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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덮개
출 26: 1-14
몇 주전 수요일에 이런 인사를 하게 했다. '수요일에 나오는 우리는 수준 높은 성도입니다' 그래서 웃었다. 오늘은 주일에 나오시는 여러분도 수준 높은 성도로 만들려고 한다.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란다. '주일에 나오는 성도도 수준 높은 성도입니다.'
수요일마다 출애굽기 강해를 하고 있다. 구약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성막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좀 딱딱한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참 중요하고 가장 귀한 말씀이다.
어려서는 우유를 먹고 자라지만 성장하면 고기나 딱딱한 음식을 먹게 된다. 항상 어머니의 젖만 빨아 먹는 유치한 신앙의 단계에서 이제는 좀 딱딱한 말씀도 먹고 소화하며, 한 걸음 더 나가서는 스스로 말씀을 읽고 적용하는 성숙한 신앙의 단계로 성장해 가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오늘은 좀 어려운 성막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오늘 본문은 성막의 덮개를 만드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성막은 거처를 말한다.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는 거처를 지으라고 모세에게 명하셨다. 성막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기 위해 임재하시는 거룩한 곳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상징적으로 예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막은 예배의 중심지였고 백성들이 거주하는 중심지역에 위치했다. 성막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셨고 백성들이 해야 할 일들을 말씀해 주셨다. 이 성막은 쉽게 말해서 요새 말로 tent를 말한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하면서 계속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동식 tent가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유목생활을 하거나 이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문명에서 tent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tent의 크기나 견고함과 화려한 모양을 보아서 거기 거하는 사람의 신분이 표시되었다. 예를 들어 왕이나 지휘관이 있는 tent는 가장 크고 잘 만들어진 화려하고 견고한 것이었다. 그 tent가 왕과 지휘관의 권세와 힘을 나타내 보였다. 지휘관의 장막이 무너진다는 것은 패배를 의미했다.
요새는 레저 산업이 발달되어서 tent를 치기 쉽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옛날 tent는 세우기가 힘들었다. 모든 규격을 잘 맞추어서 세우지 아니하고 적당히 세우면 비바람에 넘어지거나 쓸어져 다시 세워야만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나를 위해 장막을 만들라고 하셨다. 규격까지 말씀해주시고 그 안에 법궤를 만들게 하시고 그 외 모든 기구들을 만들게 하셨다. 하나님은 장막의 재료와 규모, 안팍의 덮개 자료까지 언급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바람에 펄럭이지 않도록 그 안 전체를 나무로 돌아가면서 벽을 세우고 그 밑에는 은받침으로 고정을 시키셔 하나님의 장막이 견고하게 되도록 하셨다.
성막이 천막으로 된 것은 수시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광야에서 모래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도 성막이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에 성막 덮는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성막에는 네 개의 덮개를 하게 하였다. 오늘은 이 네 개의 덮개를 생각해 보므로 하나님의 주시는 교훈을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한다.
네 덮개를 밖에서부터 살펴보면 제일 바깥에는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어 덮었고 다음은 수양의 가죽으로, 그 다음은 염소털로 덮개를 만들었으며, 안에는 세마포로 만들게 하였다. 이것을 밖에서부터 하나하나 생각해 보겠다.
1. 해달의 가죽이다(14절 하)
14절에 보면 제일 웃덮개를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게 했다. 해달은 나일강유역에 살고 있는 일종의 돌고래를 말한다. 이 돌고래 가죽이 질겨서 신발 만드는데 사용된다고 한다. 이렇게 모양은 없지만 광야의 모래 바람이나 비바람을 막아내기 위해 든든한 해달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게 했다. 미국 사람들이 집 짓는 것을 보면 겉에서 보면 별로 호화스럽지 않다.
그러나 안에는 참 쓸모 있게 실용적으로 짓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겉은 화려한데 안은 별로 쓸모 없이 짓는 것을 볼 수 가 있다. 물론 지금은 한국도 많이 달라졌다.
맨 바깥 덮개를 해달로 만든 성막은 겉에서 보기에는 별로 보잘 것 없고 아름답지 못하였다. 그 안의 아름다움도 밖에서 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다'고 표현했다.
시편기자도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마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든다'(시 22: 6-7)고 했다.
최근에 감옥살이를 하다가 나온 대통령 아들이 국민들에게 할 말이 있느냐고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였다. 그런데 적절한 인용인지 아닌지는 여러분이 판단하기를 바란다.
이사야 선지자는 또한 그 주님에 관하여 언급하기를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다고 했다(사 52: 14).
바울도 외모는 보잘 것 없었다. 이것이 저에게도 큰 위로가 된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성만 보기 때문에 주님의 참모습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목수의 아들로 오신 예수, 훌륭한 말씀을 강론한 교사나 종교지도자로 오신 예수 정도로 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즉 성막을 볼 때 그 겉모양의 해달의 가죽만 보지 그 속에 숨어 있는 수양의 가죽, 염소털의 가죽, 아름다운 세마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해달의 가죽으로 덮여있는 그 성막에 있는 황금으로 된 법궤, 떡상, 등대, 분향단과 황금 촛대에서 비추는 불을 받아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는 색실로 수놓은 커튼을 바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아름다운 내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다윗처럼 감탄의 기도와 신앙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다윗은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고백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처럼 우리는 주님께 나오고 교회에 나올 때 해달의 가죽만 보아서는 안 된다. 속을 보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아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통찰력이다. 영적 통찰력이다.
우리는 사물을 보고 역사를 볼 때 겉모양만 보아서는 안 된다. 현상학적인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 배후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바라보아야 하며, 영적 세계를 보고 진리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꿀을 따는 양봉업자는 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꽃 속에 들어있는 꿀을 바라보고 꿀의 양과 질을 생각한다.
내과 의사들은 사람을 볼 때 항상 그 사람의 속에 관심이 있다. 우리는 너무 겉만 보고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현실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도 외모를 보시지 않고 속 중심을 보신다고 하였다.
세례 요한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물었다. 우리는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오셨는가? 어떤 분은 교회에 나와서 실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의 실망거리만 보고 돌아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돌아간다.
꼭 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어떤 이는 형식적인 예배를 한 시간 드리고 간다. 그러나 어떤 성도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고 간다.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겉만 보느냐? 속 중심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겨울 나뭇가지를 볼 때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것 같지만 그 가지에서 봄이 오면 싹이 나고 잎이 자라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 속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어떤 점에서 전통과 기성질서를 다 뒤엎는 거꾸로 된 세상처럼 보인다. 젊은이들 보면 모자도 거꾸로 쓰고 다닌다. 바지도 일부러 찢어서 입는다. 남자들이 여자들이 하는 귀걸이 코걸이를 하고 다니며, 여자들은 오히려 남자들처럼 청바지를 입고 남장을 하고 다닌다. 남자끼리 결혼을 하고 여자끼리 결혼을 한다. 그런데 이런 삐뚤어진 겉만 보면 참으로 현대인의 모습을 바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이면에는 현대인의 몸부림과 내적 갈증이 숨겨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외모만 보고 너무 속단하지 마세요. 고난만 보지 말고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과 섭리의 손길을 바라보시기 바란다.
사건의 현상만 바라보지 말고 그 내면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적 사건을 바라보시기 바란다.
한 면만 바라보지 마시고 사건의 전체를 바라보는 영적 통찰력을 가지시기 바란다.
2. 수양의 가죽(14절 상)
해달의 가죽 다음에는 붉은 물을 들인 수양의 가죽을 덮었다(14절).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성막의 보호를 위해 필요하였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 몸에도 몸 안에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 많다.
수양은 대속의 희생물로 사용되는 짐승이다. 인간의 죄 때문에 대신 죽어야 될 짐승이다.
아마 양이 말을 한다면 할 말이 참 많을 것이다. 너희가 잘못은 저지르고 죄는 지어놓고 왜 내가 죽어야 하느냐고 따질 것이다. 제발 그만 죄를 짓고 바르게 살라고 말할 것이다.
예수님은 속죄양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살려주셨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붉은 수양의 가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담이 죄를 짓고 부끄러워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 입고 수치를 가리우려 했다. 나뭇잎은 곧 시들고 말라 비틀어졌다. 인간의 노력으로 수치를 가리울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때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해 입혔다(창 3:21). 무슨 짐승인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한 주석가는 수양의 가죽으로 해석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저들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신 것을 말한다. 즉 아담, 이브를 대신해서 수양이 죽은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속량함을 받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창세기 22장에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바치려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노라' 하시고 하나님이 대신 숲속에 수양을 예비해 두셨다가 번제로 드리게 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식마저 하나님께 드리려고 결단하는 순종의 믿음을 보시고 여호와 이레의 기적과 축복을 주셨다. 이 수양은 십자가상에서 대속물이 되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레위기 8장에는 제사장의 위임식이 기록되어 있다.
제사장의 위임식에서 수양이 대신 죽임을 당하였다. 그 수양의 피를 제사장의 옷에 뿌리고 오른 손 엄지 손가락에 수양의 피를 발랐다.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각오한 헌신을 의미하는 서약이었다.
우리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다. 제사장 된 성도는 모두 하나님 앞에 죽음을 각오한 헌신의 서약을 한 사람들이다.
윌리암 보렌은 시카고의 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는 은혜를 받고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해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선교사로 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을 맡아 운영해 주기를 부탁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포기하고 이스람권과 중국선교를 위해 준비를 하고 임지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임지로 가기 전 먼저 애굽 카이로에 들려 여러 가지 준비를 하다가 그만 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선교를 제대로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참 헛된 죽음을 한 것처럼 느꼈다. 그런데 사실은 그의 죽음을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헌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선교에 헌신해서 그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는 선교의 불을 부친 한 알의 밀알이 된 것이다.
3. 염소털(7절)
7절에 보면 세 번째 덮개는 염소털로 만들게 했다. 이 염소털은 바깥의 열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참 실용적인 tent였다.
이 tent는 광야생활에서 이동할 때 조립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해달의 가죽은 방수 역할을 했고 염소털은 열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더 큰 영적 실용성이 있었다.
레위기 16장에 보면 속죄 일에는 두 염소를 사용하였다. 한 염소는 번제단에서 잡고 그 피를 그곳에 쏟아 부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다. 다른 염소는 그 위에 손을 얹고 안수하므로 모든 죄를 염소에게 전가시켰다.
그러면 백성의 죄가 염소에게로 가고, 백성은 죄에서 깨끗해졌다. 그런데 이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백성은 죄와는 상관없는 깨끗한 몸이 되었다.
우리 주님이 죄를 맡아서 사하시고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 죄악을 도말하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말씀하셨다.
우리는 속죄 염소가 되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모든 죄에서 속량함을 받아 자유인이 되었다. 주홍 같은 붉은 죄라도 흰눈처럼 깨끗이 씻어주시고 양털처럼 깨끗이 씻어 주시겠다고 하셨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너희 죄를 기억도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할렐루야! 기독교는 실제로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는 종교이다. 우리를 변화시키고 죄를 용서해서 새 사람되게 하며 새 용기를 가지고 살게 하는 실용적인 도움과 위로와 힘을 공급해 주는 것이다. 그 점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진리와 생명 그 자체이다.
기독교복음은 변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담은 형식은 융통성이 있고 상황에 따라 변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육신의 정신이다.
바울은 모든 자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한 영혼이라도 더 얻기 위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아래 있는 자같이 되고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같이 되었다"고 고백하였다(고전 9:19-21).
신학적으로 토착화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어떤 나라에 들어가 복음을 선교할 때 그 나라의 문화나 풍습을 무시하지 않고 복음을 그 나라의 문화나 풍습에 맞게 정착시키고 생활화하는 것을 말한다.
4. 세마포(1절)
성막의 네 번째 덮개가 되는 가장 안에 있는 것은 가늘게 꼰 세마포로 만들게 하였다(26:1).
1-6절까지 보면 얼마나 아름답고 섬세하게 잘 만들게 했는지 모른다. 이 세마포 덮개는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천사들)을 섬세하게 수놓아 만들었다.
요새는 색실이 흔하지만 그 광야생활에서 색실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아니했다. 이 덮개의 아름다움은 성막 안에서만 볼 수 있었다. 외부의 덮게는 해달의 거죽이라 볼품이 없었지만, 이 안쪽의 덮개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 세마포 덮개는 주님의 거룩한 영광과 온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색은 하늘의 색깔이다. 천상적인 기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홍색(붉은 색깔)은 주의 죽으심과 보혈을 나타내며,
자색은 주의 왕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양날개를 활짝 편 두 그룹의 천사의 모습은 백성을 보호하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그룹은 맨 처음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을 시작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섬기면서 위에 있는 그룹들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확신을 기지고 섬겼다.
세상 바깥에서는 도무지 이 성막 안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성막 안에 들어 와 있는 사람만이 보고 알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성전 안에 들어 온 성도에게만 깨닫고 경험하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인 것이다. 이것은 바깥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신령한 은혜요 축복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은혜를 받으려면 성전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밖에만 머물면 그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예배도 그렇다. 구경꾼의 자세로 관망하면 은혜를 받지 못한다. 안에 들어와 참여하고 involve 해야 한다. 자기 자신의 마음 문을 열고 말씀 안으로 들어가고 말씀이 또한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
우리가 밤이나 수박을 먹을 때 도 그렇다. 겉만 보아서는 그 맛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겉은 보잘 것 없지만 그 겉을 벗기거나 깨고 속을 먹어보아야 그 과실의 진짜 맛을 알 수 있다.
기독교진리는 겉으로 수박 겉핥기식으로는 진짜 맛을 알 수 없다. 10년, 30년, 아니 일생을 교회생활해도 진짜 맛을 알지 못하게 된다. 아무런 변화나 큰 기쁨이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진리는 체험한 자만이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신령한 것이다. 구약의 욥은 42장 5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나서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았다"(빌 3:10) 하였다.
결론적인 말씀을 드리겠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상징하는 법궤와 속죄소를 덮고있는 천막으로써 겉은 보잘 것 없는 것 같았지만 그 내부는 아름다운 천으로 장식되었다. 광야생활에서 운반하기 쉽게 만들어졌다.
교회 조직과 제도도 이렇게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변화에 잘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이 5살 때 입는 옷을 20살이 되어서 입히려면 안 되는 것이다. 몸이 자라는 대로 옷도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막의 크기는 총 길이 18m, 총 넓이 12.6m이었다. 그렇게 크지 않았다. 이곳을 천으로 덮었다. 10개의 천을 50개의 고리와 금 갈고리로 연결시켰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귀한 영적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와 구속받은 성도는 믿음과 사랑으로 서로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고 했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과 팀웍은 생명처럼 중요한 것이다. 어떤 분들은 열심은 있는데 협력을 잘 못한다. 팀웍을 잘 못한다. 교회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팀웍을 잘 해야 하는 것이다.
제가 캐나다에 있을 때 일 년에 한 번씩 캐나다 장로교 총회가 개최하는 guidance conference라는 것이 있다. 신학교에 갈 후보생들 또는 신학생들은 꼭 한 번 참석해야 하는 프로그램이다.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교 교수들도 함께 참석을 하는데 한국 신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저도 늘 초청받아 함께 참석을 했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진행되는데 예를 들어 자기의 교회관, 목회비전 등을 나누지만 가장 중요한 웍삽 중의 하나가 팀웍 훈련이다. 어떤 주제를 놓고 함께 그림을 그리게 한다든가 모형 건축을 하게 한다든가 그룹 게임을 하게 한다든가 이런 훈련을 통해 팀웍 정신을 길러준다.
여러분! 팀웍을 잘 못하는 사람은 가능한 팀웍 훈련을 받기 전에 중직이 되어 봉사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자신도 상처를 입고 남에게도 큰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팀웍을 하기 위해 자기를 잘 알아야 한다. 자기의 장점과 약점, 자기의 은사, 그리고 상대방을 잘 이해해야 한다. 상대방의 문제와 필요에 대해 민감성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특별히 그룹 리더로 일할 때는 소외되는 사람이 없게 하며, 모두 골고루 참여하도록 균형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 때 각각 개성이 다르고 은사가 다르지만 그것을 통해 마치 각각 다른 목소리들이 합쳐서 훌륭한 합창이 울려 퍼지듯이 하나님의 위대한 성전을 함께 이루어 가에 되는 것이다.
오늘 날 가장 필요한 것이 초대교회가 보여준 진정한 공동체 운동이다.
2차대전이 끝나자 브러도 로데라는 분은 전쟁으로 서로 마음이 갈라지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진정한 공동체 운동을 벌이기 위해 떼제공동체 운동을 벌었다. 이 운동을 통해 인종과 교파를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을 펼쳤다. 이런 축복이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