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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三年(1921년) 一月 一日
臨時政府及 臨時議政院 新年祝賀式 紀念撮影
제1열 왼쪽부터 ~.전재순田在淳,김구金九,오희원吳希元,~,~,유기준劉基峻,정태희鄭泰熙,김재덕金在德,김붕준金朋濬,엄항섭,嚴恒燮,정재형鄭載亨
제2열 왼쪽부터 이규홍李奎洪,김철金澈,신익희申翼熙,신규식申奎植,이시영李始榮,이동휘李東輝,이승만李承晩,손정도孫貞道,이동녕李東寧,남형우南亨祐,안창호安昌浩,오영선吳永善,윤현진尹顯振,서병호徐炳浩,조완구趙琬九
제3열 왼쪽부터 ~,임병직林炳稷,~,김복형金復炯,도인권都寅權,최근우崔謹愚,김인전金仁全,이원익李元益,정광호鄭光浩,김태연金泰淵,이복현李福賢,~,김홍서金弘敍,나용균羅容均,황진남黃鎭南,김정목金鼎穆,
제4열 왼쪽부터 ~.왕삼덕王三德,차균상車均祥,김여제金與濟,안병찬安秉瓚,장붕張鵬,김석황金錫璜,김규서金奎瑞,김용철金容喆,~,송병조宋秉祚,양헌梁憲,조동호趙東祜이유필李裕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입법기관 의회이다
임시정부의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구성했으며 임시정부가 존재한 27년간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했다.
1919년 4월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상하이·국내·노령(露領) 등 각 지방의 대표자 29명이 모여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여 민주공화제를 표명하면서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이때 발표된 임시헌장에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차(此)를 통치함"이라고 규정되어 있어 형식적으로는 입법기관인 의정원의 초(超)의회적인 성격과 권한을 보여준다.
제6공화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좌우익 연합정부) 법통을 계승한 정부로 일제시대 좌파 민족주의자도 독립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게 되었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인사는 이승만, 이동휘,이시영,신규식, 이동녕, 안창호,김구, 김규식, 김두봉, 여운형, 김원봉, 박헌영등]
1904년 한성감옥에 투옥된 이승만(29세, 왼쪽에서 3번째)은 옥중학교를 운영하며, 한글과 성경, 영어와 한문, 세계사 등을 가르쳤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대한민국 제6공화국 헌법 전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제국 국호 대한(大韓)과 3.1운동 주도세력 신민회(新民會)의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 이념 국체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을 포용하여 건국한 정부입니다
대한민국의 국호는 대한이며 국체는 민주공화국입니다
대한(대한)은 고종 국왕이 고대부터 내려오는 삼한정통설[三韓(三國)正統說] 입장으로 건국한 국호입니다
三韓(三國)正統說, 大韓的三韓之也. 三韓的馬韓(高句麗=高麗)弁韓(百濟)辰韓(新羅)之也. 大韓民國(대한민국)[삼한정통설, 대한은 삼한(삼국)이다. 삼한은 마한(고구려=고려),변한(백제), 진한(신라)이다. 대한민국]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국가 원수 및 대표에 의하여 국정이 운영되는 나라입니다 민주(民主, 백성의 주인) 3대 원칙은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이고 공화국(共和國)은 다수인이 국가권력을 보유하고 군주가 존재하지 않는 국가를 뜻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6공화국 헌법 제1조]"
독립혐회가 입헌군주국 모델 대한제국 건국에 도움을 주었다면 신민회는 민주공화국 모델 대힌민국 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승만 전대통령이 독립협회와 신민회 등에서 활동한 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 되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조선총독부(조선왕조) 순종 법통(조선왕조 국호)을 제기하는 분도 있었지만 고종 법통(대한제국)을 계승하는 것이 올바른 입장이라는 논의에서 대한 국호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국호는 조선총독부시대 자치정부 이론과 공산주의 계열이 옹호했고[조선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 국호는 조선총독부를 부정하는 독립협회와 신민회 주축의 상해 임시정부가 옹호했습니다
일본정부 내부 조선 국호를 옹호하는 세력은 군국주의(국가사회주의 성향 공화국 이론) 세력이나 인민 회의정부 이론 좌익계열이고 대한 국호를 옹호하는 세력은 독립협회와 신민회를 도와 준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세력입니다
조선(朝鮮)은 아침의 나라(일출) 뜻으로 일출지야(日出之也)나 일출지본(日出之本)의 의미를 하고 있습니다
동학(東學, 민주 새로운 사상)이나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나 동국(東國)등도 조선(신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일본(日本)을 사용하는 야마토 민족(倭族,大和民族 )이 조선(朝鮮) 삼한민족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1949년 제31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왼쪽은 이승만, 가운데는 총리 신성모, 오른쪽은 서울시장 윤보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확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諸) 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各人)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안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이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단기 4281년 7월 12일
대한민국 국회의장 이 승 만[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 헌법 전문]
북한정부 초대 국가원수(국가수반) 白淵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북조선노동당 결성 후 1946년 8월 30일 당 고위 간부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경상남도 대표]
상하이로 가서 출판활동에 종사하다가 단재 신채호(申采浩)가 주필로 있던 '신대한신문'(新大韓新聞) 편집위원을 맡았고, 1919년 7월 7일 개회된 제5기 임시 정부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지역구:경상남도 대표)에 선출되는 등 독립 운동을 했다. 1919년 10월에는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설립한 대한교육회의 편집국 국원으로 일하다가, 그해 이동휘 등을 통하여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2년에 1916년에 펴냈던 조선말본을 수정 보완하여 "깁더 조선말본"을 상해에서 출판했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가 된 김두봉은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그해 상하이 한인 교민학교 인성학교의 국어 교수로 초빙되었다.
1929년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당원이 되었으며 곧 한독당 비서장이 되었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이사가 되고, 같은해 11월 3일에는 상해에서 개최된 11.3학생운동 1주년 기념식에 참가, 안창호·오의순 등과 함께 강연회 연사로 섰다. 1932년 10월 12일 상해 민국로 동방여사에서 한독당의 이유필, 송병조, 조선혁명당의 최동오 한국혁명당의 윤기섭, 신익희, 의열단의 한일래, 박건웅 한국광복동지회 김규식 등 9명과 함께 모여 중국에 있는 각 독립단체간에 통일전선을 결성하기로 하고, 모든 독립단체들이 수차례의 모임을 한 끝에 민족유일당 설립을 결정하였다. 1935년 6월에는 의열단 단장으로 일제에 저항한 경력이 있는 김원봉과 함께 한국민족혁명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35년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
김규식이 총재였고 김원봉은 당 서기였으며, 김두봉은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장에 선출되고, 내무부장 겸 선전부장을 역임하였다. 1937년 1월 한국민족혁명당은 다시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37년 남경(南京)이 일본군에 함락되자 김두봉은 민족혁명당과 함께 남경을 떠나 사천성 중경까지 따라갔다
제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제2전선 구축을 위해서 미영정부의 원조로 창설한1944년 소련령의 동북항일연군(제88독립 저격여단) 부대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김일성.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흑룡강성당사자료> 10집에 수록. (출처 : 한겨레신문)
제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는 소련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한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의 1개이다
제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제88독립 저격여단은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이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은 동 여단 제 1 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의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와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의 제88독립 저격여단 사실은 무시되고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이 부대를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의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는 1939년경부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의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가 등장했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당국에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등 남은 자들도 물자의 부족으로 인해 활동의 계속이 곤란해 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동북 항일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 이 야영지에 따라 제88 독립 저격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나 나아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의 편성은 동북 항일연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의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의 대부분은 중국인이었고조선인은 10%에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에 들어간 부대도 합류해, 제88독립저격여단의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은 소련의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을 받은 적군의 계급을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의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었고, 부지휘 관직에 붉은 군대(소련군)의 장교가 임명 되었다. 병사는 적군의 군복을 착용했다.
1944 년 4 월 현재의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중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과 - 스 메르시
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제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제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제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소총 대대
무선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각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각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년 9 월 ~ 1943 년 7 월 현재)은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정,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양.
제 88 여단의 병사는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과 파괴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그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의 주보중 1940 년 ~ 1943 년 사이에 총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독립저격여단 제 1 독립 저격 대대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고 소련군과 함께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인 수행과 이 때 발휘 된 용기"에 김일성에게는 적기 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독립저격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제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은 1945년 10월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령 제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포츠담 선언문에서 연합군(미국정부)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쟁 참여가 서명되었다. 서명된 내용대로 5월 9일 유럽 전쟁에 승리한 지 정확히 3개월 후 소련군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얄타, 포츠담에서 진행된 연합군 회의 국제 문서 내용에 있다.
8월 폭풍 작전은 미국을 상대로 한 본토 결전에만 대비하고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던 일본제국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원자폭탄 투하만으로도 국가 멸망 및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조 대장이 항복조칙에 따라 무조건 항복하였고, 8월 30일까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다. 불과 1주일(1945년 8월 9일~15일)의 짧은 기간동안 8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60만 명이 넘게 포로로 잡혔다. 반면, 소련군의 전사자는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8월 13일에 청진시에서 소련과 일본이 싸우면서 소련은 300명이 죽었고, 일본은 500명이 죽으면서 250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
소련은 이 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과 몽강국을 붕괴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서방 연합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자국 영토로 흡수하였다. 또,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진주시켜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하였다.
-미군시찰단 연안(延安) 방문
이들의 시찰 목적은 전선 후방 지역에서 8로군(八路軍)과 신4군(新四軍)의 작전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적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 민주당 행정부는 2차 대전 기간 중국의 유고화를 시도하지 못했으나 이러한 기조는 루스벨트 사후 트루먼 행정부에 이어져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는 것을 방치햇고 중국 공산화 이후에도 애치슨 라인 발표 등 중국 유고화를 부단히 추구했다. 이런 중국의 유고화 전략을 무산시킨 것은 한국전(6.25 사변) 발발이었으며이 전략은 1971년 공화당 닉슨행정부의 키신저가 부활시킬 때까지 동면해야 했다.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한반도 문제 해결 위한 4자 회담과 남북교차 승인, 유엔동시가입 등을 제의했다(1976).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스탈린부대[민주사회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 그룹]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
한국전쟁 이후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이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그룹과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 그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 그룹은 한국전쟁 패전 책임과 박헌영등 미국간첩으로 제거 되었고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그룹은 종파주의자로 제거 되었다
아직도 북한 권력층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후손들이 장악하고 있다
김일성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주도 인물로 소련군 도움므로 권력을 장악했다
중국에서는 김일성을 만주 조선족자치정부[만국 조선족자치정부] 공산주의(사회주의) 세대로 평가하고 있으며 일본 좌파는 김일성을 김광서(일본육사 23기 기병과 출신)으로 평가해왔다
소련에서는 한족과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 혼성 용병부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조선인 지휘관으로 알려지고 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을 할 수 없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대통령이나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기본권보장,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1단계 자본주의 민주주의 혁명 추진(경제 기반으로 정치)
자유화 개방화정책(자본주의 정책)도 국가발전[국가 경제성장과 개인 부(富)의 축적(부유층)]을 가져올 수 있다면 민주화도 국가발전(경제성장)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2단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기반 구축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존중돼야 하지만 극단적 자유주의 노선 무정부주의나 극단적 사회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는 국가의 빈곤과 개인의 생존 결핍(가난)만 가져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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