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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 금강산 일만이천봉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2. 11. 1:08
우리 산하 - 금강산 일만이천봉
2023.12.05. 21:08조회 1
금강산 일만이천봉
백두산에서 시작된 『택리지』는 금강산으로 이어지는데, 『택리지』에 실린 금강산의 기록을 보자.
전라도와 평안도는 내가 가보지 못했지만 강원ㆍ황해ㆍ경기ㆍ충청ㆍ경상도는 내가 많이 가보았다. 내가 보고 들은 바를 참고하면 금강산 일만이천봉은 순전히 돌로 된 봉우리[석봉(石峰)]와 돌로 된 구렁[석동(石洞)], 돌로 된 내[석천(石川)] 그리고 바위로 된 폭포[석폭(石瀑)]다.
옛사람들은 우리나라의 2대 명산을 백두산과 금강산으로 보았다. 백두산을 두고 산의 성자(聖子)라고 했고 금강산을 일컬어 산의 재자(才子)라고 하였다. 즉 성스러운 산의 으뜸은 백두산이고 기이한 산의 으뜸은 금강산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불과 수백 리 떨어진 금강산을 답사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신기재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을까. “젊을 때는 병이 많고, 지금은 늙었으니, 인생 백 년 동안을 금강산 한 번 못 보았네.”
『신증동국여지승람』 「회양도호부」 ‘산천’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금강산은 장양현(長楊縣)의 동쪽 30리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167리다. 산 이름이 다섯 개인데 첫째 금강(金剛), 둘째 개골(皆骨), 셋째 열반(涅槃), 넷째 풍악(楓嶽), 다섯째 기달(怾怛)이니 백두산의 남쪽 가지다. (······) 산은 무릇 일만이천봉이니, 바위가 우뚝하게 뼈처럼 서서 동쪽으로 창해를 굽어보며 삼나무와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일출봉, 월출봉 두 봉우리가 있어서 해와 달이 뜨는 것을 볼 수 있다. 안쪽 산과 바깥 산에 모두 108곳의 절이 있는데 표훈사, 정양사, 장안사, 마하연, 보덕굴, 유점사가 가장 이름난 사찰이라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나라가 약하고 형세가 외롭다고 하여 국토를 바쳐 항복하자고 하니 왕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은 천명이 있는 것입니다. 충신, 의사와 더불어 백성의 마음을 거두고 단합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 그칠 일이지 어찌 1000년의 사직으로서 하루아침에 경솔하게 남에게 넘겨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사세를 보전할 수 없는데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싸워 죽어서 간과 뇌수를 땅에 깔아버리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볼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사자를 보내 고려에 항복을 청하였다. 왕자(마의태자)가 울부짖으며 임금을 하직하고 곧 이 산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방을 만들고 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그 몸을 마쳤다고 한다.
금강산
태백산맥 북부 강원도(북한) 금강군ㆍ고성군ㆍ통천군에 걸쳐 광범위하게 펼쳐진 산이다. 옛사람들은 금강산을 기이한 산의 으뜸으로 꼽아 산의 재자(才子)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태종 4년 9월 ‘기미’조를 보면 왕이 하륜, 이거이, 성석린, 이무, 이서 등과 정사를 의논하다가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오기만 하면 꼭 금강산을 보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묻자 재상 하륜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찍이 송나라 시인이 노래하기를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 한 번만이라도 금강산을 보았으면[원생고려국 친견금강산(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이라고 했답니다.” 하륜의 말뿐 아니라 정철 또한 『관동별곡』에서 중국의 명산인 여산(廬山)이 금강을 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뜻으로 “이적선이 이제 이셔 고텨 의논하게 되면 여산이 여기도곤 낫단 말 못하려니”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도 금강은 천하의 명산이었다.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저서를 남긴 이사벨라 버드 비숍도 다음과 같이 얘기하였다. “한국인들에게 금강산 유람은 여행자의 확고부동한 명성을 제공해준다. 그래서 많은 서울 사람들은 이 풍류 어린 명예를 거머쥐려고 젊을 때부터 벼르고 또 벼른다. 비단 사찰을 순례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그러니까 불교도나 탁발승이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도 금강산은 잘 알려져 있다. 누대에 걸쳐 한국의 시인들은 그 빼어난 금강산의 경치를 경탄해마지 않았다”라고 한 뒤에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세계 어느 명산의 아름다움도 초월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쓴 글은 한갓 목록에 지나지 않는다. 미의 모든 요소로 가득 찬 이 대규모의 협곡은 너무도 황홀하여 사람을 마비시킬 지경이다”라고 하였다.
최남선은 「금강산의 모습은 조선 정신의 표치(標幟)」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금강산은 조선인에게 있어서는 풍경가려(風景佳麗)한 지문적(地文的)인 현상일 뿐이 아닙니다. 실상 조선심(朝鮮心)의 물적 표상(表象), 조선 정신의 구체적 표상으로 조선인의 생활, 문화 내지 역사의 장구(長久)코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성적(聖的)인 존재입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최해의 「스님을 보내는 서문」을 보자.
사람을 속여 유인하여 말하기를 ‘한 번 이 산을 보면 죽어서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니 위로는 공경에서부터 아래로는 선비[사(士)]와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아내를 데리고 자식을 이끌고 다투어 가서 불공을 드린다. 눈과 얼음으로 혹독하게 추운 때와 여름의 장마가 오래고 홍수가 넘쳐서 길이 막히게 된 때를 빼고는 유산(遊山)하는 무리가 길에 잇따르게 되었다. 또한 과부와 처녀를 따라가는 자가 있어 산속에 이틀씩 숙박하면서 추한 소문이 때때로 들리건만 사람들은 괴이쩍게 여길 줄 모른다. (······)
산 곁에 사는 백성들은 응접하는 일에 피곤하여 성내며 꾸짖어 말하기를 “금강산은 어찌하여 딴 고을에 있지 않았던가” 하는 자가 있기에 이르렀다. 슬프다. 사람들이 금강산을 사랑하는 것은 보살이 여기에 머무르기 때문이요, 보살을 존경하는 것은 능히 보이지 않는 고요한 가운데서 사람을 복되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편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넘어야 하는 단발령(斷髮嶺)은 강원도 김화군 통구면과 회양군 내금강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높이는 834미터다. 일설에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이 고개에서 삭발했다고 해서 ‘단발령’이라 했다고도 하고, 이 고개를 넘어서서 금강산을 바라보면 아름다움에 반하여 머리를 깎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해서 단발령이라 했다고도 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단발령을 넘어서면서 느낀 감상을 다음과 같은 글로 남겼다. “아, 나는 그 아름다움, 그 장관을 붓끝으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진정 약속의 땅인저. 진정코! 이곳은 이 산의 무수한 산사 중의 한 곳에 일생을 묻으려고 금강산을 찾는 사람들에겐 우리식으로 말해 하나의 루비콘 강이다.”
그처럼 오랜 세월 동안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단발령을 넘어서며 바라본 금강산의 모습을 겸재 정선과 동시대를 살았던 식산(息山) 이만부는 『지행록(地行錄)』 중 「금강산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 길을 따라 30리를 가니 한 잿마루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 재는 단발령이란 이름이고 그 산을 천마산(天磨山)이라 하였다. (······) 동쪽을 향해 금강산을 바라보니 눈길 머무는 곳마다 구슬 같은, 은 같은, 눈 같은, 얼음 같은 봉우리가 층층이 쌓이고 겹겹이 치솟아 하늘에 닿은 듯하였고, 그 하늘의 저쪽에는 더 바라볼 동천이 없었다. (······) 이에 혜밀이 말하기를 “이곳은 늘 구름이 높은 산을 감싸안고 있어 이곳에 와서 금강산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것을 몹시 아쉬워하였는데 지금은 하늘과 땅이 맑게 개어 모두가 상투 같고 쪽 찐 머리 같은 산꼭대기가 남김없이 다 나타났으니 참으로 공들이 이 산과 인연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연암 박지원 또한 『열하일기』 중 「도강록 6월 27일」에서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가 일찍이 신원발과 함께 단발령에 올라 멀리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마침 가을 하늘이 짙푸르고 넘어가는 해가 비꼈는데, 산이 하늘 높이 솟아 아름다운 빛과 윤기 있는 맵시가 비할 데 없어서, 미상불 금강산이 다르구나 하고 감탄했다.
구룡폭포 가는 길
구룡폭포는 금강산에 있는 폭포 가운데 가장 크다. 이 부근은 금강산의 여러 승경 가운데 가장 맑고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택리지』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봉우리, 멧부리, 마을, 샘, 못, 폭포도 모두 흰 돌로 이루어진 것이다. 금강산을 개골산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한 움큼의 흙도 없는 까닭이다. 만 길 산꼭대기와 100길 못에 이르기까지 온통 하나의 돌이니, 이런 풍경은 천하에 둘도 없는 것이다.
산 한가운데에 정양사(正陽寺)가 있고, 절 안에 있는 헐성루(歇惺樓)는 가장 중요한 곳에 위치하여 그 위에 올라앉으면 온 산의 참 모습과 참 정기를 볼 수 있다. 마치 구슬 굴속에 앉은 듯, 맑은 기운이 상쾌하여 사람의 위장 속 티끌 먼지를 어느 틈에 씻어버렸는지 깨닫지 못할 정도다.
정양사는 표훈사 북쪽에 있는 절로, 이 터가 금강산의 정맥(正脈)에 위치하여 그 이름을 정양이라 했다고 전한다. 672년에 회정선사가 창건한 것이라고 하며, 1469년(세조 5)에 대장경을 인출하여 이 절에 봉안한 것이 계기가 되어 중수하였다. 그 뒤에 보우가 임금의 하사금을 받아 절을 보수하고 서적들을 보관하였다. 정양사에는 헐성루가 있어 여기에 올라가면 산봉우리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가 있다. 이 절의 육면전(六面殿) 안에는 석구약사상(石軀藥師像)이 안치되어 있고 사면 벽에는 천왕신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정양사 서편에 자리 잡은 장안사(長安寺)는 내금강의 큰절로 514년에 진표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 뒤 990년(성종 1)에 회정선사가 대웅보전, 삼여래사보살사성전, 석가모니불십육나한존상, 명부전, 지장보살십육왕존상 등을 중건 또는 조성하였다. 고려 충혜왕 때 원나라 기황후가 관원을 고려에 파견하여 굉하와 함께 장안사를 중건하게 하였다. 이때 중건된 건물은 대웅보전 사성전, 명부전, 신선루, 수정각 등과 여러 요사들이다. 또 1791년(정조 15) 순찰사 윤사국이 여러 요사를 비롯하여 어향각, 적묵당, 설선당, 장경암, 영원암 등을 중수하였다. 그 뒤 조선 말기에도 석담이 지장암을 세웠고, 그 뒤에 심공이 비로전과 극락전을 세웠으나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에 불타 지금은 터만 남았다.
장안사 위쪽에 자리한 표훈사(表訓寺)는 670년에 표훈이 창건했으나, 1457년에 세조가 보수하여 그 규모가 일신되었다. 1890년에 화산이 반야전을 중수했고, 1893년에 형령이 영산전을 창건하였다. 내금강 만폭동 동구에 있다. 이곳에 원나라 영종이 세운 비가 있는데 영종이 그 후 태후, 태자와 함께 보시를 했다고 한다.
이중환은 “정양사를 따라 북쪽으로 들어가면 만폭동에 이른다. 못이 아홉 곳이나 있어 경치가 훌륭하다. 만폭동 벽면에는 양사언이 쓴 ‘봉래풍악(蓬萊楓嶽) 원화동천(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개의 큰 글자가 있다. 글자의 획이 살아 움직이는 용과 호랑이 같으며 날개가 돋아 하늘로 너울너울 날아가는 것 같다”라고 했는데 초서로 쓴 이 글씨를 속설에는 ‘만폭동 경관의 값이 1000냥이라면, 그중 500냥은 양사언의 글씨 값일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한다. 이중환이 말한 만폭동 중 진주담을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농암(農巖) 김창협은 『동유기(東遊記)』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좀 쉬고 나서 서북쪽으로 비틀비틀 내려가 다시 만폭동 시내의 한 못에 이르니 그 이름을 진주담이라고 한다. 급한 계곡물이 달려오다가 바위 언덕의 턱을 받고 부서져 수 없는 구슬이 되어 못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진주담 왼편에는 바위가 처마처럼 비스듬히 내밀어 그 아래로 5~6명이 들어앉을 수 있게 되었기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았더니 때때로 날아오는 진주 싸라기가 내 얼굴에 풍긴다.
『택리지』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안쪽에는 마하연[摩訶衍, 산스크리트어로 대승(大乘)을 의미한다. 마하연사는 부석사를 지은 뒤 이곳으로 온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십찰 중의 하나]과 보덕굴(普德窟)이 허공에 매달려 있는데, 그 모양이 신의 조화와 귀신의 힘 같아 거의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가장 위에 있는 중향성(衆香城)은 만 길 봉우리 꼭대기에 위치하였다. 바닥이 모두 흰 돌이며 계단이 있어 상을 벌여놓은 것 같다. 그 위에 하나의 선돌이 놓여 있는데, 불상 같으면서 눈썹과 눈이 없다. 이것은 하늘이 만든 작품이다. 좌우 돌상 위에도 작은 석상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는데, 또한 눈썹과 눈이 없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담무게(曇無偈)가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마하연은 신라시대에 의상이 창건하고 그 뒤 월송이 중건한 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강산 일만이천봉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신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