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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 1차 포에니 전쟁
B.C. 264~133년에 로마 공화정은 여러 면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B.C. 264년이 되면서 로마의 신분 투쟁이 막을 내렸다. 로마 귀족들이 동등한 조건을 요구하던 부유한 평민들의 욕구를 수용한 결과였다. 이로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치르는 것이 로마인의 생활 방식이 되었다. 모든 계층의 시민들은 승전이 가져다 주는 이익에 익숙해졌고 귀족 지도자들은 군사적 영광을 동경하고 원정에서 승리하여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정치적으로 출세하였다.
로마는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카르타고와 3차에 걸친 전쟁으로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드는데 성공하게 된다.
현재 이스라엘과 레바논에 해당하는 지역은 고대에 페니키아 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페니키아 인들은 셈 족 계통에 속하는 사람들로 지중해에서 활발한 해상무역으로 번영하였다. 정치적으로는 통일되지 않고 도시 연맹 형태를 유지했다. 우가리트, 시돈, 티루스(Tyrus) 등 항구 도시가 페니키아의 중심지였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인들이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 세운 도시국가였다.
전설에 따르면 카르타고를 세운 인물은 티루스의 공주였던 디도(Dido)였다. 남동생이 남편을 살해하여 과부가 된 디도는 추종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지중해 서부 지역으로 떠났다. 아프리카 북부 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지금의 튀니지에 상륙하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추종자들에게 "자, 여러분 이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합시다" 라고 연설하였다. 이들은 자신이 건설한 도시를 카르트 하다슈트(Kart-hadasht ; '신도시'라는 뜻)라고 불렀다. 그리스 인들은 이 도시를 카르헤돈(Karchedon)으로 로마인들은 카르타고(Carthago)라고 불렀다.
고고학자들은 카르타고가 성립된 시기를 기원전 8세기 중반으로 본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의 중심 도시 시돈과 티루스가 쇠퇴함에 따라 급격히 발전하였다. 카르타고 인들은 그들의 상업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지중해에서 어느 국가도 따라올 수 없는 강한 해군을 보유했으며 히스파니아(스페인 동남 지역),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시칠리아의 일부를 포함하여 지중해 서쪽 절반을 세력권으로 하는 제국을 건설했다.
카르타고의 국정은 로마와 비슷하여 귀족이 주도하는 공화정이었는데 로마와 달리 민정과 군정이 분리되었다. 로마의 집정관은 최고의 민정관인 동시에 최고 사령관으로 임기도 1년에 지나지 않아 군 지휘관으로서는 아마추어였다. 이에 비해 카르타고에서는 민정과 군정이 엄격히 구분되어 장군은 종신적인 직업 군인이었다. 그러므로 전쟁 그 자체만을 보면 카르타고의 장군이 더 능숙하였으나, 전공을 세우면 그것이 정치가의 질시를 초래하는 약점이 있었다. 군대도 로마는 모두 시민으로 구성되었으나 카르타고는 육군의 경우 스파르타의 보병, 누미디아의 기병, 북아프리카의 종족 등으로 구성된 용병부대였다. 용병들은 능숙한 전투 부대였으나 조국에 대한 충성으로 보면 로마군에 비할 수가 없었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처음에는 우호관계를 맺었다. B.C. 348년 두 나라는 이전에 맺은 조약을 개정하여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다. 카르타고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영토를 얻지 않고 로마와 동맹을 체결한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 대해서 침공이나 간섭하지 않겠다는데 동의했다. 이에 대해 로마는 지중해 서부의 해상 무역에서 카르타고의 독점권을 인정하였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와 카르타고 본국에는 로마 상인의 출입을 허용했다. B.C. 306년에도 로마는 이 조약을 쾌히 갱신했다. 한 세대 뒤인 B.C. 279년 카르타고와 로마는 피로스의 군사 원정에 맞서 상호 방위 협정을 체결했다. 포에니 전쟁(Punic War)은 이로부터 불과 15년 만에 시칠리아를 두고 일어났다.
<시실리섬의 도시국가들>
마메르스(Mamers)라 불리는 캄파니아(이탈리아 중부 지역) 출신의 용병 집단이 B.C. 289년 시칠리아의 전략적 소도시 메사나를 탈취한 것이 로마가 시칠리아에 개입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마메르스는 메사나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그들의 아내들을 취하였다. 이들이 시라쿠사를 넘보자 시라쿠사의 왕 히에론(Hieron) 2세는 B.C. 265년 메사나를 공격하였다.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마메르스는 인근에 주둔한 카르타고 함대 사령관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히에론 2세는 철수하였다.
마메르스는 카르타고 군이 메사나에 영구적으로 주둔할 것을 우려해 이번에는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B.C. 264년 로마는 출병을 결정하였고 카르타고도 시칠리아를 양보할 수 없어 1차 포에니 전쟁(B.C. 264~B.C. 241)이 일어났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세력범위>
B.C. 264년 봄, 로마의 호민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Appius Claudius)는 남부 이탈리아 동맹시들이 공급해 준 소규모의 함대를 이끌고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에 상륙하였다. 카르타고 해군이 온전한 전투력을 발휘하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했으나 동원 가능한 카르타고의 함대만으로 의지만 확고했으면 로마군의 상륙을 쉽게 막을 수 있었을 터였다.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던 히에론 2세는 B.C. 263년 로마군 4천이 시라쿠사를 공격하였을 때 카르타고의 지원이 없자 동맹을 파기했다. B.C. 262년 로마군은 히에론 2세의 지원을 받아 시칠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아그리겐툼을 포위공격하였다. 카르타고 수비대가 방어했으나 함락되었고 그 주민들은 노예가 되었다.
아그리겐툼 함락으로 로마는 카르타고를 시칠리아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완전한 전투력을 갖추게 된 카르타고의 함대는 이탈리아에서의 보급을 단절시킬 수도 이탈리아 반도의 해안 전투력을 침공할 수 있었다. 로마는 해군을 건설하든지 전쟁을 포기하든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B.C. 311년 로마는 20척의 트리레미스(triremis ; 삼단으로 된 노를 갖춘 배)를 건조하였다. 그러나 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한 시점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로마는 나포한 카르타고 선박을 모델로 하여 신형배를 건조하였다. 여기에다 끝에 무거운 쇠갈고리가 달린 이동식 다리를 장치했다. 돛대에 고정된 이 다리는 도르래를 이용하여 적함에 떨어뜨려 끝에 달린 갈고리를 적함의 갑판에 단단히 박을 수 있었다. 이동식 다리가 적함과 연결되면 로마군은 다리를 건너 적함으로 돌진하여 육상전과 똑같은 전투를 벌였다. 이 장치를 코르부스(corvus ; '까마귀'라는 뜻)라 불렀다.
<카르타고의 전함들>
<로마의 구전함 트리레미스triremis -3단노>
<카르타고함대에 대항하기위한 로마의 신전함 pentekonter>
<로마의 함대가 "corvus" 구조물을 이용해 카르타고 함선에 올라 백병전을 펼친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