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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라(눅10:25-37)
갈등
1. 예수님의 비유 시리즈를 나눕니다. 오늘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비유입니다. 비유의 시작은 25절,“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예수님을 찾아온 한 율법사와 대화 가운데 주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셨어요. 당시 율법사는 세 부류로 구분되었어요. 율법에 정통한 율법사(노미코스), 율법사들 가운데 고위층에 속하는 서기관(그람마테우스), 율법 교사(노모디다칼로이) 등입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께 나아와 질문을 한 사람은 가장 낮은 율법사였습니다. 이 율법사가 주님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을 정독해서 읽으면 이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이 율법사가 예수님께,‘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물었어요. 이 사람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몰라서 묻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율법의 창시자요,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주신 분이에요. 이런 주님께 율법사가 감히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 몰랐기에 그랬지만, 참 교만한 자세입니다. 이렇게 교만한 마음으로 주님을 시험하는 율법사에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6절,“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율법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온 율법사의 마음을 아시고, 질문에 대한 답을 본인이 하게 하셨어요. 유대인들은 일찍부터 하브루타가 발달했습니다. 대화 가운데 질문 및 토의식 교육. 마태복음 22장에서는 주님이 답을 하시기도.
2. 다른 복음서에서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는 질문 대신에, 어떤 계명이 제일 크냐고 물었습니다. 두 질문에 대한 답이 같기에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의 핵심이 무엇이냐는 질문이에요. 율법사가 평소에 달달 외우는 것이니까, 답은 쉬운 것이에요. 27절,“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하나님께서 주신 613개의 율법을 요약하는 말씀, 두 구절입니다. 신명기6:5과 레위기19:18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말이 여기에서 기원합니다.
율법사가 답을 하자, 예수님이 그를 칭찬했습니다. 28절,‘네 대답이 옳도다.’주님은 율법사를 칭찬과 더불어‘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기본기를 중요하게 여기세요. 말씀은 지식으로만 알 것이 아니고 행하라고 권하셨어요. 그래야 네가 살리라-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가장 뛰어난 설교)을 마무리하시면서 마7: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말씀을 먼저 알아야 하지만(지식), 알기만 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어요. 말씀 대로 행해야-순종해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3. 율법사가 예수님의 권면에 네라고 답하였으면, 오늘 만남은 종결되었습니다. 이때 율법사가 독특한 질문을 주님께 했습니다. 29절,“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니이까?”율법사는 자신의 율법 지식을 자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냐고 주님께 질문하였을까요? 세상에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사람이 주님께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갈등 심화
4.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잠시 미루고요, 예수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한 비유로 답을 하셨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고 당차게 묻는 율법사에게 주님이 주신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내용은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에요. 비유가 시작되었습니다. 30절,“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다가다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약29km 정도. 예루살렘은 높은 산악지역(산성-해발 762m), 여리고는 평지.(해면 아래-250m) 고도 차이가 많았어요.(1000m 이상) 지금처럼 터널이나 다리가 없던 고대 세계에서는 이 길이 매우 험했습니다.
길 주변에는 동굴들이 많아서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홀로 여행하는 사람을 급습하기도 했어요. 잠시 방심하면 강도를 만날 수 있는 상습 위험지역이었습니다. 이날도 강도들이 굴에 숨어서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보다가,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산하던 때 홀로 지나가는 여행객을 급습했어요. 있는 물건이며 돈을 다 빼앗고,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게 내버려 두었어요. 강도라도 옷까지 벗기고 때리는 일은 드문데, 잔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옷이 벗겨지고 상처를 입은 채 신음하며 넘어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시간 차이를 두고 계속 지나갔습니다. 주님은 그들 가운데 세 명만 언급하셨습니다.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입니다.
5.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기는 했지만, 둘 다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돌아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종교인들이었어요. 유대 종교인들은 강도 만난 자를 보았지만 돌보지 않고 무관심 속에서 지나쳤어요. 사마리아인은 좀 달랐어요. 어떻게 달랐습니까? 33절,“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유대 종교인들은 보고 피하여 지나갔는데, 이 사람은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것이 사마리아인의 발걸음을 멈추고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하지 않고 돌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모든 역사는 불쌍히 여기는(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하나님께서도, 사람도 동일해요.
사마리아인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것이 제사장이나 레위인과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스플랑크니조마이는 배 속에 있는 내장들이 움직였다는 말이에요. 심장, 폐, 간들이 다 아팠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이 강도 만난 자를 얼마나 불쌍히 여겼는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하고 지나간 두 사람이 제사장과 레위인이라고 직접 언급하셨어요. 이 사건이 당시에 실제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이런 없었는데, 주님이 비유에 넣었다면 종교인들의 큰 공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책임을 지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6. 34-35절,“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기름과 포도주는 식용이기도 했지만, 현대 의학이 발달하기 전까지 응급처치 약으로 사용되었어요. 기름은 안정제로, 포도주는 알콜 성분이 있어 방부제로. 의사의 모델로 존경받는 히포크라테스는 종기 치료법으로,‘부드러운 양털로 싸매고 포도주와 기름을 뿌리라’고 했습니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순간 불쌍히 여김으로 여러 가지 자기희생을 감수해야 했어요. 응급처치를 해주고 환자를 데리고 가며 시간이 지체되었어요. 환자를 이송하며 자기 짐승-나귀에 태워 주막-여인숙까지 갔습니다.
자신은 뙤악볕 속에서 걸어갔어요. 주막에 가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환자를 먹이고 돌보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이날 밤에는 잠도 충분히 자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비즈니스-일을 보아야 해서, 부득이 주막 주인에게 이 사람을 돌봐달라고 부탁하며 두 데나리온을 주었어요. 한 데나리온은 남자의 하루 임금이니, 두 데나리온은 20만원-40만원입니다.(전문직 여부에 따라) 이 돈을 낯선 사람을 위해 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이에요.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며 율법사에게 질문했습니다. 36절,“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단순히 지식을 묻는 것이 아니에요.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자기의 지식과 이웃사랑을 자랑하러 온 율법사에게 한 방 매기는 질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왜 이런 방식으로 율법사에게 말씀하셨을까요?
실마리
7. 두 가지 질문을 풀어봅니다. 첫째 질문, 율법사가 예수님께‘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은 질문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는 주님을 만나 대화하면서 뭔가 자기를 자랑할 것이 있으리라는 자신감 속에서 왔습니다. 주님을 만나보니, 그가 생각한 바와 달리 주님이 그리 만만한 분이 아니셨어요. 지식이나 인격에서 모두요. 율법에 대한 자신의 질문에 주님이 쉽게 대처하고, 네가 대답을 잘했다. 네가 아는 계명을 따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주님의 답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율법사는 그대로 돌아가기에는 억울했어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어요.
29절에‘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라는 단서가 보여요.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25절에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다고도. 주님의 인기와 명성이 높아가고 있는 때, 자신도 뭔가 주님 앞에서 인정을 받아보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때 나온 질문이,‘내 이웃이 누구입니까?’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어느 목사님이 흥미로운 해석을 했어요.‘이 질문의 내면에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좋으나 내가 사랑하여야 할 그 이웃은 누구입니까? 적어도 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 나와 상대할 만한 이웃이란 누구입니까?’
8. 설득력 있는 탁월한 해석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이방인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생각은 조금도 바뀌지 않고 있어요.‘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내가 돕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누구요?’이렇게 말하는 사람, 얼마나 교만합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사랑할 대상이 없어서 사랑을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말이에요. 나의 고상한 이 사랑과 인격을 알고 받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교만한 율법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질문,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을 한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비유를 전하고‘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어린이도 답을 할 수 있는데, 주님은 율법사에게 굳이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까? 지식과 선행을 자랑하려는 잘못된 태도-교만한 율법사를 바로 잡아주려는 주님의 의도를 볼 수 있어요. 잘못된 생각과 마음, 태도는 올바로 잡아주어야 해요. 이것을 잡아주지 못하면, 평생 삐뚤어진 사고 체계 속에서 살다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나를 찾아온 사람을 향한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이 올바로 판단하고 진리를 따라 살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입니다.
9. 예수님은 자신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어요.(요14:6) 진리이신 주님이 이 율법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어요.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시고 율법사에게,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지 말고‘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암기하고 이해하는 지식으로 종교 생활을 하지 말라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너의 신앙 수준을 좀 높이면 안 되겠니?’라는 주님의 기대감과 권면입니다. 사마리아인과 같이 이것저것-인종, 언어, 성별, 사회경제적 위치 등 따지지 말라. 지금 내 앞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 고통을 호소하며 신음하는 사람을 돌볼 수 없겠냐는 주님의 탄식이에요.
복음
10. 예수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가르치기만 하지 않으시고, 항상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고통당하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어요.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만나주고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2/3가 치유와 축사-기적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주님은 병든 자들을 보면서,‘민망히 여기셨어요.’(개역 개정)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동정심). 사마리인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느낀 마음처럼요. 주님은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이십니다.
오늘 비유를 읽노라면,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질병으로 인해 몸이 일그러진 모습을 보고서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허덕이는 모습을 보고서 더욱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의 그 마음이 십자가를 지시게 하셨어요. 질병에서 해방되듯이, 온갖 죄와 사탄의 영향력 가운데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기꺼이 십자가를 담당하셨어요.
기대
11.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36-37절,“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우리는 주님을 닮는 제자들입니다. 우리도 율법사처럼 배우기만 하지 말고, 행하는 자-순종하는 자가 됩시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 교회는 교단, 교파, 교회, 신앙유무를 막론하고 육신의 고통, 영적인 고통, 내적 치유, 신학적-철학적 도움을 청하는 자들을 뿌리치지 않습니다.
국내외, 어디라도, 전화기도와 상담을 통해서라도. 현지에 달려가기도 하고요. 여기서 나온 것이 선교지 순회사역입니다. 오늘 2년 만에 세례식을 행했습니다. 참 기쁘고 좋은 날입니다. 잠시 후에는 새 예배당에서 첫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희생을 기념하는 예식이에요. 주님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같이,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지 말고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시간 다 같이 일어나 찬송하며 결단의 기도를 드립시다.(오늘 찬양: 주께 가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