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p. 신사동산을 넘어 당시 군용도로를 따라 약 2.5km(40분 소요) 를 걸어 가면 가다 보면 섯알오름추모비(당시 학살터)를 바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순례길은 중간에 비행장 활주로로 접어 듭니다. 약 20분 쯤 거리- 1.3km 쯤에서 오른쪽으로 당시 비행장 활주로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날 수 있습니다. 몇년 전 까지만 해도 철조망을 치고 군부대 허락을 받으며 농사 지으러 다녔던 곳입니다. 그 공간을 가로 질러 가면 활주로의 끝에서 바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곳에 소위 '태평양의 징검다리'란 공간을 만납니다. 뭐, '꼭 이렇게 애둘러 가야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높이는 분도 계시겠지만 고무신길을 따라 군부대의 경계를 누치 보며 갔던 그 날을 떠 올리면 굳이도 아니겠지요. 눈 앞에 섯알오름을 두고 빙 돌아 걷다 만나면 더욱 그리움은 차고 공간을 만나는 의미는 커집니다. 고개가 절로 숙여지겠지요.
알뜨르 비행장 터 알드르비행장은 서기1926년에 계획하여 1935년에 만든 왜정시대의 비행장으로 주민들로부터 징발한 주거지·농지·목장 등을 이용하여 20만평으로 완공하였다. 그러나 1937년부터 확장을 계속하여 동으로는 섯알오름, 서로는 하모리 시가지, 남으로는 바닷가, 북으로는 일주도로에 이르는 평야지대까지 1945년에는 80만평을 차지했었다. (제주4․연구소 발행 4·3 장정6. 109쪽)
이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이 일대에 있던 7개의 마을이 없어져 버렸다. 비행장 건설로 알드르에 있던 마을들을 소개하는 바람에 알오름동·저근개·골못·광대원 등의 마을이 폐동되어 버렸고, 그들은 멜캐·상모리·사계리·산이물 등지로 옮겨 살았다. 제주도는 일본 남단의 규슈(九州) 지방과 중국의 남부를 연결하는 직선상에 있고, 필리핀과 한반도 사이에 있어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여건을 고려할 때 한국·중국·일본 세 지역의 중심부 해상에 놓여 있다. 따라서 제주도는 동북아시아 세 나라에 있어서 군사전략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주도에서도 대정읍 지역은 중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고, 태평양에 붙어 있으며, 지역이 광활하여 비행장으로 알맞고, 바로 동쪽의 화순 앞바다는 수심이 깊은데다 자연적인 항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최적의 군사요충지였다. 일본은 제주도를 중일전쟁 때에는 대륙 침략 전쟁의 전진기지로, 전쟁 말기에는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한 거점(결7호 작전 참조)으로 이용하였다.
현재 제주도는 여기에다 대규모 평화공원을 세울 계획을 밝혔다. 그리고 제주도에 다른 곳에는 군사기지를 세우려 하고 있다. 군사기지를 세우겠다는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당국의 방법과 일제강점기 때 그들의 방법은 비슷하다 못해 거의 같다는 게 여기서 서면 느낄 수 있다. 전쟁을 억제하는(대응하는) 방법으로 군 시설은 잠시 평화를 유지하는 하다가도 결국 전쟁을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는 사실은 이곳에서 배운다. -. 알드르비행장의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보면 길이 15m가 넘는 시멘트 구조물이 있는데 남쪽과 북쪽에 출입구가 있다. 비스듬히 내려가면 높이 1m, 폭 1.5m쯤 되는 지하출입구가 있고, 돔 형식으로 된 지붕 위에는 '띠(새)'를 심어 위장했다. 안내판(2008년 1월)에는 송수신 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내부는 3개 공간으로 구분된다. 일반 건물의 현관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고, 가운데는 천정이 높고 넓은 주공간이 있으며, 동쪽에는 폭과 높이가 각각 1.5m 정도 되는 좁은 공간이 있다. 이 좁은 공간의 천정에는 위쪽 외부로 연결되는 굴뚝과 같은 통로가 있다. 벽에 철근을 구부려 박은 사다리가 있어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여기로 올라가 외부를 경계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알드르비행장 터 격납고 大村飛行場址格納庫 (등록문화재 제39호)
1943년 20개소가 건설돼 현재까지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격납고는 소형 비행기를 보관하기 위한 것으로 '붉은잠자리'라는 별명의 연습기로 소년들을 훈련시켜 폭탄을 실은 비행기에 태워 대륙으로 보냈다. 우리들의 입에도 자주 오르내리는 '가미가제 특공대'가 바로 이것이다. 격납고 공법을 보면 널판으로 거푸집을 지은 다음 철근과 시멘트를 넣고 굳힌 다음 널판을 떼어내는 방법으로 만들었는데, 지붕은 아치형으로 만들어 위에 잔디를 덮었으며 천정 부분은 가운데가 높고 양옆이 낮은 형태로 되어 있다. 일본 고지현 매장문화센터의 조사반장이며 2002년 23명의 학자들과 공동으로 《찾아보는 전쟁유적 전집》을 발간하기도 한 대하라씨는 알뜨르 비행장 일원에 산재한 격납고는 대동아 전쟁 당시 일본군이 만든 전체 격납고 숫자의 절반이 넘는다고 한다. (오늘에 남아 있는 일제의 흔적들 12쪽, 제민일보 2003년 2월 24일)
"비행장을 만들 때에는 대정 사람들뿐만 아니라 남군·북군 사람들까지도 다 동원되었어. 16살부터 60살까지 뽑아갔는데 게 중에는 규정하는 나이보다 어린 아이들도 있었어.(나중에는 12세부터 70세까지로 대상을 늘였음) 무조건 일년에 두 번이나 세 번 석 달에 한 번씩 뽑아서 나가. 석 달 동안 일하면 석 달 쉬어서 또 가곤 했어. 가서 굴도 파고 비행장 바닥을 고르기도 했어. 지금의 비행장 바닥은 그 때 우리가 흙을 파고 평평하게 다져서 그 위에 테(잔디)를 입혀서 만든 거라." (1993년 보성리 거주 89세 박경옥씨 증언) (4·3 장정6. 110쪽)
언론 보도(제민일보 1994. 5. 23)를 보면 제주도에서 근무했던 일본 공군 '가미가제 특공대' 출신 장교들이 모여서 정기적으로 자신들의 주둔지였던 대정읍 지역을 방문하면서 대정초등학교에 돈 백만원을 기증하고 환영회를 열어 줄 것을 요구했는데 대정초등학교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들의 주둔지 방문은 1976년 6월 5일부터 시작되었다.(남제주군지 824쪽에 「1976. 6. 5. 일본 공군에 있던 20명의 일본인, 32년만에 옛 주둔지인 모슬포비행장 방문」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서 보면 일본은 아직도 군국주의 시대의 망령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평양의 징검다리
여기서는 다만 ‘여기에 담아 낸 소원 그대로’ 라는 말이 떠오를 뿐 위정자들의 행적이 적힌 것이라든지 참가 대학생들의 면면 등은 궁금하지 않다.
섯알 오름
-. 고사포진지가 있는 섯알오름의 지하에는 거대한 진지동굴이 있다. 섯알오름 지하진지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45년 2월부터로 추정된다. 고사포(고각포)지휘소와 어뢰고·연료고·통신소 등이 들어가게 할 예정이었다. 총 길이는 1,220m의 이 지하진지는 완성되지는 않은 상태에서 전쟁이 끝났다. 오름 주위로 모두 6개의 출입구가 있다. 제주도의 조망권이 좋다는 오름 들 중 거의 모든 오름엔 이런 유적들이 많다. 특히 어승생, 가마오름 등은 대표적이다.
순례길 끝에 1950년 여름 대정관내는 고구마 농사가 한창인 계절이었습니다. 그런 그 때에 충격적인 사건을 맞이하였으나, 제주도민들은 꿋꿋이 시대에 맞서 살아갔습니다. 6년이 지나 봄이 오자 그렇게도 그리던 시신수습을 하여 ‘한 자손’으로 모시기로 마음들을 모았습니다. ‘백조일손지지’와 ‘만뱅디공동장지’에 모시던 그날 그분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생각 해 봅니다. ‘헤어지지 말자’고 했던 제주4․3의 약속들을 죽어서라도 지켜드리고 싶었던 마음들을 모아서 한 곳-한울타리, 즉 올레에 모셨습니다. 그러면서 공동의 마음-공동체를 이어 가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한 자손이 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5․16군사쿠데타란 모진 역사는 또 다시 제주도민들에게 질곡의 세월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분들의 마음, ‘헤어지지 않고 한 자손이 되자’ 했던 마음은 제주4․3이 후세에 전해 준 교훈 중 참으로 소중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후 제주4․3연작을 지금도 꾸준히 해 오고 있는 ‘놀이패 한라산’ 을 통해 처음 전해 들었습니다. ‘감저줄 벋어 가듯(고구마줄기 뻗듯) 후세들은 번창하여야...’ 라고 ‘사월굿 백조일손’ 을 통해 전해 주었습니다. 현장을 안내하며 신사동산과 고무신 이야기를 끝내 잊지 못하며 흘리던 연구소 김은희연구원의 눈물을 통해 전해 받았고, 증언을 토대로 ‘백조일손’이란 시를 쓴 김수열 시인에게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6년이 지나서야 노래를 만들었고 다시 이 ‘섯알오름 길’을 걸어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노래하였습니다. ‘백조일손의 증언(김수열 작시)’ 과 ‘섯알오름의 한(최상돈 작사)’ . 겸손하지 못한 이야기지만 저에겐 형님인 김경훈 시인은 저의 노래를 듣고 ‘섯알 오름 길’ 이란 시를 썼다고도 하니, 그날 그분들의 마음이, 가르침이 고구마 줄기 뻗듯 하는 것이겠지요? 누군가는 다시 그 마음과 가르침을 어딘가에서 이어가고 있길 바라며 깊은 이념의 굴레에 아직 갈등하고 있는 이 땅 제주에 진정한 평화바람이 불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2011년 7월 '칠월칠석 섯알 오름 길'에서 질토래비 최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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