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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계시기만 해도 좋아요 = 요한복음2;23-25(190811)
PW : 믿음 BIW : 그저 바라기만 하라 AG : 예루살렘 사람들
TS : 믿음이란 언제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라고 믿고 바라보는 것이다.
두 다리의 용도
대학생 아들이 가까운 거리도 걸어 다니려고 하지 않고 걸핏하면 자가용만 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어머니가 나무랐습니다.
“넌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사람에게 두 다리를 주었다고 생각하니?”
아들이 심드렁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한쪽은 크러치를 밟으라고 주셨고,또 다른 한쪽은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라고 주신거죠.”
그러고 보니 그렇듯 하기도 합니다.
북한에서는 사람의 두 다리를 11자가용이라고 한답니다.
11자가용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교통 사정이 너무 안 좋아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다 자신이 걷거나 뛰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네 다리도 아니고 세 다리도 아니고 두 다리를 주셨음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네 다리를 주셨다면 기어 다녀야 하는 것이고, 세 다리를 주셨다면 균형 잡기에 불안전하고, 두 다리를 주셨기 때문에 좌우를 살피고, 앞뒤를 돌아보고, 하늘과 땅을 골고루 쳐다보면서 온 세상을 호령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튼튼한 두 다리를 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끔찍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넓고 넓은 세상을 두 다리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와 복음,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며 살라고 두 다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아멘.
P4.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 올라간 예루살렘 성에서 얼마 동안 예루살렘 성에 머무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며칠 동안은 머무시게 된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곧바로 일주일 동안 무교절 절기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적어도 무교절 절기 기간에는 예루살렘 성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계시면서 많은 이적들을 행하신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적들을 베푸셨는지는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23절에서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기록하는 것으로 보면 어떤 이적들을 베푸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중에 여러 번 이적들을 행하셨음을 알 수 있다.
우리 한글 성경에는 “표적”이라는 단수단어로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성경에는 “표적들”이라는 복수단어를 사용하여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서 많은 이적들을 행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신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사람들을 믿거나 의지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믿지 않은 이유는 특별히 사람들에게서 증거를 받아야 할 이유도 없었고, 사람들의 속 사람, 내면의 세계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무교절 절기기간동안 예루살렘 성에 머무시면서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하신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계실 때 예루살렘 성 사람들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계시는 동안 예루살렘 성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계심으로 인해서 백성들은 좋았을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계심으로 인해서 백성들은 부담스러워하고 빨리 떠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을까?
아무래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빨리 나사렛 고향으로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진다.
왜냐하면
① 예수님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고 주장하고 계시지만, 정말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진짜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로 그 메시야인지는 잘 모르겠다.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진짜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바로 그 메시야라는 확신을 할 수 없다.
하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메시야라고 떠벌리면서 올리브산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이들이 많지 않나?
듣기로는 자기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30여 명에 이른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저 예수라는 사람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② 예수님과 그를 따라다니는 제자들 때문에 우리들이 신경 쓸 일이 너무 많다.
저들은 예루살렘 성에 마땅하게 숙식을 해결할 처소도 없지 않나? 그러니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빨리 갈릴리지방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③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우리 예루살렘 성에 계심으로 인해서 우리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해롭지는 않을까?
예수라는 사람이 가진 성격이 너무 강성이라 시시콜콜 반대하고 지적하고 고쳐야 한다고 외치면 오히려 지금까지 쌓아온 전통이나 생활습관과 유대문화에 역효과가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D4.
① 예루살렘 성에 계시기를 좋아하시는 예수님.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도성이다.
예루살렘 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지키시고 역사하시는 성이다.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성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예루살렘 성에 계시기를 좋아하신다.
유월절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계시면서 많은 이적들을 행하신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서 많은 이적들을 행하시면서 메시야 사역을 감당하신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계시면서 이적 베푸시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이적들을 행하셨을까?
성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어떤 이적들을 행하셨는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지 않다.
단지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많은 이적들을 보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백성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성경에 기록하지 않은 많은 이적들을 행하신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하시는 동안 행하신 모든 이적들과 말씀들과 사셨던 흔적들을 모두 다 기록하기에는 너무 방대하다.
너무 많고 방대하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기록하지 않고 몇 가지만 간추려서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은 하늘 아버지께서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세계를 설명하기에 충분한 부분만 기록했을 뿐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계시는 동안 여러 이적들을 행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세계를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계시기만 해도 예루살렘 성은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계심으로 인해서 부담되는 일도 많이 있을 수 있다.
유월절 절기를 맞아서 전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 찾아오는 순례객들의 편리를 봐주기 위해서 성전 이방인의 뜰에서 제물들을 팔거나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 환전상들이 돈을 바꿔주는 일도 너무나 좋은 일인데 예수님께서 반대하면서 다들 쫓아내지 않으셨나?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내어 쫓아내면서 좋지 않은 일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계시는 것을 너무 좋아하신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여 오신 이유가 예루살렘 성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여 오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섭리를 이루어가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머물러 계시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분이다.
예루살렘 성에 머물면서 계시기를 좋아하시는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들의 처소에도 머물러 계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 자유대한민국에도, 우리 대전에도, 우리 교회에도, 우리 가정에도, 우리 동네에도 계시면서 머물고 싶어 하시는 분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머물러 계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 하나님의 구원세계를 활짝 펼쳐 나가고 싶어 하시는 분이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의 두 손을 꽉 잡고 우리들과 산책도 하시고, 뛰기도 하시고, 공부도 하시고, 일도 하면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를 좋아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계시면서 우리들의 생각과 의지와 맘과 영혼을 새롭게 하며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동행하면서 우리들에게서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고 싶어하시는 분이다.
② 사람을 믿지는 않고 사랑만 하시는 예수님.
24에서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길을 가시지만, 결코 사람을 믿거나 의지하지는 않는다.
창세기 6;5-6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 만드심을 한탄하시고 후회하시기도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어주셨지만, 사탄이 사람의 영혼과 의지와 생각을 점령하여 하수인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하나님을 떠나버린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고 사탄을 쫓아서 태양신을, 달신을, 별신들을 쫓아가기를 그 무엇보다 좋아하는 존재들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떠나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믿지 않으려고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 자체를 믿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 자체를 믿지 않고 도리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들을 투자하고 내어주면서 사랑하실 뿐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믿지 않으시고 사랑만 하는 것일까?
첫째는 사람은 본래부터 악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탄에게 조종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으시고 영생,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사랑만 하실 뿐이다.
하나님은 본래 사랑을 통하여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받고 싶으셔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드셨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고 말았다.
사람이란 존재는 절대자 하나님을 아주 쉽게 배반하는 존재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아주 쉽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이 마치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여 하나님을 조롱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온갖 죄악을 범하는 존재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은 나와 같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
지금도 예수님은 나와 같은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거나 의지하지 않는다.
지금도 예수님은 나와 같은 사람에게 기대를 걸지 않는다.
단지 예수님은 아무런 조건없이 나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실 뿐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같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어떤 조건들도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같은 사람에게 어떤 조건을 요구하더라도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예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는다.
③ 사람의 내면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
25절에서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사람을 직접 만드신 분이고, 철저하게 그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해보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의 내면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분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에게서는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증언을 받을 필요가 없으시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구태여 사람에게 누구의 증언을 받아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의 증언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절대적인 주권을 지니신 분이다.
예수님께서 메시야가 아닌데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증언하니까 메시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진짜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로 그 메시야라고 누가 증언하든 말든, 누가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라고 부정하든 말든 아무런 상관도 없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계시는 분이고, 예수님은 본래부터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본래부터 창조주이시고, 본래부터 빛이시고, 본래부터 생명이시고, 본래부터 사랑만 하시는 분이다.
사람들이 이렇다저렇다 하면서 인정하거나 부정하거나 하는 것에 따라서 예수님의 정체성이 뒤바뀌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하나님이시오 메시야이시오 창조주이시오 빛이시오 생명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믿지 않는다. 단지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해 주실 뿐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믿음의 대상,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람은 그 사람 자신부터 자신을 믿을 수 없다.
어떤 종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누군가를 믿었다가 발등 찍혔다는 말을 아주 흔하게 한다.
그 사람이 자기 학교 동창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그 사람이 자기 고향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그 사람이 자기와 절친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그 사람이 자기 교회 성도라 할지라도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그 사람이 자기 교회의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라 할지라도 목사도 목사이기 전에 사람이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심지어는 그 사람이 자기 가족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흔하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처럼 꼭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반당하고 커다랗게 실망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로마서 3:10-12에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 사람이란 존재는 의인은 하나도 없고 죄인들 뿐이기 때문에 죄인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한평생 목회에 모든 것을 바쳐서 목회하셨던 선배 목사님들께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한결같이 권면하는 말씀이 있다.
‘성도는 무조건 사랑해 주어야 할 단순한 양일 뿐, 절대로 믿음의 대상도, 의지의 대상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만, 오직 하나님만, 오직 성령님만 믿고 목회하라.’라고 권고한다.
그러면서 ‘믿는다고 여겼던 그 성도들에게서 배신당하는 것이 목회’라고 권고한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삼위 하나님 한 분밖에 다른 것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돌에 비유하곤 한다. 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울산에 있는 바위가 설악산에 옮겨져서 울산바위가 된 것이 아니다.
커다란 울산바위는 본래 한반도가 생겨날 때부터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바위이다.
금강산에 있는 바위들이 전국에 있는 바위들이 옮겨져서 금강산 바위들이 만들어져서 일만일천봉이 된 것이 아니다.
본래부터 한반도에 금강산이 생겨날 때부터 그 자리에 그 위치에 그 모습 그대로 일만일천봉이 있는 바위들이다.
돌이나 바위는 인위적으로 작업을 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돌이나 바위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니, 나의 바위이시니 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에 대해서 흰돌, 산돌, 반석이라고 표현한다.
L4 & B4.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유월절과 무교절 절기 동안에 예루살렘 성에 계시는 것 자체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은혜요 축복의 시간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계심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사람들은
①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와 축복을 받는다.
② 예루살렘 사람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많은 이적들을 행하시는 모습을 자신들이 두 눈으로 똑똑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을 받는다.
③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은 아닐지라도 몇몇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많은 이적들과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은혜와 축복을 받는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우리 예수님께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에벤에셀의 하나님으로, 엘샤다이 하나님으로, 전화위복의 하나님으로, -가 아니라 +의 하나님으로, 역전의 명수이신 하나님으로 우리들과 함께 계신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그러면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진정한 주인님이 되어주시면서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책임지고 인도하시고 도와주시지 않겠는가?
우리 교회도, 우리 가정도, 우리 일터에도, 우리 생업터전에도, 우리 학교에도, 우리 동료와 친구들에게도 우리 예수님께서 계시는 것 그 자체로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맘 간절하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계시기만 하면 우리들은 더 이상 걱정하거나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지 않나?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계신다는 믿음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면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결코 우리들을 포기하거나 떠나거나 어떤 조건들을 내세우면서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 주님은 아무런 조건없이 지극한 맘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분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서 아무런 것들도 바라지 않으시고 그저 무한한 사랑으로 바라보시며 격려해주시고 지지해 주시면서 우리들을 도와주시며 지켜 주시는 분이다.
우리 주님은 그저 우리들이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바보처럼, 예수님 바라기로 살아가는 그 모습 하나로 충분하다고 여기시는 분이다.
와우리교회 http://cafe.daum.net/GRACEOFJESUS
♥♥♥ 프레임 설교를 하시려는 분들에게 책을 소개합니다.
이 책은 출판되어진 책이 아니라 제본된 책입니다.
① 프레임설교의 이론과 실제(1권, 2권)
② 청중마음열기 2권(유머편, 예화편)
③ 감으로 읽는 성경이야기
④ 은혜로운 물붓기
⑤ 성경의 여인들 이야기 3권(구약1권, 2권, 신약1권)
혹시 관심이 있으신 분은 010-5797-9094(한상원목사)로 연락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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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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