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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6일(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요한복음 13:31~38
얽힌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초안: 2022년 4월 10일자.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여러분은 신데렐라의 구두를 아십니까? 신데렐라의 구두는 유리로 만든 구두입니다. 신데렐라가 흘리고 간 유리 구두는 주인을 찾는데 소중한 안내자 구실을 합니다. 누가 신데렐라인지 구두를 신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데렐라의 구두를 생각하면서 신분상승과 인생 역전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왜 신데렐라의 구두는 유리로 만들어졌을까요? 유리 구두는 그 특성상 신데렐라의 발을 그대로 그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고된 노동에 힘들었던 신데렐라의 발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왕자는 신데렐라가 남기고 간 유리 구두의 주인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유리 구두를 신었던 신데렐라를 가까이에서 본 왕자는 아름다운 발이 아닌, 못생기고 상처 난 발을 생각하며 신발 주인을 찾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입견 속에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깨뜨릴 때 진짜 신데렐라를 만날 수 있습니다.
-출처: 이재현, 「들리는 설교, 유혹하는 예화」(구리: 선율, 2023), 230-231.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박완서 작가의 첫 번째 소설은 「나목」입니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 이경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이경은 한국 전쟁으로 두 오빠를 잃고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경은 옥희도의 그림에 나오는 나무를 보고, 고목, 즉 말라 죽어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는 절망의 상징처럼 느꼈습니다. 마음에 꽃이 있는 사람이 꽃을 보듯이, 이경이 마음속에 있는 상처와 슬픔이 옥희도의 그림에 그대로 투사되었습니다.
이경과 옥희도의 인연은 전쟁이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옥희도는 세상을 떠났고, 이경은 단란한 가정을 꾸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이제 과거의 상처를 바라보는 이경의 시선도 달라졌습니다.
전시회에서 다시 만난 옥희도의 그림은 옛날 그대로였지만, 그림을 바라보는 이경의 시선이 변했습니다. 그러자 그 그림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잎도 없고 열매도 없어 마치 죽은 고목처럼 보였던 나무가 아름다운 봄을 품고 있는 나목으로 거듭났습니다.
-출처: 위의 책, 236~237.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사람들은 화려한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를 바라보며 열광하지만, 정작 왕자는 유리 구두 안에 들어있는 못생기고 상처 난 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똑같은 나무가 말라 죽은 고목으로 보이기도하고, 반대로 봄을 품고 있는 나목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 두 이야기는 동일한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눈으로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가룟 유다와 베드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 이 두 사람은 모두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된 줄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저녁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닦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절).”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제자들 중에 누가 자기를 팔자인지 이미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라고 이름을 밝히지는 않으셨지만,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후 마음이 괴로우셨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재차 말씀해 주셨습니다(21절).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팔자가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 사람이다(26절).”라고 말씀하신 후, 떡 한 조각을 적셔다가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떡 한 조각을 받은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곧바로 밖으로 나갔는데, 그 때가 ‘밤’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30절).
여기서 ‘밤’은 시간상으로 늦은 시간을 뜻하기도 하지만, 가룟 유다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하여 빛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가 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가룟 유다의 어두운 마음을 지적하시면서 그가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주신 여러 번의 기회들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가룟 유다의 마음은 말 그대로 ‘밤’과 같았습니다.
가룟 유다 이야기는 이 정도만 하고, 저는 베드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내는 바람에 여러 번 예수님께 꾸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의리가 있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33절).”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36절)”라고 예수님께 묻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내가 가는 곳에는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36절).”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장담했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37절).”
베드로는 충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내가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그의 진실 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8절).”
예수님의 말씀대로, 장차 베드로는 철저히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열심과 충성스러움도 결코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심문 받으실 때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물었습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 때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며 슬그머니 모닥불을 쬐었습니다.
모닥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를 발견한 사람들이 두 번째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너도 그의 제자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만, 번번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마침내 세 번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자 곧 닭이 울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가룟 유다는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고,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이 예수님께 큰 고통을 안겨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도 알고 계셨고,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 겪은 배신감을 어떻게 극복하셨을까요?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간 후에 예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나요? 우리 다함께 한 음성으로 31절과 32절을 읽어보십시다.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예수님은 가룟 유다로 인해 배신감과 괴로움을 느끼셨겠지만, 결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말씀하셨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과거의 실패와 배신의 경험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겨, 정작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한 것 때문에 낙심하여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어리둥절하고 있던 제자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31-32절).”
아무리 내 곁에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만 분명하다면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분명한데, 그 사이에 무엇이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면, 하나님께서도 인자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실 것입니다. 아직은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영광을 주실 것을 “곧 주시리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실 만큼 확실히 믿고 계셨습니다.
이런 원리를 따라 가다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도 이해가 됩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느니라.” 이에 베드로는 호언장담했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던 것처럼,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고향 땅 갈릴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연약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낙심 가운데 있던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만나주셨을 때처럼, 이번에도 주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위해 친히 숯불을 피워놓으시고 떡과 생선을 구워 그를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세 번 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어쩌면 이 때 베드로의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베드로가 계집 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후, 베드로는 숯불을 쬐고 있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이제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과거의 실패와 상처에 매여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가 상처와 실패의 자리를 딛고 일어나, 다시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엄밀히 말씀드리면, 베드로가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실패와 낙심의 자리까지 따라가셔서, 그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베드로가 경험했을 때, 베드로는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상대방을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상대방을 향해 ‘기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과연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입니까? 요한복음 13장 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할 만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셨을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젊은 며느리에게 포장이 몹시 꼼꼼하게 된 소포가 왔다고 합니다. 며느리가 얼른 가위를 찾아 포장된 끈을 자르려고 하자, 시어머니가 말리면서 “얘야, 끈은 자르는 게 아니라 푸는 거란다.”라고 말했습니다.
며느리는 포장 끈의 매듭을 푸느라 한동안 끙끙거리면서 속으로 “가위로 자르면 편할 걸, 별걸 다 나무라셔.”라며 구시렁거리면서도 매듭을 다 풀었습니다.
그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보며, “끈을 잘라버렸으면 쓰레기가 됐을 텐데, 예쁜 끈이니 나중에 다시 써먹을 수 있겠구나.”라며 천진난만하게 웃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인연도, 관계도 잘라내기보다 푸는 습관을 들어야 한단다.”
혹시 여러분은 잘 풀어도 될 것, 쉽게 잘라버려 소중한 관계를 깨뜨려버린 일은 없으신가요? 이제부터는 얽히고설킨 매듭들이 있다면 실마리를 찾아서 하나하나 풀어가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출처: 신만교, 「순례자 영성」(서울: 토비아, 2020), 35.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질수록 다른 사람을 더욱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끝까지 찾아오시고, 그를 위해 목숨을 버려주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향한 기대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라고 축복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여러분이 서로 사랑함으로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알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