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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0) 밀고자 한영익과 다산 정약용
한영익이 밀고한 주문모 신부, 정약용이 먼저 달려가 피신시키다
- 다산이 해배된 지 2년 뒤인 1821년 1월 24일에 다산초당 주인 윤문거에게 보낸 편지로, 어린 딸(稚女)을 하인 편에 업고 올라오게 해서 사창동에 사는 사제(舍弟) 정약횡의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 내용의 친필 편지다. 개인 소장.
짧은 방심
1794년 11월 2일, 천신만고 끝에 주문모 신부를 모신 조선 천주교회에 기쁨이 넘쳤다. 신자들은 이전에 가성직 신부에게서 받은 영세 대신 진짜 세례와 성사를 받겠다며 줄을 섰다. 막상 신부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당시 4000명에 달하던 교우의 숫자는 신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신부를 뒷받침할 조직도 일사불란하지 않았다. 신부를 모시려고 마련한 최인길의 집은 계동(桂洞) 안쪽의 으슥한 길 끝집이었다.
신부를 만나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영하고 고해를 받으며, 그들은 천국을 얻은 듯이 기뻐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죄에 찌들었던 삶이 한순간에 순백의 순결을 얻었다.
그 틈새로 밀고자가 파고들었다. 진사 한영익(韓永益)! 그는 예비신자였지만 1791년 신해박해 때 배교했던 사람이었다. 한영익의 여동생은 주문모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았다. 그녀가 열심한 핵심 신자였기에 가능했다. 너무 기뻤던 그녀는 오빠에게 신부가 조선에 들어온 사실과 강론 내용을 전해주었다. 그녀는 오빠에게 신부님께 함께 가서 세례를 받자고 권했다.
순간 한영익은 나쁜 마음을 먹었다. 그는 1795년 5월 11일에 누이의 주선으로 신부를 찾아가 만났다. 죄를 뉘우치고 세례받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당시 신부는 의욕이 앞섰고, 집행부도 조심성이 없었다. 한영익은 신부에게 천주교 교리를 문답하던 도중, 입국 경로에 대해서도 자세히 물었다. 이 짧은 방심이 허를 찔렀다. 한영익은 그 길로 국왕의 친위 조직인 별군직(別軍職)으로 별군청을 지키고 있던 이석(李晳)에게 달려갔다. 한영익은 평소 알고 지냈던 이석에게 계동 집의 위치와 주문모 신부의 용모를 상세히 알려주었다. 이석은 그 길로 영의정 채제공에게 뛰어가 이 놀라운 소식을 보고했다. 더 놀란 채제공이 즉각 임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임금은 포도대장 조규진(趙圭鎭)을 불러 비밀리에 주문모를 체포해오게 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
모든 것이 짧은 시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조규진이 입단속을 하며 포졸을 풀어 계동의 천주당을 덮쳤을 때, 주문모 신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전광석화의 출동이었건만 포도청의 급습 정보는 이미 새어 나간 상태였다. 신부는 마치 하늘로 솟은 것처럼 사라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중국인 주문모의 공개적인 체포는 청나라와 심각한 외교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임금은 그 점을 몹시 꺼렸다.
한영익의 고발 이후 이석, 채제공, 임금을 거쳐, 다시 포도대장에게 긴급 명령이 하달되는 사이에, 이 사실을 안 누군가가 계동 천주당으로 황급히 달려갔던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달려가 주문모 신부를 황급히 피신시킨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그는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다. 얼마 전까지 우부승지였던 그는 배교 상태에서 서학 문제로 비방을 받아 체직되어, 부사직(副司直)의 신분으로 규장각에서 「화성정리통고」의 교서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급여를 주려고 임시로 내린 부사직은 오위(五衛)의 무직(武職)이었다. 이석은 이벽의 동생이었다. 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처남이기도 했다.
신부를 피신시킨 사람이 다산임을 어찌 알 수 있는가? 두 가지 기록을 교차해 보아야 보인다. 다산은 60세 때 쓴 「자찬묘지명」에서 이렇게 썼다. “4월에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가 변복하고 몰래 들어와 북산 아래에 숨어서 서교를 널리 폈다. 진사 한영익이 이를 알고 이석에게 고하였는데, 나 또한 이를 들었다. 이석이 채제공에게 고하고, 공은 비밀리에 임금께 보고하고,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명하여 이들을 잡아 오게 했다.”
다산은 이 글에서 ‘나 또한 이를 들었다(吾亦聞之)’라고 썼다. 다산의 이 말은 나중에 전해 들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한영익이 밀고하던 자리에 자신도 같이 있었다는 의미다. 문장의 순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엉뚱한 데서 맞춰진 퍼즐
하지만 다산은 들었다고 했지, 자신이 주문모 신부에게 달려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산이 직접 달려간 증거는 어디에 있나? 전혀 엉뚱하게 1797년 8월 15일에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1796년 주문모 신부의 보고를 받고 나서, 사천의 대리 감목 디디에르(Jean Didier de St. Martin, 1743∼1801) 주교에게 보낸 장문의 라틴어 편지에 나온다.
“이 일이 터진 것은 6월 27일(음력 5월 11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조선 대신들에게 밀고하는 자리에 어떤 무관 한 사람이 같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한때 천주교 신자였다가 배교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관은 배교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는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천주교 신자들은 이 무관에게 신부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전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혹시라도 그 사람이 그런 사실을 누설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관은 앞에서 이야기한 또 다른 배교자가 고발하는 모든 사실을 듣고, 곧장 신부님이 머물고 계시다고 일러준 집으로 달려가 신부님이 고발당하였기 때문에 신부님과 천주교회에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신부님한테 한시라도 빨리 그 집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는 자기가 신부님을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한영익의 밀고를 함께 들은 무관이, 이석이 채제공에게 달려간 사이에 쏜살같이 계동 천주당으로 달려가 신부를 피신시켰다는 내용이다. 다산은 자신이 한영익의 밀고 현장에 함께 배석했다고 분명하게 얘기했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가 보내온 주문모 신부의 편지와 밀사의 전언을 통해, 신부를 극적으로 구출한 사람이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어떤 무관이라고 콕 집어서 얘기했다. 다산은 당시 배교 상태에 있었고, 명목상 무관 신분과 무관 복장으로 궐내에 머물고 있었다. 모든 진술이 다산 한 사람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그 무관이 계동으로 화급하게 뛰어들었을 때, 역관인 최인길이 중국인 행세로 시간을 벌겠다며 그에게 신부를 선뜻 맡긴 것만 보더라도, 최인길 등은 그 무관을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명례방 집회 시절부터 함께 열심히 활동했던 다산을 그가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다산이 아니었다면 난데없이 뛰어든 무관의 무엇을 믿고 그 귀한 신부를 덜컥 내준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모셔온 신부였던가? 지난 몇 년간 피눈물 나는 조선 교회의 노력이 일시에 물거품으로 돌아갈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한편 윤민구 신부도 구베아 주교의 위 편지를 번역 소개하면서 이 무관이 다산일 가능성을 지적한 바 있음을 밝혀 둔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에다 ‘나 또한 이를 들었다’고 쓸 때만 해도, 그 이야기가 돌고 돌아 구베아 주교의 기록 속에 자신을 콕 집어 말한 내용이 들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록이 이렇게 무섭다. 구베아 주교의 이 기록은 당연히 주문모 신부의 사목 보고서와 밀사의 전언에 바탕한 것이다. 이런 글에는 이름이 안 나온다. 중간에 문서가 발각되어 압수되기라도 하면 뒷감당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참한 죽음의 진실
이날 신부 대신 붙들려 간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 세 사람은 당일로 죽여 시신도 없이 사라졌고,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조선의 사법 체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한차례 쓰겠다. 한편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한영익에 대해 이런 기술을 추가했다. “밀고자 한영익은 그의 배반에서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하였다. 그해 가을에 그는 자기 집안과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그가 죽을 때 탄식하고 눈물 흘리기를 그치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진실한 참회로 하느님에게서 자기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예수를 판 유다 이스카리옷처럼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1799년 10월에 서얼 조화진(趙華鎭)이 이가환, 정약용이 한영익 부자와 함께 서교에 탐닉했다고 고발하자, 정조가 화를 벌컥 냈다. “한영익은 주문모를 고발한 자인데, 그가 어떻게 이가환과 정약용의 심복일 수 있는가? 무고다.” 이 한 마디로 이가환과 다산은 혐의를 벗었다. 이 조화진은 앞서 충청도로 내려가 옥에서 자살한 밀정 조화진(趙和鎭)과는 다른 사람이다.
한영익은 1799년에도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이렇게 썼다. “조화진이 일찍이 한영익에게 구혼했는데, 한영익이 응하지 않고, 그 누이를 나의 서제인 약횡에게 출가시켰다. 이 일로 한영익을 죽이려고 꾀하다가 내게 미쳤던 것이다.” 한영익의 천주교 신자 누이는 다산의 서제(庶弟) 정약횡(丁若鐄)과 결혼해, 다산 집안과 사돈이 되었다. 한영익 또한 서출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밀고자의 밀고를 무력화시킨 다산이 그 밀고자의 집안과 사돈을 맺었다니 해괴하다. 한영익의 회심이 전제되지 않고는 될 일이 아니었다. 그의 누이와 결혼한 정약횡도 열심한 천주교 신자였을 것이다.
최근 필자는 1821년 1월 24일, 귀양에서 돌아온 다산이 귤동 초당 주인 윤문거(尹文擧)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보았다. 사연 중에 강진 시절 소실에게서 얻은 딸을 서울로 데려와 사창동(司倉洞) 아우의 집에 데려다 달라는 사연이 있었다. 이 사연을 보는 순간 마음이 참 짠했다. 홍임이로 알려진 이 딸 또한 결국 천주교 신자 부부의 손에서 천주교 신자로 키워졌으리란 짐작이 들어서였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1) 별라산의 별난 사람 홍지영 · 강완숙 내외
강완숙 남편 홍지영은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의 7촌 서조카
- 1872년 덕산군 지도에서 별라산 인근을 화대한 지도.
홍지영의 별라산과 원백돌의 응정리
박종악이 정조에게 보낸 비밀 공문을 모은 「수기」는 1790년 진산 사건 이후 충청도 초기 교회의 생생한 현장 정보를 중계한다. 탄압 대상의 동향과 활동 정보 및 관련자 색출에 대한 보고서라서 그렇다. 「수기」에서 특별히 지속적 주목 대상이 된 인물 중 하나가 덕산 별라산(別羅山)의 홍지영이다.
1791년 12월 2일에 정조에게 보낸 비밀 공문에서 박종악은 이 지역의 호법(護法)하는 무리로 덕산 별라산(別羅山)의 홍지영(洪芝英)과 홍주 응정리(鷹井里)의 원백돌(元白乭)을 꼽았다. 별라산은 고지도에는 별아산(別鵝山)으로 나온다. 한편 박종악은 1792년 1월 3일의 보고에서 성호 이익의 종손 이삼환이 80여 호나 되는 장천리(長川里)에 사는데, 홍지영의 별라산과는 고작 3리 거리지만, 별라산과 달리 한 집도 사학에 물들지 않았다고 썼다. 홍지영이 살던 별라산이 이삼환의 장천리와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는 얘기다. 남아있는 1801년 이삼환의 호구단자에 따르면 장천리는 오늘날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이다.
홍지영의 집은 이곳에서 3리 떨어진, 별라산 자락 덕산군 고현내면(古縣內面) 별라산리(別羅山里)에 있었다. 오늘날 행정명으로는 예산군 고덕면 대천3리 별암 마을에 해당한다. 현지에서는 별아미 마을이라고도 한다. 별아산의 끝자락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로 보인다. 이곳은 1760년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편성 민호 93호, 남자 105명, 여자 260명이 거주한다고 쓴, 꽤 큰 규모의 마을이었다. (*별라산의 위치 비정과 관련 내용은 2015년 6, 7월에 임성빈, 최휘철 선생 등 천주교 순교자유적답사회에서 정리한 답사 보고서의 도움을 받았다. 귀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임성빈 선생께 감사드린다.)
원백돌은 복자 원시장 베드로이다. 백돌은 세례명 베드로의 음차다. 그가 있던 응정리는 홍지영의 별라산에서 9.8㎞ 떨어진 홍주 합남면(合南面)에 속한 지역으로, 오늘날 당진시 합덕읍 성동리이니 현재 합덕 성당이 자리한 일대이다. 인근에 신리, 솔뫼성지가 도보 거리에 포진해있다. 여사울성지와도 그다지 멀지 않다.
박종악은 홍지영에 대해 “원래 양반의 명색으로 함께 배우는 사람은 상천(常賤)과 친소를 묻지 않고 번번이 내외가 상통하여 안방으로 맞아들인다”고 썼다. 홍지영의 아내는 바로 초기 교회의 여걸 강완숙(姜完淑, 골룸바, 1760~1801)이다. 열흘 뒤에 쓴 12월 11일 보고에서는 홍주 지역 사학교도들이 무려 60여 책의 사서(邪書)를 들고 와서 자수했고, 이에 홍지영 등 네 사람을 잡아 가두고 신당(神堂)을 헐어버리게 했다고 적었다. 이들은 당시 별도의 예배 공간까지 마련해두고 집회를 가졌던 모양으로, 천당(天堂)으로도 불린 예배 장소는 응정리 원백돌의 집에 있었다.
- 1768년 풍산홍씨 족보.(최휘철 선생 편집본에 필자가 관련 내용을 추가(초록색 부분)해 정리한 것임).
별라산의 신앙 공동체
12월 20일에 올린 보고에서 박종악은 다시 이렇게 썼다. 홍지영을 붙잡아 조사하자, “저의 어미와 처는 과연 서양학 언문 책자에 종사하였으나 저는 문자를 알지 못해 애당초 뜻을 두지 않았다”고 발뺌했고, 박종악은 홍지영을 타이른 뒤 다짐을 받고 석방했다. 한편 박종악은 홍지영이 “전혀 문자를 몰라 어리석기 그지없다”고 따로 보고 했다.
1792년 1월 3일의 보고에도 홍지영 집안의 신앙 활동에 대한 설명이 길다. 요약하면 이렇다. 이들은 상하친소(上下親疏)나 노소장유(老少長幼)를 따지지 않고 서로를 교중(交中)이라 부르며 신앙생활을 했다. 길가는 사람이 신자임을 밝히면 양반가의 아낙이 안방에서 그를 맞아 가까운 친척처럼 대접하고, 떠날 때는 노자까지 주어 보냈다. 양반가의 아낙은 언문 사서를 읽고, 상천(常賤)의 경우 입으로 외워 전했다.
이렇듯 별라산의 신앙 공동체는 1792년 당시 기록만 보더라도 신앙으로 똘똘 뭉친 특별한 구역이었다. 글 속의 양반가 아낙은 상경 이전의 강완숙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이밖에 홍지영 집 행랑채에 사는 고오봉(高五峯), 김취재(金就才)와 그의 다리 저는 처남, 대천(大川) 장터 옆 안갑동(安甲同), 이름을 모르는 안충의(安忠義) 외에 별라산 사람 장성로(張聖魯)와 그의 생질 이가(李哥) 등 여러 사람이 별라산 신앙 공동체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활발하게 신앙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특별히 장성로는 그 인근의 유명한 의사여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차마 입을 열지 못해 관가에서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홍지영은 혜경궁 홍씨의 7촌 서조카
앞서 12월 20일의 보고 끝에 추가된 다음 내용이 묘하다. “홍지영을 잡고 나서 비로소 이 사람이 영돈녕 홍낙성(洪樂性, 1718~1798)의 5촌 서조카임을 알았습니다. 그의 이름의 영(英)자는 영(榮)입니다. 당초에 사실과 어긋났으니 너무도 황공합니다.”
이름 한 글자 틀린 것이 왜 황공했을까? 돌림자가 영(英)이 아니라 영(榮)임이 밝혀지는 순간, 그는 임금 정조와 혼척으로 얽힌 가까운 집안이 되기 때문이다. 박종악이 무식한 향반으로 여겼던 홍지영은 놀랍게도 정1품 영돈녕부사 홍낙성의 5촌 서조카였다. 그는 좌의정과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로,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와는 6촌 간이었다. 그렇다면 홍지영은 임금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7촌 서조카이고, 강완숙은 혜경궁의 7촌 서질부(庶姪婦)가 된다. 그의 문벌이 비록 서족이라고는 해도 시골 구석의 한미한 무지렁이 양반은 아니었다.
이에 「풍산홍씨대동보」의 추만공파(秋巒公派) 파보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홍낙성의 부친 홍상한(洪象漢, 1701~1769)에게 서제(庶弟) 홍직호(洪直浩, 1719~?, 초명 鐵漢)가 있었고, 그의 아들은 홍낙풍(洪樂豊, 1743~1819)이었다. 조부 홍석보(洪錫輔, 1672~1729)는 서자 낙풍을 포함해 아들이 둘뿐이었다. 결국 홍낙성의 5촌 서조카라면 홍낙풍의 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족보에는 홍낙풍 아래에 ‘무후(無後)’라 하고 홍지영의 이름이 없다. 이름을 파낸 것이다. 왜 팠을까? 부부가 모두 천주교 신자였고, 대역부도로 죽은 강완숙의 이름을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족보에서 파낸 홍지영이 실제 홍낙풍의 아들이요, 홍직호의 손자란 사실은 어떻게 특정할 수 있을까? 1801년 「사학징의」 기록 중 남대문 밖에 살던 권생원의 여종 복점(福占)의 공초에 “홍문갑(洪文甲: 홍지영의 아들)의 아비는 일찍이 홍영산(洪靈山)의 집 여종과 유모의 일로 결성(結城)에 내려가 1년에 두 번쯤 올라와서 어머니를 뵙습니다”라는 진술이 결정적이다. 강완숙의 여종 정임(丁任)도 “제 바깥 상전이 갈만한 곳은 덕산(德山)의 농막(農幕)이나 결성(結城)의 수리(水里)와 오리(五里) 등지”라고 진술했다. 덕산 농막은 별라산집을 가리키고, 이와 별도로 결성의 수리와 오리라는 곳에 전장과 노비 등의 근거가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홍지영은 무과에 급제해 영산 현감을 지냈던 조부 홍영산, 즉 홍직호에게서 물려받은 전장(田莊)과 노비 관리를 위해 1801년 당시까지 가족과 떨어져 별라산과 결성 등지에 머물고 있었다. 홍문갑은 홍지영의 아들 복자 홍필주의 초명이다.
조부 홍직호가 영산 현감을 지냈고, 그는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홍낙성의 서제(庶弟)였다. 그 아들 홍낙풍은 현감을 지낸 기계(杞溪) 유씨(氏) 욱기(郁基)의 딸과 혼인했다. 홍지영은 그 홍낙풍의 아들이었다. 그런 그를 두고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홍지영이 내포 지방의 지체 낮은 외교인 향반(鄕班)이며, 순박하지만 어리석고, 신앙생활에도 우유부단했던 인물로 묘사했다. 그는 강완숙이 천주교를 믿는다고 하여 쫓아내기까지 한 인물로 그려졌다.
강완숙은 1792년 이후 어느 시점에 남편 홍지영을 남겨두고 상경하는데, 남편에게 쫓겨난 여자가 시어머니와 전처 소생 아들 홍필주를 데리고 올라왔다. 뭔가 앞뒤가 안 맞아 석연치가 않다.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여장부의 기질이 다분했던 강완숙은 왜 남편만 남겨두고 훌쩍 상경했을까? 여기에는 분명 우리가 잘 모르는 속사정이 있음에 틀림없다.
다시 「수기」로 돌아가, 1792년 1월 3일 자 보고에서 박종악은, 충청도 사학의 종장(宗匠)이라는 홍낙민(洪樂敏)이 12월 10일에 예산에 내려와 수령과 대면하고 관아에서 묵어 잔 뒤에, 11일에 예산 호동(狐洞), 즉 여사울에 도착해 노비 박꽁꽁의 집에 묵은 동향을 적었다. 이어 19일에는 “그 서족(庶族)인 덕산 별라산에 사는 홍지영의 집을 방문하였다”고 했다. 별라산은 내포 지역 교회에서 홍낙민이 한 차례 내려올 때마다 순방할 만큼 비중 있는 곳이었고, 그곳의 책임자가 홍지영이었다.
그는 과연 무식하고 신앙심도 약하며, 천주교를 믿는다고 아내를 내쫓기까지 했던 인물이었을까? 쫓겨났다는 그의 아내 강완숙은 어째서 굳이 성정이 만만찮았던 시어머니와 전처 소생의 아들까지 데리고 상경 길에 올랐을까? 족보상 1819년까지 살아있던 것으로 나오는 홍지영의 부친 홍낙풍은 왜 이들과 함께 살지 않았을까? 1801년 당시 「사학징의」에 천주교 관련 인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나오는 또 다른 홍낙풍은 누구인가? 우리는 연쇄적인 질문에 휩싸인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2) 집 나가는 아우들
홍교만과 이기연, 제사 지내지 않으려고 형이 통곡해도 가출
- 복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사돈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받아 자신의 집에 숨겨 두었다.(탁희성 화백 그림) 홍교만은 서울에서 지내다가도 부친의 기일이 되면 제사를 피해 포천 자기 집으로 슬며시 돌아가 자리를 피하곤 했다.
제사를 지내느니 혈연을 끊겠다
초기 천주교 신자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제사 문제였다. 특별히 1790년 구베아 주교의 사목교서가 조선 교회로 전해진 뒤로 더 했다. 윤지충의 막내아우 윤지헌(尹持憲)은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전라도 고산(高山)의 이존창의 집에 여러 날 머물 당시, 신부를 만나기 위해 고산으로 찾아갔다. 이후 전주 유관검의 집으로 내려와 머물자, 다시 신부를 찾아가서 만났다. 1800년 11월에는 내종 간인 정약종의 서울집에서 한 번 더 신부와 만났다. 그는 드물게 다른 세 장소에서 신부를 만날 수 있었던 특별한 위치에 있던 신자였다.
그를 세 번째 만났을 때 주문모 신부가 윤지헌에게 물었다. “제사를 지내고 있는가?” 윤지헌이 “죽은 이를 산 사람처럼 섬기는 것이 우리나라의 예절입니다”라고 대답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신부는 바로, “제사는 지극히 허황하고, 또 우리 도에서 꺼리는 바이다”라고 하며 나무람을 이어갔다. 「사학징의」에 나온다. 구베아 주교의 사목교서 이후 주문모 신부까지 제사 금지의 원칙을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조선에서 제사의 여부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징표로 굳어졌다.
집안 전체가 신앙생활을 할 경우는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제사 문제는 신앙생활에 심각한 장애요 걸림돌이었다. 정광수 윤운혜 부부가 여주 부곡면(浮谷面)의 터전을 버리고 서울로 상경한 것은 제사 문제로 인한 집안 갈등이 폭발 직전까지 갔기 때문이었다. 「사학징의」의 공초에서 윤운혜는, 조상 제사에 계속해서 참석을 거부하자 시어머니가 나무라며 꾸짖음이 너무 심해서 상경을 결심했다고 했다. 신앙을 지켜낼 수 없다면 혈연을 끊는 것이 맞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정약종 일가가 마재를 떠나 분원(分院) 쪽으로 세간을 난 것도 발단은 제사 때문이었다. 정약종이 제사 참석을 거부하자, 부친 정재원의 노여움은 극도에 달했다. 뜻을 꺾고 순종한 정약전, 정약용과 달리, 정약종은 꿈쩍도 하지 않고 차라리 부자의 연을 끊겠다며 자진해서 솔가하여 집을 나갔다.
「사학징의」에 실린 신유년(1801) 2월 12일 의금부의 공초에 당시 정약종이 작성했다가 압수된 일기장 이야기가 나온다. 심문관이 말했다. “네 일기 속에 또한 조상에게 제사 지내거나 묘소에 참배하거나, 부모의 상을 치를 때 비단으로 신주를 만들고 제사상을 차리는 것 등의 일들은 모두 죄짓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네 부모에 대해 차마 할 수 없는 망측한 말을 했고, 나라에 대해서도 뻔뻔스럽게 도리에 어긋난 말을 했으니 매우 흉악하다.”
차마 망측한 말이란 일기 속에 적힌 “나라에 큰 원수가 있으니 임금이요, 집에 큰 원수가 있으니 아비이다(國有大仇, 君也. 家有大仇, 父也)”란 문장을 두고 한 말이었다. 사학죄인을 다스릴 때 입만 열면 나오는 말이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무리란 소리였다. 하지만 천주를 믿는데 장애가 된다면, 임금도 아버지도 그에게는 원수요 마귀였다.
그의 아들 정철상(丁哲祥)은 「사학징의」 공초 중 형추문목(刑推問目)에서 심문관이 “어려서부터 사학에 물들어서 네 아비 정약종의 악행을 도왔고, 심지어 집에 있을 때는 네 조상의 제사에 참배하지 않았다”고 추궁하자, 정철상은 “저는 사학에 깊이 미혹되어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종대부(從大夫)께서 사학을 금지하며 신부에 대해 바른대로 고하라는 뜻으로 송곳으로 찔렀지만 고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글 속의 종대부는 정약종의 숙부 정재운(丁載運)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정재운은 정철상의 조부 정재원의 친동생이지만 정지열(丁志說)에게 출계(出系) 되었다. 종손(從孫)을 송곳으로 찔러가며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대라고 추궁하는 모습에서, 정약종이 목이 잘려 죽은 뒤 갈 곳이 없어 마재로 돌아온 정약종의 가족들에게 집안의 무지막지한 폭력이 행사되었음을 보여준다.
개가 웃을 말
정인혁(鄭仁赫)의 공초에도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하는 행동으로 집안과 지속적인 갈등을 빚는 모습이 보인다. 정인혁은 1791년 형조에 붙들려 갔을 때, 부친과 형이 같이 끌려갔다. 아버지와 형은 형조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금지하여 끊게 하고, 친척들이 온갖 방법으로 타일렀어도 오히려 더 깊이 믿어 어찌할 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정작 정인혁 본인은 천주교에서 제사를 크게 그르다고 가르치므로 영원히 폐기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정흠(韓正欽)은 최후진술에서 “사당을 헐고 제사를 폐하고도 오히려 천당과 지옥에 일찍 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죽는 것을 사는 것과 같게 보았고, 그릇된 도리로 대중을 미혹시켰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재신(李在新)의 형추문목에는, 그가 주변 사람에게 사학을 권유할 때 제사 문제가 걸림돌이 되자, “사학하는 사람은 제사를 드리지 않지만, 만약 제사를 안 드리면 남이 지목하는 바가 되므로 어쩔 수 없이 사당에 절은 하는데, 이른바 허배(虛拜), 즉 헛절이라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훈수하는 얘기가 나온다. 일부 눈가림용의 위장술을 슬쩍 권하기도 한 셈이다.
반면 남필용(南必容)은 형조에 올린 초사에서 “산 사람은 음식을 몹시 즐겨도 영혼은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만약 부모의 영혼이 분명히 흠향하실 것을 안다면, 비록 집을 팔고 몸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또한 풍성하게 차리고 넘치도록 행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허사인 줄을 알기에 과연 정성된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사학을 하지 않는 자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진실로 죄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학을 하는 자가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 또한 도리입니다”라고 하며 정면 돌파했다.
형조와 좌우포청에서 천주교인들을 잡아다가 문초할 때 첫마디는 늘 패륜멸상(悖倫蔑常)과 이적금수(夷狄禽獸)의 도리를 꼽았다. 그 주된 근거 또한 언제나 제사 거부였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나열(羅烈, 1731~1803)이 1790년에 지은 「서학(西學)」 시에서 “서학은 천주를 위주로 하여, 부모를 빈 병처럼 여기는구나. 자신을 병 속 물건처럼 보거니, 따른 뒤엔 병에 무슨 정이 있겠나(西學主天帝, 父母視空甁. 自同甁中物, 脫來甁何情)”라고 지적한 데서 보듯, 그들에게 육신을 준 아버지는 잠시 몸을 담고 있던 빈 병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의 가짜 아버지는 잠시 몸을 빌어 태어난 것일 뿐이고, 진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천주여야만 했다. 조상 제사를 거부하고, 부모에게 이런 모진 말과 행동을 하면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겠다니, 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패륜도 이런 패륜이 없었다. 개가 웃을 말이었다.
바깥 사람들은 점차 제사 여부를 그가 천주교 신자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여기게 되었다. 한번은 궐내에 숙직 중이던 이가환에게 집에서 제삿밥을 보내왔다. 함께 숙직하던 승선(承宣) 임제원(林濟遠)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대 집에서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가?” 천주학을 한다는 사람이 어떻게 제사를 지내느냐고 비아냥거린 내용이다. 「눌암기략」에 나온다. 그전 이승훈과 권철신의 예에서도 보듯 진산 사건 이전에도 제사에 대한 거부감은 있었지만, 진산 사건 이후로 이 문제는 더 이상 대충 뭉개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 복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가출하는 동생과 통곡하는 형
강세정의 「송담유록」에는 제사 때만 되면 가출하는 아우들의 이야기가 두 차례 나온다. 먼저 홍교만(洪敎萬, 1737~1801)의 이야기를 보자. 그는 정약종의 집안과 혼인을 맺었고, 권철신과는 내외종간이었다. 서종제(庶從弟) 홍익만(洪翼萬, ?~1801)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온 집안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천주교를 믿었다.
“성품이 몹시 편협한지라 미혹됨이 더욱 심하였다. 서울에 들어오면 그의 큰 형님 집에 여러 날씩 머물렀는데, 부친의 기일을 만나면 그때 임시해서 포천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서학에서는 제사를 지내면 마귀가 와서 먹는다고 해서 제사의 예를 폐한다. 그 백씨가 힘껏 붙들어도 듣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통곡하기에 이르렀다. 사학이 사람의 심술을 빠뜨림이 이와 같았다.”
그의 큰 형은 한성판윤을 지낸 홍주만(洪周萬)이었다. 내둥 서울서 지내다가, 아버지의 기일만 되면 제사를 피해 포천 청량면(淸凉面)에 있던 제 집으로 슬며시 돌아가 자리를 피하곤 했다. 홍주만이 통곡을 하며 붙잡아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송담유록」에 거의 똑같은 기록이 하나 더 있다. “충주의 사족인 이최연(李最延)과 이기연(李箕延, 1737~1801) 형제가 권일신에게서 배워 오로지 사학(邪學)에 마음을 쏟았다. 그의 큰 형인 이세연(李世延, 1721~1797)은 근후하고 이름이 알려진 선비였다. 한번은 부친의 기일이 되었는데, 두 아우가 참석하지 않자 이세연이 통곡하였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앞서 홍교만의 기록과 짜 맞춘 듯 똑같다. 큰집 제사에 천주학을 믿는 동생들은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았다. 큰형이 통곡으로 만류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은 것까지 판박이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3) 홍교만·홍인 부자와 포천 교회
포천의 사도 홍교만, “예수의 학문이 정학이다” 당당하게 선언
- 춘천교구가 2014년 순교 성지로 선포한 포천 홍인 레오의 순교터에 세운 현양비.(김승한 제공)
홍교만 집안의 신앙
홍교만(洪敎萬, 1738~1801)은 1801년 2월 26일,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낙민, 이승훈과 한 날 목이 잘려 순교했다. 정약용은 「추안급국안」에 실린 1801년 2월 13일 자 의금부 공초에서 “포천의 홍교만 또한 유명하고, 제 형과는 친사돈 간이며, 홍주만의 아우입니다”라고 진술했다. 함께 형이 집행된 인물들의 면면과 정약용의 진술로 당시 홍교만의 교계 내 위상이 드러난다. 아들 홍인(洪, 1758~1801)과 서종제(庶從弟) 홍익만(洪翼萬, ?~1801)도 신유박해 때 순교의 길을 따랐다.
홍교만의 큰 형 홍주만(洪周萬, 1718~1799)은 집의를 거쳐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정2품 한성 판윤(判尹)을 지낸 명망 있는 인물이었다. 부친 홍회(洪晦, 1694~1763)의 기일에 홍교만이 제사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포천으로 떠나자, 홍주만이 대성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송담유록」에 나온다.
「송담유록」에는 1785년 을사추조 적발 이후 지역 교회의 활성화를 말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권일신은 한강 상류에서 가르침을 행하였다. 남필용(南必容, ?~1802), 이기연(李箕延, 1737~1801), 이최연(李最延), 홍교만, 홍익만 등이 마음을 기울여 본받아 배우며 남몰래 서로에게 전수하였다. 양근(楊根)과 여주(驪州), 이천(利川)의 몇 고을 사이에 무지한 어리석은 백성들이 휩쓸리듯 이를 따르니, 마치 소리의 기운이 멀리서 서로 호응하는 듯하였다.”
양근의 권일신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듯 충주의 남필용과 이기연 형제, 그리고 포천의 홍교만 등이 지역 교회의 간판 역할을 하면서 교세를 확장해가는 과정을 설명했다. 이들은 모두 권철신 집안과는 친인척 간이었다. 남필용은 권철신의 처남으로 충주에 살다가 1791년에 양근에서 사학을 배웠다. 1791년에 충주 관아에 끌려갔다가 석방된 뒤 1792년에 서울 소공동으로 이사했다. 상경 이유는 마음껏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였다. 충주의 사도 이기연은 권철신의 동생 권숙신의 아들 권상익(權相益)에게 딸을 시집보내, 사돈을 맺었다.
홍교만은 그 명망과 비중에 비해 알려진 사실이 많지 않다. 「사마방목(司馬榜目)」에 따르면 1738년생인 그는 40세 때인 1777년 식년시에 진사로 급제했고, 자가 도경(道卿)이다. 부친 홍회는 초배 풍천(豊川) 임씨(任氏, 1695~1723)와의 사이에서 맏아들 홍주만, 둘째 아들 홍소만(洪召萬, 1720~1788)을 두었다. 이후 18년의 터울을 두고 계배(繼配) 한양 조씨(趙氏, 1706~1781)에게서 막내 홍교만을 얻었다. 남양홍씨 예사공파 족보에는 홍교만과 그의 아들 홍인의 이름은 파버리고 없다. 그의 계보는 「남보(南譜)」와 「만가보(萬家譜)」에 겨우 남았다.
권철신의 부친 권암(權巖, 1716~1780)에게 시집간 홍상빈(洪尙賓, 1672~1740)의 딸 홍씨는 홍교만의 고모였다. 따라서 권철신은 홍교만과 고종사촌 간이다. 그런데 「만가보」에서 홍회의 여동생 홍씨를 홍교만의 누이로 잘못 적고, 또 황사영이 「백서」에서 홍교만을 권철신의 외숙이라고 착각하는 바람에, 홍교만과 권철신의 계보 이해에 얼마간 혼선이 빚어졌다. 1794년에 간행된 안동 권씨 족보에 권암의 배(配)가 남양 홍씨 참판 상빈의 딸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어, 움직일 수 없다. 홍교만의 부인은 「남보(南譜)」에 유주갑(柳周甲)의 딸로 나온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774년 통문. 홍교만의 이름이 서명자의 첫머리에 나온다.(김승한 제공)
홍교만의 입교 시점
홍교만의 입교 시점은 찬찬히 따져 볼 부분이 있다. 교회사에서는 1791년에 아들 홍인이 입교하고, 그 이후 아들의 설득에 의해 1795년에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정리된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의 기록에 바탕을 둔 설명이다. 홍교만은 1777년 늦깎이 진사가 된 얼마 뒤 포천으로 이주했고, 고종 간인 인근의 권철신 집안을 통해서 천주교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썼다.
우선, 홍교만이 권철신, 권일신을 통해 1차로 천주교에 접촉한 것은 1785년 전후 교회 출범 당시일 듯하다. 강세정(姜世靖, 1743~1818)은 「송담유록」에서 “홍교만은 판윤 홍주만의 아우로, 나와는 함께 공부했다. 문사(文詞)가 풍부하여 사람들이 알찬 인재라고 일컬었다. 전에 나와 함께 있을 때, 말이 사학의 주장에 미치면 팔뚝을 걷고 큰 소리로 극구 엄격하게 배격하였다. 나중에 정약종과 혼인을 맺었고, 또 권철신의 형제와는 내외종 간이었다. 그의 서종제(庶從弟)인 홍익만도 서학에 깊이 들어갔기 때문에 뒤늦게 그 술법을 배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집안이 빠져들었다. 성품이 몹시 편협한지라 미혹됨이 더욱 심하였다”고 적었다.
강세정은 젊은 시절 홍교만과 함께 수학했다. 강세정은 이때만 해도 홍교만은 천주교에 대해 엄격히 배격하는 태도를 지녔다고 증언했다. 이후 권철신과 고종사촌 간인 데다 정약종과 사돈을 맺으면서 서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외골수의 성격 탓에 한번 배워 익힌 뒤에는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고 적었다.
또 강세정은 「송담유고」에 실린, 척사파였던 아들 강준흠(姜浚欽, 1768~1933)을 변호하기 위해 쓴 「가아준흠변방록(家兒浚欽卞謗錄)」에서 “사학에 빠진 자는 숫자가 많으니, 이가환과 이기양, 이기성, 이총억, 그리고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정철상, 그리고 권철신의 온 집안 형제와 숙질, 이벽과 홍교만 부자, 이학규와 황사영, 유항검 형제, 이윤하 부자 등 5, 60명을 밑돌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이름들은 모두 교회 창립 초기의 핵심 구성원들이다. 특별히 홍교만 부자의 이름은 이벽과 나란히 호명되고 있다. 누구보다 홍교만을 잘 알았던 강세정의 일관된 진술은 홍교만의 입교가 1785년 전후 교회 창립 당시로 소급되어야 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더욱이 홍교만은 1801년 2월 20일 의금부의 공초에서 예수의 학문이 정학이며, 사학일 수 없다고 당당하게 선언했고, 존경하고 찬송한다는 말까지 붙여 심문관의 매서운 추궁을 받았다. 예수 강생설을 확신하여, 「시경」 「서경」 「역경」에 비춰봐도 내용이 합치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심문관이 이쪽과 저쪽 중 하나만 가리키라고 하자, 그의 대답이 이랬다. “제가 이 학문에 대해서는 수십 년 동안 공부를 쌓아서 비로소 얻은 것이니, 이제 어찌 한마디 말로 억지로 뉘우쳐 깨달았노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미 강생한 예수를 아는지라, 이제 갑작스레 뉘우쳐서 예수를 삿되다 하기 어렵습니다.” 말이 당당하고 단단했다. 추국장의 사학죄인의 진술 중 가장 힘 있는 대답이었다. 이 말을 한 엿새 뒤인 2월 26일에 그는 사형에 처해졌다. “홍교만은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사형을 받았습니다”라는 국청의 계사(啓辭)가 남아있다.
홍교만이 1791년 이후,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1795년 언저리에 입교했다면 불과 6년 뒤의 일이라 위 진술 중 수십 년이란 언급은 가당치 않다. 이를 자신이 수십 년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십수 년 이상 공부했다고 말한 것으로 본다면, 또한 1780년대 중반 입교설에 힘이 더 실릴 수 있다고 본다.
사위 정철상과 아들 홍인
홍교만은 정약종과 사돈을 맺어 그의 막내딸이 정약종의 맏아들 정철상과 혼인을 맺었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1801년 3월에 참수될 당시 정철상의 나이가 20여 세였다고 했고, 「조선순교자비망기」에서는 약 20세였다고 썼다. 정철상은 죽을 때 젊은 미망인과 아들 하나를 남겨두었다.
정철상이 홍교만의 딸과 혼인한 것은 정황상 1797년을 전후한 시점이었을 것이다. 부인 홍씨와 어린 아들은 마재에서 요절했다. 1801년에 사형당한 정철상은 죽을 당시 20세 남짓이었다. 그는 1780년을 전후해서 태어났다. 정철상과 결혼한 홍교만의 딸이 통상 두 살쯤 위인 1778년이거나 그 비슷한 언저리에 태어났다고 볼 때, 그녀와 오빠 홍인과의 나이 차이가 20세가량 난다.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의 홍인 조에서, 홍인이 포천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1774년에 작성된 포천 유림의 통문이 남아있다. 포천 용연서원(龍淵書院)의 건물이 낡아 새로 짓기 위해 각계의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연명(聯名)한 명단 첫머리에 홍교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는 진사시에 급제하기 3년 전인 1774년에 이미 홍교만이 포천지역 유림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의미이니, 그의 포천 이주를 1777년 이후로 본 달레의 언급과 달리 홍교만의 포천 입주는 이보다 훨씬 앞선 시점이었다. 다만 1758년생인 홍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이곳에 정착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한편 「사학징의」의 공초에서 홍인은 “저는 홍교만(洪敎萬)의 아들로, 신해년(1791)에 아비의 가르침을 곁에서 듣다가 따라 배워 깊이 미혹되었습니다”라고 하여, 자신이 아버지 홍교만을 신앙으로 이끈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통해 신앙을 갖게 되었음을 밝혔다.
포천의 사도 홍교만의 행적은 이렇듯 풀어야 할 고리가 많다. 신앙의 출발점이 1785년 직후인지 아닌지, 포천으로의 이주 시기는 언제인지를 살펴야 하고, 홍교만과 홍인의 신앙의 선후 관계도 짚어봐야 한다. 「사학징의」에 포천 지역 검거 교인 명단이 따로 나오지 않는 것은 의외다. 1795년 이후 홍교만이 서울 지역으로 활동 공간을 옮겼기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