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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1일 목요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평생 빚지며 산 인생
나는 정말로 빚을 많이 지고 살아서 평생 빚 갚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빚진 사람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들어서 내가 빚을 얻었어도 빚인 줄도 모르고 살았고 그 빚을 갚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벌써 30년 전에 내가 처음으로 대전에 이사를 왔을 때 정말 빈손이라서 막막하여 전세를 얻을 수조차 없었지만 온 시내를 다 돌아다니다 마침 산동네에 방이 셋이 달린 전세집이 있었는데 보증금을 150만원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 돈은 나에게 정말 너무도 큰돈이었는데 그때 아내와 나의 봉급을 모두 합해도 6만 원 뿐이어서 쓰지 않고 꼬박 2년 동안 적금을 넣어야 할 거금이었습니다.
그때 내게 고맙게도 돈을 빌려준 사람이 있었는데 정말 성심을 다해서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감사해도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대출을 받고 봉급을 받아 조금씩 갚아갔는데 그 빚을 다 갚기도 전에 집주인은 전세를 100만원이나 올리더니 ‘감당할 수 없으면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350만원이 될 때까지 정말 많은 서러움을 받으면서 그 집에서 성실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어느 날은 집주인을 만나서 ‘돈을 마련할 때까지 참아 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찌나 서럽던지 길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가슴에 응어리져 있습니다.
그 후 내가 집을 사게 된다면 가난한 사람에게 가슴 아픈 일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내가 죽는 수가 있다 하여도 빚은 다 갚으리라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한 푼도 에누리 없는 은행이나 보험회사에는 한 푼도 떼먹지 못하고 꼬박꼬박 이자까지 비싸게 주면서 갚아왔습니다. 그러나 돈보다 더 엄청난 빚쟁이 이면서도 거의 갚지 않고 떼어먹고 살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가족의 사랑, 부모님의 사랑과 은공, 스승님의 사랑과 가르침, 친구들의 변치 않는 우정, 은인들의 무한한 보살핌, 그리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하면서 하나도 갚지 못하면서 그저 은행의 빌린 돈만 갚으면 되는 줄 알고 자랑스럽게 살아왔다는 것을 가슴 아프게 느끼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기 전에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나를 장례 치를 때에 내 양손이 밖으로 나오도록 해 주오. 그리고 밖으로 나온 양손을 무엇으로 덮지 마시오.” 신하들은 이례적인 생소한 명령으로 지금까지 아무도 그렇게 장례를 치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엄하신 대왕께 대한 엄청난 결례인 것을 알기에 왕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대왕이시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장례방식은 관례가 아닙니다. 왜 두 손이 나오기를 바라십니까? 그 명령을 거두어 주십시오.”하고 신하들은 대왕을 진심으로 존경하였기 때문에 물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나는 내가 빈손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오. 누구든지 그것을 보아야 하며, 아무도 다시는 알렉산더처럼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나는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많은 것을 얻었고, 내 왕국은 강대하고 거대해졌지만 사실은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며, 나는 아직도 가난하다. 나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오.”
오늘 복음에서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임금에게 탕감 받는 것과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감옥에 넣은 것을 생각하면 동료에게 받은 것은 세상의 돈 같고, 만 탈렌트는 하느님의 사랑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 많은 돈을 고문을 하니까 다 토해내서 갚았다는 복음의 말씀에서 나는 결국 갚을 수 있는 것을 갚지 않고 염치없이 꼬불쳐 두었다는 생각입니다. 나도 죽을 때는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을 까맣게 잊고 무슨 욕심을 그리도 내어 살고 있는지 또 무슨 욕심으로 그렇게 감옥에 넣어 갚으라고 서두르며, 많이 가지려고 하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빚을 다 갚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님을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 소름도 끼치고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렇게 빚을 갚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합니다.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12,1-12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3 그러니 너 사람의 아들아, 유배 짐을 꾸려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가 사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유배를 가거라.
행여 자기들이 반항의 집안임을 그들이 깨달을지도 모른다.
4 너는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떠나듯이 떠나라.
5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벽을 뚫고 나가라.
6 너는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가는데,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마라.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삼았다.”
7 나는 명령을 받은 대로 하였다.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손으로 벽을 뚫고,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갔다.
8 이튿날 아침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9 “사람의 아들아, 저 반항의 집안인 이스라엘 집안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너에게 묻지 않았느냐?
10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신탁은 예루살렘에 있는 수장과
그 안에 있는 온 이스라엘 집안에 관한 것이다.’
11 너는 또 말하여라. ‘나는 여러분을 위한 예표입니다. 내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갈 것입니다.’
12 그들 가운데에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
축일8월 11일 성녀 클라라 (Clare)
신분 :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 지역 : 아시시(Assisi)
활동 연도 : 1194-1253년
같은 이름 : 글라라, 끼아라, 클레어, 키아라
성녀 클라라(Clara)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귀족인 파바로네(Favarone)와 오르톨라나(Ortolana)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기도 중에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고 아기 이름을 ‘빛’이란 뜻을 지닌 클라라로 지었다. 귀족 집안의 장녀이자 용모가 뛰어났던 성녀 클라라는 일찍부터 좋은 혼처를 찾아 결혼시키려는 부모의 큰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수도자로서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치려고 결심한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웠다. 마침내 성녀 클라라는 1212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밤에 부모 몰래 집을 빠져나와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고 그의 첫 여성 동료가 되었다.
당시 성 프란치스코는 아직 여성을 위한 수도원을 세우지 않았기에 일단 바스티아(Bastia) 근방 베네딕토 수녀원에 머물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강제로라도 집으로 데려가려고 친척과 친구들을 동원해 수녀원을 찾았지만, 성별의 표시로 삭발한 머리를 보여주며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하는 성녀 클라라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 후 그녀는 산 안젤로 디 판초(San Angelo di Panzo)로 옮겼는데, 얼마 후 그녀의 여동생인 아녜스(Agnes)마저 언니에게 와서 함께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녜스만이라도 강제로 집으로 데려가려고 12명의 무장한 장정들을 보냈으나, 성녀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로 끝내 아무도 데려갈 수 없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렵게 모인 성녀 클라라와 몇 명의 자매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산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을 모원으로 정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생활양식과 규칙을 작성해 줌으로써 복음적 가난과 기도의 삶으로써 교회의 복음 선포를 지원할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가 시작되었다. 이 수도회는 영국에서 작은 수녀회(Minoresses)로 불리기도 했지만, 현재는 클라라 수도회로 불린다. 성녀 클라라는 121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로부터 ‘가난의 특전’을 얻었는데, 이것은 어떠한 소유권이나 재산도 가지지 않고 전적으로 하느님과 애긍에 의존해 살아도 좋다는 허락이다. 그 후 성녀 클라라는 이 특전을 유지하고자 늘 고심했는데, 오히려 교황이나 다른 성직자들이 수녀들의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반대해서 많은 곤경을 겪기도 했다. 이렇게 클라라 수도회의 수녀들은 당시 그 어느 수도회보다도 엄격하고 가난한 생활을 실천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의 뜻이 담긴 클라라 수도회의 회칙은 그녀가 운명하기 이틀 전에야 겨우 승인을 받을 정도로 그 엄격성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성녀 클라라를 비롯한 동료들은 높은 수준의 관상가들이었으며, ‘복음적 완덕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특히 성녀 클라라는 40여 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다정한 자매요 어진 어머니로서 늘 자매들의 뜻을 경청하며 겸손하게 봉사했다.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가난을 실천하며 살았던 그녀의 삶에 감동한 많은 이들이 기도와 자문을 얻으려고 그녀를 찾아왔다. 그중에는 성 프란치스코와 작은 형제회 회원들뿐만 아니라 교황과 추기경 그리고 왕과 귀족들도 많이 있었다.
성녀 클라라는 또한 많은 기적으로도 유명하다. 1240년과 41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와 동맹을 맺은 사라센의 대군이 아시시에 쳐들어왔을 때, 성녀 클라라는 부축이 없이는 일어설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한 병중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 아시시 시민과 수도 가족을 구하기 위해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의지하며 성광을 들고 봉쇄구역까지 밀어닥친 적군들을 향해 나섰다. 성녀 클라라가 기도를 마치자 성광에서 강한 빛이 나가며 눈이 부신 사라센군들이 겁을 먹고 도망함으로써 수녀원과 도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작은 빵 하나로 50여 명의 수녀가 먹기 충분할 만큼 불어나게 했고, 기도와 강복으로 무수한 중환자를 치유했다. 1252년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에 중병으로 누워있던 성녀 클라라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병실을 떠나지 않고도 2km나 떨어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자정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기적은 1958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가 성녀 클라라를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클라라 수도회는 그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이탈리아 전역과 프랑스, 독일로 퍼져나갔다. 성녀 클라라는 42년의 수도 생활 중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 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봉쇄구역 안에서 오로지 기도에 의지하며 이 모든 일을 이루어냈다. 1253년 8월 11일, 성녀 클라라는 마지막으로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셨으니 주님, 찬미 받으옵소서”라는 찬가를 부르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선종 2년 만인 1255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Alexander IV)에 의해 곧바로 성인품에 올랐다. 1255년 성녀 클라라를 시성한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클라라는 숨어 살았지만 그 생애는 모든 이에게 알려졌고, 침묵하였으나 그 명성은 세상 끝까지 자자했다. 봉쇄 담장 안에 자신을 숨겼으나 곳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됐다”라고 말했다. 성녀의 삶이 묻어 있는 산다미아노 성당과 유해가 안치된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대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순례자를 불러모으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클라라 자매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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