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암(급성 백혈병) 투병 구백네(904) 번째 날 편지, 2 (음식, 건강) - 2023년 2월 27일 월요일
사랑하는 큰아들에게
2023년 2월 27일 월요일이란다.
새해가 벌써 두 달이 지나려고 하는데, 연초에 세워둔 목표를 꾸준히 지켜가고 있는지?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작심삼일이에요. 전 너무 게을러서요.", “번아웃이 왔는지, 잘 지켜지지를 않네요.", 동 꼭 해야지 했는데, 저녁만 되면 무기력해져서…"라는 이야기들을 자주 듣기도 하는구나.
사랑하는 큰아들아
어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이유로 ‘번아웃, 무기력, 게으름’을 꼽는데, 상 "그 세 가지의 차이가 뭐예요?"라고 질문하면, 확실하게 답변할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은데, 이 세 가지는 분명히 구분될 필요가 있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간혹 '번아웃 증후군'으로 보이는 이가 "전 왜 이렇게 게으르지요?“라면서 자기를 비하하고, 학대하고, 닦달하는데, 게으름을 타파하기 위해 억지로 뭘 더 하게 되고, 자연히 정신건강은 더 하향곡선을 그리게 돼, 세 가지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방법이 바로 '에너지 잔여량의 유무'라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예를 들어 세 사람이 침대에 누워있는데, 셋 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침대에 누워서 혼잣말만 중얼거리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각자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네.
A : "해야 할 일이고, 나발이고... 몰라..."
B : "아…. 지금 해야 하는데…. 지금쯤은 시작해야 하는데….“
C : "딱 이것까지만 보자…. 딱 이것까지만…."
사랑하는 큰아들아
이 세 사람의 차이는 뭘까?
번아웃의 동의어는 소진인데, 소진이란 에너지가 '0'으로 A는 해야 할 일이 있든 말든, 정말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이 소진돼 누워있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고, 스마트폰을 들어서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를 보는 그것마저도 할 정신이 없는 것이 번아웃이라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하지만, B는 에너지가 조금 남아있어 다른데, 해야 할 일에 쓰는 대신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유튜브를 보고 인스타그램을 보는 등 에너지를 딴짓에 쓰는데, 이게 컨트롤이 안 된다네. 즉, 에너지는 남아있지만, 그 에너지를 내가 어디에 쓸지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태가 무기력이라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C도 B처럼 에너지가 남아있고 유튜브를 보고 있지만, C는 유튜브 보기를 스스로 선택해 '이것만 보고 있다가 하자.'라는 회피적인 의사결정을 직접 한 것으로, 에너지를 딴짓하는 데 써야겠다고 자기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우리는 게으름이라고 부른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즉, 번아웃은 가용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고, 무기력은 잔여 에너지가 있지만, 사용 방향 컨트롤이 안 되는 상태고, 게으름은 에너지가 있고 스스로 딴짓에 쓰기로 결정한 상태로, 무기력은 극복하는 것이고, 게으름은 타파하는 것이지만, 번아웃은 회복이 필요한 것이라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요즘 SNS나 유튜브 등에 번아웃을 검색해보면 ‘번아웃 극복’이라는 제목으로 많은 콘텐츠가 등장하지만, 막상 정신의학전문의, 심리학자 등의 전문가는 에너지 결핍은 회복해서 채워야 할 상태이지, 의지로 뛰어넘거나 극복할 문제가 아니라 번아웃 극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요즘 타인이 만든 컨텐츠를 퍼와서 재가공하는 사람들, 자칭 컨텐츠 큐레이터이 많아지고 있는데, 이 자체로 저작권 위반이지만, 더 큰 문제는 제목이나 썸네일을 지을 때 사람들에게 진짜 도움이 되는 정보를 넣는 것이 아니라, 조회 수와 클릭 수가 최대한 잘 나오도록 재가공해 전문가들이라면 지양할 만한 '이것만 지키면 번아웃 극복! 꿀팁 5가지'란 자극적인 제목도 스스럼없이 짓는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2020년대에 들어서 힐링 열풍 대신 '갓생', '닥치고 해' 등 뭐든 다 강하게 극복해야 한다고 몰아세우는 식의 동기부여 컨텐츠가 유행이 되었고, 반대로 10여 년 전, 힐링 열풍 때는 ‘뭐든지 다 괜찮다.’고 해서 문제라, 게으름까지도 합리화시키면서 사람들에게 심리적 마취제만을 놓고, 유명세를 취하는 자칭 힐링 멘토가 너무 많았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그때건, 지금이건, 결국 문제의 본질은 똑같은데, 정확하게 자기 상태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면, 힐링 콘텐츠와 자기계발 콘텐츠에 휩쓸려서 자신의 정신건강이 악화할 수 있다는 점으로, 마치 몸이 아픈데, 아랫배가 아픈지, 명치가 아픈지 구분하지 못한 채로 아무 약이나 먹는 것과 비슷하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그러니 지금 늘어져 있는 이들,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이들도 무작정 자기 자신을 게으름뱅이로 규정하고 '극복 방법'을 검색해보기 전에 ‘지금의 내 상태가 게으름인지, 무기력인지, 번아웃인지’. 잠시 멈춰서 구분하는 시간을 가져 보라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자신의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눈이 길러질수록, 나에게 맞는 처방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이 나의 정신건강을 지키는 첫걸음이라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아무튼, 오늘 오후 편지 여기서 마치니, 오늘 하루도 안전하고, 건강하고, 늘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며, 주님 안에서 안녕히…….
2023년 2월 27일 월요일 오후에 혈액암 투병 중인 아빠가
핸드폰으로 들리는 배경음악-[외국곡] Rain & Tears-Aprodite's Chi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