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26]
김옥균(金玉均, 1851-1894)③
김옥균은 직접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 지도자가 된 기독교 중심인물은 아니었지만, 당시 조선에 그리스도 신앙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기독교 선교가 가능하게 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유교적 관습을 중시했던 조선이었기에 성리학과 소중화(小中華) 사상을 지키고자 했던 위정척사파와 같은 세력이 존재하는 한 봉건시대 관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조선 정부가 기독교 선교를 허용하도록 길을 연 사람이 바로 김옥균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옥균은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고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10년 뒤 1894년 조선인 최초 프랑스 유학생 출신 홍종우(洪鍾宇)에 의해 청일전쟁 직전 중국 상하이로 유인된 다음 암살당했습니다. 고종의 밀명으로 암살을 계획해서 실행에 옮긴 홍종우는 1894년 4월 김옥균의 시체를 가지고 귀국했고, 고종의 명에 따라 시신이 능지처참이 된 후 양화진 저잣거리에 효수되어 “대역부도 옥균”(大逆不道 玉均)이라는 깃발과 함께 사람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당시 외국 언론(프랑스, 일본, 미국 등)은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면서 조선을 반문명적이고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나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망명해 왔을 때 그를 냉대했던 일본인들조차 조선 정부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규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김옥균을 조선 개회에 앞장서다 억울하게 희생이 된 선각자로 여기고 추모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조선 내에서도 만약 김옥균이 계속 생존해서 개혁정책을 이어갔다면 한일병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재평가되기도 했습니다. 연좌죄로 아버지는 처형당하고 어머니는 음독 자결했으며, 그의 부인과 딸은 관비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참고>
전정희 『예수로 산 한국의 인물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