 거기에 말씀이 임하면 삶의 의미가 생기고 희망이 생기고 그것은 곧 삶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메마르고 공허하고 희망이 없다면, 먼저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으로 채울 때, 거기에 새로운 희망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평화가 사라지고 기쁨과 감사가 사라졌다면,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삶의 자리가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와 같을지라도, 그 절망의 골짜기에서도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생명의 회복과 소망의 빛줄기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생기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생기가 그 속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그는 살아있는 생령이 되고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의 역사를 위해 헌신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기는 곧 하나님의 숨이고 호흡이며, 다른 말로 번역하면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할 때 우리 인간은 진정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신앙과 인격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우리에게 은사를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군대로서 맡은 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능력을 주고, 모든 난관을 이기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소망 없이 절망과 탄식의 골짜기에 던져진 마른 뼈와 같은 사람들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면 넉넉히 일어나 살아있는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생명과 진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말씀을 붙잡고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간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지금 나의 영혼이 마른 뼈와도 같다고 느끼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오늘 내 삶의 자리가 에스겔의 골짜기와도 같이 생기가 사라지고, 희망도 사라지고,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끼지는 않으십니까?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골짜기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또 다른 새로운 땅이 아니라, 바로 그 마른 뼈들로 가득한 죽음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마른 뼈를 살리시고 생기를 불어 놓으시고, 하나님의 군대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떠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명령하셨을까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 문화의 중심으로서 영광의 도시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제자들은 성공과 승리를 기대했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몇 날이 못되어 예수님은 바로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말았습니다.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습니다.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은 더 이상 희망의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도시입니다. 그 고난을 받으실 때 예수님을 지켜드리지도 못하고, 오히려 부인하고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곳은 실망과 수치의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박해에 대한 두려움의 땅이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머물고 싶은 순간과 자리가 있고, 반대로 하루 속히 벗어나고 싶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나 자리가 있습니다. 성공의 자리, 영광의 자리라면 오래토록 그 땅에 머물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실패와 수치, 좌절과 아픔의 자리는 떠나고 싶어집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제자들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과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골짜기에 마른 뼈들을 일으켜 하나님의 군대로 삼으셨던 바로 그 생기입니다.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의 숨은 너무나도 짧고 얕아서 하루를 살아내기에도 너무나 힘들고 금방 숨이 찹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하며 그 생기로 충만한 삶을 산다면, 우리의 하루가 더욱 생기가 넘치고 즐거움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변하지 않는 표어가 있습니다. 말씀과 함께, 성령과 함께입니다. 말씀과 함께, 성령과 함께, 하루 하루 인생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