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치유하는 수술도구가 되게 하려면(히4:12-13)
2024.7.21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성경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하는 수술도구이며, 모든 생각과 뜻의 판단기준이 된다(히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그러나 실제 성도들이 성경말씀을 대할 때(읽기, 묵상, 설교, 쓰기 등), 고개만 끄덕이는 지식적인 공감에만 머무는 경우가 꾀나 있다. 이렇게 되면 좋은 말씀이지만 가슴에는 와 닿지 않고, 오히려 쉽게 잊어버린다. 심지어 말씀이 수면제처럼 느껴지기 까지 한다. 실제로 성경책만 펴면(또는 설교시간만 되면), 비몽사몽간에 꾸뻑 꾸벅하는 분들도 계신다(“목사님, 성경은 수면제로 만들었나요?”).
왜 그럴까? 어떻게 하면 우리(나)도 성경말씀을 대할 때, 그 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경험할 수 있을까? 이 점을 깨닫는 것은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들 중의 한 가지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중요한 영적인 방법들 중의 한 가지 나누고 기도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경말씀을 대할 때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있는 말씀으로 경험되게 하려면, “가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슴으로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골고다 십자가의 현장에 나도 함께 서서, 십자가를 붙들고, 나를 위해 흘리신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보면서 주님께 함께 아파하고, 주님과 함께 울 때, 성경말씀은 내 마음에 잘 박힌 못처럼 깊이 각인되고, 살아있는 검이 되어서 나의 영혼육(靈魂肉)을 쪼개고 수술한다.
이주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쓴 글에 의하면, 사람의 뇌는 감정이 강하게 실린 정보일수록, 생존을 위해, 가치 있고 중요한 정보라고 여기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좋은 경험은 그것을 유지하고, 나쁜 경험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경고한다. 이것을 생존 적응성(survival orientation)이라고 한다(“왜 나쁜 일은 오래 기억하는 걸까?”, 정신의학신문,2017.9.4).
전화번호나 영어 단어나 수학 공식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 눈물을 흘리며 보았던 소설이나 영화 또는 큰 사고의 경험들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왜 그런가 하면 영어단어나 수학공식을 외울 때는 감정이 들어가지 않지만, 감동적인 영화나 충격들은 감정이 강하게 실린 기억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설교내용보다도 감동받은 예화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도 역시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자신의 감정이 가슴으로부터 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하나님도 하나님의 마음에 큰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준 아담과 하와(이 시간 우리들 모두까지)를 머리로만 대하지 않으시고, 가슴으로 대해 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가슴에 품은 애틋한 사랑 때문에 우리를 잊지 않으셨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주셨다(요3;16). 만약 하나님이 하나님을 배신한 우리를 계산과 논리로만 대하셨다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성경은 머리나 논리보다는 사랑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이해될 수 있는 책이다. 머리나 논리만으로는 십자가의 희생이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 모두를(동네나 인터넷에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까지) 가슴으로 대하신다. 그 하나님의 가슴 한 복판에는 태양보다 불타는 사랑이 있다. 그래서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 아니 잊을 수 없으시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도 당연히 하나님을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대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강조한다(신6;4-5, 쉐마, 이스라엘의 교육강령).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마음과 힘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고 이처럼 강조 하실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나)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 절정에 십자가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가족, 이웃, 친구, 성도들 등)을 대할 때도 하나님이 나를 가슴을 대해 주신 것처럼 가슴으로 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 즉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정이 수반된 경험은 평생 우리들이 잊지 못한다.
성경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과 유사하게 일반 문학작품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도 감정이입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소설이나 영화에서 말하는 감정이입과 성경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일반 작품은 단지 작가의 감성과 나의 감성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일반 문학작품이나 영화는 이러한 작품들도 일시적인 스트레스 해소와 대리만족 또는 진통제 같은 카타르시스(감정정화)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머리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다. 성경 말씀에는 성령님이 함께 하신다. 그렇기에 가슴으로 성경을 대하고, 성경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곧 성령의 감성과 능력과 내가 하나 되는(연합하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진통제가 아니라, 치료제이다. 찬송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되면, 말씀 속에 살아서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능력은 곧 내 능력이 되고, 우리는 말씀의 관객에서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씀하셨다(요 14:27).
예를 들어서 홍해가 갈라지는 본문을 읽거나 묵상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가 몰려오는 상황에서 백성들과 함께 소리도 지르고, 함께 두려움도 느끼기도 하며, 모세와 함께 담대히 외치기도 하는 것이다. 눈앞에서 바다가 갈라지는 위대한 장면을 보면서, 벅찬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걸어가면서, 지금 나의 현실 속에서 이렇게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만약 시편 23편을 펼치고 읽는다면, 소년 목동 다윗이 빈들에 홀로 앉아서 수금을 연주하면서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에 내가 함께 찬양하는 것이다. 만약 요셉이 형들을 울면서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이라면, 요셉이 울 때 나도 같이 울고, 용서를 선포하는 요셉의 말이 나의 선포가 되는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들을 치유했던 말씀이 오늘도 동일하게 내 심령을 치유하는 수술도구가 된다. 그들의 정서가 나의 정서가 되고, 그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격려, 약속 등)은 나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된다. 그래서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 체험이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다.
지금부터 약 20여 년 전쯤에 서울에서 사역할 때에 경험했던 일이다. 그 당시에 사역하던 교회 주변에 있는 어떤 중학교 교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들 드렸던 적이 있다. 어느 날 예배가 마친 후 아토피가 심한 학생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 그리고 몇 일후 새벽예배시간에 그 학생을 위해 중보기도하면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이 찬송을 부를 때였다. 그때 불렀던 찬송이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134장)”이었다.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어느 바닷가 거닐 때 그 갈릴리 오신이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았네 나 그때에 확실히 소경이 눈을 뜨는 것 보았네 그 갈릴리 오신이 능력이 나를 놀라게 하였네” …….
그때 찬송을 부르는 중에 문득 “이 찬송을 지은 분은 어떻게 이렇게 예수님을 옆에서 본 것처럼 확신에 찬 가사를 썼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에 주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6절을 생각나게 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성령님의 가르쳐 주심과 생각나게 하심이 비결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성령님은 말씀 안에서 미래 뿐 아니라, 과거까지도 얼마든지 보여주시고, 말씀 속으로 나를 이끌어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이러한 기도체험과 깨달음이 있은 후에 학교에 가서 다시 그 학생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 이후 그의 아토피가 치료 되었다. 이 체험은 그 학생뿐만 아니라, 본 설교자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고, 영적인 감각도 그 이전 보다 훨씬 빨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논리나 계산으로만 우리를 대하지 않고, 가슴으로 우리 모두를 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가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날마다 말씀 속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자. 그렇게 하면 성령님께서 말씀의 검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 이 시간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나의 모든 마음과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