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칠갑산엔 여자가 산다
그 날 종식은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친구가 일하는 곳으로 갔다. 전날 밤에 마신 술 때문에 속이 몹시 쓰림에도 차창을 스치는 풍경들이 제법 눈에 들어왔다. 차창 밖의 들과 산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었다. 길은 완전히 빙판이었고, 따라서 핸들을 잡고 있는 친구는 여간 조심을 하지 않았지만 종석은 어느 만큼 바깥 풍경에 취해 있었다.
사실 눈 덮인 산과 들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것들을 감추어 버린 흰 눈 말이다. 그는 그렇게 흰 눈에 덮여 자신의 모든 것들을 감추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휴일도 아닌 날에 하릴 없이, 아니 오히려 친구가 일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따라가겠다고 나선 것부터가 그의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게 아닌가. 이제 마악 사십으로 들어선 나이에 종식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었다. 아내와 헤어진지도 오년이고, 다니던 직장에서 마저 쫓겨난 지도 이년이었다. 돌이켜보면 헤어진 아내와 살았던 기간도 진수렁창 같았지만, 헤어지기만 하면 날개를 얻은 것처럼 훨훨 날아다닐 것 같았던 그 이후의 시간들도 별 뾰쪽한 게 없었다. 게다가 한창 일할 나이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보니 말 그대로 자신의 인생이 종쳐버렸지 싶기만 했다. 생각할수록 비감스럽고, 아무런 희망도 꿈도 없었다.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생각에 지나지 않을 뿐 현실적으로 잡혀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친구는 공주와 대천을 잇는 국도변의 칠갑산 휴게소의 한 레스토랑에서 주방 일을 하고 있었다. 노래로 더 잘 알려진 칠갑산. 휴게소에서 내려다보는 눈 덮인 산자락과 계곡은 자우룩이 피어오르는 안개에 휩싸여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름다웠다. 아니, 피어오르는 안개로 인해 더욱 운치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그곳에 한 여자가 있었다. 서빙을 하고 있는 여자였는데, 휴게소 기숙사에서 기거하고 있다고 친구는 말했다.
종식은 레스토랑 주방께의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친구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고 친구가 틈틈이 가져다주는 음료수나 양주 따위를 홀짝거리곤 했다. 그는 음식도 하나의 예술이라며 열심히 일하는 친구가 부러웠다. 그리고 지난 밤 술 취해서 설핏 잠이 들었을 때 부인과 무슨 일인가로 티격태격했던 모습도 부러웠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
헌데 이상한 것은 그 여자가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손님이 들어오면 밝은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 하고, 주방에서 음식이 나오면 가볍게 나르곤 하지만 그 어느 구석인가 어둠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친구가 내놓는 주스 등을 내 앞에 가져다놓고 잠시 앉아서도 문득문득 초점이 흐려지는 눈길로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곤 하는 것이었다.
친구는 그 여자가 보기보다는 나이가 많은데 지독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 더 이상 자세한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한 가지-이런 곳에서 서빙이나 하고 있을 여자가 아닌데도 일부러 이곳에 들어와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고도 했다.
종식은 친구가 일하는데 레스토랑 한 구석에 앉아만 있기도 뭣해서 밖에 나가 휴게소 광장에 쌓인 눈들을 밟기도 하고 저 아래로 뻗어 내려간 산자락이며 골짜기 등을 구경하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드나들다가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치면 자신도 모르게 슬몃 웃음을 던지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일까. 문득 ‘저 여자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저 여자만 있다면 이미 종을 쳐버린 자신의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자신의 삶에 새 순이 돋게 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기숙사에만 기거할 뿐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거나 하는 일이 일체 없다는 저 여자…….
해가 기울 무렵, 종식은 레스토랑의 테라스에 나와 조금씩 어둠에 묻혀가고 있는 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문으로 나서면 제법 널찍한 테라스가 있었고, 거기서 바라보면 저 아래로 흘러내려간 산자락과 계곡들을 훤히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테라스 바닥에서는 녹다가 다시 얼어붙은 눈들이 자각자각 밟히고 있었다.
“왜 여기 나와 계세요? 바람이 몹시 차가운데…….”
돌아보니 그 여자였다. 레스토랑에는 손님이 한 테이블 밖에 없었다. 여자는 종식과 마찬가지로 난간에 기대는 듯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초점이 흐리고 망연한 시선이었다.
“…저어, 이따금씩 여기 놀러 와도 될까요?”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여자는 잠시 빤하게 쳐다보더니, “그럼은요.” 했다.
“주방장의 친구로써가 아니고, 손님으로써도 아닌데요. 뭐라 해얄지……”
“말씀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요. 이미요…….”
그렇게 말끝을 흐리는 여자의 입가엔 엷게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 내리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얼굴 어느 구석엔가
감추어져 있던 어둠의 그림자가 한 겹 벗겨지는 것 같았다.♧
첫댓글
칠갑산엔 여자가 산다
그 칠갑산의 지형도가 참 예쁘네요
자연이 일궈내는 저 모형들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