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E장조>, 영국의 여성 트럼펫터 앨리슨 발솜이 연주하고 있습니다. 맨 밑에는
하이든의 현악4중주 <황제> 중 2악장 <신이여 황제를 보호하소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현재 독일의
국가이기도 하지요
[ 교향곡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 ]
요제프 하이든은 오스트리아의 로라우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로라우는 비엔나에서 동남쪽으로 약 50km.웬만한 지도에는 나타나지도 않는 조그만 마을이 하이든의 고향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 어느 명소 못지않은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마을로 들어가자면 입구에서부터 하이든 생가의 안내판이 인도합니다. 생가는 큰길 가에 있습니다. 하얀 벽의 길쭉한 초가입니다.
* 하이든의 생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첫눈에 띄는 것이 '이렇게 초라한 농가에서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태어나다니-베토벤'이라고 써서 벽에 내건 글귀입니다.
베토벤은 경애하던 하이든이 비엔나에서 죽자 그의 임종의 집으로 달려가 기념으로 이 생가의 판화 한 장을 얻어 왔고, 이 때 이 그림을 친구에게 보이며 그가 한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베토벤은 이 그림을 퍽 아껴 자신이 죽을 때까지 18년간을 곁에두고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 생가(기념관)안의 하이든 자필 악보들
하이든은 6세 때 백부가 사는 하인부르크로 첫 음악 수업을 하러 가면서 이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고향을 떠난 후에도 평생토록 자신이 태어난 로라우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795년 63세가 된 하이든은 성공적인 영국여행을 마치고 이 마을에 들러서는 이미 양친이 세상을 떠난 뒤라 남의 소유가 되어 버린 옛 집의 문지방에 무릎을 끓고 엎드려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 생가 입구
고향 로라우 마을에는 하이든이 세례를 받은 조그만 교회 앞 광장에 그의 흉상(胸像)을 얹은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이미 하이든이 생존 중이던 1794년 그의 애호가이던 한 백작이 자신의 궁전 정원 안인 강(江) 가운데의 섬에 세웠던 것인데 후에 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51년 지금의 자리에 앉혀졌습니다.
하이든은 이 기념물의 모형을 자기 집에 가지고 있었고 유언으로 보존을 위한 기금까지 남겼습니다. 비면(碑面)에는 하이든의 유명한 현악 4중주곡인 <황제>의 악보가 새겨져 있습니다. 기념비가 처음 세워졌던 중지도(中之島)는 지금 이름이 하이든 도(島)로 되었고, 이 마을의 4학급짜리 조그만 초등학교는 하이든 교(校)입니다.
* 로라우 마을의 하이든 흉상
로라우를 떠난 하이든은 하인부르크를 거쳐 8세 때 비엔나의 슈테판 성당 소년 합창단으로 들어갑니다. 비엔나의 슈테판 성당은 이 음악 도시의 상징탑같은 건물입니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이 치러진 곳이기도 한 이 성당은 까맣게 때가 묻은 채 지금도 뾰족이 서 있습니다.
9년 후 변성(變聲)으로 소년 합창단을 나와 방황하던 시절(1750년) 난로 없는 지붕 방 밑에 살던 왕궁 앞의 집(현재의 콜마르트 11번지)도 남아 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나 광장에 선 이 여제(女帝)의 동상 좌대(座臺)에 하이든이 모차르트와 함께 부조(浮彫)로 새겨져 있는 것은 소년 합창단 시절의 하이든에 대한 여제의 총애를 기념한 것입니다.
* 비엔나의 슈테판 성당
하이든 하면 에스터하지 家를 빼놓을 수 없죠. 그는 29세이던 1761년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이 후작가(侯爵家)의 궁정 부악장으로 부임하면서 대음악가로서의 길이 트이게 됩니다.
아이젠슈타트는 하이든의 고향인 로라우의 서남쪽, 항가리와 국경을 접하는 부르겐란트 주(州)의 주도(州都)입니다. 항가리 땅이던 것이 1921년 오스트리아 소유가 되었습니다. 일대는 산과 호수로 둘러싸인 풍광 명미한 땅입니다. 이 아이젠슈타트에는 에스터하지 궁전이 인구 1만 정도의 마을을 온통 거느리는 듯한 위용을 하고 지금도 황금빛으로 서 있습니다.
에스터하지 家는 당시 항가리의 명문 귀족으로 하이든 때의 당주(當主)는 유능한 정치가인 동시에 음악과 회화의 열렬한 보호자였습니다. 하이든은 처음에 14명의 오케스트라와 6명의 가수로 구성되었던 이 궁정 악단에 들어와 5년 후에는 악장이 되면서 58세 때까지 도합 30년 간 여기서 음악 활동을 했습니다.
* 에스터하지 여름 별궁
14세기 때 처음 세워져 여러 번 개조한 에스터하지 궁전은 방이 200개나 되어 일부를 주 청사(州廳舍)로 쓰면서 나머지는 전시실 등 문화 행사용이 되어 있습니다. 방 하나는 음향 장치가 잘 된 연주회장입니다. 이 마을에 있는 하이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하이든 시대의 의상을 하고 나와 하이든의 작품을 주로 한 음악회를 엽니다.
궁정 악장 시절 하이든이 거처하던 집은 궁전에서 가까운 지금의 하이든가세 21번지. 2층짜리 건물이 남아 현재 하이든 기념관입니다. 하이든이 살 때 이미 두 번이나 불이 났으나 건물의 기본 골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기념관 2층에는 노이지들러 호(湖) 가까이의 페르퇴드에 에스터하지 가(家)가 세운 여름 별궁(別宮)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이 궁정은 하이든의 <고별 교향곡>의 일화로 유명한 곳입니다. 지금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인접한 항가리 땅입니다.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떠 지었다는 4층짜리 별궁 건물은 2차 대전 때 일부 파괴된 것을 복구하여 박물관이 되어 있습니다.
* 하이든이 전성기 시절 활동하던 에스터하지 궁전
하이든은 에스터하지 家의 니콜라스 公이 죽고 그 후계자가 음악에 이해가 없어서 영광있는 악단이 해산되자 1790년 비엔나로 돌아갑니다. 하이든이 비엔나에서 만년을 보낸 집은 하이든 가세 19번지. 손질이 잘 된 깨끗한 2층 집입니다. 안뜰에는 고목이 한 그루 서 있습니다. 하이든은 원래는 단층집이었던 이 집을 1793년 사서 2층을 올린 뒤 두 번째의 영국 여행에서 돌아온 1795년부터 입주하여 14년 간을 살다 이 집에서 죽었습니다.
* 에스터하지 家의 니콜라스 공
안쪽의 커다란 방은 음악실. 바로 이 방에서 하이든 만년의 대작인 오라토리오 <천지 창조>와 <四季>가 작곡되었습니다. 하이든이 쓰던 지휘봉 등과 함께 <천지 창조>의 초판 악보도 진열되어 있습니다. 이 방에서는 매년 여름 하이든의 실내악을 주로한 연주회가 열립니다.
<천지 창조>는 하이든이 영국에서 헨델의 <메시아>를 듣고 감동한 나머지 비엔나로 돌아오자마자 착수한 것인데 그 헨델의 <메시아>, 멘델스존의 <엘리아>와 함께 3대 오라토리오로 꼽히는 명작입니다.
하이든이 군중 앞에 마지막 나타난 것은 1808년 그의 76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비엔나 대학 강당에서 열린 <천지 창조> 공연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너무 쇠약해 있어서 제1부가 끝나자 집으로 실려 갔습니다. 이 때 제1부 마지막의 합창을 듣고 하이든은 흥분하여 벌떡 일어나더니 하늘을 손가락질하며 "빛은 저쪽에서"라고 외쳤다는 그 건물은 지금 과학 아카데미가 들어와 있습니다.
<천지 창조>가 탄생된 기념관의 방에 서니, 매일 무릎을 꿇고 신에게 이 곡을 성공시킬 힘을 달라고 빌던 하이든의 기도 소리가 들립니다.
하이든은 長調의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교향곡 104곡 중 短調는 12곡 뿐입니다. 그렇게 쾌활하고 유머러스하던 그의 웃음소리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마지막 해인 1809년 비엔나를 침입한 나폴레옹군의 포탄이 부근에 떨어지자 "얘들아 놀랄 것 없다. 하이든이 있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소리친 그 낙천의 주소가 이 집 이 방이었습니다.
* 비엔나의 하이든 집
포격이 그친 뒤 나폴레옹은 대음악가에 대한 경의로 이 집 앞에 보초까지 세워 주었지만 하이든은 이 방에서 자신이 작곡한 오스트리아 國歌(지금은 독일 國歌)를 피아노로 세 번 연주했고 그 며칠 뒤 어느 무덥던 날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이든의 유해는 처음에 비엔나의 훈트슈트르머의 묘지에 묻혔으나 1820년 에스터하지 가(家)의 희망으로 그가 전성기를 보낸 아이젠슈타트로 이장되었습니다. 아이젠슈타트의 무덤은 베르크 교회 안입니다. 대작곡가의 명성에 어울리게 널따란 별실의 영묘(靈廟)에 모셔져 있습니다. 대리석 석관의 네 귀퉁이에는 하이든의 <사계>에 따라 4인의 천사가 지키고 있습니다.
* 하이든 묘
비엔나에서 이장을 위해 하이든의 무덤을 팠을 때 유해의 두개골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에스터하지 가의 서기 등 두 사람이 모독(冒瀆)에서 지키기 위해 도굴했다는 것을 알아냈고, 1895년부터는 이 두개골을 비엔나의 악우협회(樂友協會)가 보관해 오다가 1954년 성대한 개장식(改葬式)과 함께 이 무덤에 옮겨져 하이든의 몸은 죽은 지 145년 만에 하나로 합체가 되었습니다.
[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 ]
하이든은 ‘고향곡의 아버지’라 일컬어집니다. 교향곡을 가장 많이 작곡했기 때문입니다. 작은 키에 유머가 많은 친밀감으로 악원들로부터 ‘파파 하이든’이라 애칭되었습니다. 모차르트와 깊은 우정을 맺었고 베토벤에게는 스승이었습니다.
평생에 걸쳐 108개의 교향곡 외에 83개의 4중주곡, 4개의 오라토리오, 34개의 오페라 등을 썼습니다. 교향곡 중에서는 <경악(제94번)>, <사계(제101번)>, 현악 4중주곡으로는 <황제>, <세레나데> 등이 유명합니다.
* 하이든의 고향과 활동하던 곳(로라우,아이젠슈타트,비엔나)
[ '트럼펫 협주곡 E 장조' 이야기 ]
트럼펫에 의한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초인적 기교! 하이든은 일생 동안에 거의 모든 악곡에 걸쳐서 수많은 명곡을 남겼습니다. 위트와 기지가 넘치는 하이든은 곡으로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거나 항의 표현을 하는 등, 기발나고도 뛰어난 지혜를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착상하기 어려운 트럼펫이라는 악기로 협주곡을 만든 것도 하이든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더구나 당시의 트럼펫이란 요즘의 것에 비하면 성능이 보잘 것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작을 남겼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죠.
그의 작품들에서는 흔히 도외시되기 쉬운 특정 악기들의 특징을 살려 곡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실험정신은 그만의 해학이자 우수함이 아닌가 합니다.
* 아이젠슈타트의 하이든 동상
이 곡은 하이든이 64세 때, 두 번째 영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1796년에 작곡된 그의 유일한 트럼펫 협주곡입니다. 트럼펫이라는 악기의 울림이 가져다주는 진기함과 악상의 독특한 아름다움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곡은 전체적으로 단순한 면이 있지만 곡 전체를 아우르는 악상 처리는 물론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듯한 '악구'에도 성숙된 조화를 이룹니다. 이로 인해 트럼펫 협주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이 되었죠.
이 곡은 오케스트라 편성의 기본적인 현악 합주 외에도 독주 트럼펫을 비롯해 각각 2개의 플루트, 오보에, 바순, 호른, 트럼펫과 팀파니 등으로 이루어져 화려하고도 웅장한 사운드를 들려줍니다.
특히 제3악장 알레그로는 '론도 형식'이며 트럼펫 예술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팡파레같은 이 유명한 주제는 그 절묘한 기교가 곡 전체에 걸쳐 눈부십니다. 고도의 테크닉을 요합니다. 오케스트라도 이에 질세라 다이내믹하게 응답하면서 경쾌하고 빛나는 '코다'로 끝을 맺습니다.
* 악구(phrasing) : 한 숨으로 연주할 수 있는 악곡의 길이
* 론도(rondo) : 음악의 형식 중 하나, A라는 멜로디가 나오고 B가 나오고, 다시 A가 나오고 C가 나오고 A가 나
오고 D가 나오고 하는 형식
* 코다(coda) : 한 악곡이나 악장의 끝에 끝맺는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이는 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