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의 순기능과 역기능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종교의 가르침이 더 필요한 때이다.
어느날 교회 친구가 나를 염려하며 "왜 자네는 청평 정성에 관심을 갖지 않느냐?"며 묻는다.
내 대답은 "나는 참아버님 말씀을 믿고 실천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네. 다수가 가는 길이 반드시 옳은 길이라는, 자기의 신앙 방식만 옳다는 편견도 버려야 하네. 내 신앙 염려는 마시게나~" (그 친구는 세상에 공개된 사실인, 교회 톱 간부들의 비리는 전혀 믿으려 않는 맹신도 였다.)
통일교에서 크리스찬으로 개종한 친구는 나에게, "세상 밖에서 통일교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자네도 제대로 보아라"
내 대답은 "지금 통일교회는 부끄러운 여러 일들이 있지. 1대 교주의 말씀도 버리며 인스턴트 원리 말씀을 만들었으니까. 또 세상의 모든 종교의 공과(功過)는 분명 있지. 로마 교황청은 과거에 창녀가 출입을 한 기록도 있지. 당시의 교황은 귀족들이 돌아가면서 하던 시대여서, 요즘처럼 신앙적 인격자를 뽑던 시절이 아니였지. 그러나 나약한 인간에게는 특정 종교를 믿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기에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것이라네" 나는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에게 참아버님은 남북통일의 하나님, 한일일체화의 하나님이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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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의미부여 기능]은 최고 리더의 깨달은 가르침이, 신봉자들에게는 기쁨과 불행을 관리하도록하며, 선교에서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게하는 순기능을 한다. 우리 참아버님은 많은 선남선녀에게 바지를 걷어 올리어 바다를 건너게 하셨다. 원수의 나라에 씨를 뿌리어 善의 확산을 실천 하셨고 이는 세계 평화의 순기능이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종교적 순기능이 있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역기능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류에게 위협을 가하는 종교 전쟁이고, 종교를 명분으로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또 절대 믿음이라는 명분하에 '신도 스스로 생각하는 것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자기 종교에 불리한 것은 보지도 믿지도 말게 지속적으로 교육하는 것이다.
자기 종교만이 절대 선이고 옳다는 아집이다.
프로테스탄트란?
16세기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등이 주도한 종교 개혁의 결과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분리해 성립된 기독교의 분파(개신교)를 말한다.
종교 개혁은 가톨릭 교회의 타락도 원인이었으나 더 큰 원인은 사제를 통해서 신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직접적인 만남을 이루는 개인의 신앙이 유일하다는, 새로운 신앙 해석이 종교 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다.
어떤 종교도 중세처럼 신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종교로서 가치가 없다. 마르틴 루터처럼 비판을 할 줄 알 때 종교는 사상적으로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다. 절대신앙이라며 비판을 묵살하는 종교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다.
신학자들 조차도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던 시대에서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이는 어쩌면 오늘날 통일가를 두고 한 말처럼 보인다. 과연 우리 통일가는 사회 보다도, 타종교 보다도 더 도덕적 우월성을 갖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개인의 신앙을 존중해 주며 신도들의 조직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고 있는가도 돌아볼 일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2세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걱정을 많이 한다. 미국에서 '가장 큰 동창회는 교회 졸업 동창회'다 라는 웃지 못할 풍자어도 있다. 이는 종교의 순기능인 <삶의 의미와 방향 제시>를 못해주고 <심리적 안정 제공>도 하지 못함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을 알고 일찍이 스스로 고백을 한 것일까? 1960년도 바티칸 공유회는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있다."였다.
신앙은 오로지 기도만 열심히 하는것도 아니고, 헌금만 많이하는 기준이 되어서도 안된다. 다양한 각자의 달란트가 있는 것이다. 그냥 지게만 지고 친구를 따라서 장에 갈 수는 없지 않는가?
나에게 있어서 지금의 통일교회는 종교의 순기능인 <삶의 의미와 방향 제시>를 제대로 못해주고있다. 이는 공자가 '상가집 개' 취급을 받았다면, 참아버님의 위상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처럼, 때로는 제자들에게 배신 당하며 외롭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참아버님의 생애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통일교인이 된 것을 부끄러워 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다시 통일가에 참아버님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하루를 출발 한다.
2024. 4. 5
박정석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