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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를 보라 말씀/ 이사야 40:1~42:25 요절/ 이사야 42:1 | 2023. 8. 6 | |
이사야 제 13 강 |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이번주 부터는 이사야 후반부를 나누게 됩니다. 이사야 후반부는 1차적으로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회복과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특별히 여러번 나오는 ‘종의 노래’를 통해 메시야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보라’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포로 백성은 누구를 보아야 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첫째, 위로와 새 힘 주시는 하나님을 보라.
40:1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비록 죄 범하고 회개치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때가 되어 그들의 노역의 때를 그치고 죄사함을 선포하시며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이는 ‘외치는 자의 소리’로 시작됩니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며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는 소리로 시작합니다. 그가 외쳐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6b~8절을 보십시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선다는 것을 외쳐야 합니다. 포로 백성이 보기에 제국을 이룬 바벨론의 군사력, 선진 문물, 화려한 도시와 사람들이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국은 풀처럼 마르고 꽃처럼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열방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이 포로백성에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구원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풀과 꽃 같은 사람에게 기초하지 않고 영원토록 견고히 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벧전1:23)
하나님께서 교만한 바벨론에게 강한 자로 임하여 보응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에게는 어린 양을 팔에 모아 품에 안는 목자 같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포로백성에게 바벨론 우상들이 커 보이고 하나님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고 금으로 입히고 은 사슬로 꾸민 것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릴 수 있으시고 드넓은 하늘을 펴시고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신 분이십니다. 감히 비교 대상 조차 안됩니다.
그런데 이런 소식을 들으면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나요“ 흥분하고 희망이 생기고 새 힘이 솟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그들은 구원의 길은 숨겨져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포로백성의 원통한 송사를 하나님은 관심 없는 것 같았습니다. 70년 포로생활로 그들은 소망 잃어버리고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깊이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그들이 어떻게 새 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 주십니다. 28-31절을 보십시오. “너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여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앙망한다는 것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피곤하고 지친 그들은 여호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하지도 곤비하지도 않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하나님을 앙망하여야 합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특징은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학업과 과제와 성적의 중압감으로 지치고 피곤합니다. 직장인들은 일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곤비합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죄와 죄에 대한 댓가로 영혼이 피곤하고 몹시 지쳐있습니다. 그래서 방학과 퇴근과 휴가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일상을 떠나 드넓은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캠핑을 가서 불멍을 하며 마쉬멜로우를 구워 먹고자 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약간의 도움이 되지만 근본적으로 새 힘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두 날개를 펴서 창공을 힘차게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새 힘을 얻게 됩니다. 비싼 보약을 먹지 않아도 달려가고 곤비하지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는 힘찬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주의 영광”, “할렐루야”가 포함된 오라토리오 ‘메시아’는 헨델이 작곡했습니다. 그런데 2시간이 넘는 이 대곡을 그는 24일 만에 작곡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성탄축하예배를 위해 2곡 연습하는데 3주 정도 걸렸는데 그는 전곡을 24일만에 완성했습니다. 사실 말년에 그는 건강도 좋지 않은 데다가 빚까지 지게 되어 완전히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헨델의 시대는 끝났다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그러나 찰슨 제넨스라는 친구가 곡을 붙여 달라고 보낸 성가집 표지에 이사야 40:1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성가 가사집에는 메시아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헨델은 이 위로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헨델은 추위와 배고품도 잊어버리고 2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한 체 곡을 써 마침내 “메시아” 전곡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위로의 하나님,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무더위를 이기고 힘찬 사명인의 삶을 살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화려한 우상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을 보라.
41장은 열방의 민족들을 재판 자리에 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고 말하라 우리가 서로 재판 자리에 가까이 나아가자” 이 재판은 열방이 섬기는 우상과 창조주 하나님 중 누가 진정으로 믿고 바라보아야 할 분이신지 재판하는 자리입니다. 2a절을 보십시오.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 공의로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냐” 이 사람은 고레스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동방의 바사왕 고레스를 일깨워 철홍성 같은 바벨론을 하룻밤 사이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정복케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참으로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또 바벨론의 우상은 아무리 금장색으로 꾸며 놓았어도 목공이나 망치질 하는 사람이 못을 박아 단단히 고정해야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두려워하고 흔들리는 연약한 그 백성을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버리지 같은 야곱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붙드시고 도우시고 구속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노하여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하게 하실 분입니다. 회오리 바람으로 흩어버리실 분입니다. 이스라엘을 날카로운 새 타작기 삼으셔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산들을 부서트리실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헐벗은 산에 강을 내시고 골짜기 가운데 샘이 나게 하시며 아름다운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게 하실 분이십니다. 28절은 우상에 대한 이 재판의 최종 주문 같은 말씀입니다. “보라 그들이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는 허무하며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 뿐이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인 자신들은 포로 되었고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은 온 제국을 다스리는 것을 볼 때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바벨론은 창조와 싸움의 신 ‘무르두크’를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금장색, 은장색으로 덥혀진 크고 화려한 무르두크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 같았습니다. 출애굽의 권능의 하나님은 옛날 옛적 이야기이지 지금은 계시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리라” 천지를 창조하였고, 바벨론을 심판하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자가 누구냐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질의 신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동산, 주식, 코인 투자를 잘 하는 사람을 우상처럼 여깁니다. 이런 유튜버들의 조회수가 높습니다. 또 테크놀로지의 신이 있습니다. IT, 바이오, 에너지 등에 기술을 가진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가 엄청난 격차를 만들어 냅니다. 또한 미의 신을 추앙합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는 것이 신분상승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과감한 성형수술로 삶을 바꾸고자 합니다. SNS에 화려한 라이프 스타일을 올려 자신을 드러냅니다. 이런 시대에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기 보다 이런 것들에 미혹되기 쉽습니다. 예배와 그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데 힘쓰기 보다 재테크와 스펙과 외모를 가꾸는데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영적 재판자리에 오라고 하시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가 물질을 창조했으며 누가 땅과 태양과 물을 창조하여 양식을 공급하느냐”,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너를 구원한 분이 기술이냐 나 구원의 하나님이냐?”, “누가 사람을 인형처럼 찍어내지 않고 다 다르게 개성 있고 아름답게 만들었느냐?” 물으십니다. 우리가 겉으로 힘있고 화려해 보이는 우상에 미혹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 분별력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길 기도합니다.
셋째,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를 보라.
42:1-4절은 이사야 후반부에 여러 번 나오는 종의 노래의 첫 번째 부분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한 종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시며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어 이방에 정의를 베풀게 하십니다. 여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은 먼저는 ‘고레스’를 말합니다. 그는 바벨론 왕 벨사살이 연회를 베풀던 밤에 바벨론을 쳐서 무너뜨렸습니다. 그는 ‘해방자’로 자처하며 바벨론의 남겨 두었던 신상들을 각 성읍으로 돌려보냈고 포로 된 자들을 귀향시키는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여호와의 종은 예수 그리스도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성 마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감시에도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후에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을 보며 본문의 이사야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2:17-21) 또 여호와의 종은 백성의 언약이 되시고 이방의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셔서 그를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이방의 빛’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소경이 눈을 뜨고 갇힌 자가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종 예수님을 통해 우상을 섬기던 자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새 일을 행하시고 만물과 섬들과 거기 사는 사람들 곧 열방의 백성들이 새 노래로 찬송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를 보라고 하십니다.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암울한 현실과 포로 된 자신들을 볼 때 희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은 과거를 보면 후회와 죄책감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눈을 들어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보라고 하십니다.
죄와 사탄의 세력에 무력한 우리 자신을 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현실의 상황과 문제들만 보면 눌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마음의 기뻐하는 자’ 예수님을 보고 믿음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 하나님 언약 백성이 됩니다. 이 예수님을 보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사도요한은 증거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예수님을 볼 때 상한 갈대 같고 꺼져 가는 심지 같은 내가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볼 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되고자 소원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볼 때 사람과 다투지 않고 자기를 드러내고자 소리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반대의 세력에 부딪혀도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의를 세우는 삶을 살게 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볼 때 불안정한 믿음이 온전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보려면 나와 세상에 주목되어 있는 마음을 돌이켜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고자 하는 영적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와 같은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미 볼 만큼 보았다라는 생각을 내려 놓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하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42:18절 이후에서 이사야는 당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영적으로 소경되어 있는 자들을 책망합니다.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
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기뻐하는 자만 보고자 합니다. 유투브 영상으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선택해 보고자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잘 생기고 춤 잘 추는 그 아이돌 스타, 멋진 플레이를 하는 스포츠 스타를 보고자 합니다. 요즘 20-50대 여성들중에는 가수 ‘임영웅’을 보고 위로와 힘을 얻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팬클럽 여성들 중에는 남편에게도 해 주지 않는 영양간식을 정성들여 만들어 지방에 공연장 까지 가서 전해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타들도 가까이 가 볼수록 허물과 연약함이 드러나 실망하기가 쉽습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팬들은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비싼 티켓을 구입해 축구장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호날두가 경기를 뛰지 않고 벤치에만 앉아있자 크게 실망하며 ‘날강두’라며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기뻐하시는 자 예수님을 바라보면 결코 실망하지 않습니다. 보면 볼수록 그 영광과 지혜와 사랑에 놀라고 감동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그를 바라보는 자에게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함께해 주십니다. 우리가 마음에 시선이 세상과 나에게로 향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마음의 기뻐하는 자 예수님께로 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김한결목동님은 다른 사람의 판단과 시선에 민감하여 마음이 두렵고 불안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께 마음의 시선을 고정했을 때 생명을 얻고 예수님 안에서 존재 의미와 안정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결목동님은 여름수양회도 끝나고 ISBC 비전팀들이 빠져 좀 느슨하게 방학생활을 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새벽기도 메신저, 주일소감을 감당하며 자격증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제가 현실과 우상과 연약한 자신을 보기 보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하실 일을 기대하며 이에 자신을 드리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누구를 보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의 시선이 위로와 새 힘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의 기뻐하는 자 예수님을 바라보자 되길 기도합니다.(김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