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열차는 타자기처럼
김경린(金璟麟)
오늘도
성난 타자기처럼
질주하는 국제열차에
나의
젊음은 실려가고.
보라빛
애정을 날리며
경사진 가로에서
또다시
태양에 젖어 돌아오는 벗들을 본다.
옛날
나의 조상들이
뿌리고 간 설화가
아직도 남은 거리와 거리에
불안과
예절과 그리고
공포만이 거품 일어
꽃과 태양을 등지고
가는 나에게
어둠은 빗발처럼 내려온다.
또다시
먼 앞날에
추락하는 애정이
나의 가슴을 찌르면
거울처럼
그리운 사람아
흐르는 기류(氣流)를 안고
투명한 아침을 가져 오리.
- 9인시집 <현대의 온도>(1957)-
김경린 시
그의 시를 소개한다.
태양이
직각으로 벌어지는
서울의 거리는
프라타나스가 하도 푸르러서
나의 심장마저 염색될까 두려운데
외로운
나의 투영을 깔고
질주하는 군용트럭은
과연 나에게 무엇을 가져왔나
비둘기처럼
그물을 헤치며 지나가는
당신은 나의 과거를 아십니까
그리고
나와 나의 친우들의
미래를 보장하실 수 있습니까
(‘태양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서울’ 중 일부)
새벽 5시 아킬레처럼
- 김경린
아직은
검은 미립자들이 가시지 않는 새까만 아침인데도 사람
들은 순환 현상처럼 45도 경사의 층계를 뛰어오르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더러는 무거운 하중을 못
이기는 사람처럼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까지 내면서 말
입니다. 굳어진 근육을 풀어 보기라도 하듯 또는 폐활
량을 더하여 실오리 같은 삶의 줄기를 늘리기 위해서인
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나도 그들과 함께 그 층계를 올라 봅니다. 아킬레스처
무거운 발꿈치를 움직이면서 말입니다. 체내의 유기
물을 배설하기 위하여 수분을 시내처럼 흘리면서도 그
렇게 해보는 것입니다. 여인들처럼 다이어트를 하자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늘 가까운
정상에는 넓은 세계가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제로
써 세척한 것과 같은 맑은 대기층, 바닷속처럼 검푸른
하늘에 아직도 기념패마냥 걸려 있는 반달,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처럼 반짝이는 별들, 나는 그 별을 바라보
며 언젠가 「당신이 진정 바란다면 별이라도 따오지」라
했던 그 말을 상기해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계절풍처럼
가슴을 여는 바람에 지난밤 나의 침실로 찾아왔던 꿈속
의 사랑 따위는 애써 잊어야 한다고 주위를 살펴봅니
니다. 어제까지 세를 지나치게 과시하다 사람을 잃었다는
정치가, 고리 대금 이자의 그늘에서 친우를 분실했다는
사람, 정 때문에 눈물만을 밤새 흘렸다는 이웃들과의
대화가 머무는 언덕에는 적어도 인간들의 존재가 있어
서 더욱 좋습니다.
새벽 5시의 하늘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서울은 아직도 깊
이 잠들고 오직 가로등만이 맥박처럼 반짝이는 거리에
친한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랑하는 사람의 언어들을 위
하여 나는 조용히 층계를 내려갑니다. 거기에는 전자
매체와 더불어 하루를 소모해야 하는 아침이 나의 눈앞
에 물결치고 있습니다.
* 지나치게 푸르러서
- 김경린
지나치게
푸르러서 슬픈 것은 물론 아니다
잊었던 기억들이
재생되어 오는 것처럼
황사 현상이 당신 얼굴마저 흐리게 하는 날에도
길가에 길게 늘어선 가로수의 잎사귀와
마천루처럼 높은 담벼락 사이로
팔을 길게 내미는 라일락의 끝마디에서도
푸름이 크레파스처럼 흘러내리는
아침
저기 앞이
하늘에 내려와 머물고
습기가 피부에 잦아드는 날이면
신경을 자극하는 전류들이
팔을 아프게 한다는 그 사람에게
푸름이 담긴 시집을 남긴 채
내려오는 언덕 길에도
푸름은 동반자처럼 따라오고
참으로 우연하게도
언젠가 사랑 때문에
푸름과 자주색을 무척 좋아한다던
그 여인을 그날 만나게 된 것은
그 무슨 인과 관계인지 모를 일이기도 한데
거리의 사람들은
오늘의 바람을 아킬레스건으로
비유도 하지만
지나치게
푸른 계절 때문에 슬픈 것은 물론 아니다
첫댓글 요즘은 선생님 덕분에 시 공부가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