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대 후반, 강화도 북단 홍의마을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마을 훈장 박능일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처럼 거듭난 우리가 새 이름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천주교회와 같습니다. 그런데 베네딕토나 베로니카, 프란체스코처럼 천주교식으로 서양 이름을 쓰거나 모세, 다윗처럼 성경에 나오는 이름을 쓴 게 아닙니다. 한국식 작명법을 따라 돌림자 전통으로 개명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집안은 다르지만 한날한시에 세례를 받아 한 형제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마을에서 처음 믿었으니 한 일 자를 돌림자로 쓰자.”라고 했습니다.
성은 조상에게서 받은 것이니 바꿀 수 없고, 마지막 자를 한 일 자로 통일하기로 했으니 가운데 자만 정하면 됩니다. 이들은 믿을 신(信), 사랑 애(愛), 능할 능(能), 충성 층(忠), 은혜 은(恩), 은혜 혜(惠), 거룩할 성(聖), 받들 봉(奉), 바랄 희(希) 등의 글자를 쓴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함께 기도한 후 한 사람씩 제비를 뽑았습니다. 능자가 뽑히면 능일, 성자가 뽑히면 성일이 되는 식입니다.
같은 집안의 아버지, 아들, 삼촌, 조카가 세례를 받아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부자간에 같은 돌림자를 쓰게 된 것입니다. 권신일의 아들 권충일, 조카는 권혜일, 정천일의 아들은 정서일, 김봉일의 아들은 김환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부자간, 숙질간일지라도 신앙 안에서는 같은 하나님의 자녀다. 우리는 세상 질서보다 영적 질서를 따르기를 원한다.”라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2주 일정으로 이집트에 다녀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네 번째 성지 순례입니다. 지난 1995년에 이집트, 요르단, 이스라엘을 다녀왔습니다. 1996년에는 터키에 다녀왔고, 2005년에는 이집트, 이스라엘, 그리스, 터키에 다녀왔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성지순례에서 이집트는 변방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는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니 한 번 갔을 때 많이 봐야 합니다. 게다가 일차적인 관심은 천생 이스라엘입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로 가기 위한 출발지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생긴 수도원이 이집트에 있는 안토니우스 수도원입니다. 카이로에서 버스로 꼬박 3시간을 달려서 안토니우스 수도원에 도착했습니다. 수도원을 둘러보고 다시 3시간을 달려와야 합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어지간한 성지순례 일정으로는 갔다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집트에서만 2주를 보냈습니다. 여느 성지순례 코스에 포함되지 않는 여러 곳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이, 지금까지의 성지순례는 성지순례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지금까지 성지순례를 다녀온 것이 맞다면 이번에 이집트에 다녀온 것은 성지순례가 아니라 다른 이름을 만들어야 합니다.
강화교회 교인들은 분명히 이전과 단절된 새로운 삶을 산 사람들이 맞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가 맞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도 그들과 같은 성도가 맞습니까? 그들이 성도라면 우리는 다른 이름을 써야 하고, 우리가 성도라면 그들한테 다른 이름을 붙여줘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제가 고등학생 때는 도시락 두 개씩 싸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희 형제가 3남1녀입니다. 어머니께서는 하루에 다섯 개씩 도시락을 싸곤 했습니다.
막냇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어머니께서 도시락에서 해방된다며 좋아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요즘은 학교에서 급식을 하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어머니들이 예전 어머니보다 훨씬 편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성애에 차이가 있을까요?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부자간에 같은 돌림자를 써야 한다는 법은 더더욱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살려는 마음은 같아야 합니다. “예전에는 예수를 믿으려면 모든 것이 철저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충 믿어도 된다.”라는 얘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예수가 곧 삶의 원칙이고 이유이고 목표이고 현실입니다. 제가 현실이라고 직시한 것을 잘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먹고살아야 하는 환경이 현실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고 신앙 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첫댓글 “예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모든 것이 철저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충 믿어도 된다.”라는 얘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