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문빈정사 납골당에 다녀왔다.
그날은 시동생의 2주기 기일이었다. 그의 아내와 어린 세 아이들은 호주에 살고 있어 기일이라고 해도 쉽게 찾아올 수 없는 처지였다.
2년 전, 그는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했다.
가족들을 먼 이역타국에 두고 혼자 서울에 남아 사업을 하며 가족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기러기 아빠로 생활하고 있던 터였다. 이 뜻하지 않은 횡액에 남편은 부모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사고 수습을 위해 현장으로 떠났다.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던 6월의 초저녁이었다.
가족 연고가 없는 고로 이곳으로 시신을 옮겨와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던 동서는, 태평양 가로지르는 전화선 너머에서 길고 오랜 울음을 토해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대요?"
"형님...... 우리 이제 어떻게 살아요......?"

장례 준비를 하면서도 남편은 이 사실을 어떻게 부모님께 알려드려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 발인 전날에서야 작은 아버지께서 총대를 매기로 했다. 아무런 사전 언급도 없이 부모님을 뵈러간 작은 아버지.
"교통사고에요, 좀 다쳤어요.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부모님을 집으로 모셔왔다. 어쨌든 전후사를 알려드려야 했다. 나는 주차장에 서성이다가 두 분을 맞아 들였다.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만으로도 어머니 얼굴이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부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으짜냐?"
"을매나 다쳤다고?"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왜 그려?"
"응?"
"가....... 부렀어?"
"어서 말해봐야......! 가 부렀냐고오오......!"
어머니는 밤새 마른 울음을 울으셨다.
"불쌍한 것. 새끼들도 없이 혼자 그렇게 살다가...... 시상에...... 그렇게 살다가 니가 가 부러야......"
서울에서 딸아이가 내려왔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아이는 작은 아빠를 꼭 뵙고 싶다고 했다. 첫 조카로서 작은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았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일과 떡을 준비해 납골당으로 갔다. 부처님께 삼배. 작은 아빠에게 재배. 우리는 골분이 든 서랍 앞에 주저앉았다. 작은 아이가 대금을 꺼내들며 낮게 중얼거렸다.
"작은 아빠! 연수 수민이 창욱이 많이 보고 싶으시죠? 여기까지 너무 멀어서 못 왔지만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저라도 자주 와야 하는데 못 와서 죄송해요. 작은 아빠! 저 요즘 대금 공부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제 대금 소리 들려드릴게요. 잘하면 잘했다고 칭찬해 주세요. 그럼, 여기 계신 분들이랑 같이 들으세요."

아이의 대금 소리가 천천히 낮게 흐르기 시작했다. 원장현의 창작곡 <날개>였다. 둥근 꽃띠를 두른 사진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던 딸아이가 기어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딸아이의 울음소리는 아이의 대금 소리 속으로 섞여 들었다. 남편이 기어이 붉어진 눈시울을 어쩌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의 연주가 끝나자, 열린 법당 문으로 바람이 한 움큼 시원하게 불어왔다. 바람은 아이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 주는 작은 아빠의 손길 같았다.
'그래, 잘 하구나. 수고했다.'
아이는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안녕히 계세요, 작은 아빠! 또 올게요."
법당 문을 나서자, 연못가에서 수건으로 눈시울을 닦아내고 황망히 돌아서는 남편의 모습이 얼핏 시야에 들어왔다.
첫댓글 맘 아프네요. 섦은 대금소리입니다.
이 음악은 평소에도 제가 좋아하는 <날개>라는 곡인데 슬퍼서 그런지 마음에 와 닿았어요.
직녀 시동생은 슬프게 가셨구나. 산다는거이 뭔지원....쩝;; 머하러 호주로 다 보내고 지혼자 고생하셨던고..아이 셋낳고 새끼덱꼬 호주로 가는 가시나는 또 머여.화가난다.
우리 어머니가 젤 맘 아프게 생각하는 데 고거여요. 뭔 영화를 보것다고 그렇게 사느냐고... 그러다가 이렇게 되버리니 맘에 한이 남으셨으요. 지 명줄이 고거 뿐인갑다 하면서도 당연히 원망스러운 마음도 있으셨을 테구요.
언젠가 들었던 시동생 얘기... 조카의 대금연주를 기쁘게 들으셨겠지..
뭔 일이 있을 때마다 큰 아들을 대신해 동생들 줄 세우는 줄반장이었는디... 그렇게도 든든했는디 가고 나니 그렇게도 허전할 수가 없어요.
대금이 저토록 가슴에 스미는 소리를 내는 악기인지 처음 알았네요. 직녀의 차분한 글 속에 돌아간 이를 그리는 식구들의 마음이 짠하게 전해오네요..
지금도 그렇지만... 식구들 중 이런 횡액은 처음이라 한동안 집안 분위기가 말로 할 수 없어요. 설날 아침에 세배한다고 모두 섰는데 어머니가 안오셔서 가보니 있어야 할 자식이 없어 작은방에서 눈물바람 하고 계시더라고요.
벌써 또 일년이 됐구나. 이구...저렇게 가면 다들 맘이 무지 아플거여...
남편이 가끔 다녀오는 모양이에요. 술 마시면 좀 울기도 하고... 지금도 가끔은 그래요.
...외롭게 가셨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고... 있다가 없으니 얼마나 허전하던지요.
미음이 찡 하네요. 그래도 그자리를 지켜준 형제와 조카들이 있어서 조금은 .....
먼 이국 타역에서 세 자식들을 돌보며 살아가고 있을 동서를 생각하면 무척 짠해요. 얼마나 힘들까 싶기도 하고요..
()()()....
고맙습니다. 기도 많이 해주세요.^^
가는 사람 눈물로 보내고 남겨진 사람은 더 조근조근 짭쪼름하게 살자고 다짐한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며 남은 식구들 내내 놓지 못하고 몸부림 쳤을 것 생각해서 더 간절히 절절한 사랑으로 살자고 가슴을 부여잡고 보이지 않는 누구에겐가 머리를 조아린다. 진정으로 보듬고 살자고.
곁에 있을 때 모르고 산다. 잃고서야 소중한 줄을 안다. 인간이니까. 한 치 앞도 못보는 어리석은 중생인지라... 나중에서야 회한으로 발등을 친다.ㅠㅠ
사람이 사는데까지 살다가 죽는것도 어쩔수없지만 슬픈맘이 드네.
나쓰메 소세키가 그의 자전적 수필 <유리창 안에서>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이는데 자신이 죽는다는 것만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며 '사람은 죽을 때까지는 죽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라는 명언을 남겼더군요.
참....
정말 그렇죠......?
이 새벽에 듣는 대금소리,직녀의 글...눈물이 핑~~~~~~~~~~~~어머님이 걱정되네요~!-_ㅠ
슬픔은 영혼의 감정 중 가장 진실한 것 같아요. 갈수록 눈물이 적어지는 것을 느끼는데 울고 싶을 때는 기다렸다는 듯 울려고요.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요...^^ 저도 요즘은 갈수록 주위 사람들의 소중함을 많이 실감하게 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