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텔라의 마음공부 >
결핍에 대한 소고(小攷)
글 | 스텔라 박
유전자 속 결핍에의 기억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존재에게 있어 결핍은 유전자 속에 깊게 뿌리 박혀 있는 의식이다. 동물 생활을 하던 시절, 호모 사피엔스는 먹을 거리를 사냥하기 위해 지구를 뛰어다녔고 사냥감은 그리 호락호락 잡혀주지 않았으며 그래서 먹을 거리는 늘 부족했다. 그래서 한 번 사냥을 하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가장 칼로리가 높은 부위를 먼저 먹었다. 그렇게 인간은 태생적으로 고지방 고칼로리 음식을 좋아하게 된다. 모두 그 시절, 우리들의 DNA에 각인된 결핍의 정보 때문이다. 탕수육과 새우 튀김을 보고 입맛을 다시는 것은 당신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호모 사피엔스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 당신의 결핍을 직면하고 인정하라.
하지만 결핍이 당신을 사로잡게 놔두지는 말아라.
결핍이 당신에게 인내와 친절, 예지를 가르치게 하라.”
- 헬렌 켈러
니까야에 나타난 결핍의식
농경생활을 시작하고 잉여물이 생겼지만 인간은 충분함을 모른다. 그래서 잉여물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디가 니까야(27) 중 <세상의 기원에 관한 경(Aggañña Sutta)>에 보면 본래 우리들은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천상에 머물며 길고 오랜 세월 살게 된다.”고 씌여 있다.
그렇게 마음으로 이루어져 마음대로 살던 중, 어떤 게으른 중생이 “왜 저녁에 저녁식사를 위해 쌀을 가져오고, 아침에 아침식사를 위해 쌀을 가져와야 하지? 아침과 저녁식사 거리로 한꺼번에 쌀을 다 가져와야겠다.’라고 생각하고 행한다.
처음엔 “난 충분합니다.”라고 말하던 다른 중생들도 이제 그를 따라서 아침과 저녁식사 거리로 한꺼번에 쌀을 가지고 온다. 니까야에 따르면 현재의 쌀이 쌀겨 즉 껍질로 싸여 있는 것은 인간이 축적을 시작하면서부터라는 것이다. 니까야의 구절 그대로 인용하자면 “결핍이란 것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벼는 무리를 지어 자라게 되었다.”고 한다.
작용 반작용인 셈이다. 내가 세상과 나를 생각으로 분리시키니 나와 세상(여기에서는 벼)이 둘이 된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 탐욕을 품게 되니 그 대상은 스스로를 지키고자 자신을 더욱 방어하게 되는 것이다.
니까야의 구절들을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인류 집단 무의식의 기록물이라고만 여길 수는 없다. 세존께서는 법안으로 세상의 기원과 종말을 모두 보셨을 터이니 이는 상징이라기보다 실제 상황이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예수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뤄냈다는 성경 구절 역시 단지 예수의 영성지도자 스펙 부풀리기로만 볼 수는 없다. 어쩌면 누군가가 떡 다섯 조각과 생선 두 마리를 같이 먹자고 내놓은 것에 대해 다른 이들의 마음이 열려 주머니 속에 꿍쳐놓았던 먹을 것을 모두 꺼내 이런 훈훈한 미담이 생겨난 것일 수도 있겠다. 또 다른 가능성은 예수의 설법으로 그 장소에 있었던 대중들 모두 더 이상 나와 너를 구별하지 않고 결핍의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을 때, 그들이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신비한 기적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부족한 존재(I am not enough.)
결핍의식의 뿌리는 나 자신에 대한 부정이다. 현재의 나는 완전하지 않다는, 나는 부족하다는, 충분치 않다는 믿음 말이다.
완전했던 당신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형제자매의, 친구의, 선생님의 말에 조건화되어 점점 스스로가 충분치 않다는 것을 완전히 믿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믿기 때문에 당신은 충분치 않은 존재, 부족한 존재가 된다. 왜? 우리는 생각하는대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이 마음이 짓기 때문이다.
욕망은 욕망을 욕망한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진 이들일지라도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99를 가지고 있으면 1을 빼앗아서라도 100을 채우려 한다. 욕망은 욕망을 욕망한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억만장자이자 동시대 최고의 부호였던 존 로커펠러(John D. Rockefeller)에게 한 기자가 질문했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돈이면 충분한 것입니까?”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쬐끔만, 쬐끔만 더 있으면 됩니다.(Just a little bit more.)”
갈애… 그렇다. 마셔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타는 듯한 목 마름…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 아귀란 상상속의 괴물이 아니라 아무리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자신이었다.
홀로코스트를 지나온 유대인들은 아무리 큰 부자가 되었을지라도 늘 결핍의식을 안고 산다. 그들은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좋은 요리를 사먹을 수 있는 돈이 있지만 부패한 음식을 버리지 못하고 먹는다고 한다. 또한 지금이 지나면 또 언제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과식을 하는 경우도 있단다. 음식을 저장하는 강박증 역시 자주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2-3년의 경험이 그들 평생의 행동을 좌우하는 영향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결핍에의 기억…
1960년대에 태어나 초등학교 때 육성회비를 한두 번 늦게 납부해 담임 교사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아본 경험을 갖고 있는 이들은 안다. 결핍이 얼마나 구차한 것인지를. 생활환경 조사랍시고 같은 반 친구들이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데 “집에 자가용 있는 사람 손들어봐.”, “피아노 있는 사람?” 묻던 교사 앞에서 손들 것이 별로 없었던 이들에게 있어 결핍은 감추고 싶은 수치감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자가용과 피아노 다 있다던 친구의 엄마가 화려한 옷을 입고 학교에 나타난 후, 그 친구는 반장으로 임명되기도 했고 별일 아닌 것에 선생님으로부터 과분한 칭찬을 받기도 했다. 이는 내 생애 처음으로 경험한 소외요, ‘상대적 박탈감’이었다.
그 시절 나는 어렸고, 약했고 두려웠다. 그래서 어른들을 향해 내 감정의 현주소와 내 필요를 당당히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어른이 된 나는 다시금 그 시절, 그 순간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겁먹은 소녀를 만난다.
나는 그녀에게 말해준다. “결핍이란 수치스러운 것도, 감추어야 할 것도 아니란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결핍 또한 이 세상의 여러 경험과 마찬가지로 무상함을 알려준다. 나는 그녀를 토닥이며 그녀와 함께 결핍을 직시한다. 무상… 고…. 무아…. 무상…. 고…. 무아…..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소녀는 웅크렸던 가슴을 열고 ‘결핍’ 역시 잠시 그녀가 지나갔던 한나절 경험이었음을 깨닫는다.
“결핍과 고통은 나의 보물이고,
나의 보물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어요.”
- <김미경쇼> 진행자, 김미경 " ''
행복지수 높은 나라들
2019년의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보자면 그 어느 때보다 호시절을 누리고 있다. 2018년 기준, 대한민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12위이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 순위는 세계 30위권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못 살겠다고들 난리다.
그 이유가 부유층과 자신을 비교했을 때 느껴지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것을 최근 굵직한 정치적 이슈들을 지나가면서 알게 됐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2018년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전 세계 156개국 가운데 행복순위 57위를 기록했다.
작년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 1위는 핀란드였다. 요즘 우리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일본은 52위(우리보다 5순위 앞이다)였고 미국은 18위였다.
UN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에서 발표한 이 보고서에서 따르면 대체로 북유럽 국가들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행복도 1위를 차지한 핀란드의 1인당 국내총생산이 이웃 북유럽 국가들보다 낮다는 것이다. 이는 행복이 돈과 정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 예이다.
세계 행복지수 1위 국가에서 그동안 가장 자주 1위에 올랐던 나라는 부탄이었다. 히말라야 동쪽, 해발 3천이 넘는 고산 지대에 위치한 인구 75만의 나라 부탄은 GNP 수준은 낮지만, 국민총행복지수(GNH·Gross National Happiness)만은 세계 1위이다.
많이 싸돌아 다녔지만 아직 부탄은 여행해보지 않아 직접 확인한 바는 아니다. 하지만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부탄은 금연 국가이며, 공장과 고속도로 그리고 신호등이 없는 나라이자, 대승불교를 국교로 삼는 나라라고 한다.
그들은 왜 행복한 걸까. 모두 다 가난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대승불교를 국교로 삼고 국민 모두가 수행자인지라 ‘남’이 아닌 ‘진정한 나 자신’을 탐구하는 것에 관심을 갖기 때문일까. 아니면 대승불교국가답게 국민 모두가 보살행을 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모두가 이유일까.
결핍을 직시하라
앞에 썼듯이 결핍감 역시 수행자가 탐색의 대상으로 삼는 현재의 경험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니 애써 ‘그런 것 없어.’라며 외면할 게 아니라 직시하는 게 해법이다. 이 목마름, 배고픔, 허기짐, 상실감, 그리고 온 국민의 심리상태를 대면하는 ‘상대적 박탈감’을 직시해보자.
‘상대적 박탈감’이란 단어가 말해주듯 상대적인 것이요, 늘 변하는 것이다. 오늘 박탈감을 느끼던 내가 내일이면 상대적 충만함을 느낄 수도 있다. 어제 친구가 페이스북에 올린 카리브해 리조트 여행 사진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을지라도 내일 프랑스 니스 해변의 다이아몬드 다섯 개짜리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상대적 행복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그러니 이는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자성이 없고 고통이다. 무상한 것을 무상한 것으로 알아차리고 내려놓는다.
상대적 박탈감이란 나의 현재 상태와 남을 비교하는데서 비롯된다. 수행자의 관심은 나의 경험이다. 그러니 일단 남과 나의 현재를 비교하는 것은 내려놓는다.
지난 2019년 8월, 상대적 박탈감에 촛불을 들었던 대학생들과 국민 여러분께 묻고 싶다. 그것이 과연 당신의 주의력을 기울일 만한 일들이었는가를.
온 국민들이 나를 들여다보기보다는 옆 사람이 무얼 하는가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옆사람이 가진 것보다 조금 더 가져야 행복한 것이 과연 행복일까. 과연 얼마나 가져야 행복할까. 당신 눈이 밖을 향하고 있는 한, 당신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은 내 안을 들여다볼 때 찾을 수 있다. 행복이란 게 따로 내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으니 그것을 발견하라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실체를 철견할 때, 즉 고통이란 것이 무상함을 깨달을 때, 고통이 고통이라 할 만 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즉 고통을 직시하면 고통의 무상함을 알게 되고 고통은 사라진다.
나는 충분합니다 (I am enough.)
‘나는 부족하다.(I am not enough.)’는 뿌리 깊이 박힌 무의식을 서서히 알아차리고 내려놓다보면 어느 순간, ‘나는 충분하다.(I am enough.)’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이를 위해 당신이 특별히 멘탈 무장할 필요는 없다. 결핍의식으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그렇다고 색칠하며 꾸미지 말고, 직면하다 보면 자연스레 찾아온다.
당신은 충분하다.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지금 그 상태 그대로. 지금 그대로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진정한 수용이 무엇인지를 가슴으로 깨닫고 심장이 전율해옴을 느낄 것이다.
당신이 ‘상대적 박탈감’, 결핍감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충만하기를… 충분하기를…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
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