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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영성으로 돌아갈 때
마가복음 12:35~37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오늘 우리가 사는 현세대를 평가하라고 하면 가치관의 실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서구 문화와 동양의 문화가 급속하게 섞이면서 오는 혼돈이 있습니다. 다양한 종교에서 외치는 가치에 대한 무분별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가들의 선동이 더욱 사람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 주면서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게 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혼돈은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주장이 진리라는 명목으로 SNS에 올려지고 있습니다. 이를 분별할 능력이 없는 분들을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런 답답하고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보살핌이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녀들을 어둠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길을 예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은 혼돈이 어지럽게 놓여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이 질서를 이루기 위하여 수면에 운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혼돈과 어둠에서 하나님은 빛으로 나타내시고 창조의 질서를 이뤄가시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어둠의 시대에는 밝은 진리로 새롭게 되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관점에서 영성이란 하나님을 알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만 아닌 경험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영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와 더불어 성경 말씀을 읽고 적용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영성입니다.
왕하 8:19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고 섭리하신 것이 다 이뤄질 때까지 다윗의 혈통을 통해 역사를 이루시고, 다윗의 가문을 지키겠다고 굳건한 약속입니다.
함께 나눈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 셋째 날이었습니다.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고, 여기서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올무 놓아 넘어트리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정치적인 올무는 은화 데나리온 동전을 보이심으로 그들의 덫에서 벗어나셨고, 신학적인 문제는 유대인들이 즐겨 있는 Torah의 핵심부인 출애굽기를 들어서 벗어나셨습니다. 종교적인 올무는 무엇이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영원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하라는 말씀으로 더 이상의 논란을 종식하셨습니다. 그래서 앞 절 34절에는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짤막합니다만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하게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인류의 영원한 소망이 되는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열망인 메시아가 되심을 말씀하시면서 다윗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의 생애와 그의 고백에는 예수님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입니다. 이것이 영성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생명에 녹아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어지러움에 휩싸이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에 소망의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보이신 영성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 반드시 승리할 것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다윗의 영성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다윗의 영성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막 12: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생각한 근거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물론 그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 곧,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임을 밝혔습니다. 삼하7:12~13에서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자손은 솔로몬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나라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때 다윗의 자손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라는 질문에서 많은 사람 중에 바리새파 사람의 서기관들을 지목했는지 흥미롭습니다.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또 흰색의 옷을 입으므로 어디를 가나 눈에 잘 뜨이게 됩니다. 신약학자로 널리 알려진 예레미야는 그의 저서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이란 책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도중에 있는 바쁜 자가 아니면 모든 사람은 서기관이 지나갈 때 존경의 표시로 반드시 일어서야 한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들은 랍비라는 칭호를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랍비’란 선생이란 의미 외에도 ‘나의 위대한 분의 뜻’ 또는 ‘주인님, 아버지’의 존칭으로도 불렸으며 항상 연회나 잔치가 있으면 이들은 음식을 빛나게 하는 존재로 꼭 있어야 하는 자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들은 노인이나 심지어 자기 부모보다 더 앞선 위치에 앉거나 대접받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는 외식하는 자들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계보를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을 보입니다. 다윗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이름 그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 이유는다윗의 생명 안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 하였고, 변화 산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행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성령으로 와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내 안에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임하게 됩니다. 이 사랑을 인정하고 기뻐할 때 내 안에서는 예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흐르게 되는데 이를 성령 충만하다고 합니다.
내 안에서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세상 것에 취하여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가득 채워져서 그로 인하여 기뻐한다면 내 안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의 영성에는 바로 이런 충만함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다윗의 영성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분명하게 담겨 있습니다.
막 12: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한 것으로 다윗이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마치 눈으로 보듯이 그리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제일 처음 나오는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여호와’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주’는 ‘아도나이’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나의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하늘에서 일어나는 계획을 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장차 보낼 메시아와 나누는 대화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메시아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아야 나를 알 수 있고, 영적 세계를 알아야 대적자를 물리치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다윗의 영성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분명하게 담겨 있고 그것을 경험한 산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임하였던 성령은 오늘에도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채우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윗는 하나님을 더욱 힘써 알기를 원하였고, 그뿐만 아니라 그분이 하시는 위대한 일을 경험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것이 영성이며 성령으로 충만한 자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는 다윗의 영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 반드시 승리할 것을 믿었습니다.
막 12: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시110:1에서는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네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시며,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시면서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할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까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까? 성경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라 말씀합니다. 고대 전쟁에서는 싸움에서 승리하면 승자가 패자의 목을 밟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발을 딛고 서 있는 발등상이란 것이 있습니다. 약간 높은 단과 같은 것인데 여기에는 적장의 목을 밟았던 장면들을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완전한 승리의 때를 참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원수를 이기신 주님이 늘 자신과 함께하심을 믿었고, 신뢰하였기에 어떤 여건에서도 그는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지닌 영성은 내게 지니고 있으면 저와 여러분도 평생을 승리로 마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보좌 우편이 의미하는 것은 권능의 자리를 뜻합니다. 모든 전권을 행사하는 자리라는 말입니다. 사도신경에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합니다. ‘저리로서’는 ‘그곳으로부터’인데 바로 ‘보좌 우편으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순교의 순간 스데반은 보좌 우편에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5-56) 보통은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특별합니다. 스데반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앉아만 보고 있을 수 없어 주님은 서 계시는 것이요, 스데반의 죽음으로 순교하는 모습을 귀하게 여겨 영접하기 위해서 서서 기다리시는 모습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희망이요 영광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묻습니다. “너희 왕이 어디 있느냐?” 그럴 때 성도들은 “우리 왕은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 곧 우리를 원수의 모든 속박에서 끌어내시려고 반드시 오실 주님을 믿었고, 그분의 소유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원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리스도의 발아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승리하실 것이며, 그의 원수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우편에 실제로 어떤 의자가 놓여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같은 영광을 누린다는 사실, 곧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적으로 뜻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악의 주축인 사탄입니다. 죽음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이 세상의 권력과 죄악들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입니다.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4-26)
이들마저 다 물리치고 무릎 꿇게 되는 날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이 될 것입니다. 적의 패배는 이미 예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던 세력들은 다 굴복을 당할 것입니다. 다윗은 승리하신 주님을 영접하였고, 기뻐하며 일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의 영성이 내 것이 될 때 세상이 힘들고 아무리 어지러운 혼돈의 과정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막 12: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흥미를 느끼고 동조를 했을 뿐입니다. 거기에 자신을 돌아보며 화개했다는 고백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이 끝맺음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그들은 그저 즐겁게 듣기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회개도 없었고, 믿음의 고백도 없었으며, 아무런 결단도 없었습니다. 회개 없는 그들은 불과 며칠 뒤에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종용을 받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으라고 고함을 치는 우매하고 패역한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회개 없는 영성은 껍데기 신앙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심을 인정하게 되면 나 자신의 죄를 발견합니다. 죄를 돌이키고 회개할 때 내 심령이 맑아져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주님의 권세가 내 권세 되어 악한 마귀의 속살거림에 넘어가지 않고 날마다 승리하며 영원한 승리가 보장되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영성이 저와 여러분 것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