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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최일환목사
친구 대우
요15:14~15
2010년 1월 31일 장안중앙교회 주일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설교:
한문으로 親舊(친구)를 지기(知己)라고 합니다.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지기(知己)라는 말을 풀어보면 알 知(지)자에다가 몸 己(기)자를 씁니다. 그래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나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知己(지기)입니다.
내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여러분에게는 이런 친구가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이런 知己(지기)친구를 갖고 있다면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중국 제 나라에 管仲(관중)이라는 탁월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관중이 처음부터 훌륭하고 탁월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포숙이라는 친구와 생선장사 동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 관중은 늘 이익금을 뒤로 빼 돌리는 욕심쟁이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관중을 비난하자 포숙은 그를 감싸주었습니다.
“관중이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집안이 더 가난하고 딸린 식구가 많아서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여”
전쟁터에 나갔을 때에도 포숙은 늘 맨 앞에서 용감히 싸우는데 관중은 늘 뒤로 꽁무니를 뺍니다. 이때 병사들이 관중을 비난하자 다시 포숙이 그를 감쌉니다.
“관중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몸을 아껴 그의 늙으신 부모님께 효도를 하기 위해 지극한 효심 때문이라고…….”
그 후에 관중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때도 포숙은 몸을 아끼지 않고 敵陣(적진)에 들어가 관중을 구해주었습니다.
이런 친구의 사랑을 먹고 자란 管仲(관중)은 나중에 탁월한 성품과 재능을 지닌 재상이 되었습니다. 후에 관중은 포숙의 눈물어린 우정을 기억하며 말하기를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 준 것은 포숙이었다.”( 生我者, 父母, 知我者, 鮑叔.) 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나를 덮어주고 용서해 주고 약점을 치료해준 친구 포숙이 있었기에 오늘의 나 관중이 있었다는 고백했습니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합니다.
성경에도 親舊(친구)라는 단어가 94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좋은 친구 사이가 많습니다. 다윗과 요나단, 여호수아와 갈렙, 다니엘과 3명의 친구…….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를 친구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을 보세요.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할렐루야!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王(왕)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主人(주인)이라는 것도 믿는 사람은 다 받아들입니다.
牧者(목자)다, 先生(선생)님이다. 또는 保護者(보호자), 생명의 떡, 빛, 인도자……. 다 좋은데 친구는 아무리 생각해도 황송합니다.
여러분은 진짜 친구가 몇 명이나 됩니까?
그냥 알고 지내는 친구 말고 이 사람은 정말 ‘내 친구다’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할만한 친구가 몇 명이나 되나요? 그런 친구가 많은 사람은 삶이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진짜 친구가 없으면 삶이 재미가 없고 힘이 듭니다.
내가 내 친구 목사에게 섥ㅅ준비하다 말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너는 내 친구냐? 답신하라” 그런데 답신이 안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습니다. 왜 답을 안하냐? 했더니 그 친구가 친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나는 뭐냐? 했더니 선배님이랍니다. 신학교는 후배입니다. 나이가 나보다 하나 더 많아 친구로 지냅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내가 선배면 반말하지 말거라 존대하라”
친구는 나이가 비슷해야만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초중고에서는 한두 살 차이가 하늘땅 차이지만 사회에 나오면 위아래 2~3년은 친구가 가능하고 나이가 들면 위아래 10년은 친구로 지냅니다.
저도 여러분과 친구가 되어 보려고 많이 애를 씁니다.
그런데 아무도 내 옆에 안 앉으려 합니다. 내가 찾아가 앉으면 부담되어 슬슬 피합니다. 어디 식사하러 가면 제 옆에 안 앉으려 합니다. 밥이 안 넘어간답니다. 그러니 친구 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러나 나하고는 친구 되기 어려워도 예수님이 여러분의 친구가 되어 주신다고 성경말씀은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라는 사실은 성경뿐만 아니라 우리가 늘 부르는 찬송가 가사에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29장에 (성도여 다함께)
인도자 되시며 친구가 되신 주 그 사랑 끝없다 할렐루야 아멘
86장에 1절에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 나의 상처 입은 심령을
불쌍하게 여기사 위로하여 주시니 미쁘신 나의 좋은 친구
후렴: 내가 의지하는 예수 나의 사모하는 친구
나의 기도 들으사 응답하여 주시니 미쁘신 나의 좋은 친구
88장에도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워라
산 밑에 백합화요 빛나는 새벽 별 주님 형언할 길 아주 없도다
내 맘이 아플 적에 큰 위로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90장 1절 후반부에도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92장에도
위에 계신 나의 친구 그의 사랑 지극하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주 나의 친구
후렴: 사랑하는 나의 친구, 늘 가까이 계시도다. 그의 사랑 놀랍도다 변함 없는 나의 친구
이 밖에도 수없이 많습니다. 찬송가를 검색해보니 약 50곡정도가 예수님을 친구라고 부르며 찬송하고 있습니다. 정말 황송하지요. 감히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교회 어떤 권사님은 찬송가에 ‘친구’라고 부르는 부분을 ‘주님’이라고 바꾸어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황송하고 죄송해도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고 그렇게 대우하신다고 오늘 봉독한 성경에 약속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것이나 그분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시니 그저 감사하고 그저 고마울 뿐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친구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있으나 마나한 친구도 있고 나를 힘들게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름만의 친구가 아닙니다. 또 있으나 마나 하는 친구가 아닙니다. 그분은 찬송가 90장의 가사처럼 “참 좋은 나의 친구”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친구로 삼으시고 어떻게 친구로 우리를 사랑하고 대우를 하고 계실까요? 오늘 봉독한 본문과 앞뒤 구절 몇 절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길 바랍니다.
1.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먼저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를 알기도 전에 먼저 나를 선택하시고 먼저 나를 하나님 자녀 되도록 구원하셨습니다. “먼저 사랑”, 이것이 위대한 사랑입니다.
요한복음15장16절을 보세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주님이 나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먼저 창세전에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이 먼저 네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친구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친구를 누구로 삼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누구와 친구를 하려면 이리저리 계산을 합니다. 그래서 좋은 친구 만나려 좋은 학교 가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남이 집값도 비싼 거고 학교도 좋은 학교라고 소문이 난 것입니다. 조건이 갖추어진 사람들을 친구로 삼고 조건이 좋은 상황에서 출발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자격이나 조건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먼저 찾아 오셨고 우리를 품어 주셨습니다. 성경을 잘 보세요.
우리 주님은 당대에 내노라는 사람들과 사귀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명문가, 귀족 왕족들과 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대 사람들이 사람 취급하지 않는 세리,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세리 마태를 사랑하셨고 세리 삭게오를 사랑하시고 친구하셨습니다. 나사로 같이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친구 삼으셨습니다.
요한복음11장11절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하신 것을 보세요. ‘당당히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13절을 보세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아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죽어주시기 까지 사랑하신 참좋은 친구이십니다.
제가 부담되는 말 하나 할까요?
여러분을 위해 대신 죽어 주실 친구는 몇이나 됩니까? 저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떤 한분 이미 죽어 주신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도 친구이십니다. 할렐루야!
2. 임마누엘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친구의 특징 중에 중요한 것은 늘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늘 만나고 늘 가까이 하고 싶고 늘 배려해주고 도와주는 것이 친구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세상 친구는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슴속에 계신 친구는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이 뭡니까?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마28:20 후반절을 보세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 친구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그 분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혹시 신앙생활 하시면서도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나 혼자라는 생각 속에 힘들고 어렵다면 이 시간 힘을 내시기를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혼자라고 느끼고 힘들다고 느낄 그때에도 결코 우리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우리 친구이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믿습니까?
유대인의 격언에 ‘친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했습니다.
그 첫째는 음식과 같은 친구요 둘째는 약과 같은 친구이며 셋째는 질병(病)과 같은 친구라고 합니다.
음식 같은 친구는 항상 사모하고픈 친구이고,
약과 같은 친구는 필요에 의해서 이따금씩 만나는 친구이며
병과 같은 친구는 피하지 않으면 안되는 친구입니다.
우리는 과연 사랑에 있어서 주님의 친구일까요? 음식과 같이 항상 함께 하는 친구, 항상 사모하고 싶은 친구이십니다.
3.비밀이 없는 참 좋은 친구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이지만 그분은 우리를 종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십니다. 종이 아닌 친구이십니다.
좋은 친구의 특징 중에 또 하나는 친구사이에는 비밀이 없는 것입니다.
친구라고 하면서 비밀을 갖고 있으면 참 친구가 아닙니다. 친구중 가장 가까운 친구는 부부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가 왔는데 나가서 받으면 그것은 비밀이 있다는 거예요. 조심하세요. 그런데 우리의 참 좋은 친구이신 예수님은 비밀이 없이 다 말하여준다고 하십니다.
15절을 다시 보세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종은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알게 하였음이라”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비밀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친구사이에 비밀이 있다면 가짜일 수 있습니다. 知己(지기)가 아닌 것입니다.
참 친구는 비밀, 프라이버시까지 다 말하고 들어내는 것입니다. 親舊(친구)란 ‘오래부터 친한 사이’가 친구입니다.
우리 친구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구원을 주셨습니다. 자기 몸을 나를 위해 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영생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천국의 비밀을 다 알려 주었습니다.
여기에 그 비밀이 다 담겨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읽지 않아 모를 뿐입니다.
그런데 안 알려 주시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1)우리가 언제 죽을지 안 알려 주십니다.
왜요? 안 알려주시나요? 안 알려 주시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알려주면 좋겠다고요? 천만에요. 알려주면 죽는 그날까지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안 알려 주시는 것이 복입니다. 아멘?
2)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안 알려 주십니다.
이것도 안 가르쳐 주시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러기에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은 그만큼 가까웠다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가족 오락관을 방영할 때 터지는 풍선을 돌리면서 답을 맞히는 게임이 있었습니다. 그 풍선은 시간이 되면 터집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여유 있게 답을 하고 넘깁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조급합니다. 답을 하기도 전에 넘기려 합니다. 왜죠? 시간이 다 되어가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오실 때가 다가옵니다. 그래도 안 알려줍니다. 그러니 빨리 영접하시고 맞을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완전 계시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깊이 보면 비밀을 알게 됩니다. 성경에 복을 누리는 비법이 다 담겨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다 담겨 있습니다. 문제는 뭐라고요? 안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친구가 보내신 사랑의 편지를 다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4. 우리의 소원을 다 들어 주는 친구이십니다.
친구의 특징 중에 또 하나는 친구가 어려울 때 발 벗고 나서서 돕는 것이 친구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 때 제일 먼저 찾아오고 돕는 자가 친구입니다.
그러나 그런 친구가 쉽지 않습니다. 막상 내가 곤경에 처하고 어려울 때 그제서 진짜 친구가 누구인지 들어납니다. 내가 어려울 때, 모르는 척하는 친구는 참 친구가 아닙니다.
우리의 참 친구는 예수님이십니다.
눅10장 33절~35절을 보세요.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들어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사람은 유대인들에게 賤視(천시)를 당한 사람입니다. 개 취급을 당한 족속이 사마리아 족속입니다. 그런 사람이 강도 만난 유대인이 거반 죽게 되었을 때 그를 도와줍니다. 레위인도 그냥 지나가고 제사장도 그냥 지나갔으나 사마리아사람은 여행 중에 그를 발견하고 그를 돕습니다.
그는 자기를 천대하는 사람이 거의 죽게 된 것을 불쌍히 여깁니다. 그리고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싸매어 줍니다. 뭐로요? 자기 옷을 찢어서 싸매어줍니다. 여행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기름과 포도주는 여행의 필수품입니다. 거기다 옷도 찢어졌으니 여행은 끝난 것입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 말은 자기는 걸어서 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밤새 돌보아 줍니다. 그리고는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어 치료를 부탁하고 더 들면 돌아와서 갚아 주겠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갑부인가요? 이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여기 사마리아 사람이 누굽니까? 예수님입니다. 유대인들이 천시한 변두리 나사렛 사람입니다. 나사렛은 사마리아와 지리적으로 가깝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만이 참된 친구라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여러분의 도움자요 여러분의 참된 친구입니다. 아멘?
그분은 사단에게 강도 당한 것 같은 우리에게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거룩한 보혈의 피로 우리를 씻어 주시고 상처를 싸매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교회로 인도하여 보호하시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분은 요한복음15장 7절에 약속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어주시겠다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요구와 소원을 다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으면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하는 어떤 목사님이 차를 몰고 수천km 떨어진 곳에 이사간 성도의 집을 심방하려고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물어물어 갔는데 어느 시골길로 접어들었는데 차 기름이 떨어져 가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길에 처음 가는 길이라 어디에 주유수가 있는지도 모르기에 주유수가 나타나길 바라며 계속 갔습니다.
결국 어느 산의 고갯길을 오르다가 차가 멈추었습니다. 길은 오르막길입니다. 주택은 보이지 않고 오지라 핸드폰이 연결이 안됩니다.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차에서 내려 민가를 찾아 간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입니다. 생명을 걸아야 할 일입니다.
결국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누군가를 보내 주셔서 도와주세요.” 기도하고 아무리 기도하고 기다려도 지나가는 차한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시동을 걸테니 차가 움직이게 해주세요.” 그리고는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시동이 부르릉 걸렸습니다.
어떻게 걸렸는지 모릅니다. 분명 좀 전까지는 기름이 떨어져 여러 번 시동을 걸었는데 소용이 없었는데 기도하고 나니 걸렸습니다.
그래서 페달을 밟고 고개를 올라갔습니다. 고개를 넘으나 불빛이 보였습니다. 마을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는 남아 있던 기름이 모여져서 됐다 추측할 것입니다.
어떻든 이 목사님은 하나님의 신기한 도움이라 믿었습니다. 왜냐면 주유소 앞에 도착해서 차가 시동이 꺼졌기 때문입니다.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친구이신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참 좋으신 친구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진짜 좋은 친구, 참 좋은 친구는 예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왕이시기도 하시고 우리의 주인이시기기도 하지만 우리를 친구로 대우해 주시는 좋은 친구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통성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